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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 속에서 피어난 성화대 파리올림픽을 앞두고 ‘서울올림픽을 위해 태어난 사람’ 朴世直 조직위원장을 추억한다 <2> 조갑제닷컴  |  2024-07-24

개회식이 승부처 

 

박세직 위원장은 서울올림픽 성공은 개·폐회식, 이 중에서도 개회식에 달려 있다고 확신했다. 서울올림픽 개회식은 주제가(主題歌) ‘손에 손잡고’와 함께 역대 최고의 작품으로 꼽힌다. 이 개회식의 생동하는 메시지와 상징성이 거대한 감동을 만들어내고 세계인들, 특히 공산권 사람들을 자극하여 역사적 변혁의 촉매제가 되었던 것이다. 공연이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점을 실증했다.

1986년 7월에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기획단이 구성되면서, 이어령, 최정호 등이 주제 발표를 하였고 박용구, 오태석 등이 시나리오 초안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러 가지 문제점과 새로운 안들이 등장하여 시간은 자꾸 흐르는데도 좀처럼 확정된 시나리오가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박세직 위원장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87년 3월 7일부터 8일 동안 시내 호텔에서 전문가들로 구성된 비상회의를 열게 되었다.

저녁에는 도시락을 먹고 자정이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가는 거의 합숙과 다름없는 강행군 회의였지만 속출하는 아이디어와 뜨거운 토론들은 결정적인 작품을 탄생시킨 산실(産室)이 되어주었다. 박세직은, 허벅지를 꼬집으며 몰래 졸음을 참는 고통을 겪기도 하였지만 이때 체험한 열기와 토론 등이 개·폐회식을 성공으로 이끌어간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이 회의의 토의를 주도했던 변종하, 김문환, 이강숙, 이상수, 이어령, 한양순 등은 그 뒤에도 상임위원으로 남아 실무에 관여하였다.

상임위원들의 추천에 의하여 문화방송의 제작이사 표재순이 제작단장을 맡게 되었다. 개·폐회식에 한국 예술계의 최고급 인력을 집합시킬 수 있었던 것이 성공의 요인이었다. 박세직은, 정상급 학자, 예술가, 문인이 머리를 짜내고 학생, 체육인, 관료, 그리고 군인들이 이 아이디어를 받아 박력 있게 실천한 지덕체(知德體)의 통합이 개·폐회식 성공의 비결이었다고 정리했다. 문무(文武) 합작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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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교수와 서울올림픽 개회식에서 굴렁쇠를 굴린 ‘호돌이 어린이’ 윤태웅 군. 

 

이어령 “뜬구름 잡는 생각도 존중하는 분위기”

 

개회식의 개념을 만든 이어령 교수는 올림픽이 끝난 뒤 필자에게 이런 토로를 하였다.

“단군 이래로 춤추는 사람, 철학하는 사람, 그림 그리는 사람, 문학하는 사람, 음악인 등등이 이렇게 모여 마음을 같이하여 하나의 목적을 위해 일한 적이 일찍이 없었습니다. 기가 막힌 인재를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한국인이 이 정도밖에 안 되었던 것은 서로의 능력을 보태준 것이 아니라 서로 깎아내렸기 때문이지요. 부정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논리는 질서 정연한데, 된다는 사람들은 콤플렉스가 있어요. 그래서 안 된다는 사람이 지식인처럼 보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안 된다는 쪽보다는 좀 뜬구름 잡는 얘기 같아도 된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분위기를 만들어갔지요.”

올림픽이 끝나고 1년 3개월 뒤 이어령 교수는 초대 문화부 장관에 취임하였다. 개·폐회식 관계자들은 그를 위한 축하연을 마련했는데, 강원룡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올림픽 문화예술행사 추진협의회 위원장이라고 하나 사실은 하나도 일한 것이 없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 툭하면 그만두겠다고 하는 이어령이라는 사람을 올림픽에 꽁꽁 묶어둔 일밖에는 한 게 없어요. 그러나 그것이 가장 큰일이었다는 것을 나는 올림픽이 끝나고서야 알았습니다.”

현실론보다는 이상론을 편들다 

박세직은 조직위 실무진의 현실론보다는 상임위원들의 이상론을 편들었다. 실무 제작진과 상임위원들끼리는 토론이 너무 진지하다 보니 격론이 되어 인간관계가 서먹해지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것을 풀어주는 것도 역시 그의 임무였다. 화합의 올림픽을 위해서는 내부의 화합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서울올림픽의 주제는 ‘화합과 전진’이었다. 조직위는 이 추상적 개념을 “벽을 넘어서”라는 개·폐회식의 기본 철학으로 좀 더 구체화시켰다. 인종, 문화, 이념, 종교의 벽을 넘어서 모여든 인류가 평화의 축제를 펼치는 그곳에 잠실 주경기장이 있어야 하며, 그 개·폐회식은 “세계에서 올림픽이 이루어지기가 가장 어려운 곳이라고 여겨졌던 서울의 일대 역전 드라마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공수특전사 장병들 1000여 명과 미동초등학교 학생 500여 명이 펼친 5분간의 태권도 시범은 평화의 축제에 어울리지 않는 파괴적 이미지로 보일 수도 있었으나 평화로의 전진을 가로막는 갖가지 장벽을 허무는 창조적 파괴 행위로 설정되었기에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 개·폐회식 공연 공간을 강과 하늘로 확장한 것이나 성화 점화자를 세 사람으로 한 것, 어린이가 화합의 원(굴렁쇠)을 굴리는 장면 등등, 개·폐회식의 모든 장면은 ‘벽을 넘어서’의 상징성으로 수렴되었다. 박 위원장은 “철학과 미학이 중요한 것은 잡다한 것들에 계통을 세워 질서와 아름다움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을 개·폐회식을 준비하면서 실감하였다”고 썼다.

개·폐회식의 출연진은 거의가 10대와 20대였다. 외국인들은 이들 젊은이의 발랄함과 아름다움과 당당함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개회식에는 1만3000여 명이 출연하였다. 53%는 고교생, 20%는 군인들이었다. 고교생은 거의가 실업고교 재학생이었다. 개·폐회식을 합치면 약 2만 명이 등장했고, 소도구는 약 18만 점이나 되었다. 물량과 규모 면에서도 사상 최대였다. 개·폐회식을 운영한 조직위 인력은 1523명이었다. 이 가운데 356명은 자원봉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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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점화식 전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 선생이 성화봉을 들고 주경기장으로 들어왔다. 이 성화봉은 세양금속이 제작했다. 

 

스무 가지 새로운 것들 

 

서울올림픽 개·폐회식에서 처음으로 실시되었던 것은 흰 비둘기, 8개 국어 해설 방송과 이어폰 사용, 24개국 합동 고공낙하, 성화 점화 및 소화(消火) 때 전자음악 사용, 개회식 행사가 강에서 시작된 점 등등 스무 가지였다.

개·폐회식을 준비하면서 조직위에서는 세 가지 첨단과학 분야의 공연을 추진하였었다. 개회식 때 코리아나가 UFO를 닮은 원반형 비행물체를 타고 등장하여 노래를 부르는 방안, 초전도체를 이용하여 회전연단을 1m쯤 자기(磁氣) 부상시켜 허공에 띄우는 아이디어, 그리고 폐회식 때 하늘을 캔버스 삼아 레이저 광선으로 세계 역사의 대표적인 이미지를 그리는 발상 등이 그것이었다.

박세직 위원장은 프랑스와 영국에 있는 레이저 관계 회사들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고 미국의 지인(知人)을 통해 초전도체 기술의 도입을 시도하는 등 막판에 열을 올렸으나 “현재의 과학 기술로는 무리다”는 결론을 내리고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안 될 줄 알면서도’ 도전해보았지만 역시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었다. 기술의 벽을 확인한 조직위는 이미 확정된 계획을 더욱 완벽하게 추진하는 쪽으로 정신을 집중함으로써 개·폐회식을 더 충실하게 만들 수 있었다.

경기도 부천시 춘의동 산 5번지 세양금속은 영세 주물 공장으로 회사 간판도 없었다. 쓰러지는 기둥을 억지로 세운 듯한 낡은 슬레이트 지붕이 늘어서 있고 가까스로 한 사람 지날 수 있는 골목을 들어서면 여기저기 놋쇠 용기를 만드는 공장이 나타나는데 그중의 하나가 세양금속이었다. 1987년 가을, 세양금속 김상도(金相道 당시·50) 사장은 동삼공업주식회사의 이인모씨로부터 연락을 받고 한국화약으로 갔더니 성화봉 견본을 보여주었다. 김 사장은 그것을 가지고 집에 와서 가만히 살펴보니까 충분히 제작이 가능하다는 판단이 섰다. 1988년 1월이 되어도 아무 연락이 없기에 그는 성화봉 제작에 대해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2월이 되자 동삼공업에서 성화봉을 가지고 와서 만들 수 있겠느냐고 했고 김 사장은 자신 있다고 하자 샘플을 만들라고 했다. 53개 업체에서 샘플을 납품했는데 그중에는 국내 유수 기업도 꽤 들어 있었다.

 

성화봉을 만든 사람들 

 

한데 어찌 된 것인지 그가 만든 샘플이 합격되었다. 이때 얼마나 기뻤는지,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채 16세부터 청동과 함께 살아온 인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구나 생각했다. 그동안 숱한 상품을 만들었지만 한 번도 작품으로 평가된 적은 없었다. 학벌이 없다 보니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세양에 하청을 준 동삼공업에서는 절대 비밀을 지키라는 지시가 있었다. 이때부터 그는 공장 출입구를 봉쇄하고 12명의 직원과 함께 오직 성화봉 제작에만 매달렸다. 평소의 제품 생산과는 달리 정성을 담기 위해 모두가 부정한 짓을 하지 않기로 약속을 하고 목욕재계를 한 후 일을 시작했다.

이때의 심정은 뭐랄까, 옛날 자식이 과거시험 보러 떠나고 나면 그 어머니가 새벽마다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천지신명께 잘되기를 기원하였듯이 그러한 심정으로 한 개의 불량품도 나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제작했다고 한다.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비밀리에 작업을 하자니 더워서 숨이 턱턱 막혔다. 납품 기일에 맞추기 위해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작업을 하였지만 피곤한 줄도 몰랐다. 생애 처음으로 국가를 위해 큰일을 한다는 자부심으로 영광스럽기 그지없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성화 봉송에 쓰일 3100개의 성화봉을 제작하였고 추후로 대통령 요청에 의해 200개, 한국화약 사장 요청에 의해 200개를 별도로 생산했다.

김 사장은 성화가 자기 회사 앞을 지나간다기에 전 직원과 함께 일손을 놓은 채 시커먼 먼지가 잔뜩 묻은 작업복 차림으로 밖에서 대기했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이 연도에 늘어서서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성화가 흰 연기를 뿜으며 지나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룩 흘렸다. 그 많은 사람 중 주자(走者)가 들고 뛰는 찬란한 금빛 성화봉이 땟물이 줄줄 흐르는 옷차림의 초라한 행색으로 눈물을 흘리는 그가 만든 것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성화가 지나가는 순간 속으로 외쳤다.

“내가 만든 것이다. 저 찬란한 성화봉은 내가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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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올림픽 성화대는 서울 구로구 고척동의 삼성공업사에서 만들었다.  

 

진흙 속에서 피어난 성화대 

 

1988년 1월 30일 토요일 오후, 박세직 위원장은 예고 없이 성화대 제작소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문화식전본부장과 비서관만 데리고 갔다. 성화대를 만드는 곳은 깨끗하고 깔끔한 작업장일 것이라고 상상했는데 찾아간 곳은 전혀 의외였다. 서울 구로구 고척동의 공장지대로 차가 진입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도착한 곳은 공장이라기보다는 철공소 같은 곳이었다. 그날따라 비가 내려 길바닥은 질척질척하였다.

근로자들은 공장 마당에 철 구조물을 내다 놓고 성화대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페인트칠을 하기 전이라 불그스름하게 녹슨 쇠파이프를 한데 내어놓고 뚱땅뚱땅 망치질을 해대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비서관은 당황한 듯했다.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비서실장에게 큰일 났다고 하는 것 같았지만 모른 체하였다.

더 놀란 것은 망치질을 하고 있던 근로자들이었다. 박세직은 미처 위문품을 준비하지 않았었다. 함께 간 직원에게 당신 뭐 가진 것 있느냐고 했더니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담배 한 갑이 나왔다. 근로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한 개비씩 돌린 뒤 이렇게 당부했다고 한다.

“여러분, 정말 수고가 많으십니다. 서울올림픽 하면 굉장한 사람들이 치르는 호화판 행사라고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일, 이런 자그마한 일들이 뭉쳐져서 올림픽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런 진흙 바닥에서 올림픽 시설 가운데서도 가장 신성한 성화대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정말 뜻깊은 일입니다. 정성 들여서 만들어주십시오.”


'공사 기간 중에는 음주, 도박 등을 삼가고…’

 

그는 조직위의 촬영팀을 불러 성화대 제작 광경을 비디오로 기록해두도록 했다. 성화대 제작을 맡은 회사는 서울시 구로구 고척동의 삼성공업사였다. 이종월(李鍾月·당시 35) 사장은 1987년 11월 작업에 착수하던 날 직원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당부했다.

“우리가 비록 쇠붙이를 만지며 막일을 하지만 우리 생애에서 두 번 다시 할 수 없는 소중한 일을 하게 되었다. 회사로서도 영광이지만 개인으로서도 자랑스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제작 기간 중에는 음주, 도박 등을 삼가고 오로지 성화대 제작에 열중해주기 바란다. 회사에서도 다른 일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이 일에만 매달릴 생각이다.”

이 회사의 용접공 이영근(李永根·당시 34)씨는 “공기(工期)도 촉박했거니와 겨울철에 야외 작업을 하게 되어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작업장이 진흙 마당이어서 얼면 넘어지기 쉽고 녹으면 질퍽질퍽하여 애를 먹었다는 것이다. 근로자들은 2교대제로 밤낮없이 일했다. 아파서 못 나오는 사람이 생기면 이를 보충하느라고 실제로는 하루 평균 14~18시간씩 일했다고 한다. 이영근씨는 이렇게 덧붙였다.

“신통하게도 추위를 참느라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불평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심신이 솜처럼 피로함에도 연장 근무를 자청하는 동료들이 속출했습니다. 교회 집사인 집사람은 성화대 제작 기간 내내 새벽 기도와 하루 한 끼 금식을 거의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이웃 사람들도 성화대를 그곳에서 만드는 줄 몰랐다고 한다. 박 위원장이 다녀간 뒤 그 사실이 알려지자 이웃 사람들은 근로자들에게 과일을 갖다 주며 격려를 하기도 했다. 성화대를 완성하고 주경기장으로 옮기려고 세워보는 날 이웃 주민들이 몰려나와 박수로 축하해주었다. 근로자의 순정 어린 손때가 묻은 성화대가 대회 기간 중 잠실벌의 밤하늘을 밝혔다. 서울올림픽의 성공 뒤에는 이들처럼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쏟은 수많은 보통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무턱대고 만든 龍鼓 

 

서울올림픽 개회식의 분위기를 처음부터 장엄하게 다잡은 것은 그해9월 17일 오전 10시45분에 시작된 용고(龍鼓) 행렬이었다. 옛 군관(軍官) 복장을 한 이가 엄청난 북채로 용고를 치면서 긴 행렬을 선도하여 들어오자 장내는 우선 그 스케일에 압도당하였다. 북소리가 전장이나 큰 행사장의 사람들 마음을 고동치게 만든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이 용고는 북통 지름이 2m10cm, 길이 2m30cm, 무게가 630kg이나 돼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큰 북이었을 것이다. 이 북이 올림픽 개회식에 등장한 데는 한 장인(匠人)의 순정이 있었다.

대전시 서구 원천동 대한민속국악사는 2대(代)에 걸쳐 북 만드는 집안에서 운영하던 곳이었다. 1대인 김창호씨의 네 형제 가운데 3남인 김관식(金寬植·당시 35)씨는 1981년 9월 바덴바덴에서 서울이 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되는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는 순간 “바로 이것이다” 하고 박수를 쳤다. 그날부터 김씨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멀리 들리는 북”을 만들어 서울올림픽에 바치겠다는 결심을 일방적으로 했다. 형제들이 말렸으나 그는 고집대로 밀고 나갔다.

세계에서 가장 큰 북을 만들려면 세계에서 가장 큰 소를 찾아야 했다. 북 면(面)을 소의 등가죽 하나로 붙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 소는 상처가 없어야 했다. 바늘구멍만 한 흠이라도 있으면 북소리가 이상해진다.

김씨는 여섯 달의 수소문 끝에 제주도에서 1200kg짜리 소 두 마리를 구해 쇠가죽을 얻긴 했으나 크기가 마음에 차지 않았다. 해외에서 큰 소를 찾다가 1년 뒤 미국에서 1550kg짜리 종자 소 다섯 마리(예비분 세 마리 포함)를 찾아 수입하였다. 북통으로 쓸 나무도 국내의 원목(原木)이 너무 작아 미국 로키산맥에서 자라는 나이테가 198개인 미송(美松)을 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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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9월 17일 서울올림픽 개막식. 한강을 거슬러 온 용고가 행렬과 함께 주경기장에 도착, 땅과 하늘을 울렸다.

 

‘미국의 소리’가 날까 걱정 

 

김씨는 재료를 구해놓고는 겁이 덜컥 났다고 한다. ‘한국의 소리’가 아니라 ‘미국의 소리’가 날까 봐서였다. 그는 그래서 쇠가죽과 나무의 처리 과정에 한국 북의 제작 공정을 엄격히 적용하여 한국화시키기로 결심하였다.

쇠가죽은 털을 뽑고 적당한 습도와 온도 아래서 2년간 건조시켰고, 미송도 2년간 자연 건조시켰다. 약품 처리 과정에서도 한국 북 제조의 전통 방식을 더욱 철저히 지켰다. 통나무를 46개의 조각으로 쪼개어 못과 철사로 촘촘히 잇고, 전체를 창호지와 흰 천으로 감쌌다. 맑고 유현(幽玄)한 북소리를 얻기 위함이었다.

북대를 만들고 북통 둘레의 단청 작업에 들어갔다. 단청 기능 보유자인 최성현씨에게 부탁하여 먹당기, 매화무늬, 꽃구름에 둘러싸인 채 청룡, 황룡 두 마리가 승천하는 모습을 10여 일 만에 완성하였다.

문제는 서울올림픽 조직위와는 아무런 상의 없이 짝사랑하듯 무턱대고 만든 것이란 점이었다. 1987년 4월에 완성해 조직위에 기증하려 하니 실무자는 “서면으로 신청하라”며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북’이 만들어졌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자 비로소 조직위에서 관심을 보이더니 1987년 11월 드디어 “기증을 받겠다”는 연락이 왔다.

김씨 형제는 운송마저도 자기 돈을 들여 타이탄 트럭에 실어 딸 시집보내는 마음으로 북을 서울로 보냈다. 그때까지도 이 북이 서울올림픽에 어떻게 등장할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상태였다. 북을 완성한 뒤 기증하기까지의 여덟 달 동안이 가장 괴로웠다고 한다. 북을 만들어놓으니 1억5000만원에 팔라는 제의가 있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개회식 날 김씨는 텔레비전을 통해 자랑스러운 용고의 모습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렸다. 부인도 울고 형제들도 울었으며 동네 사람들의 축하가 쏟아졌다.

올림픽 전에 김씨는 좀 곤란한 입장에 처했었다고 한다. 그런 일을 했으니 개·폐회식 입장권을 많이 받았을 것 아닌가, 좀 나눠 주라고 졸라대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개·폐회식 입장권은커녕 시연회 초대장도 받지 못했고, 감사장 수상 대상에서도 빠져 있었다.

박세직 위원장도 올림픽이 끝난 뒤 책을 쓰기 위하여 자료를 수집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어 1989년 초에 김씨를 초빙해 위로를 해주었다. 김씨는 오히려 “북 만드는 사람이 평생의 꿈을 이루었으니 한도 원도 없다”면서 “요즘 명함을 내밀면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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