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엔 행복도 조사에서 이스라엘 8위, 한국 58위
⊙ AI,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국인보다 더 행복한 이유로 ‘강한 사회적 유대감’ 먼저 꼽아
⊙ “외국군이 장기 주둔하면 나라의 단합이 깨지고 국민의 정신력이 해이해진다”(지브 시프 기자)
⊙ 보수의 3대 가치는 사실, 법치, 자유
군대 안 간 국군 통수권자 윤석열의 무도(無道)·무책임·무능(無能)한 ‘3무(無)’ 비상계엄 선포는 당시 여권의 제2인자를 체포 대상으로 올린 데서 보듯이 친위(親衛) 쿠데타 성격인데, 실패했다. 친위 쿠데타는 실패할 수가 없는데 실패했다. 그를 추대했던 보수(保守) 세력은 ‘무능한 집단’이 되어 버렸다. 인류사에 남을 만한 문명 건설의 챔피언이 졸지에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군 장교단은 20세기 역사에서 이스라엘군과 함께 가장 위대한 국가 건설의 주체 세력인데 무능한 통수권자를 따르다가 줄줄이 감옥에 갔다. 건국의 초석(礎石), 호국의 간성(干城), 근대화의 기관차, 민주화의 울타리 역할을 완수하고 이제 자주국방력을 바탕으로 자유통일을 뒷받침하여 일류국가 건설로 나아가려는 길목에서 한국군은 동네북 신세가 되었다. 고려 무신난(武臣亂) 이후 약 800년 만인 1961년에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했던 국군이 조선조 사대부의 전통을 잇는 검사 출신 대통령을 만나 우스운 존재로 전락하려 한다. 이번 계엄 사태가 역사에 드리우게 될 가장 어두운 그림자는 대한민국이 민족사(史)에서 재발견한 자주국방 의지의 퇴색이고, 이는 한국인의 불행 구조를 고착시키게 될 것이다.
147개국 중 한국 행복도 58위라니
유엔이 매년 발표하는 세계 147개국 행복도 랭킹에서 한국은 아무리 못해도 30위 정도는 해야 옳다. 1인당 국민소득이 세계 32위, 국민 평균수명은 84.5세로 세계 5위이다. 반면 하마스와 격투 중인 이스라엘은 가장 불행한 사람들이라야 맞다. 1인당 국민소득은 세계 16위, 평균 수명은 82.6세로 세계 9위이지만 살육의 한복판에서 무슨 행복감을 느낄까?
올해 발표된 세계 행복도 국가 랭킹은 우리의 상식적 예상을 뒤엎는다. 이 조사의 기준은 여론조사를 통한 주관적 행복도 이외에 6개 객관적 지표를 합산한다. 1인당 GDP, 건강수명, 사회적 도움(가족과 친구), 선택의 자유, 관용(기부·봉사 등), 부패 인식(정부에 대한 신뢰도)이다.
1위는 핀란드로 8년 연속 1위, 2위 덴마크, 3위 아이슬란드, 4위 스웨덴, 5위 네덜란드, 6위 코스타리카, 7위 노르웨이, 8위 이스라엘, 9위 룩셈부르크, 10위 멕시코. 한국은 58위이다. 이스라엘은 하마스 전쟁 이전엔 4위였으나 좀 떨어졌고, 한국은 전년(前年)에 비하여 6계단 하락했다. 가장 행복한 10개 나라 중 네 나라, 덴마크 아이슬란드 스웨덴 노르웨이는 300년 동안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해적 바이킹 국가이다. 바이킹은 유럽에서 가장 늦게 문명화된 게르만족이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늘 전쟁의 공포 속에서 떨어야 하는데, 이들이 왜 이렇게 행복하고 한국은 상대적으로 왜 이렇게 불행한가? AI(챗GPT)에 물어보기로 했다.
유대감과 고립감의 차이
AI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국인보다 더 행복한 이유로 ‘강한 사회적 유대감(紐帶感)’을 먼저 꼽았다. 가족·친구·이웃 간의 연결망이 매우 견고하여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의지할 사람이 있다”고 느낄 수 있는 사회적 뒷받침이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로는 ‘공동체 의식과 목적의식’이 견고하다는 점을 꼽았다. 전쟁 같은 위기 속에서도 국민이 단결하고 ‘공동의 사명 의식’을 공유(共有)하며 개인이 ‘더 큰 역사 속의 일부’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높은 행복도, 그 세 번째 이유는 회복력과 낙관적 자세이다. 전쟁 등 위기를 함께 극복해 내려는 의지, 전통 종교문화에 뿌리를 둔 낙관적 삶의 태도가 행복감을 높인다.
한국인의 행복도가 낮은 이유에 대해서 챗GPT는 ‘사회적 고립감이 심하고 사회적 신뢰가 약한 점’을 먼저 꼽았다.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가장 높고, ‘도움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음’이라고 느끼는 이들이 약 19%나 되는 등 사회적 신뢰와 뒷받침이 약하다. 두 번째 이유는 ‘학업과 직업에서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높다는 점이다. 사교육(私敎育) 의존이 높고 입시와 취업의 과열 경쟁으로 자식과 부모가 모두 만성적 스트레스와 불안을 경험한다. 세 번째 이유는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이 심하여 청년 세대는 ‘노력해도 계층 이동이 어렵다’는 좌절감을 자주 느낀다. 한국인의 불행감, 그 네 번째 이유는 ‘심각한 정신건강 및 높은 자살률’, 다섯 번째는 고령화 저출산, 그리고 외로움. 특히 고령층의 고독이 한국인의 삶의 만족도 전반에 악영향을 끼친다.
AI는 결론 부분에서 이렇게 요약했다.
〈이스라엘은 사회적 도움과 강한 공동체 의식을 통하여 위기를 극복하며 높은 행복도를 유지하고 있으나, 한국의 경우에는 경제발전은 이루었지만 경쟁과 불평등, 사회적 고립, 정신건강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상대적으로 낮은 행복도를 보이고 있다.〉
자주국방 대 사대국방
이스라엘, 특히 군대에 대해 좀 아는 입장인 나는 이렇게 다시 물어보았다.
“이스라엘과 한국의 행복도 차이에서 자주국방 의지의 강하고 약함이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챗GPT는 이렇게 응답했다.
“아주 흥미롭고 중요한 시각입니다. 이는 단순히 군(軍) 과 안보 문제를 넘어서 심리적 안정감, 국민의 자존감, 공동체 의식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AI는 자주국방은 안보에 대한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고 했다. 이스라엘은 징병제와 고강도 훈련, 그리고 자체적 무기 개발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 스스로 지킨다’는 자부심이 강하다. 이로 인해 외부 위협 속에서도 안심하면서 공포에 덜 휘둘리는 회복 탄력성이 크다는 것이다. 위기 때에도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지지 않고 ‘우리는 뭔가를 할 수 있다’는 통제감(locus of control)이 높아진다고 했다.
반면 한국은 미국의 핵(核)우산과 주한미군에 의존, 자주국방의 담론은 있지만 실질적 독립성에 대하여 의문을 갖는 국민들이 많다고 예리하게 지적했다. 이런 태도는 북핵, 중국·러시아 등으로부터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생길 때 불안감을 키운다. ‘우리가 스스로 못 막으면 미국이 도와주어야 한다’는 태도는 불확실성에 기반한 의존성으로 그 자체가 불안 요인이다.
챗GPT의 AI는 자주국방 의지가 국민의 자존감과 공동체의 정체성 강화에 기여하고 이것이 행복감을 증진시킨다고 해설했다. 이스라엘은 군복무가 국민의 의무일 뿐 아니라 국민이 되기 위한 성인식(成人式)이자 공동체 의식 강화의 도구라고 했다. 병역(兵役) 경험을 통하여 ‘국가의 일원(一員)’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공적(公的) 의무 수행에 대한 긍정적인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한국은 병역 의무가 사회적 갈등 요소로 작용하기도 하며, 일부에서는 병역의 형평성이나 가치에 회의적이다. AI는 아픈 지적을 했다.
〈한국에서 병역은 희생으로만 인식되거나 사회적 보상과 명예가 약하다는 불만의 소재가 되어 자존감 저하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선 군복무를 둘러싼 갈등이 이스라엘과 정반대로 국민 통합이 아니라 국민 분열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은 너무나 날카롭다. AI의 분석은 ‘자존심이 행복의 근원’이란 논리를 보여 준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위험하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를 믿는 듯하다.
사대국방은 분열의 원천
AI는 자주국방 태세를 가진 이스라엘은 위기 때 국민 통합과 회복 탄력성을 보인다고 평가했다. 튼튼한 자주국방 체제 덕분에 위기 상황에서도 정부·군대·민간이 협력하여 신속하게 대응한다. 이는 국민들로 하여금 국가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갖게 하고 위기 속에서도 소속감과 목적의식을 강화한다. 총 들고 나라 지키는 보람에 산다는 뜻이다. AI의 이스라엘 군사문화 설명을 들으니 한국에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1962년 육군본부 정훈국의 의뢰를 받아 유호가 작사하고 이흥렬이 작곡한 ‘진짜 사나이’는 지금은 한국보다는 이스라엘에 어울리는 군가가 되었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 전투와 전투 속에 맺어진 전우야 / 산봉우리에 해 뜨고 해가 질 적에 / 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
AI는 한국은 안보 위기 때 일치단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정치적 분열과 신뢰의 결핍이 드러나 사회 전반에 불안과 냉소주의를 확산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천안함 폭침(爆沈) 사건 이후 한국에서 벌어진 분열상이 대표적 사례이다. 한때 성인의 약 30%가 천안함 폭침은 북한 소행이 아니라는 음모론에 넘어갔다. 정치인과 언론이 이런 선동에 앞장섰다. 이스라엘에서 그런 짓을 했으면 목숨 부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AI는 “자주국방 의지는 국민 행복감에 간접적이지만 실질적인 영향을 준다”는 결론을 냈다. 자주국방 체제가 주는 심리적 안정감, 국민 자존감, 공동체 의식이 행복도 증진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반면 잘살면서도 미국에 의존, 자주국방 의지가 약한 한국에선 위기 때의 불안감, 병역으로 인한 갈등이 공동체의 분열과 냉소주의를 유발하고 사회에 긴장감과 불신을 확산시켜 행복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꼭 30년 전인 1995년 여름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만난 국방 전문기자 지브 시프 씨는 서울 한복판에 주한미군 기지가 있는 점을 들어 “외국군이 장기 주둔하면 나라의 단합이 깨지고 국민의 정신력이 해이해진다”고 경고했다. 아셰르 나임 주한(駐韓) 이스라엘 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인간이 늘 긴장 상태 하에 있어야 자신의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여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천재(天才)는 고통 속에서 피어난 꽃이지요. 우리는 오늘이 항상 생애의 마지막 날일지 모른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오늘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답니다.”
싸움꾼 바이킹 국가는 왜 행복한가
한국인의 높은 불행감을 다른 측면에서 알아보기 위하여 AI에 나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세계 행복도 조사에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아이슬란드 같은 바이킹 국가들이 늘 가장 행복한 나라로 랭크되는데, 바이킹 문화와 관계가 있는지요?”
챗GPT는 이렇게 답했다.
“훌륭한 질문입니다. 이들 바이킹 국가가 세계 행복도 조사에서 항상 상위권에 오르는 것은 단순히 현재의 정책이나 경제 지표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바이킹 문화와의 연관성은 일부 학자들과 문화비평가들이 주목하는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바이킹 문화는 개인주의적이면서도 강한 공동체 의식을 가졌고 이것이 오늘날 북(北)유럽 국가들의 높은 사회적 신뢰, 협력 문화, 평등 성향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북극권에 가까운 척박한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살았던 바이킹은 집단으로 항해하고 마을 단위로 협력하며 중요한 문제는 팅(thing)이라는 회의체를 통하여 민주적으로 결정했다. 팅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의회로도 불린다.
바이킹은 귀족과 평민의 차별이 크지 않았다. 무기와 자산을 가지면 누구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남녀 차별도 덜했다. 이런 문화는 현대의 사회민주적 시스템으로 이어져 사회적 안정감이 높고 행복도를 높였다는 것이다.
혹독한 북유럽의 자연환경은 바이킹 시대부터 사람들에게 서로 협력하고 환경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태도를 심었다. 바이킹 국가들이 보여 주는 친환경 정책, 삶의 균형, 자연과의 조화 추구는 만족감과 행복으로 이어진다.
바이킹은 먼 곳으로 항해하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기동(機動) 민족이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선 자율성과 자기결정권을 발휘해야 했고, 이것이 오늘날 북유럽에서 개인의 자유와 선택권을 존중하는 제도로 발전했으며, 자신의 삶에 대한 주인의식이 강하여 행복감을 유발한다는 논리다.
Law 어원은 바이킹 말
서기 8~11세기 300년간 유럽과 러시아, 중동, 지중해를 석권했던 바이킹은 용맹한 전사(戰士) 집단이었으나, 정복지를 다스릴 때는 법치(法治)를 세워 행정을 효율적으로 집행하고 개방적인 실용 정책으로 무역과 경제를 진흥시켰다. 덴마크 바이킹은 프랑스 노르망디에 정착하여 살다가 프랑스 문화를 받아들여 하이브리드가 되었다. 잡종 강세(雜種强勢)의 장점을 살린 이들 전사는 11~13세기 잉글랜드와 이탈리아 남부를 정복, 당시 유럽에서 가장 건실하고 번영한 두 나라(잉글랜드와 시실리 왕국)를 만들었다.
AI는 이런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북유럽 국가의 정체성과 문화적 자긍심이 되었다고 했다. 바이킹의 고귀한 야만성(noble savage)은 작곡가 바그너를 매료시켜 대작 오페라 〈니벨룽엔의 반지〉를 통하여 예술적으로 승화되기도 했다. 바이킹 후손들은 자국(自國)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보니 미래에 대한 낙관적 신뢰를 갖게 되고 이는 안정감과 만족도를 높인다. 한때 가장 잔인했던 해적의 후예들은 오늘날 가장 평화로운 시민으로 바뀌었고, 그들이 노벨평화상을 주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든지 보수의 3대 가치는 사실, 법치, 자유이다. 사실 위에 세운 법치라야 자유를 지키고 그 자유의 생산성으로 문명을 건설하고 행복한 삶을 보장한다. 내가 윤석열을 보수의 배신자로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망상적 계엄으로 법치를, 부정선거 거짓말로 사실을 파괴하여 자유의 기반을 허문 ‘국민 신임 배반자’(헌재 결정문)이다.
문명 파괴자였던 바이킹이 위대한 문명 건설자가 되어 그 후손들이 가장 행복하게 살고 있는 이유에서 법치를 뺄 수 없다. 다시 AI에 물었다.
“Law는 바이킹 말에서 유래했다는데 바이킹과 법치는 어떤 관계가 있나요?”
챗GPT는 “Law가 바이킹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는 언어사적(言語史的) 근거가 있다”고 답했다. Law는 고대 노르드어 ‘lagu’에서 변형된 단어로서 ‘무언가를 정해진 자리에 놓는 것, 즉 규범을 설정한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바이킹이 잉글랜드를 자주 침공해 거기 정착하면서 이 단어가 영어 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바이킹 하면 무법자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실제로는 ‘강한 법적 전통’을 가진 민족이었다. 주민회의 팅은 의회와 법정 역할을 했다. 아이슬란드의 알팅(Althing)은 서기 930년에 설립된 세계 최초의 의회이다. 모든 자유민이 참여해 법률을 논의하고 판결을 내렸다. 바이킹은 ‘법률 암기자’도 두었다. 글로 쓰인 법이 없어 법률을 기억하고 낭독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9세기 바이킹은 잉글랜드의 동부에 ‘데인 로’라는 자치구역을 경영, 이곳에 노르드식 법을 적용했다. 바이킹 법체계가 영미법(英美法)에 영향을 주었다.
바이킹은 법의 목적을 정의의 구현이 아닌 공동체의 질서 유지에 두었다. 법의 존재 이유를 도덕성이 아닌 실용성에 둔 것이다. 그들의 법 집행은 증거와 증인(證人)을 중시(重視)하고, 매우 실용적이었다.
범죄자 처벌은 공동체의 의무
바이킹은 나쁜 행위가 반드시 나쁜 사람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살인에 대한 처벌도 슬기롭게 했다. 사람을 죽여 놓고도 일정한 시한(時限)에 자수하면 정상을 참작하였다. 바이킹 법은 살인한 자는 ‘행위를 한 뒤 만나는 첫 번째 사람에게나 세 집을 지나치기 전’에 자수를 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살인을 한 뒤 적절한 조치를 취하였을 경우엔 추장이 재판장 역할을 하는 주민회의에서 피살자 가족에 대한 배상을 하는 조건으로 사형(死刑)을 면제해 주기도 했다. 사람을 죽이고도 신고하지 않거나 밤에 몰래 죽이는 행위는 용서하지 않았다.
정정당당한 행동을 했느냐가 유무죄를 판단하는 잣대가 되었다. 예컨대 누군가가 사고를 만나 죽어 가는 것을 보고도 가족에게 알리지 않은 행위는 살인죄에 준하여 처벌했다. 회식 장소에서 살인이 벌어지면 모든 참석자들은 가해자를 체포할 의무가 있다. 그런 의무를 다하지 않은 자는 피살자 유족들에게 배상해야 했다. 도둑질을 하다가 발각된 절도범은 죽여도 죄가 되지 않지만, 강도를 죽여선 안 된다. 절도는 피해자 몰래 하지만 강도는 면전(面前)에서 이뤄지므로 최소한의 방어 수단은 보장되었다고 판단한 결과이다. 사소한 절도에 대한 처벌은 통로를 만들어 지나가게 해놓고 마을 사람들이 돌을 던지는 것이었다. 이 집단폭행에서 빠지는 주민에겐 벌금을 물렸다. 범죄자 처벌을 공동체의 의무로 규정한 것이다.
바이킹 법정이 이재명(李在明) 대통령 관련 재판을 했다면 공직선거법 허위사실 유포 혐의엔 무죄, 위증교사(敎唆) 혐의에는 유죄(有罪)를 선고했을 것 같다. 윤석열 후보도 허위사실 유포 혐의가 있는데,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므로 처벌이 불가능하다면 낙선한 후보에 대해서도 처벌을 하지 않아야 하고, 위증교사 혐의는 공동체의 유지에 위험 요인이므로 처벌하지 않았을까?
피의 독수리
법치엔 왕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천재지변이 잦고 농사를 망치고 바다에서 물고기가 잡히지 않아 주민들이 굶게 되면 신(神)에게 황소를 잡아 바쳤다. 효과가 없으면 산 사람을 제물(祭物)로 올렸다. 이것도 소용이 없으면 왕을 죽여 제물로 삼았다.
바이킹은 ‘피의 독수리’라는 잔인한 사형 집행 의식을 가졌다. 히스토리 채널 시리즈 〈바이킹〉에서 그 장면이 생생하게(처참하게) 방영되었다. 이 사형 방식은 왕이나 주교(主敎) 또는 추장과 같은 자가 중죄(重罪)를 범했을 때 적용하였던 것 같다. 사형수의 등을 칼로 갈라 가죽을 벗기고, 등뼈를 드러낸다. 갈비뼈를 부러뜨려 날개처럼 펼친다. 상처엔 소금을 뿌린다. 허파를 등 뒤로 잡아당겨 어깨 위에 얹어 놓는다. 이 모습이 ‘피로 그린 독수리’와 비슷하다고 한다. 이렇게 칼질을 해도 사형수는 비명을 지르지 않아야 한다. 입을 다물고 침묵으로 버티면서 죽어야 바이킹 신화에 나오는 오딘 신(神)을 만날 수 있다. 한 번이라도 소리를 질렀다가는 죽어서 좋은 데를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잉글랜드의 캔터베리 대주교, 잉글랜드의 노섬브리아 왕, 노르웨이의 왕자가 이런 형(刑)을 받아 죽었다고 전한다.
노르만 전사 집단의 이탈리아 남부 정복 역사를 다룬 책 《남(南)의 북인(北人)(The Normans in the South, 1016-1130)》의 저자 줄리어스 노리치(John Julius Norwich)는 “노르만은 법을 주인이 아니라 노예로 여겼다”고 했다. 노예는 튼튼할수록 도움이 된다. 법치도 튼튼하게 만들어야 지배자와 공동체에 유리하다고 본 것이다.
야만의 바이킹이 유럽 문명의 위대한 유산(遺産)인 법치의 한 건설자가 된 것은 세계사에서 가끔 발견되는 경이로운 역전극(逆轉劇)의 명장면이다.
정정당당한 이름을 위한 헌신
11세기까지 바이킹은 기독교를 믿지 않았다. 거창한 우주관과 용맹한 인생관을 지닌 원시(原始) 종교를 따랐다.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긴 덕목은 ‘남자의 미학(美學)’, 그리고 명예였다. 바이킹의 인생관을 엿보게 하는, 돌에 새긴 시(詩) 한 수를 소개한다.
〈가축들이 죽는다. / 친척들도 죽는다. / 너도 죽어야 한다. / 내가 아는 한 영원히 살아남을 것은 / 죽은 이들 하나하나의 정정당당한 이름이다.〉
미국 남(南)일리노이 대학 출판부에서 펴낸 《스웨덴의 역사》 저자 프랭클린 D. 스콧은 이 시에 담긴 바이킹의 윤리를 이렇게 요약하였다.
〈그들은 영웅적 신념의 소유자들이었다.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살아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궁극적 결과물이 아니라 어떻게 이 운명적 게임을 감당하였는가였다. 고통은 참아 내야 한다, 남을 위해서나 원칙을 위해서가 아니라 운명의 실천을 위하여, 미리 주어진 삶의 목적을 구현하기 위하여. 폭력과 잔인한 행동도 예사로 했다. 이 또한 변명이 필요 없다. 운명이니까. 그들은 사회적 의무나 도덕적 금기 따위는 무시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안전과 경제적 이해득실(利害得失) 같은 것들은 경멸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이 나쁘고 옳다는 것에 대해선 확실한 기준이 있었다. 그것은 미학이었다. 그들이 한 일들이 다른 이들을 기쁘게 할 정도의 이야깃거리가 된다면 그것은 멋진 것, 그래서 옳은 것이 된다.〉
바이킹 언어에서 유래하는 영어 단어로 버서크(berserk)라는 형용사가 있다. ‘광포(狂暴)한’이란 뜻이다. 명사형으로 berserker는 광전사(狂戰士)로 번역된다. 늑대처럼 곰처럼, 미친 듯 신들린 듯 싸우는 전사들이다. 미칠 정도로 신나게 싸우다가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것, 이를 멋진 인생으로 여겼던 이들이 11세기를 전후하여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문명화되었고 지금은 사회복지 제도를 발전시켜 세계에서 삶의 질이 가장 높은 행복국가군(群)을 만들었다.
남자의 미학이 실종된 한국
남자의 미학이 실종된 곳이 요사이의 한국이다. 막말, 떼쓰기, 폭로, 배신, 저질, 거짓말, 사기, 무례가 배운 층에서 더 기승을 부린다. 특히 미풍양속의 수호자여야 할 보수 지도층에서. 이순신(李舜臣)의 절대 고독, 박정희(朴正熙)의 초인적(超人的) 결단, 김유신(金庾信)의 장엄한 자주정신, 계백(階伯)의 결전(決戰) 의지, 이승만(李承晩)의 자존과 자유, 성삼문(成三問)의 절개, 안중근(安重根)의 인의(仁義) 같은 남자의 미학이 우리에게도 있긴 했었다.
지난 대선(大選) TV 토론에서 극적으로 드러난 요즈음 한국 정치인들의 교양 없음은 계급투쟁적 행동양식에다가 한글 전용(專用)으로 사고(思考) 체계가 흐트러지고 자주국방을 포기한 가짜 보수의 무능과 무책임이 더해진 결과일 것이다. 이스라엘과 바이킹 국가들의 예에서 보듯이 행복의 근원은 자유인으로서의 자존심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에 대한 존중심, 그리고 멋지게 사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다.
“영원히 살아남을 것은 죽은 이들 하나하나의 정정당당한 이름이다.”
행복은 결국 ‘우리가 우리를 지킨다’는 생각, 즉 총구(銃口)와 칼에서 나온다. 용감하게, 멋지게 산 이들의 얼굴을 보려면 경주박물관에 가면 된다. 세계 최강국인 당(唐)의 힘을 빌려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왜(倭)의 간섭을 배제했으며, 당이 신라까지 먹으려 할 때 “개는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개의 다리를 밟으면 물어야 합니다”(김유신)라면서 7년간의 나당(羅唐)전쟁으로 한반도를 한민족의 보금자리로 확보, 그리하여 동북아에 300년 이어지는 고대사의 황금기를 만들었던 주인공들의 당당하고 느긋하며 우스운 표정들이 돌에 새겨져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이다”라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