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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너 혹시 아직도 부정 선거를 못 믿는 거야?" 결론이 나도 끝없는 평행선을 달리는 싸움이 될 수도 있다. 엄상익(변호사)  |  2025-01-22
<자해행위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총선거에서 부정이 있었다고 확신하는 의사 친구에게서 어제 밤 늦게 전화가 왔다.
  
  “나 미국으로 망명하려고 해.”
  뜬금없는 소리였다.
  
  “왜?”
  내가 되물었다.
  
  “부정선거를 잡으려고 군대까지 동원한 대통령도 잡혀들어갔는데 이제 저놈들이 나를 그냥 두겠어? 내가 그래도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모임에서는 꽤 유명해. 나를 보호하기 위해 요새 가스총을 사서 가지고 다녀. 내가 출국금지조치가 내렸는지 엄 변호사가 좀 알아봐 줄 수 없어?”
  “…”
  
  나는 말문이 막혀 잠시 가만히 있었다. 순간의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저쪽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왜 말이 없어? 너 혹시 아직도 부정 선거를 못 믿는 거야? 윤석열 대통령이 믿고 황교안 총리가 믿고 전광훈 목사가 믿고 수십만이 믿는데 말이야. 너 인권변호사라면서 알고 보니까 참 한심한 놈이다. 그만하자. 전화 끊는다.”
  
  윤석열 대통령은 조직적인 부정선거가 있어 자유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고 했다. 그 영향력이 큰 것 같았다. 대통령에 의해 부정선거는 단순한 의혹에서 사회의 어젠다가 됐다. 친구는 윤석열 대통령의 구속을 부정선거를 밝히려는 대통령의 패배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친구의 인식 속에 이 나라는 부정선거를 밝히려는 세력과 반국가세력 둘로 나뉘어 있었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나는 한심한 족속이었다.
  
  광화문에 모인 수만 명의 군중 앞에서 전광훈 목사가 국민저항권을 행사해 구치소에 있는 대통령을 구해내자고 소리치는 뉴스 화면을 봤다. 윤석열 대통령 지지자들이 영장을 발부한 서부법원으로 난입해서 그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구속 영장을 발부한 여판사를 잡기 위해 판사실 문들을 발로 차고 부수며 광분해서 돌아다녔다. 다음날 파괴된 법원 현장을 방문한 법원행정처장은 박살난 유리 조각으로 발 디딜 곳이 없더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확신을 가지고 광장으로 모이고 또 과학적인 통계가 인터넷상을 돌아다니는 걸 보면서 정말 그런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판단에는 신중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다중이 믿는다고 그게 진실은 아니다.
  
  나같은 노인 세대는 시대의 광풍을 받고 국가라는 배를 풍파 속으로 몰고 가는 돛이 될 게 아니라 배의 뒷전에서 사태를 관망하면서 키를 굳게 잡아주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광우병 사태 때였다. 미국산 소고기만 먹으면 광우병에 걸린다는 말을 듣고 백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흥분한 채 광장으로 모여들었을 때였다. 한 청년이 군중을 향해 소리쳤다.
  
  “미국 소고기를 먹어도 광우병에 안 걸립니다. 거짓말입니다. 믿지 마세요.”
  
  군중들은 그 청년을 향해 욕을 하고 침을 뱉었다. 군중들에게는 과학적 증명도 논리적 설득도 소용없었다. 그때 나는 한 장의 유인물을 봤다. 광장에 백만 명이 넘게 모이면 정권을 뒤엎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본질은 광우병이 아닌 것 같았다. 그 광풍에 정권은 기가 꺾이고 무기력해졌었다. 시대마다 광풍을 불어대는 암흑의 정부가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 때도 해괴한 말이 돌았다. 대통령이 아방궁같이 방을 꾸며놓고 쾌락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청와대에서 굿을 한다는 소리도 돌았다. 흥분한 군중이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대통령이 파면되고 감옥으로 갔다. 변호사인 나는 나중에 대통령에 대한 수사 기록과 재판기록을 샅샅이 뒤져 보았다. 괴소문들은 전부 거짓이었다.
  
  거짓의 영이 노아의 홍수같이 이 사회를 휩쓸고 있다. 변호사로 사십 년 가까이 법정에서 사람들이 싸우는 걸 보아왔다. 진실은 하나인데 쌍방의 주장은 반대였다. 증거에 의해 진실이 밝혀져도 사람들은 잘못된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럴 때면 증거가 조작됐거나 담당 판사가 매수됐을 거라는 새로운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내가 그 피해자였던 적도 있다. 이혼소송을 맡았는데 어느 순간 의뢰인이었던 여성이 내가 남편 측으로부터 돈을 받고 불리하게 변론을 한다는 망상을 가졌다. 그녀가 나를 배임죄로 고소하고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워낙 확신을 가지고 집요하게 주장하니까 형사도 검사도 판사도 의심의 눈으로 나를 보았다. 대법관까지도 뭔가는 모르겠지만 내가 잘못한 게 있으니까 그 여자가 그렇게 덤비지 않겠느냐는 말을 했다. 그들은 내가 지능적으로 사실을 은폐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 능력으로는 망상 환자와 거기에 감염된 법관들을 설득하기 불가능했다. 내가 패소했다. 진실이 허위가 되고 허위가 진실이 됐다. 망상 속에 빠져 있는 그 여자의 목소리가 훨씬 높았다. 그런 게 세상이었다. 예수도 현실에서는 패배자였다.
  
  진짜 부정선거가 있었을까. 일개 시민인 나는 진실을 알 수가 없다. 진실은 하나겠지만 편 가르기에 따라 두 개의 진실로 나뉘어버렸다. 어쩌면 진실과 법정의 진실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거짓이 자존심이 되고 종교적 신념같이 될 수도 있다. 그게 내가 경험한 위선의 세상이기도 하다. 어느 한쪽으로든 결론이 나면 증거 조작이나 배후의 공작이라는 말이 나오면서 끝없는 평행선을 달리는 싸움이 될 수도 있다.
  
  진실은 그 자체의 힘으로 언젠가 드러날 거라는 생각이다. 뱃 속의 아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기 위해 칼로 배를 가르는 자해행위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비상계엄이나 법원을 파괴하는 행위가 그 비슷한 행위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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