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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누가 세종의 한글 창제 반대했나?'…'일본놈' 엄상익(변호사)  |  2024-08-03
<손자의 이상한 답안>
  
  딸이 초등학교 사학년에 다니는 아들을 데리고 동해에 있는 나의 집으로 왔다.
  
  “아빠 요새 쓰는 일제 시대 역사에 관한 글 재미있어. 계속 써봐요.”
  
  딸은 토론토 대학에서 동아시아 역사를 공부했다. 그리고 뒤늦게 서울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게 됐다. 대화중에 딸이 이런 말을 했다.
  
  “아빠 초등학교에 다니는 태윤이 역사문제 중에 세종의 한글 창제를 반대한 게 누구였느냐고 묻는 게 있더라구. 녀석이 답을 일본놈이라고 썼더라구. 왜 그렇게 썼느냐고 물었더니 공부 안 해도 대충 나쁜 건 일본 놈이라고 쓰면 정답이더라는 거야. 아이들 역사 공부 문제 있는 거 아니야?”
  
  딸의 말 속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뼈아픈 문제점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 내가 달달 외웠던 교과서도 그런 관념을 내 머리 속에 구겨 넣었었다. 나라를 빼앗긴 일제시대는 암흑이었다. 경찰과 헌병이 우리 민족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들은 놋그릇까지 빼앗아가 총알을 만들고 한국 청년을 전장으로 끌고 가 총알받이가 되게 했다는 것이다. 일본인에 대한 적대감을 가져야 할 것 같았다. 대학시절 카페에서 일본 사람을 만나면 시비를 걸어야 할 의무감 비슷한 걸 느끼기도 했었다.
  
  나는 어느 날 서울대의 이영훈 교수가 방송에서 우리에게 주입된 역사 인식이 잘못됐었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 나는 이영훈 교수와 서울대 안병직 교수의 대담을 적은 ‘역사의 기로에 서서’라는 책을 사서 보았다.
  
  안병직 교수는 지난 사십년간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오류들을 말하고 있었다.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 때 우리 땅의 사십 퍼센트를 빼앗겼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어떤 때는 국토라고 하고 어떤 때는 농지라고 하는데 거짓 통계 수치라고 했다. 조선 말 임야는 국가소유였고 일제가 들어오면서 임야를 그대로 국유림으로 했다는 것이다. 농지도 기존 개인의 소유권을 그대로 인정하고 다만 등기를 하게 했다는 것이다.
  
  안병직 교수는 천구백이삼십년대 조선의 무역흑자와 경제성장을 얘기하면서 정직하게 말하면 수탈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그리고 일제 삼십육년간 일본인들이 투자했던 것을 모두 빼앗기고 빈 몸으로 돌아간 그들이 과연 한국을 수탈했느냐는 것이다. 그는 교과서의 내용들은 감정적인 민족주의로 쓴 잘못된 역사 서술이라고 했다. 그는 현실 속에 있는 진실을 보고 편향된 역사관을 가지지 말자고 했다.
  
  나의 인식 속에는 억지로 구겨 넣어진 쓰레기 같은 지식이 참 많았다. 일본뿐 아니라 초등학교 육학년 시절 교과서 안에는 소련과 중공에 관한 것들도 많았다. 교과서에 소련 사람들은 음침한 성격이라고 표현한 것이 오래 기억의 언저리에 걸려 있었다. 나이를 먹고 나서야 러시아에 톨스토이도 도스토엡스키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린 시절 주입된 정보는 세상을 보는 잘못된 틀로 작용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엄마의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초등학교 사학년인 손자가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반대한 것은 정답이 일본놈이 아니라 양반놈이었다고 말했다. 그 대답도 어쩐지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손자는 이렇게 말했다.
  
  “양반놈들은 자기네 기득권을 지키고 싶어했대요. 일반 대중이 알아듣지 못하는 자기들의 말과 글을 가지고 특권을 누리고 싶었던 거죠. 그게 한글 창제를 반대하는 이유였다고 하던데요? 민중이 너무 소통하면 안되니까요.”
  
  손자의 말을 들으면서 이 사회가 검은 안개에 너무 오염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역사를 조선과 일본, 양반과 상놈으로 나누어 차별을 강조해 적대시하고 증오감을 갖도록 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일제하에 가난하게 살아온 부모에게서는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함경도 회령 출신인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나쁜 말을 하는 걸 나는 들어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학교 다닐 때 일본 여학생들의 깨끗함과 정직성 그리고 흰쌀밥이 든 도시락을 보고 부러워했었다고 말해주었다.
  
  같은 나이인 장모님은 경성에서 아버지와 미제 자동차인 택시를 타고 호텔 레스트랑에서 스테이크를 먹은 얘기를 하곤 했었다. 우리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었다. 겉으로는 미워하는 척 하고 속으로는 부러워하는 면이 있었다. 그게 어디서 나온 것일까. 자존감이 부족했던 건 아닐까. 이제는 당당하게 그 시대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봐도 되는 때가 아닐까.
  
삼성전자 뉴스룸
  • 白丁 2024-08-04 오전 9:38:00
    전국민이 아직도 항일투쟁중인 광복군의 나라에서 반일 팔이는 손해볼 일 전혀없는 100퍼센트 남는장사. 말로는 욕하지만 내심 일본의 식민지배를 가장 고마워할 놈들은 정치꾼들일거다. 코너에 몰리면 언제든 꺼내들어 국면 전환할 수 있는 조커, 두꺼비를 제공해 준 일본이 어찌 고맙지 않을 수 있으랴.
  • 골든타임즈 2024-08-04 오전 7:00:00
    일본 가요가 티비에서 흘러 나오고 있었다. 어느 한국 가수가 ‘슬픈 술(悲しい酒)’을 부르자 탄성이 터졌다. 어떤 가수는 ‘갸란두(ギャランドゥー)’를 열창했고, 어떤 일본 가수는 ‘긴기라기니 사리게나쿠’를 불러 국내 유튜브에서 600만뷰를 넘어섰다. 시청자들은 "가수들의 감성에 반했다, 신선했다” 등 호응했다. 영국 가요, 미국 노래, 프랑스 음악, 중국 노래, 이탈리아 가곡, 러시아 가곡, 독일 노래에 이어 일본 노래들이 반갑게 우리 앞에 섰다. 空氣가 國境이 없듯이, 올림픽이 국경을 초월하듯이, 노래도 그렇다. 좋으면 좋은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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