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일 역사에서 남북한의 골 때리는 거짓말 하나를 또 발견했다. 일제시대 징용은 부자되는 관문. 제목 자체가 친일 소리 딱 듣기 좋은 소리이다. 하지만 사실 앞에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직접 느낀 것이다. 은퇴를 예견하여 8년 전에 경매로 농가를 산 적이 있다. 명당자리의 좋은 집을 너무 싸게 구입해 시기를 받을 정도였다. 이 농가가 있는 고을에서 부자는 세 집이었는데 그 한 집이었다고 한다. 이 고장 출신인 부녀회장을 통해서 이 세 부자의 내력을 듣고 놀랐다.
이 고장은 지금은 다리가 놓여있어 육지와 같지만 그 전에는 외진 섬이었다. 나갔던 자녀들이 돌아올 만큼 풍부한 어장과 흑염소로 유명한 곳이다.
좀 색다른 얘기이지만 탈북자 정착의 롤 모델로서 대통령 취임식 상단에 유일하게 오른 이은영 사장도 바로 곁에 있다. 필자와 동향인 이은영 탈북 사장은 전복과 미역으로 수십억 대의 부자가 되었다. 이런 천연 자원을 통해 고을에서 세 부자가 되었는가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갈비뼈가 아롱아롱한 서울 용산역 앞의 강제 징용상처럼 일본에 인부로 갔던 이들이 바로 세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이 의심된다면 이 증언을 한 부녀회장에게 즉시 연결시켜 드릴 것이다.
정말 반일과 관련해서는 북한에서나 남한에서나 뒤골 때리는 거짓말에 하나같이 놀랍기만 하다. 반일 독립 투쟁의 화신 김구, 김좌진, 홍법도는 살인 강도, 마왕, 독립군 말살 공산당원이라는 사실 앞에 충격이었다. 이번 80주년 8·15 행사 때 이재명 대통령이 말한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건국의 위대한 법통>인 3·1운동과 제2의 3·1운동인 <광주학생사건>도 사실 앞에 뒤골 때리는 충격이었다.
고종의 장례식을 계기로 벌어진 3·1운동은 일제의 독살이라는 거짓 소문을 타고 일어난 것이 사실이다. <광주학생사건>도 조선 학생이 일본 학생에게 시비 걸어 일어난 별치 않은 싸움(주먹 날린 박춘재 증언)이었다. 하지만 일본 학생이 조선 여학생을 희롱하고 조선 남학생의 코를 베갔다는 거짓 소문으로 타고 국내외에 반일 운동으로 비화 되었다는 것이 역사 사실이다.
당시 국가 수사 자료에 의하면 광주 학생 사건을 국내외에 확산시킨 주범은 허정숙을 비롯한 좌파 사회주의자들이라고 했다. 결국 3·1운동 다음가는 광주 학생 사건은 좌파 사회주의 독립 운동인 셈이다. 가짜 소문으로 발달 된 3·1운동과 광주 학생사건이 과연 대한민국의 법통으로 당당히 될 만한 사안이 되는가이다. <위대한 법통>들이 모두 가짜 소문을 탄 <거짓 법통>인 셈이기 때문이다.
위안부 사건도 사실 앞에 충격이었다. 여학생을 희롱했다는 사실 아닌 사실 가지고도 국내외까지 번져 졌는데 왜 위안부 문제로는 일어나지 않았을까. 광주 학생사건시 두각을 나타난 한국의 최초 열혈 여성 운동가 허정숙은 왜 이보다 훨씬 심한 여성 문제인 위안부 문제에 나서지 않았을까. 그것은 강제로 위안부를 끌어간 것이 아니라 돈을 받고 부모가 허락한 것이기 때문이다. 위안부로 가서 돈을 벌어 부자가 된 사례도 수두룩하다.
북한이나 남한이나 반일 하면 무조건 좋다고 악용하는 시대를 더는 지속시켜서는 안될 시기가 왔다. 일본을 죽어도 못 따라 잡을 것 같아서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하지만 이제는 국민소득이나 반도체를 비롯한 경제 기술적으로나 일본을 압도한 시대이다. 이에 걸맞게 의식 수준도 높아져야 진정 선진국으로 될 것이다.
서울 용산역 앞의 징용 동상에 이어. 이런 징용상이 대전과 부산에도 세워졌다. 위안부 소녀상 같은 효과를 노리고 사방에 세우는 것 같다. 하지만 실제 징용으로 갔다 온 당시의 실제 사진들을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이는 국사 교과서 연구소 이병환 소장이 역사 자료로 올린 사진들이 증명한다. 사실 이는 부산 국립 일제 강제 징용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사진들이다. 당시 징용을 가기 위해 치열한 경쟁이 있었다.
징용은 50대 1 경쟁률이었다. 징용으로 가기 전부터 혈서를 쓰고 탄원하였고 경쟁에서 탈락된 이들은 혈서를 쓰며 보내 달라고 무릎 굽히는 근거 기사가 있다(1942.3.5 매일신보). 그 당시 징용자들은 자랑스럽게 제복과 징용 배지와 완장까지 차고 가족과 또는 동료들과 찍은 살집 좋고 혈기 왕성하고 당당한 모습들이다(국립 부산 강제 징용 박물관에 소장된 징용자 가족사진과 동료들 사진).
그 당시도 거짓 소문도 있었다(1944. 2.8 매일신보). 15세 16살 소녀들이 징용에 끌려 갈 가 보아 시집을 가는 거짓 소문을 질타하는 기사이다. 징용 기준에 여자는 해당이 안된 것이 역사 근거이다. 하지만 반일 선동꾼들은 이런 거짓 소문을 강제 징용의 나쁜 근거 자료로 악용한 것이다.
필자의 두 번째 큰아버지 이형구도 홋카이도 탄광에 징용갔었다. 해방 후 필자의 부친 이포구 익산군 남로당 선전비서의 포섭으로 자위대장으로 있다가 유엔군이 북진하자 동생과 함께 월북하였다.
이형구 큰아버지는 일본 식이었는지 법 없이 살 정도로 정직 근면하셨다. 자식 7명을 낳아 키우셨는데 항상 배고프고 너무 가난했다. 동생인 필자의 부친 이포구가 활동성이 좋아 항상 도와 나섰다. 이형구 큰아버지는 혼자 말로 중얼거리시던 것이 특이하게 기억난다. 징용 가서 배고픈 적이 없었고 남는 돈을 집에 보냈는데 공화국(북한)은 그때보다 훨씬 못하다는 것이다.
먹을 건 없는데 인구가 이런 식으로 자꾸 늘어나다 보면 지구가 망하지 않을까 걱정도 하신다. 이는 하늘처럼 믿고 고향을 떠나 월북하여 왔던 공산 북한의 막막한 앞날을 예견하신 것이나 다름 없다. 공산당원으로서 어디 가서 이런 소리를 할 수 없으니 본능적으로 중얼거리시며 속풀이하시는 것 같았다. 결국 가난과 굶음으로 60을 겨우 맞으시고 돌아가셨다.
이형구 큰아버지에게, 반일 선동꾼들이 말하는 <징용>은 북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