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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한 가지 노래를 천 번 부를 수 있어요?” 엄상익(변호사)  |  2020-10-15
토요일자 ‘중앙 썬데이’를 읽다가 남해안 바닷가의 우람한 성벽이 찍힌 사진을 보았다. 태풍의 피해를 본 한 사람이 그때부터 집요하게 하나하나 돌을 쌓아 만들었다는 내용이었다. 그게 중세의 성(城)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되자 명물이 되어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것이다. 우람해 보이는 사진 속의 성벽보다 쉬지 않고 매일 조금씩 일을 하는 그의 모습이 더 위대해 보이는 것 같았다.
  
  인생이 짧다 해도 만일 한 가지 일을 매일 계속해서 조금씩 한다면 죽을 때까지는 큰 사업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매일 조금씩 하는 일의 결과다. 육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만리장성은 육억 개의 돌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로마의 콜롯세움은 삼천만 개의 돌로 이루어졌다고 들었다. 그런 거대한 건축물들도 인간이 한 개의 돌을 놓는 데서 시작했을 것이다.
  
  고등학교 일학년 시절이었다. 내 뒷자리에는 성실 그 자체로 보이는 두 친구가 있었다. 그 둘은 하얗게 빛이 나는 깨끗한 노트에 번호를 매겨가며 매일 수학 문제를 하나씩 진지하게 풀어가겠다고 했다. 욕심내지도 않고 쉬지도 않고 그들은 천천히 숨을 쉬듯 그렇게 공부를 하는 모습이었다. 그때부터 오십 년이 흐르고 우리들은 칠십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었다. 그때 그 친구 중 하나는 외환위기 때 대한민국을 구하는 데 기둥이 되었던 재무부 변양호 국장이고 다른 한 명은 법원장을 마치고 로펌인 대평양의 대표변호사를 하고 있다. 법대에 입학하고 고시 공부를 시작할 무렵이었다. 시험에 합격한 선배가 학교로 와서 공부하는 요령을 이렇게 알려주었다.
  
  “시험장에 가면 두려움이 들었어요. 다른 사람들 모두 다 수재고 눈에서 빛이 번쩍이는 것 같았어요. 응시자가 다 공부에는 선수들이니까요. 그런 사람들이 모인 전체에서 한 명이 합격할까 말까 하는 비율이니까 나는 가망이 없다는 열등감이 들었어요. 그러다가 생각을 바꾸었어요. 나무의 열매를 딸 생각을 하지 말고 매일 조금씩 물만 주자고 말이죠. 매일 법서(法書)를 백 장을 읽자고 결심하고 실행을 했죠. 읽고 또 읽고 이십만 장 분량까지 가 보자고 했어요. 제 경우는 그 분량이 찰 때쯤 되니까 어떤 두꺼운 법서도 몇마디의 단어로 압축되는 느낌이었어요. 그때 고시에 합격을 했죠. 제 경험을 한번 참고해 봐요.”
  
  나는 집중력이 약했다. 하루에 공부를 많이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선배의 말처럼 매일 조금씩 그러나 가급적 쉬지 않고 하는 방법을 택했었다.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게으름을 피지 않고 간다면 천리 밖도 보리라. 소걸음이 늦다 해도’라고 말했다. 그는 그걸 우진주의(牛進主義)라고 했다. 천재인 히데요시가 할 수 없었던 일을 평범한 이에야스는 이룩했다. 매일 조금씩 꾸준히 일하면 평생의 일을 하는 데 시간은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꾸준히 무엇을 한다는 노력도 하나님이 주시는 재능인 것 같다. 얼마 전 의사인 친구가 나의 사무실로 놀러왔다. 초등학교 시절 그는 졸업생 칠백 명중 전교 일등으로 졸업했다. 비상한 머리로 의료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안철수씨보다 먼저 성공했던 친구이기도 했다. 그는 노년에 기타를 배운다고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음악을 해 보니까 이건 무한 반복인 것 같아. 수학같은 건 매번 새로운 거니까 흥미가 있는데 그냥 반복연습을 하려니까 힘이 들어. 정경화씨는 악보의 한 소절을 심지어 일억 번 연습했다는 소리를 들었어. 그렇게 평생 살아와서 세계 최고 수준의 뮤지션이 됐다는 거야.”
  
  그런 것 같았다. 내가 아는 가수들도 그랬다. 아이돌 가수로 성공한 이재훈은 고등학교 시절 나보고 “아저씨 한 가지 노래를 천 번 부를 수 있어요? 아마 백 번도 못할 걸요. 그리고 나같이 밤새 체육관에서 율동연습을 해서 운동화를 닳아 없어지게 할 수 있어요?”라고 했었다. 가수 나훈아씨도 평생 죽도록 연습을 한다고 했다. 노래를 못하니까 더 연습을 한다고 했다.
  
  바보도 어떤 일을 세 시간은 할 수 있다. 보통사람은 한 가지 일을 삼일 동안은 열심히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을 이루는 사람은 한 가지에 삼십 년 이상 전념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삼십대 후반쯤 글을 쓰고 싶다고 했을 때 그 말을 들은 대기자 조갑제씨는 나의 키만큼 글로 원고지를 채워보라고 했다. 그는 틈틈이 짜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원고지에 글을 쓴다고 했다. 그 작은 시간의 글들이 모이면 상당한 양에 이른다고 경험을 얘기해 주기도 했다. 인생이란 매일 조금씩 물을 주면서 자신의 나무를 키우는 일이 아닐까. 열매는 그분께 맡기고 말이다. 고기를 낚지 못해도 하루 종일 잔잔한 강을 본 낚시꾼처럼 흡족해야 하지 않을까.
  
  • 이중건 2020-10-17 오전 1:12:00
    또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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