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이다. 한국은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고려에 걸쳐 약 1000년간 불교국가였다. 불교의 화합과 포용력이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바탕이 되어 민족통합의 길로 나아갔다. 가장 성공한 불교적 정치인이 삼국통일을 마무리한 文武王이다. 그의 생각을 보여주는 글 두 편을 소개한다.
*유언
三國史記(삼국사기)에 적혀 있는 통일대왕 文武王(문무왕)의 유언은 권력자의 유언으로서는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담담하다. 죽음을 맞아 모든 것을 비운 사람의 담백한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일부를 소개한다.
<(前略) 山谷(산곡)은 변하고 세대는 바뀌기 마련이다. 吳王(손권)의 北山 무덤에 금으로 채색한 새를 볼 수 없고 魏主(조조)의 西陵(서릉)에는 오직 銅雀(동작)의 이름만 들을 뿐이라. 옛날 萬機(만기)를 다스리던 영웅도 마침내 한 무더기의 흙이 되고만다. 草童(초동) 목수는 그 위에서 노래하며, 여우 토끼는 그 곁을 구멍 뚫는다. 한갓 자재를 낭비하여 虛事(허사)와 비방만을 책에 남기고, 헛되이 人力만 수고롭게 할 뿐 사람의 영혼을 구제할 수 없는 것이다. 고요히 생각하면 마음의 아픔은 금할 수 없으니 이와 같은 것들은 내가 즐겨하는 바 아니므로, 죽은 뒤 10일이 되면 庫門(고문)의 바깥뜰에서 인도의 식에 따라 화장하여 장사지내고, 服(복)의 輕重(경중)은 규정이 있으나 喪(상)의 제도는 애써 검약하게 하라. 邊城(변성)의 鎭守(진수)와 州(주), 縣(현)의 과세도 꼭 필요치 아니하면 모두 헤아려서 폐하고, 율령과 격식중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곧 고치도록 하라. 사방에 포고하여 이 뜻을 널리 알게 하고, 소속 官員(관원)은 곧 시행하라.>
문무왕의 인감됨을 느끼게 해주는 이 유언은 천하大亂(대란)의 시대에 태어나 山戰水戰(산전수전)을 다 거친 大人物(대인물)의 폭과 깊이를 드러낸다. 바로 이 文武王이 모든 것을 걸고 對唐(대당)결전을 선택하여 唐을 축출, 한반도를 韓民族의 생존공간으로 확보한 분이다. 50대에 죽은 문무왕 金法敏(김법민)이 자신의 몸을 불살라 그 재를 바다에 뿌리게 한 것은, 권력을 잡았다고 오만과 위선에 빠져 있는 인사들에게 주는 좋은 가르침이 아닌가. 민족사상 최대의 업적을 남긴 인물이 죽음 앞에서 보여주고 있는 인생無常(무상)의 겸허함!
*사면령
문무왕 8년(서기 668년) 11월5일, 왕은 멸망시킨 고구려의 포로 7000명을 이끌고 경주에 돌아왔다. 그는 신하들을 데리고 선조의 묘에 배알, "백제와 고구려의 죄를 물어 國運이 태평하게 되었다"고 신고하였다. 이듬해 왕은 죄인들에게 사면령을 내렸다. 三國史記 문무왕 條에 적힌 그 요지는 감동적이다.
<지금 두 敵이 평정되어 사방이 안정되었다. 적을 무찌를 때 공을 세운 자들에게는 이미 상을 다 주었다. 戰死한 혼령들에게도 명예를 추증하였다. 그러나 감옥의 죄수들은 아직 은혜를 입지 못하고 고통을 받고 있다. 이를 생각할 때 나는 먹고 잘 수가 없다. 국내의 죄수들에게 특사령을 내리니 오늘 未明 이전에 五逆(임금 아버지 어머니 조부 조모를 죽이는 것)과 死罪를 범하지 않은 자로서 갇혀 있는 자는 범죄의 대소를 불문 다 놓아주라. 죄를 범하여 관직을 박탈 당한 자는 다 복구시키고, 도적질한 자는 석방하되 도적질한 것을 갚을 능력이 없으면 징수를 면한다. 집안이 가난하여 남의 곡식을 취하여 먹은 자로서 농작이 부실한 곳에 사는 자는 갚지 않아도 된다. 농작이 잘 되는 곳에 사는 자는 올해 추수 때 취한 본곡만 갚고 이자는 물지 않아도 된다.>
문무왕이 信賞必罰을 엄히 하면서도 백성들, 특히 고통 받는 이들을 극진히 보살피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文武王이란 諡號(시호)처럼 그는 文과 武의 교양을 겸하여 아름다운 균형감각을 가졌던 분이다. 특히 김일성 세력의 同族 살륙 행패와 비교하면 1347년의 時空을 뛰어넘는 聖人처럼 느껴지는, 보편적 인간애와 도덕성을 확인하게 된다.
*'皮骨은 너희 것이나 血肉은 신라 것이다
671년 唐將 설인귀에게 보낸 문무왕의 答薛仁貴書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南으로 웅진에 보내고 北으로 평양에 바쳐 조그마한 신라가 양쪽으로 이바지함에, 인력이 극히 피곤하고 牛馬(우마)가 거의 다 죽었으며, 농사의 시기를 잃어서 곡식이 익지 못하고, 곳간에 저장된 양곡은 다 수송되었으니 신라 백성은 풀뿌리도 오히려 부족하였으나, 웅진의 漢兵(한병)은 오히려 여유가 있었소. 머물러 지키는 漢兵은 집을 떠나온 지 오래이므로 의복이 해져 온전한 것이 없었으니 신라는 백성들에게 勸課(권과)하여 철에 맞는 옷을 보내었소. 都護(도호) 劉仁願(유인원)이 멀리 와서 지키자니 四面(사면)이 모두 적이라 항상 백제의 침위가 있었으므로 신라의 구원을 받았으며, 1만 명의 漢兵이 4년을 신라에 衣食(의식)하였으니, 仁願(유인원) 이하 병사 이상이 가죽과 뼈는 비록 漢나라 땅에서 태어났으나 피와 살은 신라의 육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