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85년 월간조선 8월호에 40代 기수론을 쓸 때 40세가 된 張琪杓(장기표) 씨를 만난 뒤 이런 글을 남겼다.
<1970년 노동자 전태일 분신 자살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양심을 때렸다. 한 젊은 노동자의 짧고 깨끗하고 치열했던 삶과 죽음은 절망감과 증오감보다는 깊은 감동을 주었고, 많은 대학생들이 이 감동을 수용하면서 자신의 진로를 바꿨다. 전태일은 그가 남긴 일기장 속에서 살아 있었고, 그 일기장을 특종으로 보도한 것은 당시 학생들로부터 비판받던 제도 언론이었으며, 많은 학생들이 이 일기장을 통해 전태일과 만나고 스스로를 다짐해 갔다. 전태일사건을 사회문제로 부각시킨 핵심 인물은 장기표씨(40. 1985년 당시 민통련 사무차장)였다.
한일회담 반대 데모 때부터 적극적이었던 장씨는 그때 군에서 제대한 뒤 복학, 서울 법대에 다니고 있었다. 그때 장기표씨는 <자유의 종>이란 지하신문을 내는 데 관계하고 있었다. 신문을 통해 청계천 평화시장의 근로조건이 열악하다는 데 관심을 쏟고 있는데 전태일 사건이 났다. 그는 후배 세 명을 데리고 전태일씨의 어머니 이소선씨를 만나러 갔다.
"그 사건은 사실 어머니(이소선)가 크게 만든 것입니다. 아들의 유언(노동조건 개선 요구)이 이뤄지지 않으면 시신을 인수하지 않겠다고 나왔으니까요. 저희들과 만난 이 여사는 대여섯 시간 동안 폭포수처럼 애끓는 이야기를 토해 내셨어요. 전태일이 노동법을 연구하면서 '나에게도 대학생 친구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이라고 애태웠다는 이야기도 하셨고 우리를 보고는 왜 이제 오느냐고 말했습니다. 이 말들이 우리를 통해 외부로 전달되어 지금은 유명해졌습니다만, 그 자리에서 저희들은 전율과 같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를 보면 아들을 안다고, 그 아들에 그 어머니였습니다. 영웅의 주검이 안치된 영안실은 쓸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학교로 돌아가 전태일 장례식을 우리 법대 학생들이 치르기로 한 것이죠."
경찰의 제지로 그런 장례식은 이뤄지 않았으나 서울 법대생들의 데모를 계기로 <근로조건 개선하라!>는 시위가 대학가. 종교계로 확산되었다. 전태일 사건은 학생운동사의 분수령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은 질적인 전환을 하기 시작했다. 60년대의 학생운동은 <정치적 자유>를 주제로 한 것이었다. 전태일 사건 이후 70년대의 학생운동은 <경제적 평등>에도 관심을 돌리게 된다. 운동의 방법도 이론적이고 관념적인 데서 벗어나 공장이나 농촌의 현장에서 실천을 통해 구체적인 문제를 체험하고 그 속에서 행동 논리를 확인하는 쪽으로 바뀐다. 그들은 몇몇 리더나 사회 명망가 중심의 하향식 운동을 배격하고 사람들의 의식화. 조직화에 의한 밑으로부터 올라가는 일꾼 중심의 운동으로 나아간다. 정치운동에서 사회운동으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60년대를 주름잡았던 학생 운동가들은 후배들에 대한 영향력과 그들로부터의 존경심을 다 같이 잃게 된다. 그럼에도 장기표씨는 20대와 맥이 통하는 몇 안되는 운동가 축에 든다. 학생운동의 정신을 자신의 사회적 삶으로까지 연장시킨 최초의 직업 운동가이기도 하다.
- <민중>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돼야 한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 못한다. 그러나 민중은 그 속에 진보적 요소뿐 아니라 진보에 장애가 되는 조건도 갖고 있다. 이런 현상을 꿰뚫어 보지 않고 민중을 우상숭배해선 안된다. 민중에 아첨해서도 안된다. 민중을 각성시키는 것은 누구인가. 지식인이다. 지식인이 민중보다 우월해서가 아니다. 지식인의 고유 기능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민중의 약점을 직시해야 민중의 실상을 볼 수 있고, 그 약점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민주화>에 대해서.
"민주화는 글자 그대로 인간이 각자의 주체가 되려는 행위다. 내가 나의 주체가 되어 나를 해방시키면 거기에 참 기쁨과 자유가 깃든다. 민주화는 남을 위한 운동이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을 위한 운동이 된다. 그래서 나는 민주화를 인간화 운동이라고 믿는다. 자신이 자신의 주체가 되는 것은 곧 역사의 주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 인간과 우주의 통일도 이뤄지고 불교에서 말하는 天上天下 唯我獨尊의 法悅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민주화를 '사랑을 사회과학적으로 실천하는 행위'라고도 정의하고 싶다.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지극히 관념적이지만 정치에서 말하는 사랑은 구체적이고 실천적이어야 한다. 나를 먼저 사랑하지 않고서는 남도 사랑할 수가 없다. 즉, 스스로의 인간화가 안된 상태에서는 남을 위한 민주화도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가냘프면서도 강인하고, 차게 보이면서도 뜨거운 장기표씨는 대학생 때 가장 듣기 싫었던 교수의 말이 "너희들도 커 보면 안다"는 타이름이었다고 했다.
"그런 자세는 오늘의 문제를 그냥 온존시키자는 기성세대의 비겁함이죠. 나는 커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아야 되겠다고 다짐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장면이 바뀌어 노태우 정부가 들어선 뒤인 1989년 여름 월간조선 기자인 나에게 당시 수배중이던 장기표 씨가 전화를 걸어왔다. 내가 근처의 호텔 방을 하나 잡아 만났다. 피신중인 사람의 질문은 의외였다.
"월간조선 읽어보니 趙 기자가 김현희를 인터뷰했던데 진짜가 맞습디까?"
"왜 묻지요?"
"운동권에선 지금 대한항공 폭파가 안기부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만났으니 감이 있을 것 아닙니까?"
나는 김현희 씨를 나흘 간이나 만나 요리조리 캐물어 본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를 만난 것은 지난 2, 3월 두 차례, 윤석열판 이른바 의료개혁이 호기롭게 진행되던 무렵이었다. 우파 인사들 모임이었다. 첫번째 만남에서 좌중은 거의가 "윤석열 잘한다, 의사들 나쁘다"였는데 장기표 씨는 다소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런 식으로는 잘 안될 겁니다."
두번째 만남에선 모임이 의사들 규탄장으로 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짧게 말했다.
"의사들도 국민인데 싸잡아 욕하면 안되지요."
나의 뇌리엔 인간애와 진실의 끈을 놓지 않았던 사람으로 남아 있다. '영원한 在野'라고 하는데 時流에 편승하지 않고 사실 편에 서서 '소수의견'을 자임하였던 사람이다. 그가 유언처럼 남긴 '특권폐지'는 제자들에 의하여 이뤄질 것이고 그때는 '다수의견'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