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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모래시계를 빠져나가는 돈과 생명 ‘노자 돈은 떨어져 가는데 언제 데려가시렵니까?’ 엄상익(변호사)  |  2025-07-29
모래시계를 빠져나가는 돈과 생명
  
  일흔두 살의 할머니가 오천만 원이 들어있는 통장을 가지고 있다. 그게 전 재산이다. 그걸로 남은 여생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가스비를 아끼려고 전기장판 하나로 버티고 있다. 아무리 아껴도 모래시계 같이 돈이 빠져나간다. 피가 마르는 느낌이다. 늙은 몸으로 어디 가서 일을 할 수도 없는 처지다. 그렇다고 살아온 서민아파트를 팔 엄두가 나지 않는다. 어제 방송에서 우연히 들은 한 노인의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마지막을 궁핍 속에서 불안해 하며 살고 있지 않을까.
  
  대학교수이자 유명한 시인이었던 분의 노년의 시 중에서 ‘노자 돈은 떨어져 가는데 언제 데려가시렵니까?’라는 구절을 읽었던 적이 있다. 우리 집안도 그랬다. 할아버지는 칠십대 중반 병으로 누워있었다. 평생을 장사를 하고 다녔어도 돈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불안한 것 같았다. 돈을 얼마라도 꿔서 머리맡에 놓아달라고 했었다. 돈은 마음의 안정제이기도 한 것 같았다. 노년의 돈은 목숨이다. 그래서 바들바들 떨면서 쓰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한 할머니의 얘기가 기억의 언저리를 두드리고 지나간다. 자식의 집에 들어가 살던 그 할머니는 며느리의 눈치가 보였다. 그래서 평생 살아왔던 아파트를 처분하고 작은 셋집을 얻어 따로 나왔다. 차액을 현금으로 가지고 있게 됐다. 그 할머니는 며느리가 방문할 때마다 백만 원씩 주었다. 손자 손녀가 올 때마다 오십만 원씩을 주었다. 며느리와 손자 손녀들이 자주 왔다. 할머니는 자신을 위해서도 과감히 돈을 쓰기 시작했다. 병원 갈 일이 있으면 비싼 모범택시를 불러 기사가 부축하게 했다. 더러는 호텔에서 좋은 음식을 사먹었다. 이웃들에게 선물도 했다. 단골 지압사에게도 의료 침대를 사주었다. 아들은 그렇게 돈을 펑펑 쓰시다가 바닥이 드러나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했다. 할머니는 개의치 않았다.
  
  어느 날 그 할머니가 조용히 저 세상으로 옮겨갔다. 아들은 할머니의 장에 있는 통장부터 찾아보았다. 돈이 일억구천만 원이나 남아있었다. 그 할머니의 지압사로부터 들은 얘기다. 그는 할머니가 사준 지압용 침대를 진심으로 고마워하면서 그 할머니의 명복을 빌고 있었다. 그 할머니는 돈을 막 쓴 게 아니라 제대로 쓴 것 같았다.
  
  나는 서울에 가지고 있던 건물을 팔고 동해 바닷가의 건물을 사서 지내고 있다. 그 차액을 예금했다. 통장에 들어있는 돈이 내가 여생을 살아갈 비용이다. 통장의 돈과 여생의 남은 시간을 잘 쓰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돈 이상으로 중요한 건 시간의 잔고라고 생각한다.
  
  돈은 모래시계처럼 투명하게 빠져 내려가는 게 보인다. 그런데 남은 생명의 시간은 얼마나 되는지 가려져 있다. 그게 돈보다 더 중요한데 말이다. 그 할머니의 돈쓰는 방법을 배웠다. 딸이 동해로 내려올 때마다 돈을 준다. 빠듯한 살림에 기차비나 기름값을 딸이 쓰게 하기는 안타깝다. 며칠 전에는 갑자기 딸의 오래된 노트북이 떠올랐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낡은 노트북을 쓰고 있었다. 동해시의 전자제품 판매점으로 가서 노트북을 사서 택배로 딸에게 보냈다. 딸이 너무 좋아하고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돈은 이렇게 쓰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딸을 사주니까 고등학교 2학년인 손녀가 마음에 걸렸다. 손녀는 엄마가 쓰던 십년이 넘은 노트북을 쓰고 있었다. 손녀에게 가지고 싶은 노트북의 모델명을 카톡으로 보내라고 했다. 손녀는 사양하면서 대학에 입학한 후에 사달라고 했다. 내 품안에서 먹은 우유를 토하던 아기가 철이 들었다. 나는 이제야 돈을 제대로 쓰는 법을 배워가는 것 같다. 더 중요한 문제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딱 일년 전이었다. 땅거미가 질 무렵 여든아홉 살의 어머니는 이십층 아파트의 창문 앞에 정물같이 앉아 도로 위를 지나가는 차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서 “어머니” 하고 부르며 갸날픈 어깨를 만졌다. 어머니가 갈퀴같이 마른 양손으로 내 손을 잡고 쓰다듬으면서 혼잣말 같이 중얼거렸다.
  
  “내가 언제까지 내 새끼 손을 이렇게 만질 수 있으려나…”
  
  어머니와 함께했던 금 같던 남은 시간이었다.
  
  폐암으로 임대아파트에서 혼자 죽어가던 시인을 찾아가 만난 적이 있다. 그 시인이 이런 말을 했었다.
  
  “생명이 열 달 남았다고 의사한테 들었는데 벌써 여섯 달이 지났네요. 가난하게 살았어도 문인으로서의 삶은 행복했었습니다.”
  
  그는 죽기 전날까지 시를 쓰고 있었다. 남은 시간을 담백하게 살면서 내가 하던 일을 계속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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