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7.11) 조선일보에 이런 기사 제목이 있었다.《[유석재의 돌발史전] '일제 강점기'란 용어, 알고 보면 섬뜩해진다고?》
나도 ‘일제 강점기’란 말을 싫어한다. 북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우리보다 잘살거나 자유롭다면 북한 용어를 철벽으로 막더라도 막지 못한다. 북한 인민이 숨어서 우리 드라마를 보고 우리 가요를 몰래 부르듯, 언어문화도 부국(富國)에서 빈국(貧國)에 아래로 전파되는 법이다. 우리는 거꾸로 우리 것을 버리고 북한 용어를 쓴다. 어째서인가?
작년이든가 언제 한번, 어둑해 보이는 노파가 TV에 나와서 ‘일제 강점기’라 말하는 걸 보고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나이가 영 많아 보였는데 ‘일제시대’나 ‘왜정시대’가 아닌 일제 강점기라 말한 바람에 이상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저 노파보다 나이가 적은 나도 일제시대나 왜정시대라 말하고 자랐으며 입에 익었다.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사람이, 그 당시에는 없던 말, ‘일제 강점기’가 노파 입에서 나온 것은, 일제 강점기라 말하라고 TV 촬영진이 사전(事前)에 시켜서 된 일일까 하는 의심도 했다.
그게 아니고 자의로 일제 강점기라 말했다면 더 무서운 일이다. 노인은 언어생활부터 보수적인데 노인네가 저러면 북한에 대한 경계심이 이미 다 허물어졌음을 의미하겠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일제 강점기’를 퍼뜨리기로 작심. 그 결과가 오늘처럼 널리 퍼지게 됐지 싶다. “말은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지만 천 사람의 귀로 들어간다.”는 명언이 실천된 것이다.
일제시대, 왜정시대를 타자하면 저절로 일제 강점기로 변환된다. 내가 쓴 글을 컴퓨터가 강제로 다른 말로 바꾸는 데도 그걸 막지 못함에 무력감이 들고 울화가 치솟는다. 이렇게 강제 변환되도록 프로그램화해서 입력한 사람은 누굴까? 그는 대한민국의 국가적 자존심을 깎아 내리는데 성공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더니 ‘일제시대’ ‘왜정시대’를 타자하더라도 ‘일제 강점기’로 강제 변환되지 않게 하는 방법을 마침내 알아냈다. ‘일제’와 ‘시대’를 띄어쓰기 해 두었다가 조금 지난 후에 일제와 시대를 갖다 붙이면 ‘일제시대’라고 완성된다.
내가 쓰는 글에, 내가 사투리를 쓰든 표준어를 쓰든, 영어를 흔하게 쓰든 말든, 대한민국은 자유의 나라다. 자유의 나라에서 남의 글을 강제로 다른 용어로 바꾸는데 이러고도 우리나라를 자유국가로 분류할 수 있을까. 국민의 소소한 자유를 앗으면서, 어문 질서를 어지럽히면서, 북한 용어를 강제로 주입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백보 양보하여 ‘일제시대’가 낡은 용어일망정, 문학작품에도 토속어를 써야 더 어울릴 때가 있고 상말을 써야 격에 맞는 때가 있거늘 일제시대는 왜 쓰면 안 된단 말인가? 새로운 말을 써야 유식한 것으로 잘못 아는 우리네의 습관성으로 인해 ‘일제 강점기’가 더욱 급히 퍼졌을 것이다.
유석재 기자는 ‘일제 강점기’란 말은, ‘1945년 이후 지금까지 남한에 해당하는 시기, 바로 ‘미제 강점기(美帝强占期)’와 짝을 이루는 말이므로 더욱 문제가 된다는 취지로 말했다.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
“그러니까 ‘일제 강점기’가 끝나자마자 38도선 이남에 미군이 진주하면서 남한이 미국에 의해 점령 당한 ‘미제 강점기’가 시작됐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북한의 역사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유석재 기자는 “이걸 알고부터는 도저히 그 용어를 기사에 그대로 쓸 수 없어 여러 차례 교열 부서에 사정을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신문사의 교열부에 막혔다.” 뜻의 글도 썼다 그리고 이런 말을 했다.
“‘일제 강점기’에 해당하는 용어를 써야 될 문장이 나오면 ‘1910년대’ ‘1920년대’ ‘1930년대’ ‘1910~30년대’ ‘1940년대 초’나 ‘20세기 전반’ ‘한국사의 식민지 시기’ ‘국권을 상실했던 시기’ 등으로 표현을 살짝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말(용어)은 혁명과 변혁과 반란의 원동력이다. 그래서 마틴 루터 킹도 “말에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또 사기(史記)는 이렇게 가르친다. 집안이 가난하면 어진 처를 생각하고 나라가 어려우면 충신을 생각한다(家貧思良妻 國亂思忠臣). 유석재 씨가 이 시대의 충신이다. 유석재 같은 기자가 있음에 우리나라는 희망적이다. 저런 기자가 아홉 명만 더 있으면 좋겠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