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닷컴

  1. 칼럼
모진 우연(偶然), 반가운 우연 조선의 4대 문장가인 이식(李植)의 명구(名句)를 만나다, 무학산(회원)  |  2025-07-08
<가장 놀라운 우연은, 우연한 일이 전혀 없는 것>
  
  세상에는 ‘우연’이 많다. 어쩌면 세사(世事) 거의가 우연일 것이다. 좋은 우연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불행한 우연이 더 많으니 문제다. 오늘 조선일보에 이런 기사 제목이 있다.《건물 옥상서 10대 여성 추락…모녀 덮쳐 11세 딸 숨져》
  .
  기사는 자살이라 쓰지 않았지만 문맥상 자살로 보인다. 10대 여성이 상가 건물 옥상에서 행인들 위로 떨어져, 40대 어머니와 11살 딸, 20대 남성 등 3명 위에 덮쳤다고 한다. 11세 딸이 현장에서 숨지고, 뛰어내린 본인은 병원에서 숨졌다 한다. 그리고 40대 어머니는 의식불명이며 20대 남성은 어깨를 다쳐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자살자(自殺者)야 본인이 원한 일이지만, 영문도 모른 채 죽은 이는 무어란 말인가. 그 시각에, 그 장소를 걷게 된 우연으로 불귀의 객이 된 것이다. 모진 우연이다.
  
  저런 불행한 우연이 있는가 하면 우연히 읽어서 생활의 낙을 되찾게 되는 우연도 있다.
  
  또 내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글을 쓰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된 것이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포츠 탈장으로 수술날짜를 받아 놓고 있다. 무거운 것을 드는 운동 끝에 얻은 병이니 절대 무거운 것을 들지 말고, 걷는 것도 오래 걷지 말고 운동을 하지 말라고 들었다. 이 나이까지 입원이라곤 안 해 본 내가 전신마취에 척추마취까지 하는 수술을 받으려니 두렵다. 희한한 것은 두려움 속에서도 수술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다는 점이다.
  
  음주 다음 날 숙취에 시달리는 경우 이외에는 하루라도 근력운동 하기를 빼먹지 않은 사람이 맨손체조마저 못하게 됐다. 사실 운동을 남달리 좋아해서 매일 한 것은 아니다. 학생 때는 학교를 다니기 위한 수단이었던 운동이 노년이 되니 그게 생활의 낙(樂)으로 바뀌었고, 그 바람에 운동을 한 것일 뿐이다. 그 낙마저 잃었으니 산 것이 산 것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자연 짜증이 나고 뜻 모를 성이 난다.
  
  오늘 책장에서 먼지 앉은 책을 한 권 꺼내 읽었다. 조선의 4대 문장가인 택당 이식(李植 1584~1647)의《택당집(澤堂集)》인데 아무 뜻도 없이 그걸 골랐던 것이다. 거기에 이런 명구(名句)가 나온다.
  
  “아, 위장(胃臟)도 음식이 들어가야만 배부름을 느끼고, 폐장(肺臟) 역시 한 잔 술을 마셔야만 윤기(潤氣)가 돌게 되며, 피부로 말하더라도 솜옷을 입어야만 따뜻하게 되는 법이다. 그러니 어찌 유독 마음에 있어서만 채워지는 것이 없이도 충실하게 된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저 글을 읽고 무릎을 치며 뛸듯이 기뻐했다. 여태 내 ‘마음’에게 커피 한 잔 사주지 않은 나 자신이 미안하기도 했다. 그렇다. 세상에는 맨입에 되는 일이 없는데, ‘마음’이라고 해서 어찌 맨입에도 일을 척척 처리할 수 있겠나? 육신은 마음의 명령으로 움직이는 것인데 마음이 무언가 만족해야 육신도 편안하고 짜증도 성도 안 낼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의 ‘마음’에게 말했다.
  
  “요시.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오늘부턴 맨손체조를 하고 역기와 아령 들기를 단 한 세트라도 하여 마음, 너에에 기쁨을 주겠다.”
  
  탈장은 복근이 약해서 생기는 게 아니고 복압이 많이 올라가기에 생긴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다. 그래서 복압이 덜 오르도록 하기 위해 누워서 다리를 벤치 위에 올려놓고 가벼운 아령을 골라서 들었다. 이러고 나니 기분이 상쾌해지고 짜증낸 것이 부끄러워졌다.
  
  ‘마음’에게도 미식(美食)을 주고, 커피도 주고, 좋은 옷도 입혀 주어야 함을 380년 전 사람의 글을 통해 배웠다. 책장의 책 중에서 하필 ‘택당집’을 골라내서 읽게 된 것도 우연이고 하필 그 부분을 읽은 것도 우연이다. 이런 배움의 우연, 행운의 우연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문주란의 힛트곡 ‘돌지 않는 풍차’ 2절에도 “낙 없이 지내온 기나긴 세월은”이란 노래말이 있다. 생활에 낙(樂)이 없는 사람은 망자(亡者)거나 산송장일 것이다. 하필 총중에서도 ‘택당집’을 꺼낸 ‘우연’이 짜증 내지 않게 해 주었고 작은 낙이라도 되찾게 해 주었다.
삼성전자 뉴스룸
  • 글쓴이
  • 비밀번호
  • 비밀번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