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尹이 아닌 李에 가까워 보인다>
6·29선언은 역사적 선언이고 역사의 변곡점이었다. 이로 인해 ‘신군부’라 비판되던 전두환 대통령의 이미지가 다소 부드러워진 것은 물론 노태우 씨도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군인 출신은 역시 끊고 맺음이 분명하다는 말씀 또한 새삼 듣게 되었던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이 6·29선언을 결단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노태우 씨가 만들어 전두환께 건의한 작품이었고, 이를 전두환 대통령이 납언(納言)했던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노태우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진언하여 뜻을 이루었다. 훈공(勳功)도 윗사람에게 돌렸다. 거인다운 중량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진정성도 묻어난다.
한동훈은 머리가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시에 되고 검사가 되고 검사로서 승승장구했을 리 없다 이런 총명이 자기 뜻을 가슴에 조용히 담아두지 못하고 ‘3대 요구’를 미리 언론에 대고 유세하듯 알렸다. 이렇게 동네방네 떠들어 놓고서 윤석열 대통령을 만나서 또 같은 요구를 내밀었다. 일개 나무꾼일지언정 가납하고 싶더라도 자존심 상해서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이재명이 한동훈을 향해 만나자고 하니 한동훈이 지체없이 동의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수사,재판 중인 이재명을 만나면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 있다며 만나기를 거절했었다. 잘못된 논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여당 대표 또한 저런 논리를 공유해야 바람직할 것이다. 하지만 한동훈은 기다렸다는 듯이 만나자 했다. “남자는 백 근에서 한 근이 모자라도 안 된다.”고 했는데….대통령 따로. 대표 따로 하겠다는 말일 것이다.
어제(10.23) 조선일보에 이런 기사 제목이 있었다.〈속보 한동훈 "11월 이재명 선고 前 김 여사 관련 국민 요구 해소해야"〉왜 하필 이재명 선고 前인가? 선고 전에 김건희 씨 부부에 망신을 주어서 이재명이 반사 이익을 얻게 하자는 것은 설마 아닐 것이다. 한동훈은 선고 전이어야 할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이 대표의 범죄 혐의에 대한 재판 결과들이 11월 15일부터 나온다. 그때 우리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겠나. 김 여사 관련 국민의 요구를 해소한 상태여야만 한다.” 옛날에 새 옷을 사 입고 설날을 맞이했듯 이재명의 선고도 그렇게 맞이하자는 말로 들려서 웃음이 나왔다. 이재명 선고와 김건희 문제는 사돈의 팔촌의 관계도 없다.
어제 중앙일보에〈[단독] 한동훈 "용산, 예스냐 노냐 답하라"…빈손 회동 뒤 때렸다〉는 기사 제목이 있었다. ‘예스냐 노냐’란 말은 최후통첩이다. 길바닥 사람 같으면 저 말끝에 서로 주먹이 오고 간다. 지체 높은 사람들은 여간해서 저런 말을 쓰지 않는다. 혹 썼을 때는 피차간에 안면몰수할 게 뻔하다. 한동훈은 속으로 미리 안면몰수하고서 저 말을 했을 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대통령을 향해 감히 저러겠나. 도리어 한동훈의 정치적 최후가 될지 모른다. 성급한 자가 ‘최후’를 먼저 말하고 항우장사가 제 성질에 죽었다. 여당을 이끌어 가야 하는 대표가 ‘최후성’ 발언을 했으니 예삿일이 아니다. 이재명이만 깽판 치는 게 아니었던가 보다.
한국에는 특히 언더독 효과가 많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자꾸 구박해도 윗사람에게는 표를 주지 않는다. 거꾸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모질게 대들면 설혹 그가 잘했더라도 인심은 고개를 돌려 버린다. 이를 모르지 않을 한동훈이 왜 연일 윤 대통령을 공격할까? 한동훈의 때가 오려면 아직도 가맣다. 차기에도 당 대표를 할지는 미지수인데다가 차기 대선일은 2027년 3월 3일이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계속해서 강공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럴수록 한동훈이 먼저 지칠 것이고 그럴수록 표심(表心)은 떠나간다. 이렇게 될 처지를 머리 좋은 한동훈이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런다 어째서일까? 한동훈 주위에 이상한 사람들이 들끓을지 모른다. 김건희 씨 주변의 사람을 정리하라 요구했지만 자기 주위부터 살펴볼 일이다.
한동훈의 오늘이 있는 것은 오로지 윤 대통령 덕분이다. 그러나 법무장관으로 앉혀 준 것이 불행의 시작이 됐다. 반면에 한동훈에게는 윤석열이 은인이다. 그런데도 한동훈은 윤석열에게 이재명과 마찬가지인 사람이 돼 버렸고 손톱 밑의 가시가 되고 말았다. 한동훈이 길게 내다보고 큰 그림을 봐야 할 텐데 눈앞의 잔기술만 즐기고 있다. 진정성이 없기 때문이 아닐는지. 대통령에게 요구할 사항을 국민에게 먼저 알린 것은 국민에 대한 진정성이 없음을 드러낸 것이다. 여기서 한동훈을 반추하면 윤석열 쪽보다 이재명 쪽에 가까운 사람 같다. 과연 나만의 생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