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 만난 사람들 (254) - 고대 로마유적지 팔미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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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역대(歷代) 여왕들 가운데 세계사에 큰 족적(足跡)을 남긴 걸출한 여왕(여제)들이 많다.
*핫셉슈트(이집트 BCE 1479-1458), *클레오파트라 7세 (이집트 BCE 51-30년), *제노비아(팔미라 제국-시리아 260~ 67), *선덕여왕(善德女王, 신라-한국 606-647), *진덕여왕眞德女王, 신라-한국 647~647), *측천무후 (중국 690-705년, *마틸다 Matilda, (영국 1102~1167), *샤자르 알 두르르 (이집트 1250~1250), *엘리자베스 1세 (영국 1558-1603), *마리아 테레지아 (오스트리아 1740-1780), *예카테리나 2세 (러시아 1762-1796), *이사벨 1세 (스페인 1474-1504), *크리스티나 여왕 (스웨덴 1632-1654), *빅토리아 여왕 (영국 1837-1901), *엘리자베스 2세 (영국 1952-2022) 등.
그러나 오늘 이야기할 여왕(女王)은 팔미라(시리아)의 여왕이다. 이름은 제노비아(Zenobia), 찬란했던 고대(古代) 도시 팔미라의 주인공. 제2의 클레오파트라로 불릴 만큼 미모(美貌)와 지성(知性) 그리고 야망(野望)을 두루 갖춘 여왕. 한때는 이집트까지 손에 넣고(AD 270) 그 막강한 로마제국에 도전했던 여왕이다. 로마의 ‘아우렐리우스’ 장군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선왕(先王)들이 300여 년간 이뤄놓은 위업(偉業)을 계속 이어 나갔다. 당시의 여왕 권위와 세력의 정도 여하(如何)는 팔미라의 유적지(遺跡地)를 둘러보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우선 그 장대(張大)한 스케일에 경탄(驚歎)을 넘어 어안이 벙벙해진다.
우리는 이미 이태리 로마의 고대 도시, 포로 로마노를 비롯해 폼페이 등 대부분의 유적지를 다 둘러 봤다. 또한, 터키(요르단, 튀니지, 이집트, 프랑스, 스페인, 포루투갈, 크로아티아 등) 지에 남아 있는 수많은 고대 로마유적지들도 구경한 바 있다. 물론 어디에 있든 고대 로마의 웅대(雄大)하고 화려(華麗)한 건축물과 조각품들 그리고 그 장대하고 방대(厖大)한 규모에 감동하고 감탄했다. 이는 얼마 전에 ‘암만’의 ‘제라쉬’에서도 그러했지만, 이곳 시리아의 팔미라 또한 전혀 다르지 않았다. 아니 어떤 면에선 여태껏 한 번도 체험해 불 수 없었던 또 다른 분위기의 가장 기품(氣品)있고 기교(技巧)있고 우아한 고대 로마유적지였다. 확 트인 거대(巨大)한 사막 위에 우뚝 선 원주(圓柱) 기둥들, 우람하고 웅장한 또 다른 모습의 신비의 세계, 로마의 고도(古都)가 펼쳐져 있었다. 그 소중하고 진귀(珍貴)한 유물 하나하나 모두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보고 느꼈다. 민감(敏感)한 손끝을 더듬이 삼아 2천 년 전에 아로새겨진 도공(圖工)들의 혼(魂)과 숨결을 직접 느껴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이곳은 분명 달랐다. 물론 이같이 소중한 세계 문명의 유적지가 무방비(無防備) 상태로 완전히 노출된 것은 위험천만이었다. 이미 대부분 파괴되고 훼손됐다. 그나마 남아 있는 유물마저도 곧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내내 가시지 않았다.
이곳 팔미라에도 다른 나라에 산재(散在)한 고대 로마유적지에서 공통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가령 신전(神殿), 원형극장, 개선문, 거대 목욕탕, 도서관, 정치 집회장, 숙박소 그리고 시민들이 모이는 광장이나 시장 등등.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고 애석한 점은 이미 위에서 언급했지만, 이곳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고대 유물인 거대 원형 석주(石柱)들과 문양(文樣) 등이 새겨진 석조물(石彫物)들이 그대로 방치돼 있었다는 것. 풍상(風霜)에 노출된 체 변색(變色)되고, 수많은 관광객의 손길과 발길로 훼손의 가속도를 더 하고 있었다는 것!! 로마는 말할 것도 없고, 요르단의 ‘제라쉬’만 해도 유적지 곳곳에는 관리인이나 경비원이 배치돼 있었다.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서 만져 보고 싶어도 허용되지 않는 곳이 많았다. 그러나 이곳에선 그런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었다. 입장료를 받는 ‘벨 신전(神殿)’ 외의 모든 유적지와 유물들은 마치 허허벌판에 마구 버려진 건축 폐기물 같았다. 강한 애국심(愛國心)을 가진 유능한 대통령과 정부가 있는 나라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근원적(根源的) 원인(原因)은 그들을 뽑은 국민에게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나 내가 만난 몇몇 현지인들의 말은 달랐다.
먼저 우리가 묵었던 팔미라의 숙소에 관한 얘기다. 우리가 다마스쿠스에서 장거리 버스로 3시간을 달린 뒤 이곳에 도착한 때는 한낮이었다. 사실 우리가 이곳에 도착했다기보다는 버스가 우리를 이곳의 허름한 이층집 숙소 앞에 내려놓고 가 버린 것. 주변이 너무 설렁했다. 도로 건너편에 펼쳐진 광활한 사막 위의 어마어마한 고대 로마유적지와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보통 어느 나라를 가든 이 정도 규모의 유적지 주위엔 관광객 위주의 상가(商家)와 호텔 등이 크게 활성화돼있다. 이곳은 전혀 아니었다. 어느 쪽이든 상가도 여행사도 사람도 안 보였다. 뭔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호텔이라고 붙여놓은 초라한 건물에 들어갔다. 찜통 그 자체였다. 40도 이상을 오르내리는 살인 더위에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주인이 나왔다. 텅 빈 방 두 개를 보여주며 아무 곳을 써도 된다고 한 뒤 나갔다. 침대 4개씩 둔 도미토리형 숙소였다. 샤워 물은 꼭지는 트는 순간 깜짝 놀랄 정도로 뜨거웠다. 실제로 처음엔 웬 온수가 나오나 싶어 어리둥절했었다. 그나마 고물 선풍기가 돌아가 다행이었다. 아래층엔 고물 냉장고가 있었다. 주인에게 물으니 이상 없단다. 다행이다 싶어 약 1km 밖의 수박 가게에서 수박 한 통을 사와 냉장고에 넣었다. 한 30분 지났을까, 시원한 수박을 상상하며 아래층으로 내려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아니 이게 웬일인가. 냉동실에서 온기(溫氣)가 나온 것이다. 분명 수박을 넣을 땐 그렇지 않았다. 알고 보니 손님방의 선풍기만 비상용 발전기로 돌려주고 냉장고는 정전(停電)으로 멈춘 상태였다. 하루에 두 번 정전한다고 했다. 최고 더운 시간대인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그리고 또 오후 6시부터 8시까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60년대 중반까지는 정전했던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하여간, 이런 사정을 알고 있는 주인은 내가 수박을 냉장고에 넣는 것을 보고도 가만있었다. 주인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J: 주인장은 내가 냉장고에 수박을 넣을 때 정전에 관한 얘기를 안 했습니다. 왜 그랬어요? 결국, 나는 시간, 돈, 수박을 다 낭비해버리고 말았잖아요.
A: 내 말 좀 들어봐요. 그건 내 실수가 아닙니다. 내 잘못이 아니라구요. 이 나라는 가난해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요. 우리는 돈도 없고, 일자리도 없고, 갈 곳도 없어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우리에겐 미래도 없어요.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정전에 관해서건 역사적 유물에 관해서건 아무 관심도 없어요. 있어 본들 뭘 할 수 있겠어요? 다 소용없는 짓이에요.
한 마디로 그는 이 나라는 절망(絕望)의 나라라고 했다. 정상적인 게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잘못도 책임도 아니라고 했다. 따라서 정전도, 세계의 역사 유적지 훼손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만난 몇 명의 시리아인도 같은 말을 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그토록 원망스러운 가난이 왜 생겼는지, 나라를 누가 어떻게 운영했기에 이 지경이 됐는지, 세계화 시대에 자기 나라의 위치는 어디에 있고 국제 관계, 외교 관계는 제대로 유지되고 있는지 등에 대해선 아무도 말하지도 않고 묻지도 않았다. 사실, 이처럼 세계 곳곳에는 아무리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역사를 가졌어도, 시쳇말로 무능하고 무책임하고 부패한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뽑은 나라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과거의 영광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정 반대다. 곧 국가(國家) 자체가 사라지고 민족(民族)은 해체되며 노예(奴隷)의 길을 걷게 된다. 이는 냉혹(冷酷)한 현실이며 동시에 예외 없는 자연의 질서다. 역사(歷史)가 증명한다.
암튼, 우리 부부는 40도가 넘는 더위 때문에 바로 눈앞의 팔미라 유적지를 두고도 감히 나가 볼 엄두를 못 냈다. 그래서 오늘은 해가 질 무렵 맞은편에 있는 아랍 성채(城砦)만 올라가 보고 팔미라 유적지는 내일 아침 일찍 해가 뜨기 전에 돌아보기로 했다.
우리 숙소에서 바라보면 그리 멀지 않은 산봉우리에 우뚝 서 있는 아랍 성채를 볼 수 있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팔미라 고도(古都)와 운명(運命)을 같이 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가 볼 만한 곳이었다. 특히 이곳에서 바라보는 팔미라의 고도(古都) 전역(全域)과 일몰(日沒) 감상은 일품이었다. 우리는 오후 5시쯤, 숙소를 나와 아랍 성채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막상 평 길을 지나 산자락에 다다라 위를 향해 걷다 보니 곧 만만치 않은 코스임을 알게 됐다. 멀리서 보기와는 달리 잔돌로 뒤덮인 돌산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해냈다. 물론 아내에게는 매우 무리한 코스였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해낸 데 대해 여간 고마운 게 아니었다. 사실, 산 정상(頂上)에 올라가서 안 것이지만 거기에는 차량을 이용해 올라가는 도로가 나 있었다. 다만, 이쪽 우리 숙소에서는 보이지 않아 몰랐을 뿐이다(*스마트폰 시대와 차이점).
어쨌든, 힘든 만큼 보상도 컸다. 성채 구경도 그렇지만 광활한 사막 위에 세워진 역시 광대한 고대 왕국 위에 드리우는 아름다운 일몰은 금상첨화(錦上添花)였다. 어디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유일무이한 매우 특별하고 존귀(尊貴)한 선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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