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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女工 해방둥이 기자의 年代記 / 40대가 해냈다! <4> 趙甲濟  |  2024-09-29

 

못 배운 한을 아시나요?

  

나는 1945년 10월에 일본 사이타마현에서 나서 그 이듬해 부모 품에 안겨 고향인 경북 청송(靑松)으로 돌아왔다. 6·25 때는 유엔군의 오폭(誤爆)으로 죽을 뻔했다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점령지에서 석 달을 보냈다(나는 다섯 번 국적을 바꿨다. 일본 국적에서 미군정,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북조선, 다시 대한민국). 마을에 들어온 인민군이 우리 밭에서 익어가던 누런 오이(내가 따 먹으려고 벼르고 있었다)를 가져간 것이 계기가 되어 반공의식이 또렷한 아이로 자랐다(가까운 친족이 보도연맹원으로 재판 없이 사살되었지만). 부산으로 이사, 수정국민학교에서 분교(分校)된 수성(水城)국민학교 1회 졸업생이 되었다. 요사이도 서울에 사는 동기생 10여 명과 석 달에 한 번씩 만난다. 올해 팔순(八旬) 잔치를 해야 할 것인데 만(滿) 나이를 채택한 국가시책에 협조한다고 하여 내년으로 미루는 이들이 태반이다.

  

김석원 회장 추모식이 있었던 주의 토요일 박성호(朴聖浩) 동기가 자신이 관여하는 단체의 행사에 초대를 하여 별다른 사전지식 없이 친구들과 함께 참석했다가 충격을 받았다.

  

김석원, 김박, 조갑제와는 다른 해방둥이 세대를 거기서 만난 것이다.

  

서울 명동성당 옆에 있는 가톨릭회관 7층 강당에서 열린 한국여성생활연구원 창립 46주년 행사였다. 한글을 읽지 못하거나 집안 사정으로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지 못했던 이들(주로 60~80대 여성)이 입학, 초등 과정은 연간 240시간씩 3년, 중학 과정은 연간 450시간씩 3년을 이수하면 국가가 인정하는 졸업장을 주는 학교였다.

  

그날은 재학생들이 시 낭송, 노래 등 발표회를 하였는데 강당 벽엔 동시(童詩) 같은 글들이 순진한 그림들을 배경으로 붙어 있었다. 배고픔보다 더한 못 배운 한(恨)이 서린 글들이었다. 배고픔을 아는 마지막 세대이고 풍요를 즐기기 시작한 첫 세대라고 자부하는 우리의 어린 시절 잊힌 감상(感傷)이 되살아났다. 글 몇 편을 소개한다.

  

●보인다 보인다(김선숙)

  

보인다 보인다

ㄱ ㄴ ㄷ ㄹ ㅁ ㅂ ㅅ

보인다 보인다

가나다라마바사

보인다 보인다

간판이 보인다

보인다 보인다

세상이 보인다

좋다!

  

●늦깎이 공부(박귀자)

  

교복 입은 친구들 모습이

너무나 부러워

나무 뒤에 숨어서 울기도 했네.

늦깎이 공부 배우고 익혀서

한 맺힌 배움의 꿈을 버릴 수 없어

국어 영어 수학 과학 사회 선택 창체(창작체험)

내 마음속에 고이 품고 모두 다

내 것으로 만들어보세.

  

●배움(정규순)

  

배움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 아프고 슬프고

부러움이 있었다.

그런 배움이 늦은 나이의

나에게 찾아왔다. 행운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하셨다.

자신감 있게 용기 있게

열심히 생이 다하는 그날까지

놓지 않을 것이다.

배움은 나의 영원한 친구!!

  

●학교(함일연)

  

어린 시절 가고 싶었던 학교

아들만 가는 학교

딸인 나는 못 간 학교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어

자식 손자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었던 하루하루

팔순을 바라보며

늦게나마 다니는 학교

보람되고 행복한 하루하루

  

●학교 가는 길(권태성·남성)

  

꽁보리 밥도 없어서 못 먹던 시절 나는 그 시절에

태어났네. 첫돌 되기 전 6·25 한국전쟁 나 전쟁 중 나 돌봐준

큰 누님 힘들게 하고 눈떠 보니 왜 이리 배고프니

돌아서면 배고프고.

학교 가고 싶어 부모님 졸라 또래보다 1년 전에 입학하여 

이십 리 길 멀다 않고 재미나게 학교 다녔지.

6년 세월 금방 지나 중학교 시험 봐서 합격되어 다니는데

집안 형편 좋지 않아 자진하여 그만두니 

이것이 나의 최종학교 졸업 증명서. 중학교 1년 중퇴.

온 가족 이사하여 서울 생활 살아보니 세월은 빨라 내 나이 내년이면

70대 중반이라 잠자리에 누워보니 학교 가는 꿈만 꾸니 왜 이리

눈물 나는지. 이래서는 안 되겠다 다시 한 번 용기 내어 창피함 무릅쓰고

중학교 입학하여 국, 영, 수 공부하니 왜 이리 기쁘노. 그 옛날 서러움

조금씩 풀어지네.

남은 시간 열심하여 건강 허락한다면 고등까지 도전하여 최종학교 고졸이라는

소리 듣는 것 희망사항이라네.

눈만 뜨면 학교 가서 공부하고 싶은 생각. 설레는 이 마음 감출 수 없다.

아직도 수업시간 2시간이나 남았는데

늦었다고 생각되어 나만 혼자 분주하네.

  

●노년의 행복(서화옥)

  

꽃보다 예쁘고 아름다운 나!

서산에 넘어가는 노을이 된 지금

지난날 접어둔 배움의 꿈

발걸음 가볍게 학교에 간다.

어느새 내 머리는 은빛으로 변하고

열심히 가르쳐주신 선생님 말씀

학교를 나서면 잊어버리고

그래도 최선을 다해 배우고 익힌다.

배운 모든 것이 나의 즐거움에

꽃으로 피어나는 그날

내 인생은 다시 한 번 피어나리.

  

●배움길(임경순)

  

집에서 손자 보는 할매에게 열린 배움길

중학생이 된 지 벌써 2년 반

공부는 너무 어려워

머릿속에는 안 들어온다

그러나 재미있고 즐겁다

아침 먹고 가방 메고 집을 나서면

모르는 것 많아도

나는 학생이다. 힘이 생긴다.

건강하고 즐거운 배움길

  

●연필(최재임)

  

너를 다시 만난 것은 행운이었어

너와 헤어진 반평생 그 긴 세월

가슴 깊은 곳에 늘 네가 있었어

세상살이 돌고 돌아

너를 다시 만나니

행복해서 눈물이 나

오래여서 좀 서툴고 어설퍼도

선생님들과 친구들이 거들고 있어

돌아서면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네 덕에 다시 떠올리네

할 수 있다 가다듬고

오늘도 가방 메고 학교에 간다.

  

●빛이 보인다(신재옥)

  

내 나이 어느덧 팔십 셋

세월 참 빠르지요

웃음 조금 눈물 많이 섞어 살아온 세월

못 배운 한 너무 커서 마음 아팠네.

큰딸 주선으로 학교에 와서

초등공부를 시작하고

중학생이 되었네

이제는 나도 모르게 힘이 솟네.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학우들 도움으로 정말 재미 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건강하기만 기도합니다.

  

  

박정희와 女工

  

1950년대 부산의 국민학교 시절 한 반이 70명쯤 되었는데 10% 정도는 고아원생이었다. 그들은 도시락을 싸 오지 못했다. 영민한 친구들도 집안이 가난하면 중학교 진학을 못 했다. 아들이 우선이고, 딸은 제외되었다. 숨어서 친구들이 학교 가는 걸 지켜보면서 눈물짓던 아이들,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인 대통령이 한 사람 있었다. 아래 글은 1999년에 산업자원부가 펴낸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역대 상공·동자부 장관 에세이집》 (42~44쪽)에 실린 박충훈(朴忠勳) 전 국무총리의 회고다.

  

〈이것은 좀 감상적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너무나 인상 깊었기에 적어본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타고난 손재주도 물론 대단하지만 배우겠다는 향학열(向學熱) 또한 세계 제일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날짜가 확실치 않은데 어느 날 구로공단 작업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박정희 대통령은 몇 사람의 수행원들과 함께 공장을 둘러보는 과정에서 여남은 살 된 소녀가 제 옆에 대통령이 와 서 있는 것도 모른 채 일하고 있었는데, 대통령께서는 바쁘게 놀리고 있는 소녀의 손을 내려다보다 덥석 그 소녀의 손을 잡고 “네 소원이 뭐냐”고 물었다.

  

엉겁결에 대통령에게 손목을 잡힌 소녀는 어리둥절했다기보다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 아닌가 해 겁에 질렸을 게 당연한 일이다. 대통령은 가볍게 떨고 있는 소녀에게 재차 “네 소원이 뭐냐”고 물었다. 주위에 있던 수행원들이 그 소녀에게 안심하고 네 소원을 말해보라 했다. 그제야 소녀는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른 또래의 아이들과 같이 교복 한 번 입어보고 싶다”는 대답이었다.

  

순간이었지만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박 대통령은 군인이면서 다정다감한 데가 있었다. 내가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틀림없이 대통령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을 것이다.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엄명을 내렸다. 그 엄명은 지체 없이 시행됐다. 공단에서 일하는 아이들이 원한다면 어떤 법을 고치고 또 절차를 바꾸어서라도 학교 다니는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기회를 주도록 하라는 명령이었다. 야근(夜勤)을 마치고 다닐 수 있는 학교와 어떤 졸업장과도 구별되지 않는 똑같은 졸업장을 주도록 하라 엄명했다. 며칠이 지난 후 그 소녀가 아무도 보지 않는 밤길이었지만 교복 입고 가방 들고 학교 나갔을 때의 심정은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감격이요, 드라마였을 것이다. 그 소녀가 얼마만큼 열심히 공부했을 것이며 직장에서도 얼마나 헌신적으로 일했을 것인가는 말할 나위 없는 것이다.〉

 

  

나는 1976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포항서 양질의 석유가 나왔다고 발표했을 때 의문을 가지고 취재하여 경제성이 없는 기름이란 글을 썼다가 신문사에서 추방되어 세계에서 가장 큰 신발공장(국제상사)에 들어가 기획실에서 일할 때 위에 나오는 산업체 특별학교 설립에 참여한 적이 있다. 이승만·박정희는 위대한 교사의 품성을 가진 분이었다. 시대가 흘러 베이비 붐 세대인 대통령의 난폭한 의료 정책으로 1만2000명의 수련의와 1만8000명의 의대생들이 병원과 학교를 떠나 5년간 의사 1만 명을 늘리겠다는 계획은 시작도 하기 전에 끝장이 났다. 결국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졸업식 노래

  

오늘의 풍요와 고민을 만든 1980년대의 대전환은, 세계에서 IQ가 가장 높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배우고 가장 오랜 시간 일한 자연스러운 결과물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교실에서 이뤄졌다. 해방된 직후부터 불렸던 ‘졸업식 노래’대로 우리는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우리나라 새 일꾼이’ 되었던 것이다.

  

  1.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 잘하며

  우리는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2.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우리나라 새 일꾼이 되겠습니다

  3.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우리나라 짊어지고 나갈 우리들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우리들도 이다음에 다시 만나세

  

윤석중(尹石重) 작사, 정순철(鄭順哲) 작곡. 1946년 문교당국에 의하여 제정된 초등학교의 졸업가. 광복 후 첫 졸업식부터 사용되어 오늘날까지 통용되고 있으며, 4분의 4박자 다장조의 엄숙하면서 다정한 감정을 나타내고 있다. 1절은 재학생이, 2절은 졸업생이, 3절은 다 함께 부르도록 작사되었다.

삼성전자 뉴스룸
  • 골든타임즈 2024-10-01 오전 11:26:00
    "너 왜 대학에 들어왔니? 공부가 싫어서 대학가기 싫은데 엄마가 시집이라도 가려면 대학졸업장이 꼭 있어야 된다며 저를 억지로 밀어 넣었어요." 기능공을 양성하는 한국폴리텍대학 입학생들은 대졸자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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