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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머
처참하게 당하는 젤렌스키를 보면서 이승만을 생각하는 이유! 趙甲濟  |  2025-03-01
오늘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러시아와 싸우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새삼 이승만 대통령의 위대한 지도력이 그리워진다. 미국의 도움을 받았지만 미국에 끌려가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끌고 다니면서 오늘의 한미동맹을 구축한 이승만은 미국 대통령을 향하여 고얀 놈이라고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이현표 씨의 수년 전 글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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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명서 草案의 “韓-日 우호관계” 문구 보고 激怒한 老 大統領
  
  
   國賓(국빈)방문중 워싱턴과 인근의 사적지, 워싱턴 스타 신문, 그리고 미국의 유명한 야구왕이자 구단주인 그리피스 자택을 방문한 李承晩 대통령은 같은 날, 즉 1954년 7월29일 오후, 백악관에서 제2차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은 세계 정상외교 역사상 전례가 없을 정도로 험악했다. 그 단초를 제공한 것은 아이젠하워였고, 이유는 韓美관계가 아닌 韓日관계 때문이었다.
   이 일화는 이 대통령 방미 당시 주미한국대사관의 정무공사 한표욱 씨의 회고록 ‘이승만과 한미관계외교’(1996)에 등장한다. 당시 그는 회담에 참석할 수 없었지만, 참석자였던 양유찬 대사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이므로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참고로 당시 공보처에서 발행한 책자에는 이에 관한 내용이 거의 소개되지 않고 있는데, 이는 회담을 전후해 韓美 양국 대통령 사이에 불화가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준다. 한 가지 지적해 둘 것은 韓씨는 회담일시를 1954년 7월 30일 오전 10시라고 적고 있으나, 회담이 개최된 일시는 7월 29일 오후 2시 30분이었다.
  
    일반적으로 정상회담 후에 공동성명이 발표되는 것이 보통이다. 제2차 韓美정상회담도 그런 차원에서 준비가 됐다. 문제는 미국 측, 구체적으로는 美 국무부가 우리 측과 사전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李 대통령을 자극하는 성명서 초안을 작성한 것이 문제였다. 즉 미국 측 성명서 초안의 제3항에 “한국은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호적이고”라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이 초안을 본 이승만 대통령은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평소 대한민국과 일본이 국교정상화에 이르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아울러 이 대통령은 6·25전쟁 후, 미국의 아시아 정책이 너무 일본에 치중하고 있는 데 대해 우려하면서, 미국이 한국에 대한 경제와 군사 원조를 강화해 아시아 자유의 확산 및 평화 구축의 보루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설파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 측의 성명서 초안에 한일관계에 관한 뜻밖의 언급이 있었으며, 정상회담 1시간 전에 우리 측에게 전달된 것이다. 이는 국제관례상 문제가 있는 행위이며,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월권행위였다.
  
    李 대통령은 즉시 최순주 국회부의장, 孫元一 국방부장관, 양유찬 대사 등 공식수행원들을 불러 모아 불편한 심기를 적나라하게 토로했다. “이 친구들이 나를 불러 놓고 드디어 올가미를 씌우려는 작전을 시작한 모양인데, 이런 형편이라면 아이젠하워를 만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워낙 노발대발하는 어조였으므로 수행원 누구도 감히 입을 뗄 수 없을 정도였다.
  
    李 대통령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회담 시간이 됐는 데도 백악관으로 출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총대를 멘 것은 孫元一 국방부장관과 백두진 경제조정관이었다.
  
    “각하, 가셔야 합니다. 가셔서 싫은 것은 싫다고 말씀하셔야지, 가시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李 대통령은 결국 백악관으로 향했고, 10분 늦게 회담장에 들어섰다.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덜레스 국무장관 모두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 이유는 李 대통령이 회담장에 들어서며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은 일절 없고, 차갑고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어색한 분위기 속에 아이젠하워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어제 귀국의 헌병사령관 원용덕 장군이 휴전협정에 의거해 파견된 중립국 감시위원단의 공산 측 대표인 체코와 폴란드 대표에게 한국을 떠나라고 경고했다고 합니다.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李 대통령은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되받아쳤다. “그들은 스파이입니다. 우리 군사기밀을 정탐하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들이 미국이 제공한 헬리콥터를 타고 우리나라의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귀하의 나라 군부대 시설까지 정탐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아이젠하워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고, 동석 중인 주한유엔군사령관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하자, 사령관은 즉시 사실이라고 보고했다. 아이젠하워는 잠시 말문을 열지 못했다.
  
    우리는 여기서 이승만 대통령이 얼마나 용의주도한 인물인지를 실감할 수 있다. 그는 미국 측이 틀림없이 韓日관계를 이슈화할 것에 대비해서 중립국 감시위원단의 공산 측 대표에 대한 카드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참고로 원용덕 헌병사령관은 1954년 7월 30일(미국시간으로는 제2차 한미정상회담이 개최된 7월 29일) 중립국 감시위원단 공산 측 대표에게 퇴거를 경고하는 담화를 발표했으며, 이 대통령은 7월 31일(한국시간은 8월 1일) 워싱턴에서 중립국감시위원단 철수 요구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함과 동시에 휴전협정 공문화(空文化)를 선언하는 중대발표를 했다.
  
    이어 회담의 화두가 韓日관계로 넘어가자, 李 대통령은 “내가 대통령에 재임하는 동안, 일본과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극단적인 발언을 했다. 아이젠하워는 화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장 옆방으로 가버렸다. 李 대통령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우리말로 “저런 고얀 사람이 있나, 저런”이라고 말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젠하워가 화를 삭이고 들어와 韓日문제는 보류하고 다른 의제로 넘어가자고 제안하자, 이번에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대통령이 통쾌한 답례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내일 외교기자클럽에서 중요한 오찬연설이 있는데, 준비를 위해 먼저 일어나야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아예 회의장을 떠나버렸다. 李 대통령은 이런 인물이었다. 아무리 미국의 신세를 지고 있지만, 국가지도자로서의 자존심과 품격에 손상을 입을 수는 없다는 당당함을 갖고 있었다. 또한 상대가 우리를 얕볼 때 이를 용납하면, 결국 걷잡을 수 없이 양보하게 된다는 사실도 익히 알고 있었다.
  
    회담장을 나온 李 대통령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회담장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알 리가 없는 기자들은 질문을 쏟아냈다. 우선 美 의회연설에서 李 대통령이 제안한 아시아 해방을 위한 새로운 전쟁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李 대통령은 “토론된 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어 어느 기자가 “美 의회에서 제안한 중국본토 반공전쟁에 대해 아이젠하워 등 미국 정치인 및 군사 지도자에게 실망했는지 아니면 격려를 받았는지?”라고 질문하자, 이 대통령은 정색을 하며 나지막한 어조로 반문했다. “도대체 내가 美 의회에서 무슨 제안을 했다는 말인가?” 이 같은 질의응답은 당시 李 대통령의 심기를 잘 대변해 주고 있었다.
  
  
  
   “내 겨례 자유 위해 몸 던져 미국 民主 배웠다”
  
   1954년 7월 29일 오후, 제2차 한미정상회담 중에 한일관계 문제로 양측이 대립하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비신사적인 태도로 일시 회의장을 비웠으며, 이에 분개한 이승만 대통령이 아예 회의장을 나와 버리자 난리가 났다. 하는 수 없이 아이젠하워도 분통을 터뜨리며 회의장을 나와야 했다. 미국 측 대표도 아이젠하워를 따라 퇴장하려는데, 주미 한국대사관의 양유찬(梁裕燦·1897∼1975) 대사가 양국 정상이 자리를 비웠더라도 회의는 진행시켜야 한다며 특유의 친화력으로 이들을 가로막았다. 양측은 가까스로 회담의 파행을 수습하고 공동성명을 만드는 데 합의했다.
  
     여기서 잠시, 양유찬 대사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그는 아주 어릴 적에 부모를 따라 하와이로 이민 갔으며, 이승만의 하와이 망명시절 한인교회의 학교에 다니던 아주 총명한 학생이었다. 의과대학 졸업 후 그는 하와이에서 산부인과를 개업해 크게 성공했으며, 독립운동을 하는 이승만을 여러모로 도왔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초, 부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주미 대사를 맡아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고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외교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그는 이후 무려 4·19혁명 직후까지 9년 이상을 주미 대사로 근무했다. 전무후무한 장수 기록이다. 그는 탁월한 영어실력, 유머 넘치는 화술로 미 조야인사들과 친분을 쌓았으며, 미국의 각지를 돌며 강연 등을 통해 대한민국을 알렸고, 반공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당시 그의 연설문들을 모은 책자 `Korea against Communism'(1966)을 보면 그가 얼마나 부지런한 인물이었으며 자신을 버리고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 일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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