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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전(知情戰)’으로 ‘임진왜란과 6·25’ 보기 홍표정(회원)  |  2020-02-25
필자는 여기서 편의상, ‘지정전(知情戰)’이란 말을 ‘지(知)와 정(情)의 싸움’으로 쓰려 한다. 이런 시각에서 ‘임진왜란(壬辰倭亂)’과 ‘6·25’를 살피고 싶다.
  
  ‘임란(壬亂)’을 말하면 흔히 두 사람이 먼저 나온다. ‘조선 통신사’로 왜(倭)에 파견된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이다. 둘은 방문 일정 속에서 사사건건 부딪쳤다. 예컨대, 대마도에 도착, 사신단에 보인 영주 종의지(宗義智)의 ‘무례(無禮)’에 대해 黃允吉은 ‘그냥 넘기려’ 했는데 金誠一은 ‘단호’했다. 그래 끝내 저들의 ‘사죄’를 얻어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關伯; 실제 최고권력자)’를 두고도 갈렸다. ‘국왕’으로 대하자는 황윤길에 김성일은 반대해 결국 ‘倭王의 臣下’ 禮로서 그를 대했다. 사신에 방약무인(傍若無人)했던 그는 조선 국왕(선조)에 대한 답서(答書)를 차일피일 미뤘고 나중에 보내온 것도 조선의 국격(國格)을 홀대했는데, 겁을 내 말도 못 꺼낸 황윤길과 달리 김성일은 수개월을 의연히 버터 끝내 ‘제대로 된 것’을 얻어냈다.
  
  당시, 성리학적 사대부(士大夫)로 강직했던 金誠一은 ‘정사(正使)’로서 황윤길이 ‘조선의 국격을 떨군다’ 보고 내심 경멸했을 법하다. 귀국해 김성일은 어전에서 ‘倭의 불침론’을 폈다. 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倭의 군세'를 깔본 측면도 있겠으나 황윤길에 대한 ‘사감(私感)’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실은 김성일도 ‘내심’으로는 그들의 침략을 우려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무장(武將)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통역관에 비친 黃允吉은 ‘술꾼’이었고 金誠一은 ‘의사(義士)’였다. 그러나 ‘지사(智士)’로 보지는 않았다. ‘군세’를 ‘실제적’으로 살피지 않아서다.
  
  결국, 조정(朝廷)은 ‘술꾼’ 소릴 들었어도 군세를 예의 살핀 황윤길의 현실적 ‘냉정함(知)’보다 士大夫다웠던 김성일의 ‘의연함(情)’에 손을 들어준 셈이다. ‘知情戰’으로 보면, ‘知가 情에게 패한 셈’이다. 그러니까 냉엄한 ‘知性’보다 감상적 ‘人情’에 따르다 마침내 ‘壬亂’이 발발한 셈이다.
  
  이번엔, 6·25를 보자. 여기에는 ‘김구(金九)’와 ‘이승만(李承晩)’이 나온다.
  
  김구는 ‘민족(民族)’이 우선이었다. ‘민족주의자’였다. ‘자주독립’이 그의 유일한 ‘소원’이었다. 그래 南北이 하나인 ‘한민족(韓民族)’이 우선이었다. 김구는 ‘이념(ideology)’을 ‘유전적(流轉的)’으로 본 것 같다. 그러니까 옛 ‘짚신’을 대신한 ‘양화(洋靴)’처럼, 때 되어 다시 바꾸면 되는 거로 여겼다. 그보다는 ‘피의 역사’를 함께 나눈 ‘民族만이 영원하다.’ 믿었다. 그러니까 당시 ‘한반도 통일’을 ‘民族的’ 관점에서 본 셈이다.
  
  이승만은 ‘이념(理念)’이 우선이었다. ‘자유민주주의자’였다. ‘같은 民族’이라도 ‘공산주의자’는 배격했다. 함께 살 수 없는 ‘호열자(콜레라)’라 본 것이다. 그래 그들에게 때론 무자비했다. 그는 세상이 이미 미소(美蘇) 두 이념(‘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으로 갈리는 걸 일찍이 간파(看破), ‘자유민주주의’가 ‘우위 이념’이라 확신하고 그 ‘깃발’을 한반도에 꽂으려 했다. 그게 여의치 않자 '남쪽만'이라도 그래야겠다 결행한 것이다. ‘한반도 통일’을 ‘理念的’ 관점에서 본 셈이다.
  
  김구는 이런 이승만을 반대했다. ‘남북협상’을 해서라도 ‘하나가 되자’는 입장이었다. 물론 이 협상은 실패했고 허상임이 드러났다. 한낱 6.25남침 ‘위장用’이나 ‘정당화用’으로 이용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6·25를 앞두고 김구는 ‘情(민족) 편’에 이승만은 ‘知(이념) 편’에 선 셈이다. 공교롭게도 壬亂 때처럼 ‘知情戰’을 했다 할까? 다만 6·25 한 해 전 김구가 암살됨으로써 6·25는 ‘민족주의’보다 ‘자유민주주의(南)’와 ‘공산주의(北)’의 ‘이념전쟁’이 되었다. 그리고 승자와 패자가 없는 전쟁으로 끝났다.
  
  여기에 몇 가지 의문이 남는다. 당시 이승만과 김구의 ‘역할’이 바뀌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니까 이승만이 암살되고 김구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면? ‘민족주의’의 기치가 이 땅에 세워졌을 것이고, '남북협상'을 계속 추진하다 전쟁이 발발했을 것이다. 그리고 北의 ‘공산주의’와 南의 ‘민족주의’와의 전쟁이 되었을 것이다. 과연, 北을 막아내었을까? 연합군 도움은 받았을까? 필자는 ‘부정적’이다. 당시 ‘연합군 참전’은, 순전히 ‘소련(공산주의)’에 패해선 안 되는 ‘자유민주주의(미국)’ 이념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명분(名分)에서였다. 국군도 그렇게 싸웠다. 적어도 명분상 '民族'을 위해 싸운 게 아니었다. 그 시절 갈수록 심화하고 있던 美蘇 냉전 구도를 보면 이해된다. 그래 ‘민족주의자’인 김구로는 전쟁 수행이 어려웠을 것이다. 연합군 도움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한은 훨씬 적화(赤化)될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그러니까 6·25를 앞두고 우리는 ‘知(이념)’와 ‘情(민족)’ 중에서 ‘知’를 선택한 셈이다. ‘知情戰’으로 정리해 보면, ‘壬亂’은 ‘知가 情에 져’ 발발한 데 비해, ‘6·25’는 ‘情보다 知를 선택해' 이 전쟁으로부터 나라를 보존했고 마침내 오늘날 세계 속에 ‘우뚝’ 선 ‘자유대한민국’이 탄생한 셈이다.
  
  ‘나라의 일’은 늘 ‘公(知)의 영역’이다. ‘私(情)의 영역’이 아닐 것이다. 그래 나라의 일을 놓고 다투려면, '知情戰'에서 늘 ‘知’가 ‘情’을 이겨야 할 것이다. ‘情의 領域’에 서 있는 ‘정치인’은 ‘知’에 우선 양보해야 한다. 오늘에 사는 우리에게, ‘壬亂’과 ‘6.25’가 주는 역사의 교훈이 아닐까 싶다.
  
  2020. 2. 25
  
  (부기) 본 글에서 6·25와 관련, ‘민족주의’를‘情(민족)’이라 보고, ‘자유민주주의’를 ‘知(이념)’로 본 것은 순전히 필자의 ‘독자적 견해’입니다. 참고로, ‘知’와 ‘情’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조갑제닷컴 지난해 11월 22일자 글’에 밝힌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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