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닷컴

  1. 칼럼
가늘고 길게 조용하고 단단히 구도자(求道者)의 길 걷는 무명 화백(畵伯) 이야기. 엄상익(변호사)  |  2024-10-29
<그림이 안 팔려도 나는 창조한다>
  
  일기장이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이천육년 삼월 십삼일로 돌아가 보았다. 수은주가 영하 팔도 아래로 떨어진 꽃샘추위였다. 저녁 무렵 나는 아내가 하고 있는 빌딩 지하의 갤러리로 내려갔다. 구석의 테이블에 텁수룩한 머리의 늙은 화가가 벽을 보면서 무심히 앉아 있었다. 아내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화가들에게 전시 공간을 빌려주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아내의 갤러리에는 찾아오는 사람도 그림을 사는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텅 빈 갤러리는 손님이 없는 가게처럼 쓸쓸했고 혼자 앉아 있는 화가는 초라해 보였다.
  
  어둠이 내릴 무렵 나는 그날 처음 본 화가와 부근의 허름한 식당에 앉아 있었다. 화덕에서 동태찌개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아내가 하는 갤러리에서 나는 슬퍼하는 화가들의 위로를 담당하는 셈이었다. 나는 청주 한 병을 시켜 그 화백의 잔에 따랐다. 술이 한잔 들어가자 그 화백의 얼어붙은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넋두리 같은 그의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 평범하게 살기 싫었어요. 남들이 내가 손재주가 많다고 칭찬해 줬어요. 그래서 미대로 진학했죠. 대학 시절 작품에 전념했어요. 단 일 분도 아쉬웠죠.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면서 작품에 매달렸죠. 그렇게 작품에 매달린 생활이 삼십 년이 흘렀습니다. 그래도 저는 지방대학에 일주일에 두 번 강의를 나갑니다. 그 돈으로 생활하죠. 그런 자리마저 없는 화가들은 별 일을 다하고 막노동판에 나가야 하는 게 실정입니다.”
  
  그게 예술가들의 삶인 것 같았다. 고갱도 증권회사를 그만두고 그때그때 노동을 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겠다는 욕망은 안정된 직장을 거부하게 했다. 나는 그의 다음 말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저는 안성의 논바닥에 창고를 지어놓고 거기서 작업을 합니다. 조각도를 가지고 나무를 파고 거기다가 색깔을 입히는 작업을 하죠. 추상을 합니다. 음악을 틀어놓고 조각도로 단순 작업을 하는데 그게 하나의 구도 행위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하죠. 어느 순간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서 무아의 경지로 갑니다. 그러면서 어떤 관념이 생기죠. 그때 작품이 탄생하는 겁니다.”
  
  라즈니쉬는 춤을 추는 사람을 비유하면서 어느 경지에 도달하는 순간 자기가 없어지고 춤만 남는다고 했다. 작가가 작품을 만드는 것도 종교인들의 만트라 비슷한 건 아닐까. 그가 말을 계속했다.
  
  “작업실에서 작품을 할 때가 가장 즐거운 시간입니다. 제가 나이가 오십대 중반인데 이 일을 앞으로 십 년이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제 그림은 추상이라 사람들이 멀리하고 색조가 강해서 벽에 걸기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입니다. 평생 그림이 팔리지 않지만 이겨나가려고 노력합니다. 나이 먹은 지금은 그 남은 시간이나마 내게 얼마나 귀한지 모르겠어요.”
  
  그림 한 점에 천문학적 금액인 고호도 살아생전에는 그림이 팔리지 않았다. 조카가 한 점 산 것이 유일한 판매실적이라고 했다.
  
  변호사를 하면서 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이 내뱉는 삶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진리였다. 사람들이 열심히 돈을 벌고 있는 동안에 화가들은 열심히 그림을 만들고 있다. 사람들이 벼슬을 자랑하고 있는 동안에 정치에 바삐 뛰고 있는 동안에 화가는 산 속에서 들에서 이젤을 앞에 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진정한 화가들은 붓이 손에서 떨어질 때까지 시력이 계속되는 한 붓을 움직이려 한다. 그들은 왜 그렇게 예술의 제단에 자신을 제물로 바칠까.
  
  고갱은 그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고 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망에 일단 예술의 강에 몸을 던졌다고 했다. 그 다음 거기에 빠져서 죽든지 헤엄쳐 살아나오는 건 운명이라고 했다. ‘달과 육펜스’라는 고갱의 전기에 나오는 주인공의 말이었다. 하나님은 즐거움과 돈을 동시에 주지 않는 것 같았다. 창조의 기쁨의 바탕색은 어두운 가난인 것 같기도 하다.
  
  한평생 살아보니까 장관이라든가 국회의원 같은 사회적 지위는 한때 입었다가 벗는 무대의상 비슷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의상이 조명을 받아 반짝거릴 때 잠시 기쁨을 느끼는 환각 비슷한 게 아닐까. 그림은 차원을 달리하는 것 같다. 작가는 자신이 창조하는 작품을 통해서 영생을 한다. 작품이 곧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생명을 다른 모습으로 창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거기서 얻는 기쁨이 최상의 즐거움을 알기에 그들은 구도자 같은 길을 가는 것은 아닐까. 가늘고 길게 조용하고 단단히.
  
삼성전자 뉴스룸
  • 글쓴이
  • 비밀번호
  • 비밀번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