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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가스'를 처음 만난 날 엄상익(변호사)  |  2023-01-31
돈가스
  
  신문을 읽다가 독특한 삶을 발견했다. 꽃집을 하면서 일본어를 번역해 주는 사람이 있다. 그는 ‘돈가스’를 좋아한다고 했다. 한 접시로 고기, 채소, 밥 등 영양을 골고루 갖추었고 먹고 나면 든든하다고 했다. 평생 한 가지 음식만 먹으라고 한다면 그는 맛과 영양이 있는 ‘돈가스’를 먹겠다고 했다. 그는 블로그에 돈가스 리뷰를 올리기 시작했고 돈가스 맛집을 소개하는 책자를 내기도 했다. 젊은 세대의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인 것 같았다. 뭐 이렇게 아름다운 인생이 있어? 하는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는 동해에도 독특한 미니멀 라이프를 목표로 낭만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사진작가와 책 공예가가 만나 세계여행을 하고 돌아와 동해에 정착해서 작은 책방을 하는 경우도 봤다. 남편은 황혼의 빨간 등대나 동해바다의 일출을 예쁜 엽서로 만들어 책방 서가 옆에 진열해 팔기도 했다.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나도 그런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 싶다. 오늘 나의 관심을 끈 것은 ‘돈가스’라는 음식 하나에 그렇게 매니아가 될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이다. 나의 상념은 어느새 오십오년 세월 저쪽으로 순간이동을 해 광화문 뒷골목의 허름한 돈가스집 안으로 들어갔다.
  
  열네 살인 내가 처음으로 본 ‘돈가스’라는 음식 앞에 앉아 있다. 얇게 저민 돼지고기에 빵가루를 묻혀 쉭쉭 끓는 기름에 바로 튀겨낸 음식이었다. 노릇노릇한 돈가스 표면에는 빵가루들이 튀어나갈 듯 알알이 서 있었다. 소년인 나는 처음 잡아보는 반짝거리는 포크로 돈가스를 고정시키고 나이프로 작게 조각을 냈다. 입에 들어간 돈가스의 껍질은 바삭바삭했고 그 속에서 육즙이 풍부한 고기가 부드럽게 씹혔다. 고기의 독특한 향이 입 안에 퍼졌다. 하얀 접시의 고기 조각들 옆에는 잘게 채썬 양배추가 분홍색 소스를 덮고 있었다. 아삭거리는 양배추에 고급한 단맛의 소스가 섞여 상큼한 느낌이었다. 으깬 감자와 따뜻한 빵도 있었다.
  
  그 시절 돈가스집 주인은 밥과 빵 중에 어떤 걸 먹겠느냐고 물어보곤 했다. 당연히 빵을 선택했다. 그래야 양식을 제대로 먹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처음 먹어 보는 수프도 신기했다. 흰 접시 바닥에 감질나게 조금 부어진 부드럽고 고소한 수프의 맛을 보면서 마치 천상의 음식을 맛보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돈가스는 유년 시절의 질감을 한 단계 높인 음식이었다.
  
  중학 시절 어느 추석명절, 같은 동네 사는 형과 사먹던 돈가스집 풍경도 나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우리는 명절에 개봉한 외국영화 한 편을 보고 거리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용기를 내서 을지로 뒷골목의 경양식집으로 갔다. 삐걱거리는 낡은 나무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구석의 탁자에 앉아 우리는 점잖게 ‘돈가스’를 시켰다. 잠시 후 흰 접시에 풀죽 같은 수프와 돈가스가 나왔다. 우리는 서양 영화 속의 화려한 식탁 앞에 있는 기분이었다. 환상에 빠져 한 단계 업그레이된 느낌이었다고 할까.
  
  서양의 커틀릿이 일본에서 돈가스로 변하고 진화해 왔다. 두꺼운 돈가스를 젓가락으로 집어 먹을 수 있도록 잘라서 밥과 함께 먹는 정식으로 만들었다. 대개가 돈가스 된장국 생양배추 흰 쌀밥으로 되어있다.
  
  한국의 돈가스는 돼지 등심을 얇게 펴서 튀긴 다음 자르지 않고 그대로 준다. 일본의 된장국이 아니라 미역국, 콩나물국, 어묵볶음, 김치 등 곁들여 내는 국과 반찬이 다양하다.
  
  정년퇴직을 한 내가 아는 분이 ‘돈가스 집’을 냈었다. 그는 제이의 인생을 ‘돈가스’로 승부를 보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질 좋은 돼지 등심을 밑간을 해서 여러 시간 숙성시켜 튀겨냈다. 소스를 찍지 않아도 맛있게 하려고 노력했다. 빵도 직접 굽고 수프도 직접 끓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가게는 입소문을 타고 많은 손님들이 모여들었다. 한 가지 작은 아이템을 잡고 깊이 들어가는 게 요즈음의 경향같이 보이기도 한다.
  
  얼마 전 후포항의 뒷골목에 있는 ‘문어짬뽕’집을 간 적이 있다. 후미진 곳에 있는 허름한 식당이라도 관광객들이 바글거렸다. 동해에도 젊은 사람들이 문어로 만드는 탕수육집이 성황을 이룬다. 재료가 있는 만큼만, 하고 싶은 시간 만큼만 영업을 한다. 전문직도 그렇게 다양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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