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법률사무소를 낼 때 작가 지망생이 사무장을 하겠다고 찾아왔었다. 그는 택시 운전사부터 시작해서 스무 종류의 직업을 체험해 봤다고 했다. 그에게서 많은 걸 배웠다.
소설가 황석영씨는 젊은 날 품팔이 노동도 해보고 월남에 가서 전쟁 체험도 했다. 북한도 다녀오고 광주민주화 운동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기도 했다. 그의 책들을 재미있게 읽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작가들은 경험에 목마른 것 같다. 외국 작가들의 고행 과정을 찾아본 적이 있다. 써머셋 모옴은 의사가 되어 빈민가에 들어갔다. 그는 처참한 빈민가의 모습을 글로 썼다. 그는 작가에게 있어 몇 년 동안 의사 직업을 갖는 이상의 더 훌륭한 훈련이 없다고 했다.
까뮈는 가리지 않고 직업을 택했다. 온 종일 걸으면서 사람과 길을 보기도 했다. 그는 플라톤부터 사르뜨르까지의 문학과 철학을 읽었다.
카프카는 보험협회 사무원으로 일하면서 매일 오후 두시까지만 일하고 그 뒤에 독서와 글쓰기를 했다. 카프카는 글쓰기를 기도의 한 형식이라고 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지팡이를 들고 어깨에 구식 여행가방을 메고 혼자 걸으면서 그리스를 구경했다. 그는 루소, 샤브토리앙, 위고 등을 닥치는 대로 다 읽었다. 니체를 발견하고는 그를 탐식했다. 그는 아토스 산의 승려들에게 감동을 받고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교섭을 시도했다. 그게 실패하자 그는 세계를 수도원으로 삼기로 했다. 그는 크레타 섬의 집에 스스로를 유폐시키고 글을 쓰면서 혼자 살았다.
뉴올리언즈에서 기자로 일할 무렵 포크너는 계속 원고를 거절당했다. 천구백이십오년 유월 그는 유럽행 화물선에 몸을 싣고 이탈리아와 프랑스로 갔다. 포크너는 유럽에서 도보여행을 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천한 일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1929년의 여름’이라는 글에서 포크너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아침 여섯시부터 저녁 여섯시까지 석탄을 나르는 인부로 옥스퍼드의 발전소에서 일했다. 외바퀴 손수레로 책상 하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글을 썼다.”
헤밍웨이는 군시절 운전병으로 앰뷸런스를 몰고 가다가 박격포탄을 맞은 체험이 ‘무기여 잘있거라’라는 그의 작품에 활기를 넣어줬다고 하고 있다. 그가 쓴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은 그가 바다에서 얻은 경험이다. 주인공들이 헤밍웨이 자신이기 때문에 생기를 갖는다.
스타인 벡은 경험에 굶주려서 화물선을 타고 뉴욕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페인트공의 견습 벽돌 나르는 인부 노릇을 했다. 그는 얼마 후 태평양 숲 지대에 정착했다. 그는 많은 작품들을 써서 그것들이 원고상태에서 혹은 인쇄된 후 사장되는 걸 목격하면서도 절망적일 정도로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일본 작가 아쿠다카와는 자신의 서재를 ‘아귀굴’로 명명하고 창작에 임했다. 천구백십육년 여름 나츠메 소세키는 스승으로서 지바에 머무는 아쿠다카와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뭔가 쓰고 있습니까? 그저 소처럼 천천히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은 끈기앞에 머리를 숙입니다. 그렇지만 불꽃 앞에서는 순간의 기억밖에 부여하지 않습니다. 끙끙 죽을 때까지 미는 것입니다.’
에밀 졸라는 ‘한 줄도 안 쓰고 보내는 날은 하루도 없다’라는 좌우명을 걸고 날마다 일정량의 원고를 썼다.
작가라는 정신적 알맹이가 있으면 어떤 직업의 옷을 걸쳐도 괜찮은 게 아닐까. 노숙자 생활을 하더라도 내면에 작가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그의 생활은 목표를 위해 잠시 거치는 소중한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외국 작가들의 고행 같은 과정들은 내게 문학을 알려주는 등불이 되기도 했다. 사십 년 가까이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사건을 맡을 때마다 그 세계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보았다. 변호사가 관심을 가지고 경청하는 걸 의뢰인들은 좋아했다. 외부인에게 비밀인 사항도 변호사에게만은 적나라하게 알려주었다. 내가 듣고 본 것은 간접 체험일 수 있지만 법정에서의 행동은 내가 주인공이고 나만의 직접 체험이었다. 그 체험들을 오랜 시간 침묵의 체로 여과시켜 숙성시켰다. 거기서 얻은 철학을 수필이라는 나의 발자국으로 남겼으면 하는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