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원로 철학자 김형석(104) 연세대 명예교수는 당혹감이 채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이번 대통령의 비상계엄령 선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고 인터뷰 하러 온 조선일보 기자에게 털어놨다고 한다. 김 교수는 윤석열 대통령이 2021년 3월 검찰총장직을 사퇴한 뒤 첫 외부 일정으로 찾아가 만난 ‘어른’이었고, 그는 당시 “마음 그릇이 비어 있다면 정치를 해도 된다, 전문가 의견을 적극 받아들여라, 정치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다”라고 조언했었다.
김 교수는 이번 조선일보와 한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우리는 정치적 독재인 ‘권력 국가’에서 시작해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뒤 ‘법치국가’로 들어섰지만, 아직 도덕과 윤리가 지배하는 ‘질서 국가’로 들어서지 못한 상태에서 다시 권력 국가로 후퇴할 위기에 놓였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사태의 한 책임이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이재명 대표가 과거 문재인 정부의 실정(失政)을 극복하고, 정권 창출을 위한 정치를 하는 대신 나라와 국민을 위해 잘 이끌어주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그가 가는 길이 국민이 원하는 것도, 국가가 가야 할 방향도 아니고, 오로지 윤석열 정부를 무능하게 만들어 정권을 쟁취해야겠다는 목표밖에는 없었던 것 같아요. 더욱 나쁜 것은 이재명이라는 사람의 과거를 덮기 위해 행정부와 사법부에 압력을 가한 점입니다. 이대로 가게 되면 대한민국의 정치 방향은 이재명 개인을 위한 것이 됩니다.”
기자가 "계엄령 선포를 야당이 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
“원인 제공은 민주당이 했죠. 그러나 의사가 환자를 고치는 것에 비유하자면 먼저 약을 주고 나서 안 되면 주사를 놓고 그래도 안 되면 수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계엄령을 선포한 것은 약도 주사도 없이 다짜고짜 메스를 들고 수술부터 한 셈이니 국민들이 놀랄 수밖에요. 이건 민주주의 국가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닙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그 노선을 따르려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지지했던 것인데, 이제 보니 자유민주주의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 건지 몰랐고, ‘이 정부 가지고는 잘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이죠.”
윤석열의 무도한 계엄 선포의 원인 제공을 민주당이 했다는 김 교수의 말은 모순이다. 윤석열의 진짜 계엄의도는 이재명 척결보다는 김건희 여사 보호와 부정선거가 있었다는 망상에서 비롯된 것이란 주장이 더 유력하다. 민주당의 잘못을 군대를 동원하여 척결하겠다는 발상은 구름이 보인다고 홍수대비 댐의 水門을 다 열어 水害를 일으키는 것과 같은, 비례에 맞지 않은 정신착란적 행동이므로 민주당을 원인제공자로 보는 것은 논리모순이다.
총선을 1주일 앞둔 지난 4월3일 윤석열 대통령은 용산 대통령실에서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와 오찬을 함께 했다. 김수경 대통령실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2021년 3월 검찰총장 퇴임 후 김 교수를 방문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며 “평소에도 김 교수의 저서 ‘백년을 살아보니’ 등을 읽고 존경심을 밝혀 왔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식사를 시작하며 “3년 전 이맘때 찾아뵙고 좋은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며 “취임 후 빨리 모시고 싶었는데 이제야 모시게 됐다”고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당시 나는 아래와 같은 글을 올렸다.
<김 교수는 지난 2년간의 윤석열 정부의 정책들을 언급하며 “특히 한일관계 정상화는 어려운 일인데 정말 잘 해내셨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소득주도성장, 재정 포퓰리즘, 탈원전, 집값 폭등 및 보유세 폭탄 등 문재인 정부 정책을 지적하며 “지금까지는 윤 대통령이 전 정부의 실정을 바로 잡는 데 애쓰셨다면, 총선 후에는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여러 분야에서 제대로 실현했으면 좋겠다”고 충고했다고 한다.
김 교수는 전공의들의 이탈 등 의료 현장의 혼란에 대해서 “나도 교수지만 의대 교수들이 전공의들의 집단 행동을 만류하기는커녕 단체로 사직서를 제출하는 등 집단으로 동조하는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실망스럽다”고 비판했다고 한다.
식사를 마친 윤 대통령은 김 교수에게 대통령실 내 집무실, 정상회담장, 국무회의장 등을 안내하며 그간의 활동을 설명했다. 김 교수는 “청와대에 가 본 적이 있는데, 용산 집무실이 더 나은 것 같다”며 “청와대는 굉장히 갇혀 있는 느낌이었는데 용산은 탁 트인 열린 공간이라 마음에 든다”고 했다고 한다. 이에 윤 대통령은 “참모들과 한 건물에 있다 보니 늘 소통할 수 있어서 좋다”고 답했다고 한다.
김 교수는, 논란이 많은 의대정원 2000명 증원과 청와대 이전에 대하여 대통령 편을 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김 교수의 태도는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나는 청와대 본관 앞에 서서 광화문과 남산 쪽으로 보았을 때 탁 트인 느낌이 들어 좋았다. 청와대는 지대가 높은 데다가 뒤로는 북악산, 앞으로는 서울시내를 내려다 보게 되어 있어 뒤로 보지 않는 한 탁 트인 시야(視野)이다. 윤석열 대통령도 사석에선 국방부 청사였던 용산 대통령실 건물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한다고 한다. 외국 정상들에게 보여줄 게 없다는 등 건물의 품격이 떨어진다는 식의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직접 들었다는 측근의 傳言). 그래서인지 윤석열 대통령은 청와대의 상춘재, 영빈관 시설을 자주 이용한다. 그러면서 청와대에서 살아보았다면 옮기지 않았을 것이란 취지의 이야기를 한 적도 있다. 옮긴 지 3년째인데 용산 대통령실의 이름도 짓지 않는다. 애착이 생기지 않는다는 증거 아닌가. 그런데도 두 사람은 칭찬만 했다. 아이가 태어난 지 3년째인데 이름을 지어주지 않는다면 뭔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