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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둥이 기자의 짧은 회고록 ⑤ “포항 석유 경제성 없다” 책자 내고 해직 趙甲濟  |  2025-11-21

⊙ ‘포항 석유’ 기사로 정보부 조사 받아… 조사자는 10·26 때 경호원들 사살한 박선호

⊙ 정보부 압력으로 해직 후 프리랜서로 《월간중앙》에 글 쓰면서 잡지와 만나

⊙ 1차 해직과 복직, 그러나 유신 시절이 과연 언론의 암흑기였나?

⊙ 세계 최대 신발 공장 다니며 본 것

⊙ 이리역 폭발, 가장 한국적인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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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항 석유’ 소식에 들뜬 국민들의 모습을 담은 1976년 1월 16일자 《조선일보》.

 

1975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이 비공개 모임에서 ‘포항에서 나온 기름’ 이야기를 하고 이게 세모(歲暮)의 분위기에 실려 입소문으로 퍼져 나가고 있을 때 의문을 품은 사람은 석유 개발 전문 기자인 나와 청와대 중공업 담당 경제수석비서관 오원철(吳源哲)이었다.

  

오 수석은 호남정유에 보내 분석을 의뢰한 기름이 원유(原油)가 아니라 정유(精油)라는 보고를 받은 뒤 분석 보고서를 들고 김정렴(金正濂) 비서실장 방에 갔다. 박 대통령은 원유가 나왔다고 여러 사람들에게 자랑을 많이 하고 있는데 만일 원유가 아니라면 거짓말을 한 셈이 된다. 두 사람은 그래도 사실대로 보고해야 한다는 결심을 했다. 오원철 수석은 생전에 “경사 난 집에 재를 뿌리는 것과 같은 이런 보고는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가장 기분 나쁜 보고거리일 것”이라고 회고했다.

  

김 실장은 오 수석을 데리고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오 수석이 보고할 것이 있다고 합니다. 포항에서 나왔다는 기름은 원유가 아니라고 합니다. 오 수석, 직접 보고하시오.”

  

오원철 수석은 사실대로 설명했다. 박 대통령은 “김 실장!” 하고 부르더니 “중앙정보부장을 당장 불러!”라고 했다. 오 수석은 대통령이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회의용 탁자 정면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앞만 노려보고 있었다. 김 실장과 오 수석은 그 왼쪽에 앉아 무거운 침묵을 견디고 있었다. 오원철은 “처단을 기다리는 포로 신세 같았다”고 기억했다.

  

기나긴 15분이 흘렀다. 남산에서 출발한 신직수(申稙秀) 중정부장이 황급히 들어왔다. 인사를 하고 오른쪽에 앉았다.

  

 

오원철 “원유가 아니고 경유”

  

박정희 대통령은 인사도 제대로 받지 않고 “신 부장, 포항에서 나온 기름은 원유가 아니라면서! 어떻게 된 거야?”라고 했다. 오원철이 살펴보니, 신 부장은 갑자기 당하게 되자 대답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오 수석, 임자가 설명해!”

  

오 수석은 괜히 이런 악역(惡役)을 맡게 되니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포항에서 나온 기름이 진짜 원유라면 여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 좋아할 텐데…. 비밀공작 하듯이 석유 탐사를 벌이고 있는 정보부에 오 수석의 기술자적인 오기(傲氣)가 칼을 들이댄 꼴이 됐다.

  

오 수석은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하게 요점만 설명하기로 했다.

  

“석유가 나왔다고 해서 너무 기뻤습니다. 그 원유를 미국의 칼텍스에 보내 분석을 시켰습니다. 그 결과 원유가 아니고 경유(輕油)란 판단이 나왔습니다.”

  

보고서를 신직수 부장에게 넘겨 주니 수행한 간부가 받아 본다. 박 대통령이 먼저 이 어색하고 긴장된 분위기를 풀려고 했는지 오 수석을 향해서 “오 수석, 임자 생각은 어때?”라고 말했다.

  

“각하, 정보부에서 보고한 대로 시추 작업에서 채취된 기름이란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전문가가 아니라서 원유로 잘못 안 것 같습니다.”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것은 아니다”라고 변호하는 식의 답변을 한 셈이다. 박 대통령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신 부장, 포항에 석유가 있다느니 없다느니 말썽이 많으니, 이번 기회에 속 시원히 뚫어서 확인토록 하시오.”

  

그제야 오원철 수석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신직수 부장이 상처를 입지 않고 이 침통한 분위기에서 헤어난 것이 다행스럽게 생각됐다. 박 대통령의 절묘한 결심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박 대통령은 신 부장을 수행한 간부에게 말했다.

  

“앞으로 석유 탐사를 할 때는 오 수석과 자주 상의를 하라. 그리고 오 수석을 통해서 보고토록 하라.”

  

  

왜 정보부가 석유 탐사를?

  

1968년에 일단 석유가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던 포항 시추는 왜 재개(再開)되었으며, 그것도 왜 정보부가 그 일을 하게 되었는가?

  

1960년대 포항 석유 소동의 주인공이 정우진[후에 鄭盛燁(정성엽)으로 개명]이었다면, 1970년대의 주인공은 그의 큰형 정장출이었다. 정장출은 대단한 수완의 소유자였다. 5·16 전후 정당 간부 생활도 했고, 비록 낙선했지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본 경험이 있었다. 그는 학자들과의 이론 투쟁보다는 정치력을 동원해서 일이 되는 쪽으로 꾸미는 데 전념했다. 먼저 일본인 친구를 찾아내 자민당 중의원 다나카 다쓰오(田中龍夫)와 나카니시 이치로(中西一郞)를 소개받은 뒤 자신의 복안(腹案)을 전했다.

  

1975년 1월 12일 자민당 국회의원단 16명이 방한했을 때 훗날 문부상이 되는 다나카 다쓰오 의원이 당 대외경제협력위원장 자격으로 끼어 있었다. 다나카와 나카니시 의원은 정장출과 만나 포항 지역의 한일 공동 개발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2월 14일 일본 의원단은 박정희 대통령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두 의원은 포항 석유를 한일 양국이 공동 개발할 것을 제의했다. 박 대통령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고 한다. 이들은 다음 날 김종필(金鍾泌) 총리를 방문해서도 그 계획을 털어놓았지만 김 총리도 듣고만 있었다고 한다.

  

이 무렵 포항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고위 정치인들이 포항 광구(鑛區)를 빼앗으려 한다”는 탄원서가 올라왔다. 대통령은 김정렴 비서실장을 불러 탄원서를 주면서 “확인해 보라”고 지시했다. 확인 결과 진정 내용은 사실과 많이 달랐다. 김 실장이 대통령에게 보고하자 박정희는 화를 내는 대신에 이렇게 말했다.

  

“아무튼 석유가 나오긴 해야겠는데, 업자는 있다고 하고 기관에서는 없다고 하고, 게다가 모략까지 들어온다고 하니 참…. 아예 이해관계가 없는 정보부에 시켜서 포항 지역에 시추 탐사를 하도록 하시오. 미국에도 우리 학자들이 있으니 순수한 애국심만 있는 사람들을 동원해서 반드시 이해관계 없이 중립적으로 추진하시오.”

  

  

위장 회사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석유 탐사 특명을 받은 신직수 중앙 정보부장은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김정렴 당시 비서실장의 생전(生前) 회고는 이렇다.

  

“석유에 문외한인 정보부장이 이 일을 맡게 되니 난감한 표정이 되어 땀을 흘립디다. 그래도 박 대통령은 신직수 부장을 믿고 맡기신 거지요. 신 부장은 이해관계 없는 순수한 사람을 쓰라는 각하의 하명에 따라 시추 회사의 회장 격으로 정보부 육동창(陸東蒼·당시 육군 준장) 국장을 발탁했어요.”

  

1975년 2월 6일 정장출은 뜻밖의 사람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서울 광교 부근의 어느 다방에서 만난 사람은 육동창이었다. 육영수 여사의 친척이기도 한 육 국장은 그동안의 포항 시추 경과에 대해서 물었다. 정씨는 정보부가 고위층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고 있다고 판단했다. 정보부는 정씨에게 정부에 요구할 사항을 물었다. 정장출은 ‘시추기 두 대, 자금 2억원, 방해 요인 제거’를 건의했다. 육 국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신직수 정보부장은 3월 5일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말했다.

  

“하느님은 아마도 자원을 골고루 나눠 주었을 것이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기름이 어딘가는 숨어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이만큼 컸으니 우리 손으로 기름을 한번 찾아보자.”

  

박 대통령으로부터 특명을 받은 정보부는 포항 시추의 진행 책임을 김영수 기획조정실장-육동창 국장-최갑동(崔甲東) 과장 선으로 정했다. 현장에서 진두지휘를 할 사람으로 뽑힌 최 과장은 육군 공병 대령으로서 정보부에 파견 나가 있었다.

  

5월 31일부터 포항에서 중앙정보부 특별석유탐사반은 ‘동신산업공사’라는 위장 간판을 내걸고 정장출이 지목한 3개 지점 A, B, D 세 개 공(孔)의 시추 기공식을 올렸다. A, B공은 정장출, D공은 자문위원들의 의견이 많이 반영된 위치 선정이었다고 한다. 정보부는 상공부로 하여금 정씨 형제들이 갖고 있던 이 지역의 석유 개발권을 ‘실적이 없다’는 이유로 그 등록을 취소하게 했다.

  

  

정보부의 추궁

  

나는 포항 육상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퇴적층을 가진 동해 6광구에서도 소규모 기름층만 발견되어 경제성이 없다는 평가가 내려졌는데 빈약한 포항에서 기름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믿을 수가 없었다. 기사를 써야겠다고 하니 이철호(李哲昊) 사회부장은 정보부에서 언론사로 보도 금지 지침이 내려와 있다고 했다. “그래도 이런 특종을 놓치면 안 되니, 걸쳐 놓는 기사를 쓰겠다”고 했다.

  

1976년 1월 1일자 《국제신문》 사회면 머리기사 제목은 ‘石油여 솟아라, 浦項 일대 中生代 경상계 지층 탐사서 희망적 결론’이었다. 직설적으로 포항에서 석유가 나왔다는 언급은 없었지만 석유가 나왔다는 전제 하에 유전 가능성을 지적한 내용이었다.

  

나는 연초의 연휴 때 포항 시추 현장을 둘러보았다. 해양 석유시추선에 눈이 익은 기자에겐 매우 초라한 규모의 시추탑이었다. 시추 구멍 사이의 거리로써 배사(背斜) 구조의 크기를 대강 짐작하고 왔다.

  

1월 4일 회사에 출근하니 정보부 부산지부에서 좀 와달라는 연락이 왔다. 갔더니 “포항 석유 관련 기사는 쓰지 않기로 되어 있는데 무슨 의도에서 썼느냐”는 추궁이 있었다. 정보과장이 나를 수사과 직원한테 넘겨 진술서를 받게 했다. 몇 시간 지나 풀려나긴 했지만 정보과장의 정중한 태도가 인상에 남았다.

  

3년여 뒤 1979년 10·26 이튿날인 27일 아침, 경찰서 출입 기자이던 나는 전국에 지명 수배된 대통령 시해(弑害)사건 범인 자료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3년 전 나를 조사한 그 정보과장이 범인으로 지명 수배되어 있는 게 아닌가. 그가 박정희 대통령 경호원이자 자신의 해병대 친구이기도 한 안재송·정인형 두 사람을 사살한 박선호(朴善浩) 중앙정보부 의전과장(해병대 대령 출신)이었다.

  

  

박정희 “석유가 발견된 것은 사실”

  

1976년 1월 15일 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 때 혹시 기름에 대해 언급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전날 미리 포항 시추 관련 기사를 몇 꼭지 써두었지만,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석유 발견을 확인해 주지 않으면 신문에 게재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몇 시간이나 다소 지루하게 계속된 일문일답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도 석유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 순간 어느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포항 근처에서 석유가 나왔다는 설이 일부 국민 간에 퍼져 있으며 제주도 남쪽 7광구에도 많은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어 국민들이 대단히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이 기회에 사실 여부를 밝혀 주십시오.”

  

박 대통령이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지난해 12월 우리나라 영일만 부근에서 처음으로 석유가 발견된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기술진이 오랫동안 탐사한 후 3개 공을 시추한 결과 그중 한 군데에서 석유와 가스가 발견된 것이 사실입니다. 석유가 나온 양은 비록 소량이나 지하 1500m 부근에서,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석유가 발견된 것은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동안 KIST에 의뢰해 성분을 분석한 결과 양질의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매우 반가운 소식이고 고무적인 이야기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매장량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나 우리나라에서 석유가 나왔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경제성이 있을 만큼의 매장량이 있는지는 더 조사해 보아야 합니다. 이 지역에 대한 탐사 및 조사를 위해 연초부터 외국 기술자를 불러오고 필요한 장비를 들여오고 있습니다. 4~5개월이 지나면 그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외국 기술자들이 유망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나 땅 밑에 있는 문제로 아직은 무어라고 말할 수 없으며 더 조사해 봐야 할 것입니다. 좀 더 확실한 것을 안 후 발표하기 위하여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기름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기름이 나온다니까 국민들이 흥분하고 좋아하는 심정은 충분히 알 수 있으나 직접 파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므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과 같이 국민들이 번영된 조국 건설을 위해 근면·자조·협동으로 부지런히 일하고 열성을 다하면 하느님이 우리에게 좋은 선물을 가져다줄지도 모르니 조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석유의 마력

  

박정희 대통령은 원유가 아니란 보고를 받고도 그런 발표를 한 것이다. 나는 이 설명이 끝나자마자 회사로 뛰기 시작했다. 마감 시간을 늦추면서까지 석유 발표를 싣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우리 신문에 준비해 둔 기사를 넣기 위해서였다.

  

오원철 수석도 이 기자회견장에 배석하고 있었는데 석유 관련 질문이 나오자 불안했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의 설명을 분석해 보면 그는 포항 석유가 원유가 아니란 사실을 알면서도 원유가 발견된 것처럼 말했고, 마치 매장량이 많아 유전으로 성립될 수 있으리란 기대감을 주는 방향으로 대답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제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나 포항 석유 발견에 대단한 의미를 두는 발언이었다. 2024년 6월 당시 윤석열 대통령이 비슷한 방식의 발표로 동해 140억 배럴 유전의 꿈(대왕고래 프로젝트)을 띄웠으나 이번엔 언론과 국회가 견제를 하여 국민 세금이 털리지 않도록 했다. 하여튼 석유는 권력자들을 이상하게 만드는 마력(魔力)이 있다. 석유 개발 자체가 투자와 사기의 경계선에 있는 사업이다.

  

  

언론의 과장 보도

  

박정희 대통령의 이 발표에 기름을 부은 것이 언론의 소나기 같은 과장·조작 보도였다(작년 대왕고래 프로젝트 때도 마찬가지). 거의 모든 신문은 포항 석유 발견 발표를 1면 머리에 통단 컷 제목으로 보도했다. 이런 편집은 북한이 남침하거나 현직 대통령이 사망한 경우에나 사용한다.

  

박 대통령은 “석유가 나왔다”고만 했는데 거의 모든 신문들은 유전이 발견된 것처럼 보도했다. 퇴적층을 뚫으면 소량의 석유는 자주 나오지만 경제성이 있을 만한 유전 발견율은 2%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무시하고 “우리도 산유국(産油國)이 되었다”느니 “이제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될 날이 오고 있다”느니 하고, 어느 중앙지는 “포항 유전의 매장량은 일본 최대 유전의 열 배, 중동 최대인 멜라님 유전과 맞먹는 69억 배럴로 추정된다”고 백일몽(白日夢) 같은 기사를 쓰고 있었다. 이런 기사로 해서 주식 가격은 연일 폭등했다. 참고로 일본에서 당시 가장 큰 유전은 매장량이 약 6000만 배럴이었고, 중동에서 가장 큰 유전은 사우디아라비아의 가와르 유전으로서 매장량이 약 700억 배럴이며 멜라님이란 유전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의 석유 발견 발표 다음 날부터 포항 석유에 대해서 비관론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포항 시추에 관계했던 기술자들과 접촉하면서 언론 보도나 박 대통령의 희망 섞인 발표와는 다른 냉담한 견해를 듣기 시작한 것이다. 박 대통령의 언급에서 내가 느낀 것은 ‘아하, 이분이 석유를 무슨 우물 파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구나’ 하는 점이었다. 그는 지하 1475m에서 기름이 발견되었으니 더 깊게 파면 더 많이 나온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감을 갖게 된 것이다. 목표로 하는 지층에서 기름이 나오지 않으면 더 깊게 판다고 해서 기름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신문사에서 쫓겨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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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인쇄비 11만원을 들여 만든 조갑제 기자의 《한국의 석유개발》.

 

1976년 5월에 들어서자 포항 석유에 대한 2차 발표가 있을 것이란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5월 16일에 석유 축제가 열릴 것이란 말도 돌았다. 주가(株價)가 또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때 나는 논문을 완성했다. 《한국의 석유개발: 비공개 자료분석에 의한 전망과 제언》이란 제목의 원고지 250장 분량 소책자를 200부 찍었다. 인쇄비 11만원은 “제발 그런 위험한 짓 그만두라”고 말리던 아내가 댔다. 이 책자를 연구소, 관청, 언론사로 보냈다. 정보부의 지시에 의해서 모든 언론이 포항 시추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논문이라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 비슷한 것이 있었고, 약간은 아는 체하는 심정으로 논문들을 다 보내고 나니 후련하기도 했다.

  

《한국의 석유개발》 제5장에서 나는 포항에서 정보부가 뚫고 있는 시추공의 위치와 이미 밝혀진 지질 단면도를 결합해 가능한 최다량(最多量)의 원유 매장량을 계산해 보았다. 포항 석유로 한국이 석유를 자급자족하게 되었다느니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느니 하는 보도는 터무니없는 과장이라는 판단은 자연스러웠다. 나는 “포항 석유는 경제성이 없거나, 있어도 매장량은 적을 것”이라고 마무리했다.

  

보름쯤 뒤 정보부 부산지부에서 좀 보자는 연락이 왔다. 일본 《산케이신문》에서 내 논문을 인용해 “포항 석유의 경제성은 비관적이다”라고 기사를 썼다는 것이다. 정보부에선 내가 배포한 보고서를 모두 회수하라고 강요했다. 그들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논문을 되돌려주십시오”란 요지의 글만 써주면 자신들이 대신 회수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주었다.

  

그 보름 뒤 나는 근무하던 《국제신문》에서 쫓겨나 실업자가 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드라마틱하게 발표한 포항 석유가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정보부의 예민한 신경을 건드린 결과였다.

  

그 1년 뒤 일본에 가서 《산케이신문》 조사부를 찾았다. 서울 특파원이 쓴 문제의 기사는 ‘한국 포항 유전 소규모’란 제목으로 외신면 머리에 실려 있었다. 요지는 “석유 전문 기자인 《국제신문》의 조갑제 기자가 포항 석유와 관련된 시추 자료를 근거로 하여 포항 석유에 대해서 비관적인 전망을 했다”는 것이었다.

  

수년 전 언론학자 정진석(鄭晉錫) 한국외대 명예교수가 나의 운명을 바꾼 그 논문을 보관하고 있다는 연락을 해왔다. 정 교수는 기자협회 편집실장으로 있으면서 내가 쓴 글을 협회보에 자주 실어 준 인연이 있어 그에게도 한 부를 보냈던 것이다.

  

  

잡지와 만나다

  

1971년 2월 1일부터 기자 생활을 하다가 5년 4개월 만에 실직자가 되니 먹고사는 문제가 눈앞에 닥쳤다. 부산 수정5동 고지대 작은 집에서 부모님, 두 동생, 두 딸, 그리고 우리 부부 합쳐서 8명이 살고 있었는데 사내(社內) 결혼한 아내가 홀로 책임을 져야 하게 생겼다. 아내와 나는 “잘렸다”는 이야기를 집에는 비밀에 부치기로 하고 아침에 같이 집을 나와서 아내는 중앙동의 회사로, 나는 다른 곳으로 갔다가 저녁에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 3년 전 경주의 천마총 발굴 취재를 하면서 오래 머물렀고 마음도 편한 경주로 가서 여기저기 다니다가 돌아오곤 했다. 지나치는 동사무소의 직원, 파출소의 경찰관들이 평범하게 일하며 살고 있는 모습이 부러웠다.

  

한 달쯤 뒤부터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월간중앙》의 논픽션 공모를 보고 원고료를 목표로 부산의 동족부락(同族部落)이 도시화의 바람을 타고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를 추적하였다. 5년 전 《국제신문》에 연재한 적 있는 기사를 토대로 5년간의 변화 과정을 살핀 학술적인 기사였는데 입상(入賞)했다. 그렇게 해서 《월간중앙》에 고래잡이, 북양(北洋) 개척, 부산항 등을 소재로 한 긴 글을 잇따라 썼다. 《월간중앙》에선 프리랜서라는 직함을 붙여 주었다. 긴 글을 쓰니 좋았다. 사회부 기자 때 마감 시간에 쫓기면서 시간 단위로 쓰던 글이 아닌 심층 취재가 가능한 매체가 잡지임을 알게 된 것이다. 사회부 기자 때는 ‘일주일만 취재 시간을 주면 끝장을 낼 터인데’ 하는 소재가 많았는데 잡지는 한 달에 한 번 기사를 쓰니 특종을 위한 매체인 셈이었다.

  

그러나 부정기적인 원고료로 생활할 수는 없었다. 재취업을 시도했다. 동양통신이 외신부 경력기자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응시했다. 영어와 일어는 자신 있다고 생각했다. 1차 시험에서 합격, 면접시험을 치르고 내려왔는데 그사이 정보부가 동양통신에 ‘채용 불가’를 통보하였다. 일반 회사는 좋지만 언론사는 안 된다는 지침이었다. 자연주의적 인생관을 가진 친구가 ‘농사짓고 사는 삶’을 권유해서 농업 공동체 비슷한 곳에 함께 가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해 가을 국제상사(國際商事)에서 낸 경력사원 채용 공고를 보고 응시, 합격, 기획실의 계장으로 취직하는 데 성공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신발 공장에서

  

1976년 11월~1977년 10월 사이의 종합상사 근무는 새로운, 그래서 유익한 경험이었다. 종업원이 2만 2000명인 세계 최대의 신발 공장에 출퇴근하면서 수출 전선의 엘리트와 여공(女工)들을 두루 만났다. 그곳의 업무 강도(强度)는 밤낮이 없는 사건기자에 못지않았다. 토요일 오후가 되면 직원들이 사내방송에 귀를 기울인다. “내일 일요일은 휴무(休務)입니다”라는 발표가 나오면 사무실마다 환호성이 터졌다. 한 달에 쉬는 일요일은 두 번 정도였다. 밤 10시에 퇴근하면서 “야, 오늘은 일찍 간다”는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1970년대는 신발 공업의 전성기였고 여공애사(女工哀史)의 전설이었다. 부산 사상(沙上)공장 종업원 중 여공이 70%, 그 가운데 약 70%가 10대였다. 나의 일 중 하나가 대외적 홍보, 그리고 사장 연설문을 쓰는 일이어서 회사 고위층에서도 해직된 전직(前職) 기자를 잘 대해 주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산업 현장을 둘러볼 때마다 여공들을 아끼는 당부를 했는데 여공들이 밤에 다닐 수 있는 야간학교를 만들도록 지시했다. 이 일은 기획실에서 하게 되었는데 실장은 부산시청에서 간부로 일했던 강대신(姜大信·후에 정원종합산업 회장, 서울고 총동창회장 역임)씨였다. 그의 지휘하에 한 달 만에 학교 하나를 만들어 내는 저력을 보면서 ‘한국의 엘리트는 종합상사에 다 모여 있구나’ 하고 감탄을 했다. 나는 입학식에서 할 입학생 대표의 인사말을 대신 써주었는데 방송으로 중계된 연설이 눈물바다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박정희와 女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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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여공. 박정희는 모든 살아 있는 것, 특히 힘없는 존재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한 박정희 대통령은 특히 작고 약한 존재에 대한 동정심이 유별났다. 그는 여공 등 근로자들을 자식처럼 여겼다.

  

1999년에 산업자원부가 펴낸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역대 상공·동자부 장관 에세이집》에는 박충훈(朴忠勳) 전 국무총리의 회고담이 있다.

  

〈이것은 좀 감상적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너무나 인상 깊었기에 적어 본다. 어느 날 구로공단 작업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박정희 대통령이 몇 사람의 수행원들과 함께 공장을 둘러보는 과정에서 여남은 살 된 소녀가 제 옆에 대통령이 와 서있는 것도 모른 채 일하고 있었는데, 대통령께서는 바쁘게 놀리고 있는 소녀의 손을 내려다보다 덥석 그 소녀의 손을 잡고 “네 소원이 뭐냐”고 물었다.

  

엉겁결에 대통령에게 손목을 잡힌 소녀는 어리둥절했다기보다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 아닌가 해 겁에 질렸을 게 당연한 일이다. 대통령은 가볍게 떨고 있는 소녀에게 재차 네 소원이 뭐냐고 물었다. 주위에 있던 수행원들이 그 소녀에게 안심하고 네 소원을 말해 보라 했다. 그제서야 소녀는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른 또래의 아이들과 같이 교복(校服) 한번 입어 보고 싶다”는 대답이었다.

  

순간이었지만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대통령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을 것이다.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엄명을 내렸다. 그 엄명은 지체 없이 시행됐다. 공단에서 일하는 아이들이 원한다면 어떤 법을 고치고 또 절차를 바꾸어서라도 학교 다니는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기회를 주도록 하라는 명령이었다. 며칠이 지난 후 그 소녀가 아무도 보지 않는 밤길이었지만 교복 입고 가방 들고 학교 나갔을 때의 심정은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감격이요, 드라마였을 것이다.〉

  

외국 방송사가 신발 공장을 취재하겠다고 해서 내가 안내를 했는데 기자가 여공들의 손놀림을 찍으면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장면”이라고 감탄하였다.

  

  

다시 신문사로

  

1977년 여름 나는 회사 일로 처음 미국을 찾았다. 야구광(狂)의 취향대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야간 경기를 구경했다. 맨 꼭대기 좌석이었는데 옆에 앉은 검은 안경 낀 흑인이 라디오를 켜놓고 중계방송을 들으면서 구경하고 있는 게 아닌가. 가만히 보니 장님이었다. 볼 수 없는 야구 경기의 분위기와 소리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뉴욕의 타임스퀘어에 면한 카터 호텔에 체크인을 한 뒤 근처 유흥가를 구경하고 돌아오니 도둑이 들어와서 두고 온 가방을 열고 소형 녹음기 하나만 들고 간 게 아닌가! 여행을 하면서 구술받은 자료가 날아간 것이다. 경찰서에 전화로 신고를 했더니 경찰관을 보내겠다고 했다. 잠도 안 자고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귀국하고 며칠이 안 되어 정보부 부산분실에서 나를 담당하던 요원이 전화를 걸어 왔다. “작년 말에 김재규(金載圭) 부장으로 바뀐 뒤에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신문사로 복직(復職)해도 문제 삼지 않겠다”는 요지였다. 신직수 부장이 계속한 포항 시추는 아무 성과 없이 끝난 후였다.

  

봉급 면에선 국제상사 근무가 유리했지만 나는 복직을 결심했다. 직원들에겐 “나는 어차피 경기장에서 뛰어야 할 사람이다. 출장 정지가 풀렸으니 돌아가겠다”고 했다. 지나 놓고 생각하면, 박정희 대통령이 건설부장관이던 김재규를 정보부장에 임명한 일이 자신과 정권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친 것과 함께 나의 인생 항로도 변침(變針)을 하게 만든 것이다.

  

  

한국형 사고 원인의 공통점은 ‘황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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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 맞은 듯한 이리역 폭발사고 현장. 사고의 원인은 다이너마이트 상자 옆에서 촛불을 켜고 잔 호송원의 무신경이었다.

 

1977년 10월부터 나는 다시 《국제신문》 사회부 기자였다. 잠시 사회부장 보좌 역할을 하다가 서부경찰서와 보사(保社) 부문을 맡게 되었다.

  

그해 11월 11일 밤 전북 이리(現 익산)역에서 대폭발 사고가 터졌다. 다음 날 오전 현장에 도착한 나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지 비슷한 장면을 목격했다. 다이너마이트 40톤을 실은 화차(貨車)가 터진 곳에는 작은 연못만 한 구덩이가 파졌고 반경 500m 안의 건물은 거의가 무너졌다. 수십 톤 나갈 것 같은 열차 바퀴가 떨어진 곳은 폭심(爆心)에서 거의 1km 거리였다. 역에 정차해 있던 기관차와 화차 117량이 파괴되었다. 주택 675채는 완전 파괴, 1288채가 반파(半破). 철도 공무원 16명을 비롯하여 59명 사망, 1343명 중경상. 한국전 이후 최대 규모의 폭발이었다. 이리 주민들은 다른 도시에 사는 친지에게 전화를 하여 “전쟁이 일어난 것 같다. 그곳도 폭격을 당하고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사고 원인은 최근의 무안공항 사고에서도 확인된 지극히 한국적인 것이었다. 여기서 내가 ‘한국적’임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전(前)근대적이고 어처구니가 없거나 지극히 감정적인 이유란 뜻이다. 육해공(陸海空)의 다양한 사고를 많이 취재한 경험에 비추어 이런 경향은 시간이 흘러도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비행기를 타면 내릴 때까지 잠을 자지 못한다.

  

502명이 죽은 삼풍백화점 붕괴는 4층 건물에 1개층을 불법 증축하고도 모자라 무거운 에어컨 냉각탑을 올린 때문이었다. 304명이 죽은 세월호 침몰도 증축과 과적 때문이었다. 269명이 죽은 KAL 007기 피격 사건은 조종사가 자동항법장치(SNS)를 끄고 나침반으로 날았던 때문이었다. 179명이 죽은 무안공항 사고는 활주로 끝에 인접한 콘크리트 벽 때문이었다. 세월호와 삼풍 사고는 돈을 위해 안전을 희생시킨 경우이고 두 건의 항공 사고는 주의 부족이 원인이었다. 사고 원인의 황당성에서 한국은 특이하다는 이야기다.

  

이리에서 다이너마이트를 실은 화차는 역 구내에 정차시킬 수 없는데 40시간이나 대기시켰다. 화약 호송원인 신무일은 기다리다가 지쳐서 술을 퍼마시고는 화약과 뇌관을 가득 실은 화차 안에서 촛불을 켜놓고 잠들었다. 촛불이 쓰러져 화약 상자에 불이 붙었을 때 일어나 “만연히 닭털 침낭으로 불이 난 곳을 두드리다가 꺼지지 않자 문을 열고 나와 달아나 버린 것이다.”(대법원 판결문) 그는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만기 출소했다.

  

  

維新 시절이 과연 암흑이었나?

  

혹자는 사회부 기자로 돌아온 내가 정보부에 의하여 ‘반(反)정부 기자’로 찍힌 전력(前歷)을 의식하여 조심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전혀 그러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하는 게 정확하다. 내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언론의 분위기가 그랬다는 뜻이다. 1975~78년은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체제가 가장 안정적일 때였으니 언론 탄압도 가장 심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탄압의 피해자인 나는 그때나 그 후로나 ‘박정희 독재’란 말에는 동의하지 못한다. 그래서 한국 기자 중 유일하게 세 번 해직되고 세 번 복직한 경력을 쌓았지만 민주화 보상을 신청하지도 않았다. 세계에서 민주화 운동을 했다고 국가가 보상하는 나라가 또 있는지도 궁금하다.

  

나는 유신 때도 대통령, 군대, 정보기관을 제외한 정부, 여당, 공무원들에 대한 기자들의 비판은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더 가혹했음을 자신 있게 증언할 수 있다. 그때는 야간 통행금지가 있을 때인데 아침에 경찰서에 가면 통금 위반으로 잡혀온 사람들 명단을 확인하는 일이 하나의 루틴 체크였다. 공무원이나 새마을지도자가 걸리면 굳이 기사를 써서 골탕을 먹였다. 관공서에서 아침에 새마을 노래를 크게 트는 것은 수면을 방해하는 소음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기사도 썼다. 박정희 권력에 대한 이런 반항이 정의라고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했고 공무원들도 그런 기자들의 눈치를 보았다. 정권적, 안보적 차원의 언론 자유 제약이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전체 기사 중에서 극히 일부인 이를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유신 시대를 ‘암흑의 시대’로 규정하는 것은 관념의 유희일 것이다.

  

1970년대 대한민국이 중화학공업 건설을 매개로 하여 거대한 전환을 하고 있다는 역사적 의미를 현장을 누비는 기자들이 알았다고 하더라도, 언론의 권력 비판은 속성이니 별로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끔 동료 기자들이 정부에서 마련한 산업 시찰을 다녀와서 울산공단 등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마어마한 변화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이고, 눈앞에선 그런 변화에 따른 부작용부터 보였다.

  

1977년 12월 22일은 박정희 대통령의 숙원이자 민족사적 이정표인 100억 달러 수출 목표를 달성한 날이었다. 나는 이날에 즈음하여 수출 전선의 그늘인 산업 재해의 사례를 모아 사회면 머리기사를 썼다. 편집국에서는 “아무리 그래도 이런 날에”가 아니라 “이런 날일수록 이런 기사가 필요해”라는 평이었다.

  

내가 출입하는 서부경찰서 관내엔 원양어업 회사가 많았다. 북양에서 남태평양에서, 라스팔마스 근해에서 조난 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명태잡이, 참치잡이 어선이 가라앉으면 한꺼번에 수십 명이 죽는다. 실종 선원 수십 명의 얼굴 사진을 일일이 구해서 신문에 실어야 하는데 동사무소에 가든지 실종 선원 가족 집을 찾아가야 했다. 1980년대에 가면 이 폐습(?)이 언론에서 사라진다.

삼성전자 뉴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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