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悲劇으로, 두 번째는 笑劇으로
1851년 12월2일 나폴레옹의 조카인 프랑스의 루이 보나파르트 대통령은 삼촌이 52년 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독재자가 되더니 다음 해엔 나폴레옹 3세 황제로 등극했다. 이 과정을 지켜보던 칼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루메어의 18일」이라는 책을 썼다. 여기서 브루메어는 「안개」라는 뜻인데 프랑스 革命曆의 제2월을 가리킨다. 1799년 브루메어 18일에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자가 된 것이다. 이 책에서 마르크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헤겔은 말하기를 세계사의 대사건과 인물들은 다른 모습으로 다시 출현한다고 했다. 그는 하나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처음엔 비극으로, 다음엔 웃음거리(farce)로서.>
역사가 되풀이될 때는 처음엔 비극적으로, 두 번째는 嘲笑(조소)거리로 나타난다는 이야기이다. 마르크스는 세 번째는 어떻게 된다고 쓰지는 않았다. 역사에 재탕은 있지만 삼탕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지 모른다.
조선조 이래의 한국 역사는 똑같은 실패를 되풀이하는 惡性(악성) 전통이 있다. 조선조는 1592년 임진왜란이 난 지 35년 뒤인 1627년에 정묘호란, 즉 後金(후금)의 침략을 받았고, 그 9년 뒤에 또다시 병자호란을 당했다(전쟁을 불러들였다).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재집권한 대원군이 淸軍(청군)에 의하여 납치되어 淸으로 끌려가더니 그 13년 뒤엔 閔妃가 일본 깡패들 손에 궁정 안에서 피살되었다. 주자학적 관념론에 찌든 양반 정치인들은 실패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대비를 할 줄 모르니 이런 어처구니 없는 비극의 재탕, 삼탕이 일어난 것이다.
비극적 喜劇
한국 현대사도 그랬다. 金九(1948년), 金大中(2000년), 盧武鉉(2007년), 문재인의 방북(2018년)이 그것이다.
<김구, 김규식은 남한에서만이라도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이승만의 권유를 끝내 거부하고 김일성과의 회담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남한에서 유엔감시하의 총선거가 준비되던 1948년 4월, 국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으로 올라가 김일성을 만나 담판을 시도하였다. 남북협상이라는 회담 자체가 김일성의 남한 사회 분열책의 일환이었다.
김구, 김규식은 남한에서 진행되고 있던 制憲의회 선거에 대한 거부와 미군 철수 등에 관한 결의 등에 찬동하는 등 김일성과 공산주의자들에게 끌려다니다가, 본격적인 회담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한 채 국민의 비난 속에 내려와야 했다. 김구, 김규식은 이로써 政局의 주도권을 잃었다.>(「한국 현대사의 이해」, 경덕출판사, 李東馥 외)
金大中 당시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에 집착하더니 현대그룹을 앞세워 4억5000만 달러를 金正日의 해외 비자금 계좌로 보낸 뒤에야 평양에 가서 金九를 속여먹은 金日成의 아들 金正日을 만날 수 있었다. 두 金씨는 6·15 선언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첫 단어부터 마지막 마침표까지가 완벽한 對南적화전략 문서였다. 이 문서대로 하면 대한민국은 적화하게 되어 있다.
이 사실을 잘 아는 남북한의 반역左派들은, 「적화」란 말을 버리고 「6·15 선언 실천」이란 말을 쓰기 시작했다. 6·15 선언은 보안법을 死文化시키고 연방제(적화)통일 주장자들을 국회로 보내는 반역면허증 역할을 했다. 국가의 안보와 정통성을 主敵에 넘긴 代價(대가)로 金大中씨는 그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비극적 희극이었다.
盧武鉉 대통령은 임기를 다섯 달밖에 남겨 놓지 않은 신분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李東馥(前 자민련 의원)씨의 표현에 따르면 金正日은 연방 대통령처럼 행세하면서, 盧武鉉을 남조선 지방정부 대표, 김영남을 북조선 지방정부 대표처럼 다루었다. 盧 대통령은 金正日이 참석하지 않은 만찬장에서 700만 학살정권의 수괴가 無病長壽(무병장수)하기를 기원했다. 수령독재의 장식물인 최고인민회의 의사당을 방문해서는 「인민의 행복이 나오는 인민주권의 전당」이라는 글을 남겼다. 그는 민족의 원수인 金日成 美化 매스 게임 「아리랑」을 참관하고 박수를 쳤다. 그는 金正日이 달라는 것은 다 주고, 얻어야 할 것은 하나도 얻지 못했다. 빈 손으로 돌아와선 어용지식인과 좌경언론으로부터 영웅 대접을 받았다. 국민행동본부는 그를 「강도에게 안방을 열어 주고, 뇌물 많이 주었다고 자랑하는 머슴」으로 비유했다.
「배운 무식자」
이 笑劇(소극)에 조연으로 등장한 김용옥이란 識者가 있다. 그는 북한을, 「잘 살려고 하는 나라가 아니라 올바르게 살려는 나라」라고 美化하고 플라톤의 哲人국가에 비교하였다. 그에 대한 비판엔 「배운 무식자」, 曲學阿世(곡학아세), 識者憂患(식자우환), 惑世誣民(혹세무민) 같은 말들이 등장했다. 문재인은 2018년 9월 평양에 가서 아들뻘 되는 김정은을 옆에 두고 '민족의 지도자'로 치켜세우는 한편 자신을 '남쪽 대통령'이라고 격하하는 연설을 했다. 그래도 공산화되지 않았다.
영국 역사학자 A.J.P. 테일러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사라예보에서 포츠담까지」).
<문명이란 것은 보통사람들의 교양 있는 행동에 의해 유지되어 왔다. 현실에 있어서는 통치자들보다 보통사람들이 더 침착하고, 더 분별력이 있었다>
마르크스의 말을 한국 현대사에 비유적으로 적용하면 이렇게 되나? 계급투쟁론자의 시각에선 1961년 박정희의 군사혁명, 그 첫번째 되풀이인 1980년의 전두환 쿠데타는 비극이고, 두번째 되풀이인 윤석열의 계엄自爆은 코미디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충동적 계엄선포는 6시간만에 헌법적 절차에 의하여 無血진압되었다. 앞선 두 번의 쿠데타는 계급투쟁론자들의 희망과는 달리 새로운 권력을 만드는 데 성공했고 세계사의 大勢를 타고 나름대로의 역사적 역할을 수행하였지만 윤석열판 친위쿠데타는 시대착오적이었다.
계엄령 선포에 접한 국민들이 보여준 첫 느낌은 공포가 아니라 "이게 뭐지"하는 궁금증이었다. 그날 밤을 드라마 보듯이 즐긴 이들도 많다. 윤 대통령은 하도 야당이 괴롭히니 경고 차원에서, 국민들에게 그 심각성을 알리려고 비상계엄을 택했다는 초현실적 발언도 했다. 계엄령을 리얼리티 쇼로 생각했다는 놀라운 고백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관심을 끌기 위하여 나체로 스트리킹을 하는 정도를 넘어서 사는 집에 불을 질러서야 되겠나? 오늘 양상훈 조선일보 주필은 윤석열 '계엄테러', '자폭테러'라는 말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