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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어머니의 기일(忌日) 한번도 어머니의 슬픔이나 아픔을 생각해 보지 못하는 미련한 아들이었다. 엄상익(변호사)  |  2025-04-28
<아들바보 엄마는 언제 좋았을까>
  
  핸드폰의 벨이 울렸다. 액정화면에 외가의 아저씨가 떠올랐다. 어려서 내가 친형같이 여기던 분이다. 통화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오늘이 어머니의 기일이 아닌가?”
  
  십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고 동해에 있는 내게 전화를 한 것이다. 고마운 마음이 든다. 아저씨와 잠시 어머니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끝에 물었다.
  
  “아저씨가 본 어머니의 모습이 어땠어요?”
  내가 어려서 보지 못했던 어머니의 삶을 알고 싶었다.
  
  “내가 대학시절 누님 집에서 신세를 질 때 옆에서 봤지. 작은 집에서 시아버지를 모시고 시동생 가족과 복닥거리고 힘들게 사셨지. 남편인 자네 아버지는 평소에는 착하고 말이 없는 분인데 술을 마시면 돌변하는 모습이었지. 집안을 때려 부수고 주먹을 휘두르기도 했지. 월급봉투를 가져다 준 적이 없다고 들었어. 노름을 좋아했던 것 같아. 사람들을 끌어들여 밤새 화투를 치곤 했으니까. 같이 살던 시동생도 형과 비슷했어. 술에 취하면 형수에게 덤벼들었어. 이재명 정도는 아니었지만 하여튼 그 비슷했어. 그런 속에서 어머니가 뜨개질을 해서 자네를 키운 거지.”
  
  “어머니는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하셨어요?”
  어머니의 세상에 대한 태도를 알고 싶어 물었다.
  
  “시골 고등학교를 졸업한 내가 서울의 대학을 다니게 되면서 있을 곳이 없었어. 그래서 사촌 누님인 어머님 신세를 지게 된 거지. 시아버지와 남편의 눈치가 보이는 데도 나를 받아들인 거야. 어머니는 힘들게 살면서도 남에게 박하지 않았던 것 같아. 당시 우리 집도 가난하니까 내 여동생이 보조간호사가 되어 독일로 갔었어. 당시 우리나라에서 독일로 광부와 간호사를 보냈었지. 내 여동생이 독일병원의 정신병동에서 일했지. 덩치 큰 독일인의 똥오줌도 받아내고 시신을 처리하기도 하고 얻어맞기도 하고 죽도록 고생했지. 그러다 몸이 아파서 귀국을 했지. 그때 자네 어머니가 봉투에 돈을 넣어 내 여동생에게 줬지. 아마 지금의 돈으로 치면 백만 원 정도 될 거야. 뜨개질을 해서 힘들게 돈을 버는 분이 그 돈을 주기가 쉽지가 않을 텐데 말이야. 지금도 감사하고 있어.”
  
  그 말을 들으니까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어머니는 독일에 간 친척이 얻어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짓기도 했다. 어머니가 돈을 주었다는 얘기는 오늘 처음 들었다. 어머니는 먹고 입는데 무서울 정도로 돈을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들을 위해 우유 한 통도 제대로 사주지 않았다. 나는 아저씨의 다음 얘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자네 어머니가 동네 아이들을 모아주어 그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해서 사장까지 했지. 모든 게 자네 어머니 덕분이라고 생각해. 돌아가신 지 오래됐는데 감사했던 마음으로 오늘 아침 자네한테 전화를 한 거야.”
  
  그 말을 들으면서 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오늘이 어머니의 기일이다. 기일이 되면 어머니를 생각해서 글을 써 올리는 것으로 제사를 대신한다. 힘겨운 세상살이에서 어머니가 언제 기뻐하셨던가 생각해 본다.
  
  치열하던 중학교 입시가 있을 때였다. 어머니는 아들이 무조건 당시 최고의 명문이었던 경기중학교에 가기를 소원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인생의 모든 것을 걸었다. 입시를 치르고 얼마 후 라디어 방송에서 합격자 발표가 나올 때였다. 선생님과 시험을 치른 아이들 그리고 엄마들이 함께 방송을 듣고 있었다. 아나운서가 수험번호를 부르면 합격이고 그냥 지나치면 불합격이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무섭도록 긴장한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내 수험번호인 ‘542’가 아나운서의 입을 통해 나오는 순간 어머니는 펄쩍 뛰며 일어났다. 그리고 옆에 있던 선생님에게 엎드려 절을 했다. 어머니는 정말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그 다음은 내가 사법고시에 합격했을 때였다. 그 두 번의 기회를 제외하고는 나는 평생 어머니의 속만 썩였다. 툴툴대고 함부로 했다. 한번도 어머니의 슬픔이나 아픔을 생각해 보지 못하는 미련한 아들이었다. 어머니의 기일을 맞아 추억 한 조각을 떠올려 글로 만들어 향 대신 올린다. 글 향이 어머니에게 갔으면 좋겠다.
  
삼성전자 뉴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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