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9년 한 여름 견학을 한 곳이 대안전기공장이었다. 북한 경제의 롤모델은 농업에서는 '청산리농장' 공업에서는 대안전기공장이다. 모두 평남도 강서군에 있다. 천리마 운동하에 김일성이 현지 지도한 곳으로서 경제정책이 세워진 청산리정신과 대안의 사업체계 고향이다. 따라서 수령의 위대한 업적을 선전하기 위해 전국민을 보게 하는 견학 장소이다.
필자는 당시 농업과학원 밭작물 연구소 사로청위원장(청년비서)으로서 청년들을 이끌고 견학가게 되었다. 뻐스는 없고하여 화물차 적재함에 딱딱한 긴 의자를 올려놓은 것에 앉아 간다. 비포장도로가 대부분인 북한 도로에서 쿠션이란 존재하지 앉는다. 삐걱대는 바람에 의자 못이 솟아나 엉덩이 바지가 찢어져 망신살이다. 그래도 밤낮 일만 시키다가 오랜만에 견학가니 모두 즐거워한다.
공산주의 이상촌인 청산리 농장에 먼저 갔다. 공산주의 되었을 때 살게 된다는 농가를 보니 연탄을 때는 집이었다. 나무나 곡(穀) 짚을 때는 농가와 차이가 이것이었다.
이어 대안전기공장을 견학하였다. 과학연구기관에서 왔기에 공장 안내자와 좀 구체적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공장에서는 대형발전기들을 생산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주요한 것들은 구라파의 오지리(오스트리아)제라고 한다. 자력갱생 정신으로 밤낮 한다더니…보다 충격적인 것은 공장 가동률이 40%라는 것이다. 대표적 모범공장이 이 정도라면 일반 공장들은 20% 좌우이고 멈춰진 공장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1977~79년 김일성대 졸업 후 3대혁명소조로 황남도 해주 린(燐)비료공장에 나갔던 국방과학원 기자였던 김길선의 증언 ㅡ공장이 모두 멈춰져 있었다.
1984년 북한의 최대 탄전인 평남도 지구 탄광들에 공급하는 은산 탄광기계공장에 근무했던 부친의 증언 ㅡ 일을 하고 싶어도 자재가 없어 못한다.
1988년 당시 북한이 최대로 집중하였던 평남도 순천 비날론 공장 건설장 식모로 있었던 모친의 증언이다. 먹을 것이 귀한 북한에서 식모는 식당에 오는 고위간부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다. 한 고위 간부가 하는 말 ㅡ 국가의 중요 창고에 가봐도 텅텅 비어있다.
이 시기 북한은 식량배급을 제대로 못 주어 아사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1987년 필자가 공산주의 이상농장의 하나인 웅기(선봉)에 가는 길에 라진에서 굶어죽은 가정주부가 있었다. 인민국가에서 아사자 발생은 대망신이기에 심장마비로 급사한 것으로 덮으며 입단속하였다. 이 입단속마저 어쩔 수 없이 1990년대 들어 수백만 아사자 속출이었다. 그럼에도 김정일은 '나에게 변화를 기대하지 말라! 사회주의는 과학이다!'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일생을 사회주의 북한을 경험해본 부친은 <최대의 협잡>이라 하셨다. 사회주의는 사기주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