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두 번째로 오랜 민주주의 역사를 가진 프랑스이지만 프랑스 대혁명 169년 후인 1958년(4공화국 때), 171년 후인 1961년(5공화국 때)에도 군부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左右(좌우)대결은 프랑스에서 시작된 정치행태이다. 나는 10여년 전 글에서 <左右대결을 정치의 軸(축)으로 하는 한국은 프랑스型에 가까운데, 그렇다면 좌익 폭동과 우익 쿠데타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인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고 했는데, 이번 윤석열의 계엄사태로 절반이 적중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제1공화국 등장, 루이 16세 부부 처형,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황제 등극, 1814년 왕정復古(복고), 1815년 워털루 전투로 나폴레옹 몰락, 1830년7월 혁명으로 새 왕조 등장, 1848년 2월 혁명으로 제2공화국 등장(나폴레옹 조카가 대통령에 당선), 1851년 나폴레옹 3세가 쿠데타로 공화정 종식시키고 왕정부활, 이듬해 황제로 등극, 크리미아 전쟁, 1871년 普佛(보불)전쟁에서 프랑스 패배, 王政폐지, 제3공화국 등장, 수만 명이 죽은 좌우 내전 파리콤뮨.
대혁명에서 파리콤뮨까지 82년간의 파란 많은 프랑스 민주화 과정에서는 20여년에 걸친 네 차례 전쟁, 두번의 혁명, 두번의 쿠데타, 그리고 파리콤뮨이란 內戰이 있었다. 이런 소용돌이의 軸은 地主-상공업자-교회-군장교 중심의 우익과 노동자-농민-지식인 중심의 좌익 사이 대결이었다.
1870년 독일통일을 노린 프러시아가 프랑스를 친 普佛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가 스단에서 포위되어 항복하였다. 프러시아군은 파리로 진격, 이 도시를 포위하자 새 정부는 이듬해 프러시아에 막대한 배상금과 알사스-로렌 지방을 바치기로 하고 항복하였으나 노동자와 지식인들이 중심이 된 시민군은 항복을 거부하고 파리콤뮨이란 독자 정부를 수립, 파리를 장악하였다. 베르사이유에 본부를 둔 정부군(국회파)은 파리로 진격, 두 달 간의 치열한 시가전 끝에 파리 시의회 중심의 좌파세력을 일소하였다. 약3만 명(대부분이 파리콤뮨 세력)이 죽었다. 빅톨 유고는 "파리는 이 내전으로 最良(최량)의 남녀 10만 명을 잃었다"고 개탄하였다. 이 기간 프러시아는 포로로 잡았던 10만 명의 군인을 프랑스 정부군에 돌려보내, 진압작전을 도왔다. 계급모순은 민족모순보다 더 강하다는 말이 있다.
파리콤뮨의 참사가 일어난 것은 프랑스 대혁명 82년 뒤였다. 민주주의가 성숙되기엔 너무 짧은 기간이었다. 2024년 현재 한국의 민주주의는 나이가 76세에 불과하다. 프랑스를 오늘날까지 흔들고 있는 左右 대결이 한반도에선 南北 사이뿐 아니라 남한내에서 2重으로 전개되고 있다. 프랑스보다 훨씬 복잡한 內戰的(내전적) 구도를 안고 있다. 파리 콤뮨 같은 사건이 한국에선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하는 이들이 있다면 세계사 공부를 다시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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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대결과 군대의 역할
프랑스나 스페인처럼 左右 대결 양상이 강한 나라에선 군대가 늘 중요한 정치적 변수이다. 左右 대결로 사회 혼란이 지속되면 불안해진 국민들이 군대를 國法 질서 수호자로 여기고 정치적 역할을 기대하게 된다. 5.16 군사혁명도 프랑스와 비슷한 類型(유형)이다.
1958년 5월 프랑스의 알제리 주둔군은 정부의 알제리 독립허용 움직임에 불만을 품고, 사실상 반란을 일으켰다. 매슈와 살랑 장군의 지휘하에 알제리군은 코르시카섬을 장악한 뒤 파리로 진격하겠다고 위협하면서 드골 추대를 선언하였다. 이는 2차 대전 때의 救國(구국)의 영웅 드골이 국가 지도자로 복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12년간 고향에서 칩거 생활을 하던 드골은 수상직을 맡는 조건으로 국회에 시한부 비상大權, 대통령 중심제로의 改憲을 요구, 관철시켰다. 1961년 4월엔 드골이 알제리를 독립시키려 하자 알제리 주둔군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本土에 상륙하겠다고 나왔으나 드골의 對국민-對軍 직접 호소로 좌절되었다.
1968년 5월 학생과 노동자 및 좌익의 反정부 시위가 격화되고 대통령 관저인 엘리제궁이 군중으로 포위되는 위기를 맞았을 때 드골은 한때 하야를 고려하였다. 5월 말 드골은 헬리콥터를 타고 독일의 바덴바덴에 있는 駐獨(주독) 프랑스군 매슈 사령관을 비밀리에 방문하였다. 매슈는 2차대전 때부터 드골의 부하였고, 알제리 주둔군이 드골을 추대하는 사실상의 반란을 일으킬 때 주모자였다. 매슈는 드골에 대한 군부 지지를 확인시키면서 下野를 만류하였다. 자신감을 회복한 드골은 파리로 돌아오자마자 對국민 연설을 통하여 "공산당이 정권 장악을 음모하고 있다"면서 국회 해산과 총선거를 발표하였다. 이 연설 직후 드골을 지지하는 우파 시민들이 파리의 거리로 몰려나왔고 총선에선 드골파가 大勝(대승)하였다.
1930년대 스페인 內戰 때도 군부는 우파 편에 섰다. 당시의 사회혼란은 계급혁명을 추구하는 좌익과 특권을 누리는 교회 사이의 대결이 핵심이었다. 여기에 지역 분리주의 운동까지 가세하였다. 모로코 주둔군 사령관 프랑코가 스페인의 國基(국기) 수호를 명분으로 내걸고 집권 좌익세력 타도에 나서면서 4년간 스페인 內戰이 벌어졌다. 유럽의 지식인들이 좌익을 지원하고 헤밍웨이 같은 문학인들과 피카소 같은 예술가들이 좌익을 미화하는 바람에 좌익 공화파가 善이고, 우익 민족파가 惡이란 인상을 남겼지만, 左右 양쪽이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한 점에선 비슷하다. 좌익 공화파는 교회를 파괴하고 7000명의 신부들과 300명의 수녀들을 학살하였다.
스페인 내전엔 독일과 이탈리아가 우파 편에, 소련이 좌파 편에 서서 개입하였다. 이데올로기적 內戰에선 상대를 치기 위하여 外勢(외세)를 끌어들이는 경향이 있다. 계급적 적대감이 민족애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스페인, 한국의 左右 이념 대결 구도는 內戰으로 갈 수 있는 요인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주의가 요망된다. 프랑스와 스페인은 민주주의를 표방하였으나 민주주의가 內戰을 막아주지 못하고 어떤 점에선 사태를 악화시켰다. 한국의 민주화도 內戰的 요인을 제거하지 못하고 오히려 키워준 게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다. 김일성은 1977년 호네커를 만났을 때 남한에서 反共민주주의가 이뤄져도 혁명에 유리하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선거와 언론의 자유를 악용하면 더 쉽게 좌익세력을 심고 키울 수 있다는 의미였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지 170여년이 흐른, 선진 민주국가인 프랑스에서 군부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는 것은 많은 점을 생각하게 한다. 프랑스는 1789년 7월14일의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을 가장 큰 국경일로 기린다. 建國보다 혁명을 더 重視(중시)하니 혁명이 자주 일어나는지 모른다. 한국도 1948년의 8월15일 建國기념일은 아예 무시하고, 4.19와 5.18을 더 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