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에게서 반려목(伴侶木)을 얻었다>
내가 먹을 밥과 반찬 그리고 군고구마를 사러 가는 북평 오일장터의 구석에서 아주 작은 화원이 있다. 사람이 없는 시골에 왠 화원인가 의아했다. 작은 공터에서 육십대 쯤의 남자가 꽃동산을 만들며 놀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그 공터에는 그가 만든 샘플들이 몇 개 있다. 반 평 정도의 땅에 돌로 테두리를 하고 그 안에 흙을 채워 들꽃도 심고 분재 같은 나무도 심어놓았다. 나무 아래는 장난감 같은 나무집도 만들어 놓았다. 시골의 오일장터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집이었다. 외진 곳에 있는 그 화원은 늘 한산했다. 지나칠 때 보면 가게를 지키는 남자는 욕심이 없는 사람 같았다. 팔리지도 않을 것 같은 작은 꽃동산을 그냥 만들고 있었다. 어느 날 그의 가게에 들어가 차를 한잔 얻어 마신 게 인연이 되어 그와 알게 됐다. 그 자리에서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집에 빈 땅이 조금이라도 있으시면 꽃동산을 만들어 보세요. 그리고 거기에 맞는 작은 반려목을 심고 매일 물을 주면서 사랑해 보세요. 그러면 나중에 영혼이 편안해지실 겁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반려목을 키워보고 있습니다.”
반려동물이란 말은 들어도 반려목이라는 단어는 처음 듣는 소리였다.
“반려목이 뭐죠?”
내가 물었다.
“죽은 뒤에 재가 된 내가 묻힐 나무죠. 살아 있을 때 예쁜 나무 한 그루를 사서 반려 동물 같이 애정을 쏟는 겁니다. 수목장에 사용되는 나무같이 크고 우람할 필요가 없어요. 마당의 정원수 정도 아담한 크기면 됩니다. 내가 살아서 사랑해 주던 나무 밑에 들어가면 서늘한 기운이 도는 납골당이나 외진 산의 모르는 거대한 나무 밑둥에 들어가는 것보다 느낌이 따뜻하지 않을까요? 사람의 뼛가루를 비료액과 섞어 흙에 비벼 넣으면 거름으로도 아주 좋아서 뿌리가 그 성분들을 바로 흡수하죠.”
재미있는 발상이었다. 그렇게 하면 흙에서 난 인간이 바로 흙으로 돌아가고 어쩌면 예쁜 나무로 변할 수 있는 건 아닐까.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그가 정성들여 키웠다는 자그마한 소사나무 한 그루를 사서 집 앞에 심었다. 키가 내 허리 정도까지 오는 것 같았다. 그에게 부탁해서 그 앞에 장난감 같은 나무집도 한 채 만들어 놓았다. 내가 자라던 일본식 목조 가옥 모양으로 만들어달라고 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나의 반려목이 될 나무에게 물을 주며 사랑을 쏟고 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다큐멘터리 화면에서 보았던 법정 스님의 후박나무 집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의 수필집을 보면 그는 조계산 산자락에 불일암을 직접 지어 그곳에서 사색을 하고 글을 썼다. 이따금 암자 앞에 심은 후박나무와 대화하는 장면이 글에 나오고 있다.
스님은 죽은 후 재가 되어 그가 사랑하던 후박나무 아래로 들어갔다. 후박나무 앞에는 스님이 앉던 소박한 나무 의자가 놓여 있다. 그런 모습을 일반화하자는 게 시골 정원사의 아이디어인 것 같았다. 시골 정원사는 이렇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 놓았다.
“저는 강원도 깊은 산골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두 개의 길이 내 앞에 있었어요. 하나는 태백 탄광의 막장에 들어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깊은 산 속의 산판에서 일하는 거였죠. 저는 깜깜한 막장은 싫었어요. 그래서 산판에서 평생 나무를 자르고 가꾸는 일을 해왔어요. 그러다 반려목을 생각하게 됐어요. 여러 사람의 뼈를 한 곳에 묻으면 자연훼손이 될 수도 있어요. 도기에 담아 납골당에 두는 것도 습기가 차면 벌레가 생길 수 있습니다. 비료와 섞어 한 줌의 흙으로 만들어 반려목이 되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는 그 반려목을 만들어 보고 있습니다. 엄 변호사님께 보낸 그 반려목도 작아 보이지만 제가 30년을 공들인 거라니까요. 돌아가시면 제가 그 옆에 모셔드리고 나무도 돌보아 드릴 겁니다.”
나는 의외의 장소에서 반짝거리는 사람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를 통해 반려목이라는 지식도 얻었다. 나와 친한 해운회사의 사장을 지낸 친구가 있다. 그 친구 덕분에 평택항에서 사우디로 가는 LNG선을 얻어 타고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회사에서 인사부장을 했던 적이 있어. 그때 보니까 사람마다 각자 빛을 발하는데 그 색깔이 다른 거야. 하늘의 별 같이 각자 있는 자리에서 그 빛을 내게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
그의 말대로 어떤 사람이건 간에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반짝거릴 수 있는 것 같다. 굳이 별같이 빛이 나지 않아도 된다. 바위틈의 앵초같이 혼자 존재해도 된다. 인간이란 있는 그대로의 나로 존재하면서 자기 일을 하면 되는 게 아닐까. 그것으로 족하다는 생각이다. 하늘의 그 분이 조용히 내려다 보실 것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