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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행이야기
설날 연휴에 드리는 조갑제의 여행 이야기 시실리, 인도, 노르망디 등 조갑제닷컴  |  2026-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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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브로브니크는 빨간 지붕과 하얀 건물 색이 파란 바다와 어우러진 이, 이탈리아 반도의 동해안 북쪽 도시 베니스와 많이 닮았다두 해양 도시는 역사에서도 닮은 점이 많다무엇보다도 두 도시 국가는 13세기부터 약600년 간 아드리아 해의 무역과 制海權을 놓고 경쟁한 라이벌 사이였다상업에 밝고 해군력도 강한 商武국가였는데 공화국이었다는 점에서도 같다두브로브니크의 옛날 이름은 라구사인데귀족중심의 공화정을 운영할 때도 베니스의 제도를 참고하였다.

바다로 돌출한 두브로브니크(옛이름은 라구사)는 해안 절벽을 따라 쌓은 성벽에 의하여 둘러싸여 있다
성벽 길이가 약2km, 너비가 600m쯤이다이렇게 작은 나라라구사가 16세기 말엔 보유 선박 규모가 유럽의 유수한 해양강국 베니스와 거의 맞먹었다라구사의 해양인즉 선원들과 무역상 및 외교관들은 세계 도처를 돌아다니면서 돈을 벌고 國益을 도모하였다.

16세기 초 인도(무갈 제국)에 진출한 한 라구사 사람은 이슬람 교도로 개종포르투갈의 공격에 저항하고 있었다같은 시기 다른 라구사 사람은 스페인 함대의 지휘관이 되어 리스본을 출항하고 있었다페루의 銀鑛에서 돈을 버는 라구사 사람도 있었다라구사(지금의 두브로브니크상인들은 발칸 반도를 휩쓸었다불가리아세르비아다뉴브 유역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에 거점을 만든 데 이어 영국에까지 진출하였다라구사 사람들은 해외 유학을 많이 했다스페인의 살라망카 대학과 파리의 소르본느 대학 출신들이 출세의 雙璧(쌍벽)이었다유럽의 외교가에선 라구사를 일곱 國旗를 가진 공화국이라고 불렀다그만큼 變化無常(변화무상)한 외교술을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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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매년 라구사의 귀족들이 보물들을 싣고 이스탄불로 가서 오스만 터키에 朝貢(조공)을 바치기는 했지만이는 일종의 보험료였다라구사는 달마티아(지금의 크로아티아 동쪽 아드리아 해안 지역)에 영향력이 큰 베니스헝가리오스만 터키 가운데 터키 제국의 宗主權을 인정보호를 받았지만 한 번도 독립성을 빼앗긴 적이 없다터키도 라구사의 내정에 간여하지 않았다.

라구사는 중세에도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였다그리스 정교가톨릭신교도이슬람유태교의 예배당까지 있었고 지금도 있다그러다가 보니 內政도 많이 開明(개명)되었다세계를 아는, 교양 있는 귀족들이 지배층을 이뤄노예무역과 拷問(고문)을 일찍부터 금지시켰다. 1347년에는 양노원이 만들어졌다외국인을 관료로 채용하였다불합격한 사람 중엔 피렌체의 마키아벨리도 있었다.

그들은 개방적 자주에 성공한 이들이다라구사 사람들은 슬라브 족이었지만 이탈리아의 先進 문명을 과감하게 수용하였다늘 베니스와 라이벌이었고 가끔 충돌도 있었지만 전쟁은 하지 않았다. 1699년 라구사는 주위에 있는 베니스 식민지와 離隔(이격)하기 위하여 주변 영토 일부를 오스만 터키에게 넘겨주는 편법까지 썼다.

이때 넘겨준 영토는 지금 보스니아의 유일한 항구 네움으로 변했다. 두브로브니크는 네움에 의하여 단절되어 크로아티아와는 陸續(육속)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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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베니스처럼 해외에 식민지를 만들지 않았다자신들의 분수를 지키면서 확장을 꺼렸다두브로브니크를 둘러싼 성벽 위를 걸어보면외부 세계와 자유롭게 통상하지만 우리 것은 단단히 지키겠다는 意志를 느끼게 해준다아름답지만 육중하기도 한 도시이다문화와 군사가 공존하며 번영과 규율이 균형을 이룬 도시이다이 도시의 600년에 걸친 평화와 자유와 번영을 보장해준 것은 善意가 아니라 성벽과 군함들이었다.

베니스가 게르만 족의 침입을 피해 해안지대로 피신한 사람들이 만든 도시이듯이 두브로브니크도 7세기 무렵 몽골 계통 아바르 족의 공격을 피하여 해안 절벽 지대로 避亂 온 이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도시이다라우스로 불렸는데절벽이나 深淵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라우스가 나중엔 라구스로 바뀐다피란민들은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비슷한 시기 크로아티아 사람들도 근처에서 도시를 건설하였다이 도시는 두브로브니크로 불렸다두 도시는 나중에 하나로 결합된다. 두 도시 사이에 있던 해협을 메웠는데 두브로보니크의 중앙로에 해당하는 플라카(스트라둔)이다베니스의 聖 말코 광장처럼 붐비는 곳이다.

12세기에 라구사 사람들은 렉터(Rector)라고 불리는 지도자를 선출하는 공화정을 채택하였다. 라구사는 비잔틴 제국의 영향을 받다가, 1205년 베니스가 라구사를 공격점령했다. 1358년 라구사 사람들은 베니스를 거부,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의 지배를 선택했다베니스와는 달리 새로운 지배자들은 內政엔 간섭하려 들지 않았다왕에 직속한 자유도시의 자격을 주었다달마티아 지방을 둘러싼 각축전으로 두브로브니크 공화국의 종주권은 자주 바뀌다가 나중엔 오스만 터키에 넘어갔다터키도 자율권을 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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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브로브니크 시민들은 세 계층으로 분류되었는데 잘 공존하였다. 정치권력은 자산가들이 잡았다. 16세기 중반 이 계층은 약1500명이었다그 일곱 배의 시민들을 다스렸다고 하니 인구는 1만 명 정도였다는 이야기이다. 18세가 된 지배층에 속하는 남자들은 공화국 총회 회원이 되고 이 회의가 의회소위원회그리고 지도자를 선출했다지도자의 임기는 한 달그 기간에 그는 사무실에서 살아야 했다.

서기 1272년부터 1808년 나폴레옹 군대에 정복될 때까지 두브로브니크는 市條例에 의한 통치가 이뤄졌다. 500년 이상 중단 없는 법치국가였던 셈이다두브로브니크의 경제는 무역을 중심으로 돌아갔다상인들은소금소금에 절인 물고기陶器섬유 등을 싣고 해안 산맥을 넘어 내륙의 보스니아 세르비아로 들어갔다여기서 여러 가지 광물은 구리 (납 등을 구할 수 있었고이를 배에 실어 유럽으로 수출하였다특히 중동 지역에서 비단을 수입이를 가공고급 섬유로 만들어 비싸게 팔아 돈을 벌었다.

두브로브니크 공화국은 9세기부터 배를 만들기 시작, 16세기엔 180척의 배와 5000명이 넘는 선원을 보유하였다인구 대비로는 세계 최강의 해양국이 된 것이다最盛期엔 두브로브니크 공화국 시민 중 여덟 명에 한 명꼴로 해외무역과 관련된 활동을 했다고 한다. 1670년대 네덜란드가 세계의 바다를 주름잡고 있을 때 두브로브니크는 70만 金貨의 가치가 있는 36000개의 마차 분의 화물을 실을 수 있는 180척의 배를 움직이며 지중해영국아프리카인도까지 돌아다녔다이 나라는 간단한 디자인의 튼튼한 배를 만드는 造船 기술이 뛰어나 여러 가지 배를 띄웠다. 18세기에 들어가면 두브로브니크는 세계 80개 도시에 영사관을 두었다당시 두브로브니크에 적을 둔 선박은 어선을 포함, 650그중 200척은 대양 항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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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으로 축적된 와 정치적 안정은 문화 예술그리고 보건 분야의 발전을 뒷받침하였다. 1317년 프란시스코 수도원 안에서 약국이 생겼다. 영업중인 약국으론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1377년엔 세계 최초의 검역소를 세웠다여러 나라 사람들과 물건들이 오고가니 전염병을 막아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쓰레기는 건물 뒤에 난 쓰레기 집적 라인으로 버리게 했다.

두브로브니크는 14, 15, 16세기 유럽에서 핍박 받는 유태인들을 받아주었다그들은 주로 상업에 종사하고의사로 일했다종교적 탄압도 받지 않았다그때의 시나고그가 지금도 문을 열고 있다.

두브로브니크 공화국은 많은 영웅이 아니라 좋은 제도를 가진 나라였다좋은 제도를 가진 나라는 영웅적 지도자가 없어도 法治에 의한 통치로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한다베니스도 그런 경우였다.

1667년 46일 대지진으로 두브로브니크는 폐허로 변했다8000 명의 시민중 5000명이 죽었다고 한다정박중이던 배도 많이 부서졌다거의 모든 건물이 무너졌다성당수도원교회정부 청사도 무너지고 수많은 문서들이 불탔다회복하는 데 오래 걸렸다지금 관광객들이 보는 건물들은 거의가 再建된 로마식 바로크 건물들이다외교와 정치를 잘한 두브로브니크는 전쟁으로 도시가 부서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으나 지진은 막을 수 없었다.

대지진 이후 內治도 어려워졌다사회 분열의 증상도 보였다결정타는 나폴레옹의 등장이었다. 1808년 나폴레옹 군대가 이 찬란한 도시국가의 600년간 이어져온 독립을 끝장냈다워털루에서 프랑스 군이 패전한 1814년 이후엔 오스트리아 제국 領 달마티아 왕국의 지배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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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세계대전이 독일오스트리아 제국의 패배로 끝나자 두브로브니크가 속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세르비아는 유고 왕국으로 연합독립하였다. 라구사에서 두브로브니크로 이름이 바뀐 것도 이때였다. 크로아티아는 2차 대전 때 나치 독일군에 점령당해, 괴뢰정권이 들어섰으나 이 나라 출신 티토의 게릴라 전이 성공自力으로 해방을 이루고, 소련의 간섭도 물리친 공산국가 유고연방의 일원으로 재기하였다티토의 사망과 공산권 붕괴를 틈타 슬로베니이와 크로아티아가 1991년 세르비아 주도의 유고 연방에서 탈퇴, 이를 막으려는 세르비아 및 몬테네그로를 주축으로 하는 유고 연방군과 독립전쟁이 터졌다. 1991년 12월 두브로브니크는 세르비아인이 주력인 유고연방군의 포격을 받아 수백 명이 죽고 많이 부서졌다. 이 포격은 세르비아 세력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95년 독립전쟁에서 이긴 크로아티아는 유럽연합 국가의 일원이 되어 안정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면적이 남한의 약55%이고, 인구는 400만 명을 간신히 넘고, 1인당 국민소득은 한국의 반 정도이다. 인종적으론 슬라브, 역사적으론 그리스-로마-이탈리아-베니스 문명권에 속해 40여년 간의 공산주의 지배 前歷에도 불구하고 文明 국가의 분위기가
완연하다.

지금은 한국인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가 되었다
크로아티아에 가는 가장 큰 이유가 두브로브니크 구경이다.

베니스처럼 관광객으로 밤낮 없이 붐비는 두브로브니크 구경의 핵심은 성벽 위 산책이다산의 능선을 따라 걷는 기분인데높은 데서 내려다 보는 빨간 지붕의 石造 건물과 바다는 그림 같다도시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다가 보면 이것을 가능하게 한 두브로브니크 공화국의 尙武실용정신을 놓치게 된다. 自主를 유지하였기에 자유를 누린 도시이다.

두브로브니크를 포함한 달마티아 지방(아드리아해의 동해안=발칸반도 서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뻗은 디나르 산맥 주변 사람들은 세계에서 키가 가장 큰 축에 든다.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사람들인데, 最長身國으로 알려진 네덜란드와 맞먹거나 더 크게 보인다. 남자의 경우 평균 184cm 전후이다. 男女 신장 차이가 크지 않은 듯하다.


이탈리아 폼페이-아말피-시실리 紀行 사진
_이탈리아 유적 및 풍경 화보

韓五洙(정신과 의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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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의 타오르미나 山頂 마을 몰라의 골목에서 발견한 MADE IN KOREA!(조갑제 사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 한국에서 교과서로 알았던 역사와 현지에서 알게 되는 역사가 달라 혼란에 빠진다. 이탈리아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두 文明-로마와 르네상스의 고향이지만 현재의 이탈리아라는 국민국가는 1861년에 반도가 통일되면서 建國(건국)되었으니 매우 젊다.

서기 5세기에 西로마가 무너진 후 19세기까지 1400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는 한 국가나 왕조 아래로 통합된 적이 없다. 여러 王國과 公國(공국)과 도시국가, 그리고 교황 직할령 등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런 분열상이 프랑스, 독일, 스페인, 비잔틴, 아랍, 노르만 등 외세의 침략과 개입을 불렀다.

이탈리아가 통일되기 전에 이 반도에서 가장 큰 나라는 나폴리 王國이었다. 로마 남쪽의 반도와 시실리를 다스린 나라였다. 이 왕국의 수도는 초기엔 시실리의 팔레르모, 나중엔 나폴리였다. 11세기 이후 '시실리 왕국', '두 개의 시실리 왕국', '나폴리 왕국' 등으로 불렸다.

나폴리 이남의 이탈리아 반도와 시실리는 고대 문명이 꽃핀 그리스, 이집트, 중동, 지중해와 인접하여 늘 유럽 文明의 중심에 있었다. 특히 '지중해의 진주' 같은 시실리는여러 번 다양한 민족과 文明이 거쳐가고 섞이고 쌓인 곳이다. 시실리 여행을 하면 장대하고 풍요로운 자연을 배경으로 명멸해갔던 여러 민족이 남긴 문명의 다양성과 복잡성에 경탄하면서 역사 앞에서 겸허한 자세를 갖게 된다.

기원 전 8세기부터 그리스 사람들이 시실리에 건너와 동쪽의 시라쿠사 등 도시국가를 만들었다. 아프리카 北岸(북안,지금의 튀니지)에 살던 카르타고 人들도 몰려 와 서쪽에 정착하였다. 시실리의 州都(주도)인 팔레르모는 카르타고 사람들이 개척한 식민지였다. 카르타고-로마의 결전인 포에니 전쟁을 거치면서 시실리는 로마 지배로 넘어갔다. 시실리는 지금이나 그때나 농산물과 수산물 생산량이 많았다. 5세기부터 西로마 제국이 무너지는 틈을 타서 라인강 동쪽에 살던 게르만족이 침범한다. 게르만족의 선두 주자 반달족, 고트족이 이 섬을 점령하고 약탈하더니 6세기엔 지금의 이스탄불(당시는 콘스탄티노풀)에 수도를 둔 東로마제국(비잔틴)이 시실리를 기독교 권으로 탈환하였다. 9세기 초부터는 중동을 석권한 사라센(이슬람 세력) 군대가 아프리카로부터 이 섬을 공략하기 시작, 827년엔 팔레르모를, 878년엔 시라쿠사를, 902년엔 타오르미나를 함락시켜 全島(전도)를 이슬람화한다. 이슬람 지배자들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고 상공업을 장려, 시실리는 中世(중세)암흑기에도 번영하기 시작하였다.

11세기부터 바이킹의 후예들인 노르만 인들의 시실리 공략이 시작된다.

이탈리아 남부와 시실리를 통합한 왕국을 처음 만든 이들은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서 원정 온 노르만 전사들이었다. 노르만인들은 9세기 말부터 노르망디에 정착한 바이킹족의 후예들이었다. 바이킹족은 지금의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에 살던 미개한 게르만族으로 약 300년간 유럽의 全域(전역)을 습격하면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등지에 정복왕조를 세웠다. 몽골-투르크족이 기마군단을 앞세워 중국, 한반도, 일본열도, 중앙아시아, 中東에서 여러 나라를 만들고 부수고 하였던 것과 비견된다. 바이킹족은 뛰어난 항해술을 이용하였고 몽골-투르크족은 기마군단을 앞세운 점이 다르다. 기동성이 이들 정복민족의 힘의 원천이었다. 이들은 싸움도 잘 했지만 소수가 다수를 효율적으로 지배하는, 통치, 행정술이 뛰어났다.

1066년 노르망디의 윌리엄公은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에 상륙, 해스팅스 결전에서 잉글랜드 군을 격파, 영국(잉글랜드, 아일란드 등)을 정복하고 王이 된다. 노르만 세력은 그 후 수백 년간 英佛(영불)에 걸친 영토를 갖게 되는데, 100년 전쟁을 통하여 정리된다. 노르만의 영국정복 이전에도 영국은 덴마크의 카누트 대왕에 의하여 통일된 적이 있다. 11세기 초 카누트 大王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영국에 걸친 바이킹 대제국을 세웠으나 오래 가지는 못하였다.

노르만의 영국정복은 그 후 영국의 운명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유럽 문명권에서 멀어진 北海 국가에서 탈피, 유럽 文明의 일원이 되고, 佛語의 영향을 많이 받은 영어가 만들어지고 좋은 제도가 뿌리를 내려 富國强兵(부국강병)의 길을 걷는다.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아이슬랜드가 100% 바이킹 국가라면 핀란드는 30%, 영국은 50% 바이킹 국가라고 부를 만하다.

노르망디 지역에 정착한 바이킹족은 이곳에서 프랑스의 고급문명과 기독교를 받아들여 실력을 기른 다음 2차 원정에 나선다. 영국 정복은 설명한 대로이고, 거의 같은 시기에 오트빌 家門(가문)의 노르만 戰士(전사)집단이 나폴리 이남의 이탈리아 반도와 시실리를 점령한다. 이들을 이끈 루제로 1세가 교황으로부터 시실리王 및 캄파니아(이탈리아 남부)公으로 公認(공인)된 것은 1130년이었다. 루제로(영어로는 로저) 2세(서기1095~1154)는 정복과 행정을 결합시켜 시실리 왕국을 유럽에서 가장 번영하는 나라로 만들었다. 바이킹 사람들이 그렇듯이 노르만 지배세력도 여러 종교, 민족,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한 바탕에서 실력 위주의 개방적이고, 실용적이며, 관용적인 통치를 했다. 이슬람과 기독교도들이 공존하고 아랍 사람들과 그리스 사람들과 유대인들까지 시실리 왕국에선 큰 차별을 받지 않고 살 수 있었다.

노르만의 루제로 1세가 팔레르모를 점령한 1072년부터 프랑스 안주家가 시실리 왕국의 통치권을 장악한 1268년까지의 약200년간은 노르만 王朝(그 피를 이어받은 독일의 스와비아 왕조 시절도 포함)의 시실리 지배 기간이다. 당시 유럽의 가장 역동적인 문명국가는 프랑스와 시실리 왕국이었다. 시실리 왕국의 수도 팔레르모는 스페인의 코르도바와 함께 유럽에서 가장 국제적인 도시였다. 나중엔 노르만의 영국이 중심국가로 떠오르지만 12세기 당시엔 아직 변방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미개하였던 바이킹족이 소수로서 다수를 다스리면서 가장 찬란한 기독교 文明을 건설한 것은 세계사의 한 기적이다. 10세기까지만 해도 바이킹족은 원시종교를 믿고 부족장이 죽으면 殉葬(순장)을 했다.

시실리의 노르만 왕조에는 다섯 명의 名君(명군)이 있었다. 루제로 1, 2세, 굴레모 1, 2세, 그리고 페데리코 황제. '

'로마인 이야기'를 쓴 일본인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 멸망 후의 지중해 세계'(한길사)에서 노르만인이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시실리를 탈환한 이후 취한 점령 정책을 감동적으로 서술하였다.

<(노르만 정복왕) 루제로는 패배자가 된 아랍 유력자들과 그 가족을 죽이지도 않았고 노예로 삼지도 않았다. 남이탈리아 내륙지방에 땅을 주고 농장주로서 살게 했다. 아랍인 병사들을 노르만-시실리 군에 편입하였다. 아랍의 학자도, 상인도, 기술자도 농장경영자도 남았다. 서로 다른 신을 믿는 사람들이 상대의 신앙을 존중하며 共生(공생)하는 사회가 실현된 것이다. 노르만 인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랫동안 사라센 해적에게 피해를 본 남이탈리아 사람들과는 달리 유럽의 북쪽 끝에서 온 노르만 사람들에게는 이슬람교도에 대한 원한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랍인 지리학자 이드리시는 이 시기의 팔레르모를 이렇게 묘사하였다. <팔레르모만큼 장대하고 화려한 건축물이 가득 찬 도시는 없고, 팔레르모의 정원만큼 아름다운 경관도 없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사라진 여러 민족과 종교와 문명의 융합을 보여주는 건축물이 시실리엔 많다. 팔레르모 근교에 있는 몽레알레 대성당은 노르만 왕조의 굴레모 2세가 만든 것인데, 노르만-비잔틴-아랍식이 혼합된 건축물이다. 몽레알레 대성당은 13세기 말에 단기간에 세워진 것인데, 굴레모 2세가 적극적으로 후원한 덕분에 공사기간이 단축되었다. 굴레모 2세는 라틴어, 아랍어 등에도 능통하였고, 인문적 교양이 풍부한 온후, 관용, 경건한 성품의 왕이었다.

이 성당 건축엔 정치적 고려가 있었다. 교황권과 왕권이 격돌하는 중세였다. 교황권의 대리자인 팔레르모 대주교는 굴레모 왕을 견제하고 있었다. 대주교가 관리하는 팔레르모 대성당도 대단한 건물인데, 왕이 나서서 같은 권역 안에 또 다시 대성당을 지은 데는, 대주교의 권한을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몽레알레 대성당 벽면엔 6340 평방 미터에 걸쳐 비잔틴 풍의, 성서 이야기를 소재로 한 모자이크 그림이 장식되어 있다. 천지창조에서부터 베드로의 십자가刑까지 수많은 에피소드를 그린 것이다. 중세 때는 일반 신도가 성경을 읽을 수 없었으므로 신부가 이 그림들을 보여주면서 설명을 하였을 것이다. 성당을 '돌에 새긴 성경'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이 성당에서 실감할 수 있다. 굴레모 2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棺을 이 성당에 모셔 권위를 더했다.

시실리 왕국의 노르만 왕조는 150여년 만에 代가 끊어지고, 政略(정략) 혼인 관계에 의하여 1190년 독일 스와비아 왕조의 하인리히 6세가 시실리 왕이 된다. 노르만 왕조의 마지막 왕은 굴레모 2세(영어론 윌리엄 2세)인데, 아들이 없어 고모 코스탄자(할아버지 루체로 2세의 딸)를 후계자로 지명한다. 코스탄자는 독일 스와비아 왕조 출신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바바로사의 장남 하인리히와 결혼하고, 바바로사가 죽자 하인리히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하인리히 6세) 및 시실리 왕으로 등극했다. 코스탄자는 아들을 낳는데, 그가 중세 유럽의 名君 중 한 사람인 페데리코 2세(영어로는 프레데릭, 독일어로는 프리드리히 2세)이다.

하인리히 6세는 독일에 체류중 시실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왔다가 1197년에 병으로 급사했다. 독일과 이탈리아 북부 및 지금의 프랑스 동부와 헝가리 등지를 관할지역으로 삼았던 신성로마제국은 중앙집권화된 적이 없었다. 느슨한 제후국 연합체였다. 이 신성로마제국에 대하여 프랑스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신성하지도, 로마답지도, 제국같지도 않다'고 조롱한 바 있다.

11~12세기 신성로마 제국 황제는 교황과 늘 갈등하였다. 교황은 유럽 기독교 세계의 정신적, 종교적 수장인데, 세속 권력 면에서도 首長(수장) 노릇을 하기를 원하였다. 반면,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교황의 정신적 지도력을 인정하면서도 관할지 교회에 대한 통치권, 특히 인사권을 확보하려고 했다.
당시 교회, 수도회 등 유럽 全域(전역)에 모세혈관처럼 퍼져 있던 교황 지휘하의 가톨릭 조직은 단순한 종교집단이 아니었다. 주교들은 영주처럼 땅을 소유하고 사법권 및 군대를 보유한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교황에 복종할 뿐 세속권력으로부터는 독립성을 유지하려 했다.
초기의 神聖로마제국 황제는 교황과 주교들을 멋대로 교체할 힘이 있었지만 11세기에 들어서면 교회 안에서 개혁운동이 일어난다. 교회 입장에선 세속 권력이 성직자들을 임명하는 한 부패를 청산할 수 없다고 믿었다. 황제가 자격 없는 자들을 돈을 받고 주교 등 성직자로 임명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황제 입장에선 막대한 재산을 관리하는 고위 聖職(성직)에 측근들을 임명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래야 자기 派(파) 사람들을 교회 기관에 취직시킬 수 있었다. 중세 유럽의 가장 큰 행정조직은 가톨릭 교회였고, 일자리도 가장 많았다. 주교 임명권은 수많은 일자리를 만드는 인사권을 잡는 것을 뜻했다.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이 문제에서만은 타협이 어려웠다.

1059년 교황측은 종교회의를 열고, 교회법에다가 추기경 회의가 교황을 선출하도록 규정하여 황제의 영향력을 차단할 수 있게 하였다. 이렇게 뽑힌 교황은 황제의 측근이 아니라 가톨릭 세계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교황 측은 같은 해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대결할 수 있는 장치를 더 만든다. 루제로 지스카드가 지휘하는 노르만 戰士 집단이 이탈리아 남부를 정복한 것을 公認(공인)해주는 대신 그들로부터 교황에 대한 충성 서약을 받았다. 프로 戰士집단인 노르만 기사단의 뒷받침으로 황제의 독일군과 대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1073년 개혁정신에 불타는 그레고리우스 7세가 새 교황이 되었다. 1075년 그는 드디어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를 상대로 대결을 선언한다. 종교회의를 소집, 세속권력, 즉 황제가 주교를 임명하는 것을 금지시킨 것이다. 이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하인리히 4세와 그 추종자를 파문하겠다고 경고하였다. 황제가 거부하자 교황은 황제를 파문하고, 황제에 대한 영주들의 충성서약이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南독일의 親교황측 영주들이 들고 일어나, 파문이 해제되지 않으면 황제를 폐위시키겠다고 결의하였다. 하인리히 4세는 일단 전략상 후퇴를 결심하였다. 1077년 그는 눈 덮인 알프스 산맥을 넘어와 교황이 묵고 있던 北이탈리아의 카노사 城(성)에 도착했다. 이때의 모습을 그레고리우스 7세는 이렇게 묘사하였다.
<그는 아무런 敵意(적의)도 불손한 마음을 보이지 않고서, 자진하여 수 명의 종들을 데리고 내가 묵고 있던 카노사에 왔다. 그는 왕의 복장을 다 벗고는 3일간 성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울면서 再考(재고)를 호소하였다.>

이를 보고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파문을 해제하고 그를 교황에 복직시켰다.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알려진 이 에피소드는 황제권에 대한 교황권의 승리를 상징하지만 그 후의 사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하인리히는 독일로 돌아가자마자 보복에 나선다. 그에 반기를 들었던 영주들을 처단하고 독일 전체에 대한 통치권을 회복한 것은 1080년이었다. 그는 독일에 있는 교회 성직자 회의를 소집,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폐위를 결의하게 하고, 이듬해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그레고리우스를 쫓아내고 北이탈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재확인하기 위한 원정이었다. 3년간 이탈리아에선 교황군과 황제군이 死鬪(사투)를 벌였다. 황제군은 1084년에 수개월간 로마를 점령, 교황을 추방하였다. 이때 남쪽에서 노르만 援軍(원군)이 도착, 황제군은 로마에서 물러났다. 로마를 점령한 노르만군은 시내를 약탈하였다. 로마 사람들은 화가 나서 그레고리우스 교황을 미워하게 되었다. 노르만군이 물러나자 교황도 더 머물 수가 없게 되어 노르만이 지배하던 살레르노로 피신, 다음해(1085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하인리히 4세도 勝者(승자)가 아니었다. 친교황측 영주들이 독일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후임 교황들은 이들을 지원하였다. 황제는 이탈리아에서 얻은 성과를 유지할 수도 없었다. 1106년 그는 파문 당한 상태에서 사망하였다.

1122년 독일의 보름스에서 교황과 황제측이 타협했다. 독일에서 성직자 선출은 교회법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다만, 황제나 황제의 대리인이 선출시 참석,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황제와 교황의 대결에서 일단 승리한 쪽은 교황이었다. 황제의 성직자 임명권을 제한하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신성로마제국의 역대 황제들은 교황과 대립, 이탈리아 문제에 개입하느라고 정작 본거지인 독일 내부의 통치는 소홀히 하였다. 프랑스와 스페인, 그리고 영국에선 중앙집권적 왕권이 강화되어 가는데도 독일은 여러 도시와 공국으로 분열되어 통일국가를 만들지 못하였다. 그런 사정은 이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유럽에서 정치적 후진국이 되는 길이 열린 셈이다.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이탈리아 통일을 기도한 이가 페데리코 2세이다. 이탈리아 통일은 교황과 교황 직할령을 정리하지 않으면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다. 페데리코와 교황은 정면충돌 코스로 달리지 않을 수 없는 구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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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 노토의 바로크식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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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 근방 해안엔 10세기 무렵 해양도시였던 아말피가 있다. 피사, 제노바, 베니스와 함께 4대 해양 公國이었다. 지금 이탈리아 해군 깃발은 이 네 도시국가의 紋章(문장)을 합성한 것이다. 아말피는 절벽면을 수평 공간처럼 활용하여 도시를 건설하고 미로를 만들어 사라센 해적의 침략에 대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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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나폴리 근교의 폼페이는 기원 후 1세기에 베수비오스 火山이 폭발, 묻혀 있다가 발굴되었다. 사진은 당시의 재판소 건물이다. 이 도시에서 가장 큰 公共건물이다. 로마의 유산이 法治인데, 法의 권위를 상징하는 큰 건물을 지어 주민들을 심리적으로 다스렸음을 엿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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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의 활화산 에트나의 頂上부근이다. 흘러내린 용암이 굳은 바위 넘어 눈 덮인 꼭대기에서 연기가 나오고 있다(趙甲濟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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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 州島 팔레르모 근교에 12세기 시실리 王國(나폴리 남쪽도 통치)을 다스리던 노르만(바이킹 후손) 왕이 건설한 '몽레알레' 대성당과 수도원의 회랑이다. 노르만-아랍 혼합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회랑과 정원은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을 연상시킨다. 이 성당과 수도원을 지을 때 아랍 기술자들을 썼기에 건물 양식과 구조에 아랍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노르만 왕조는 아랍이 다스리던 시실리를 빼앗았지만 아랍, 유대인, 그리스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信敎의 자유도 허용, 중세 유럽의 가장 번성하는 나라를 만들었다. 몽레알레 성당 안엔 6000평방 미터의 壁面(벽면)에 성경 이야기를 모자이크로 장식하였다. 성당을 흔히 '돌에 새긴 성경'이라 부르는 것은, 중세에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성당의 벽화를 교육 자료로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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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랑의 기둥인데, 기둥에 붙여두었던 금박이 뜯겨 나간 흔적이 있다. 기둥 머리의 조각이 다 다르고 정교하다. 이런 회랑은 수도사들의 산책로로 이용되었다.

바이킹과 노르만족의 특징

로마인마케도니아인게르만족아랍족몽골족투르크족마자르족불가르족바이킹족영국인포르투갈인스페인네덜란드인프랑스인의 공통점은 여러 국가를 만들고여러 국가를 무너뜨리고여러 국가를 植民地化하였다는 점이다이들은 尙武(상무)정신과 정복욕이 강하고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군사기술이 있었다세계사의 지배민족이라고 부를 만하다지배민족을 대별하면 몽골-투르크-흉노-아랍족과 같은 유목민족바이킹-영국인과 같은 해양세력그리고 그리스-로마 같은 잘 조직된 문명세력으로 나뉜다유목민족은 騎馬(기마)군단해양세력은 항해술이 우수한 군사력의 핵심이었다.

정복 전쟁엔 능하지만 통치엔 무능한 세력이 있는가 하면 정복에도
통치에도 유능한 세력이 있다싸움도 잘 하고 다스리는 데도 유능한 민족은 장기간 계속되는 나라와 제도를 만들었다현재의 국가 수준을 기준으로 하면 바이킹게르만족영국인들의 정복과 통치가 성공적이었다는 평을 받는다특히 바이킹과 노르만(프랑스에 정착한 바이킹)이 점령하고 세운 나라들의 목록은 호화찬란하다.

1. 바이킹이 세운 나라 또는 王朝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아이슬란드키에프 러시아.
2. 노르만이 정복하여 발전시킨 나라영국아일랜드시실리 왕국핀란드.
3. 노르만 사람들이 개척한 식민지미국의 루이지애나뉴올린즈캐나다 퀘벡 주 등.

넓은 의미의 게르만족에 드는 바이킹과 노르만족이 세우거나정복하여 발전시킨 나라들은 거의가 과거나 지금 一流국가들이다지금의 노르웨이덴마크핀란드스웨덴영국아이슬란드과거의 시실리 왕국키에프 러시아는 지금 러시아의 母胎(모태)이고노르만이 정복한 영국은 미국호주뉴질랜드를 개척하였다바이킹은 가히 一流(일류)국가의 産母(산모)라고 부를 만하다. 9세기까지는 유럽의 가장 후진된 종족이었던 이들이 세계의 지배민족으로 변신한 과정은 신비하기까지 하다.

9세기부터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 정착하기 시작한 바이킹족은 프랑스 왕으로부터 자치권을 얻어 노르망디 공국을 세웠다이들은 주로 덴마크와 노르웨이에서 온 바이킹들이었다그들은 프랑스의 先進문물을 수용하면서도 戰士(전사)집단의 용맹성을 유지곧 영국이탈리아 원정에 나선다노르만족의 성격에 대하여 11세기 베네딕트 수도사이자 역사학자인 제오프리 말라테라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꾀가 많고정복과 통치를 위하여는 자신들의 전통을 버린다모든 것을 모방하고상반된 성격인 베풀기와 탐욕을 겸한다두목은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하여 많이 베푼다노르만족은 아부에 능하고어릴 때부터 웅변가들이며법으로 엄격히 다스리지 않으면 통제가 잘 안 된다말과 무기사냥을 좋아하고추위나 배고픔을 잘 견딘다.>

노르만족은 적응력이 뛰어났다전통이나 관습의 구속을 받지 않고 필요에 따라 행동하였다어느 지역을 정복하면 재주 있는 현지인들을 채용하고좋은 여자를 골라 결혼도 했다노르만 지도자들은글을 읽을 줄 모른다고 열등감을 갖지 않았으며 교회의 書記(서기)를 채용하여 자신을 돕도록 하였다.

비잔틴 제국의 알렉시오스 1세의 딸 안나 콤네네는 소녀 시절에 본 노르만 왕자 보헤몽(안티옥 공국의 건설자)에 대하여 이런 기록을 남겼다.

<로마 땅에선 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그는 가장 키가 큰 비잔틴 사람보다도 한 단위가 더 컸다허리는 가늘고 어깨는 넓었으며 깊은 가슴과 강력한 팔을 가졌다너무 야위지도너무 살이 찌지도 않았다균형 있는 몸이었다그의 몸은 희고얼굴은 붉은 점이 있었다머리카락은 황색이었으나 다른 야만인처럼 허리까지 내려오지 않고 귀까지만 오도록 잘랐다수염은 면도칼로 잘라 분필보다 더 부드럽게 보였다그의 푸른 눈은 높은 품격과 기상을 보여주었다매력적인 사람이었지만 무섭기도 하였다용기와 열정이 몸과 마음에 녹아 있었지만 전쟁을 좋아하는 기질이었다그는 위트가 있고 재주가 많아 곤란한 상황에서 늘 벗어나곤 하였다대화를 할 때 그는 정보가 많아 보였고그의 답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그런 체격과 그런 성격은 황제 이외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였다고매함과 행운그리고 다른 타고난 성격에서도 그러하였다.>

바이킹과 노르만족을 묘사할 때 자주 등장하는 게 큰 체격과 용기명예욕그리고 실용적 정신과 적응력이다고고학자들의 遺骨(유골조사에 따르면 바이킹 남자의 평균 키는 약174, 여자는 158cm였다고 한다중세 유럽인들 중 가장 큰 키였다.

역사에서 바이킹과 노르만은 여러 얼굴을 갖고 활동한다해적장사꾼傭兵(용병), 정복자통치자영주농부이민자탐험가식민지 개척자다양한 역을 해낼 만큼 타고 난 능력과 적응력이 강하였다는 뜻이다바이킹이 남긴 碑文(비문)과 ()를 종합하면 바이킹을 원정과 정복의 길로 몰아간 가장 큰 심리적 동기는 명예와 탐욕(일확천금의 꿈)이었다바이킹과 노르만인들에 대한 옛날 기록을 읽어보면 이들이 영웅적인 人間像과 人生觀을 갖고 있었다는 결론에 이른다그런 성격은 과대망상으로 흐르기 쉬운데바이킹-노르만족은 다른 편으론 實利를 매우 중시하였다무엇보다도 인간의 본성을 잘 파악하고인간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는 재주를 가졌다바이킹과 노르만은 새로운 지역을 점령하면 商工業을 진흥하고개방-관용-實用의 통치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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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 라구사 입구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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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의 시라쿠사의 성당. 그리스 시대부터 신전, 성당 등으로 2500년간 계속 사용되고 있는 종교건물이다. 여러 양식의 건축 기법이 섞여 있다.

기원 전 480년 카르타고의 공격을 물리친 시라쿠사 왕의 명령에 따라 아테네 신을 모시는 도리아式 神殿(신전)이 교회 자리에 세워졌다. 기원 전 415년 펠로포네소스 전쟁 때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편에 선 시라쿠사를 공격하였다가 패전한다. 기원 전 398년 플라톤이 시라쿠사를 방문, 이상향이라고 칭찬했다. 사도 바울은 로마로 선교 여행을 할 때 시라쿠사에 도착, 처음으로 기독교를 시실리에 소개한다. 기독교 공인후 그리스 신전은 교회 건물로 개조된다. 시실리는 로마 멸망 후 반달, 고트족의 공격을 받다가 東로마제국, 즉 비잔틴의 지배로 넘어갔다. 서기 878년 아랍이 시라쿠사를 점령, 이 교회 건물을 모스크로 改造하였다.
1085년 노르만 족의 루제로가 아랍세력을 몰아내고 시라쿠사를 수복한 뒤 모스크를 성당으로 바꾸었다. 성당의 관할권은 로마 교황으로 넘어갔다. 노르만族은, 성당을 확장, 木造지붕을 올리고, 모자이크를 붙였다. 1693년 대지진 때 많이 부서졌다. 正面을 바로크 양식으로 바
꾸었다. 2500년간 중단 없이 그리스 신전, 기독교 교회로 사용된, 역사의 숨결이 멈추지 않았던 건물이다.

일본인 역사 저술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 멸망 후 지중해 세계'라는 책(한길사)에서
시라쿠사 성당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시라쿠사 대성당은 기독교 교회로 돌아간 뒤에도 아랍 색채가 전혀 보이지 않고, 교회가 되기 전에 古代 신전이었던 前歷이 지금도 압도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강력하게 다가온다. 시라쿠사는 기독교 세계가 되든 이슬람에 굴복하든 상관 없이 고대 그리스를 줄곧 질질 끌면서 살아왔다는 느낌이 든다. 고대 그리스 조각처럼 쓸데없는 요소를 모두 제거한 뒤에 흐르는 고요함과 편안함으로 가득 차 있다.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밖에 없는데도 더 없는 풍요로움을 느끼게 한다. 이런 느낌의 서재를 갖고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마음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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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말피의 골목에서 바라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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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 타오르미나의 수도원을 개조한 호텔 도미니크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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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 타오르미나의 환상적 해안 풍경. 뒤로 보이는 산은 에트나 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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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의 古都 아그리젠토(Agrigento)의 '신전의 계곡'에 있는 그리스의 神殿이다. 보존상태가 매우 좋다. 시실리를 거쳐간 수많은 지배 민족들은 指紋(지문)처럼 자신들의 유적을 남겼다. 그런 다양성이 이곳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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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리젠토의 그리스 신전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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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리젠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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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 아그리젠토의 그리스 성벽인데, 나중엔 무덤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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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나폴리 왕국 시절인 18세기 말에 지은 카세르타 왕궁. 베르사이유 궁전보다 크다. 1600개의 방이 있고, 200만 입방미터의 체적을 가진 18세기 유럽에서 지어진 최대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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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 왕국의 카세르타 왕궁 정면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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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을 기다리는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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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말피의 수도원을 개조한 호텔의 中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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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의 한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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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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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 라구사. 전형적인 山頂 도시이다.
趙甲濟의 메모: 바이킹과 노르만의 세계

8세기부터 약 300년 간 계속된 바이킹의 유럽 약탈 시대에 프랑스 북부에 노르망디 公國(공국)이 탄생하였다스칸디나비아(지금의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에서 살던 바이킹 족은 게르만 족의 일파인데 용맹한 戰士(전사) 집단으로서 항해에 비상한 재주가 있었다이들은 프랑스의 세느 강 주변을 약탈하다가 지금의 노르망디 지역에 정착한다. ‘노르망디는 북쪽에서 온 사람들의 땅이란 뜻이다서기 911년에 족장 롤로는 프랑스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노르망디 公國(공국)을 인정을 받았다바이킹은 프랑스에서 살면서 현지어를 습득하고 현지인들과 결혼하면서 문명화되었다이곳엔 바이킹앵글로 색슨 족프랑크 족 등 여러 종족들이 살면서 通婚(통혼)混血(혼혈)하였다노르만 족은 바이킹 족의 정복탐험 기질을 이어갔다.

1066년 노르망디의 윌리엄 은 영국으로 쳐들어가 해스팅 전투에서 잉글랜드 군을 무찌르고 지금의 영국과 아일랜드까지 점령하였다오늘의 영국은 노르만 족이 건설한 제도를 이어받아 발전하였다엘리자베스 2세는 정복왕이라 불리게 된 윌리엄 1세의 32대 후손이다.

노르만 족에 의하여 영국이 정복됨으로써 세계사가 바뀐다노르망디 사람들이 영국의 새로운 귀족층이 되었다이들은 先住民(선주민)인 앵글로-색슨 귀족과 융합하여 오늘날 영국의 왕가 및 귀족들의 先祖(선조)가 된다노르망디 사람들이 쓰던 프랑스어가 영어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치고 유럽 대륙의 로마-라틴계 문명이 영국에 많이 들어온다바이킹 족이 영국과 유럽을 이어준 것이다.

이때부터 영국은 北歐(북구)를 벗어나 유럽 대륙을 활동무대로 삼게 된다노르만의 침공은 영국에 대한 마지막 침공이었다그 전 대륙으로부터 수많은 침공을 당해오던 영국은 그 이후는 침략하는 나라로 나라의 운명이 바뀐다윌리엄 1세와 후손들은 고향인 노르망디의 領有權(영유권)을 주장하고나중엔 프랑스의 王座(왕좌)까지 탐하게 된다. 14~15세기 프랑스-영국 사이 백년전쟁의 서막이 열리는 것이다.

노르만의 영국 정복과 거의 같은 시기 노르망디의 오트빌 家門(가문)의 戰士들이 지금의 이탈리아 남쪽과 시실리 정복에 나선다이탈리아 남부 지방을 점령해가면서 아랍 세력이 지배하던 시실리에 상륙한 노르만 족이 팔레르모에 입성한 것은 1072년이었다노르만의 영국 정복 6년 뒤였다. 1130노르만 족의 루체로 2세는 교황에 의하여 시실리 왕 겸 캄파니아 지방(나폴리 주변)의 공작으로 책봉된다그는 영토 확장에 나서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아말피카푸아살레르노 등을 흡수하고한때는 말타아프리카 북부예루살렘 주변 지역까지 점령하였다.

노르만이 시실리와 이탈리아 남부를 다스린 약 200년 간 이곳은 유럽의 가장 번성한 문명국이 되었다노르만 지배층이 개방과 관용과 실용적 정책을 편 덕분이다시실리 왕국엔 노르만그리스아랍유대인들이 공존하면서 상공업과 농업그리고 문화와 예술 활동에 참여하였다노르만은 종교 차별을 하지 않았고 기술자들을 잘 대우하였다.

노르망디는 1204년 프랑스 왕의 통치로 넘어갔다가 14~15세기의 백년전쟁 때 영국군에 잠시 점령당한 적도 있다. 16세기 新舊敎(신구교) 사이의 종교 분쟁 때는 노르망디 사람들이 新敎로 개종하였다가 탄압을 받았다비슷한 시기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은 일제히 루터교로 개종유럽에서 가장 먼저 신교 국가로 변한다. 17세기 노르망디 출신들이 北美(북미) 지역으로 넘어가 지금의 캐나다와 미국에 방대한 지역을 확보하였다캐나다의 퀘벡미국의 루이지아나(뉴올리안스지역을 개척한 이들이 바이킹의 피를 이어 받은 프랑스인들이었다.

바이킹-노르만 족은 몽골-투르크 족처럼 많은 나라를 부수고만들고키운 세계사의 대표적 지배민족이다바이킹 족이 만들거나 세운 나라들은 거의가 一流(일류)가 되었다시실리 왕국영국노르웨이아이슬란드핀란드(바이킹에 의하여 정복), 덴마크스웨덴 등등캐나다와 미국에서도 이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도시나 시골은 삶의 질이 매우 높다일류국가 또는 일류문명 제조기라고 부를 만하다. ‘바이킹 一流의 비결은 무엇인가바이킹 족이 10세기 무렵까지 유럽에서 가장 미개한 종족으로서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고原始(원시)신앙을 가졌으며심지어 殉葬(순장)까지 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하나의 기적이다.

1. 체력이 좋고 용감하다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적 死生觀(사생관)을 가졌다.

2. 戰士 집단이면서도 의외로 사회가 민주적이고 평등하였다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의회는 노르만 족이 시실리에 만든 것이다.

3. 전쟁기술에 못지않게 통치행정 기술이 뛰어났다異民族(이민족)을 다스릴 때는 개방관용실용적 자세를 취함으로써 통합의 에너지를 동원주로 상공업과 건설에 썼다.

4. 해양적 탐험 정신과 이를 뒷받침하는 치밀한 계획 및 기술습득이 제2의 天性(천성)이 되었다.

이하는 趙甲濟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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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이탈리아의 4大 해양도시 중 하나인 아말피(나폴리 근처)의 새벽. 사라센 해적의 공격을 피하기 위하여 절벽을 깎아 도시를 짓고 미로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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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유적. 나폴리, 폼페이, 아말피는 베수베오스 산을 중심으로 인접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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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말피의 해안 절벽 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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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船에서 본 시실리의 에트나 화산. 한라산처럼 이 섬의 중심이다. 높이 3300m. 60만 년 전에 생성된 매우 젊은 활화산으로 자주 폭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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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를 내뿜는 에트나 산의 분화구

에덴 동산 같은 타오르미나

우리는 흔히 좋은 경치를 보면 “그림 같다”는 말을 한다. 내가 지난 3월 중순 시실리의동해안 도시 타오르미나의 그리스 극장 관람석에 서서 사방을 둘러 보았을 때 무심코 나온 말이기도 하다. 청명한 하늘, 정면엔 연기를 내뿜는 에트나 화산의 꼭대기(3300m)가 보였다. 왼쪽으로는 높이 200m의 해안 절벽 위에 만든 2700년 역사를 가진 도시 타오르미나, 그 뒤편엔 깎아지른 절벽 위에 쌓은 성벽과 ‘어금니’라는 뜻을 가진 해발 500m의 山頂 마을 카스텔몰라. 타오르미나에서 내려다 본 이오니아 海의 색감은 코발트 블루이다. 여러번 빤 청바지 색깔이다.

양쪽에 늘어선 상점들과 교회를 지나 약1.5km인, 타오르미나 중앙로를 걷다가 절벽 위에 조성한 작은 광장에 섰다. 낙차 약150m 아래 해안의 모래사장이 빛난다. 머리를 뒤로 돌리면 해발 500~600m의 돌산이 내려다 본다. 타오르미나는, 보는 이들의 뇌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映像(영상)을 남긴다. 화산, 바다, 해안, 절벽, 유적, 마을, 교회, 수도원, 城砦(성채), 하늘, 꽃밭이 어우러진 한 폭의 그림이다. 에덴 동산의 이미지이다. 尙美會 여행단은 수도원을 개조한 호텔에서 묵었다. 절벽 위였다. 수도사들이 조용하게 거닐었을 긴 복도와 정원의 하루는 너무 짧았다.

 

타오르미나를 유럽의 인기 관광지로 만든 이는 독일 화가 오토 겔렝과 文豪(문호) 괴테이다.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에서 타오르미나의 경관을 격찬하였다. 베를린이 고향인 게렝은 나이 스무 살 때 시실리를 여행하다가 타오르미나에 매혹되어 겨울을 지내면서 이 도시의 환상적 모습을 화폭에 담아 가서 독일과 프랑스에서 전시하였다.

게렝의 그림을 본 유럽의 미술 평론가들은, “空想이 심하다”고 비판하였다. 겔렝은 “타오르미나를 가 보라. 만약 내가 과장을 하였다면 경비를 내가 물겠다”고 선언하였다.

타오르미나는 감수성이 좋은 많은 예술가, 문학가들을 끌어들였다. 특히 방랑벽이 있는 사람들이 이 도시에 머물면서 그들의 인생을 바꿀 작품을 남겼다. 영국의 D.H. 로렌스와 미국의 트루먼 카포테는 ‘폰타나 베키아’라는, 17세기에 세워진 빌라에서 장기 투숙하면서 작품을 썼다. 로렌스는 Touch and Go (1920), The Lost Girl (1920), Arron's Rod (1922)을 완성했는데, The Lost Girl로 상금 100달러의 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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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의 타오르미나에서 바라본 해발 500m의 山頂 도시 카스텔몰라. '어금니'란 뜻이다. 아랍 지배 시절 세운 도시를 노르만이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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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미나에 있는 그리스-로마 시절의 半圓(반원)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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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미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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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같은 타오르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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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의 상징 紋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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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로르미나 시내 건물의 벽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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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의 풍경엔 늘 에트나 산정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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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 타오르미나 근처의 해안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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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미나 근처의 山城(산성). 12세기 경, 노르만이 시실리를 점령하고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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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와 고대가 공존하는 시실리의 古都(고도) 시라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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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쿠사의 석회암 채석장. 그리스 시대부터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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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쿠사 성당. 그리스 신전을 기초로 만든 성당인데, 내부가 단순하고 정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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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쿠사 근교 노토의 바로크 식 건축물.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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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토의 바로크 식 건축물. 17세기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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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토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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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구사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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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lla Romana del Casale라고 불리는 시실리의 로마 시대 대저택 건물 바닥에는 서기 3~4세기에 만들어진 모자이크 그림들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이 그림을 통하여 당시 지배층의 생활과 패션을 느낄 수 있다. 위의 모자이크는 생포한 코끼리를 배에 싣는 모습이다. 유네스코 세계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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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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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도 비키니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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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만 족이 세운 시실리 왕국의 수도 팔레르모 시내에 있는 '궁전 예배당'은 호화찬란하다. 노르만-아랍-비잔틴-그리스 식이 혼합된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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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르모 시내의 야외 카페, 尙美會(상미회) 여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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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레알레 성당 벽에는 베드로가 거꾸로 메달려 십자가 刑을 당하는 모자이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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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르모 근교에 몽레알레 성당을 지은 시실리 왕국의 노르만 왕(굴레모 2세)이 성당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뜻을 담은 조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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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레알레 성당과 수도원의 아랍 풍 정원 및 회랑. 노르만-아랍-비잔틴 식이 혼합된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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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의 음식점 정원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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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 만을 지키는 노르만의 海城. 안에는 수백 명이 버틸 수 있을 만한 생활공간이 요새화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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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밀라노 대한항공기 창을 통해 내려다 본 알프스 산맥.




2013년 여름 파리, 노르망디, 브리타뉴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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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셍미셀 수도원 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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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본 몽셍미셀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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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바이유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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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유 근교의 고성 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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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성당 지붕에 걸린 미군 공수부대원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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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해변도시 옹플레르.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에 많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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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노르망디 오마하 비치 해안 미군묘지. 별표는 전사자가 유대인이란 표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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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색기를 향한 사랑?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 앞 로뎅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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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브리타뉴의 깡페르 시내 개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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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페르 대성당 내부. 13세기부터 건축된 고딕 성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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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브리타뉴 생말로 해안의 낙조(落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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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브리타뉴 해안 예술마을 퐁타뱅의 고갱이 그렸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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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타벤 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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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마을 퐁타벤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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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타뱅 저녁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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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타뱅 개울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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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타벤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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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가 그렸던 성당 앞에서 신용석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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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앙제 공국의 본거지였던 앙제의 성. 둘레 660m에 두께 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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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앙제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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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제 성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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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제 城 성벽 위에 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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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제성의 성벽을 따라가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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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제성 안에서 본 시내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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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차창을 통해서 본 프랑스 농촌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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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상제리제 거리의 드골 장군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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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상제리제 거리에 있는 처칠 동상. 파리엔 케네디 거리, 루즈벨트 역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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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가 마지막 70일을 묵으며 78점의 그림을 그렸던 여관




Incredible India, 깊이와 폭, 스케일과 정교함
_인도의 건축과 예술은 스케일과 정교함을 겸하고 있다. 거대한 인구와 엄청난 생산성에서 나온 國力의 뒷받침이 있었고, 다양한 종교의 열정과 집념이 건축과 예술에 투입되었으며, 이 모든 것을 뒷받침하는 과학과 기술이 있었다.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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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릭스로 불리는 3륜 택시가 질주하는 인도 라자스탄 주의 조드푸르 시장통. 차량과 인파와 동물들이 뒤섞인 거리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이런 택시를 타는 것은 목숨을 거는 행동이다.

인도는 면적이 약 330만 평방킬로미터로서 남한의 약 33배이다. 인구는 약 12억4000만 명, 남한의 약 24배이다. 인도 國土의 약 52.5%는 耕作(경작) 가능 農地이다. 이 비율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축에 든다. 유럽의 穀倉(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와 비슷하다. 한국은 경작 면적 비율이 약 16%, 이란은 약 11%이다. 서구의 농업대국 프랑스는 33.4%. 인도 간지스 강 流域(유역)은 세계에서 가장 풍요한 토질에 생산성이 높다.

인도의 구매력 기준 GDP는 약 5조 달러로서 한국의 약 3배이며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위이다. 1인당 국민소득은 약 4000달러, 한국의 8분의 1이다. 인구 구조를 보면 젊고, 학생수가 많아(6억) 잠재적 생산성이 높은 편이다. 핵 및 항공모함 보유국이다.

매년 약 1500만의 인구가 늘어난다. 네덜란드(인구 약 1600만) 같은 나라가 매년 하나씩 생기는 셈이다. 몇십 년 안으로 중국을 앞서 세계 1등 인구 大國이 된다. 영국이 다스렸던 舊인도는 지금의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를 포괄한다. 이 3국의 인구를 합치면 16억을 넘는다. 1700년 인도를 통치하던 무갈 제국의 인구가 약 1억5000만 명이었다. 당시 淸의 인구는 약 1억2000만 명. 예나 지금이나 인도 주변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 그것도 인종과 종교를 달리하는 이들이 몰려 사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불교와 힌두교, 자이나 및 시크교 등 여러 종교와 철학과 수학이 발달하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종교 철학 수학의 공통점은 생각이다. 생각을 깊게 하는 곳이 인도이다. 인도 여행을 하면 극단적인 가난과 극단적인 사치, 극단적인 紀律(기율)과 극단적인 향락, 극단적인 평등과 극단적인 차별, 그 차별 속의 공존을 만나면서 생각이 깊어진다.

1. 인도의 국가적 민족적 성격을 규정하는 가장 큰 변수는 약 80%의 인구가 믿는 힌두교이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인간의 본능에 대한 억압이 적다. 기독교, 유교, 회교엔 禁忌(금기)가 많은데 이 종교에선 그게 적다. 이런 포용적 생각은 경제 건설보다는 민주주의 발전에 더 적합한 면이 있다.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민주국가이다. 미국 인구의 약 4배이고, 인종적, 계층적, 지역적 갈등과 지도자 암살 및 대사고가 끊이지 않는 속에서도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여 간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2. 인도의 건축물은 石造(석조)가 많다. 그리스 로마가 대리석 문화라면 인도는 砂岩(사암)이다. 황토색이 도는 사암으로 된 성, 궁전, 모스크, 寺院, 탑, 미나렛 등이 파아란 하늘과 대조를 이룬다. 石造 건물이 많아 보존이 잘 되어 있다.

3. 3500년 전 인도의 원주민(드라비다 인)을 남쪽으로 밀어내고 北인도를 차지한 이후 인도 역사의 주도권을 잡은 인도-아리안 족은 유럽의 主流 인종인 게르만 족과 親緣性(친연성)이 있다. 인도는, 오래 된 인더스, 간지스 문명을 품고 서쪽의 페르샤 문명과 교류하였으며, 기원 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원정 이후엔 그리스-로마-비잔틴-이슬람 세계와 섞이면서 세계사의 흐름에 동참하였다. 1492년, 콜럼부스가 인도 航路(항로)를 찾기 위하여 항해하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였듯이 인도는 늘 유럽 문명과 연결되어 있었다.

4. 기원 전 3세기, 불교를 진흥시킨 아쇼카 大王, 16~17세기 힌두교와 이슬람을 다 포용하여 무갈제국의 전성기를 이룬 아크발 大帝가 4000년에 걸친 인도 역사의 대표적인 영웅이다. 인도도 중국처럼 북방에서 내려온 세력, 즉 아리안 족, 알렉산더 대왕, 이슬람 세력, 투르크 계통의 노예왕조, 징기스칸 기마군단, 무갈제국(투르크 계통의 이슬람 戰士들)에 의하여 정복되었으나 힌두교를 핵심으로 하는 인도문화는 정복되지 않고 오히려 이들 외부세력을 동화시켜 오늘의 주인공이 되었다.

5. 무갈제국 시대와 영국 통치 시절에도 인도에는 수백 개의 지방 왕국이 상당한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存續(존속)하였다. 이들 王權이 경쟁적으로 세운 성과 궁전 및 사원이 많다. 중앙집권적 권력이 강하고 지방 사이의 경쟁이 약했던 중국에 비교하여 더 찬란하고 다양한 건축물들이 남았다.

6. 인도의 건축과 예술은 스케일과 정교함을 겸하고 있다. 거대한 인구와 엄청난 생산성에서 나온 國力의 뒷받침이 있었고, 다양한 종교의 열정과 집념이 건축과 예술에 투입되었으며, 이 모든 것을 뒷받침하는 과학과 기술이 있었다.

7. 인도는 그동안 세계문화유산 등재엔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등재 대상이 될 수 없는 개인 소유의 城과 궁전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본격적으로 올리기 시작하면 종국엔 인도가 중국을 누르고(현재는 이탈리아가 最多 보유국) 1등이 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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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서부 라자스탄 주의 조드푸르에 있는 메헤랑가르 성. 궁전을 겸했다. 수백 개나 되었던 인도 지방왕국의 궁전이 유럽의 왕국 궁전처럼 거창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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砂岩으로 된 거대한 성채의 높이는 70m. 메헤랑가르 성의 돌출부 건축기술은 불가사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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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 벽의 정교한 문양. 인도 건축물은 스케일과 예술성을 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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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드푸르의 메헤랑가르 성은 무갈-라자스탄 혼합건축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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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델리에 있는 쿠툽 미나르. 12세기 말~13세기 초 투르크 계통의 戰士 집단인 노예왕조가 세운 72.5m의 勝戰塔(승전탑)이다. 사암으로 만든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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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올차 무갈시대 궁전의 창문장식. 돌을 깎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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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카주라호의 힌두교 사원. 고려 초기에 해당하는 11세기 작품. 모래돌로 만들었다. 에로틱한 조각으로 둘렀다. 이런 사원이 수십 개다.

쿠툽 미나르 승전탑 부근은 이슬람, 힌두교 複合建物群(복합건물군)이다. 투르크 계 戰士집단이 세운 노예왕조가 건설한 인도 최초의 이슬람 모스크와 4세기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7m 높이의 鐵棒(철봉)도 있다. 요사이 製鐵(제철) 기술로도 만들기 어려운, 굉장히 높은 純度(순도)를 가진 쇠막대기가 어떻게 썩지 않고 내려왔는지 미스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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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라의 호텔 옥상에서 바라본 타지마할. 17세기 무갈 건축의 걸작이자 최고의 호화분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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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걸하는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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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인의 정신적 고향 바라나시의 아침. 화장을 하고 뼈가루는 강에 버린다. 간지스 강가는 생명과 죽음의 공존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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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는 건물 사람 역사가 color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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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波가 몰린 타지마할. 무갈제국의 전성기 샤자한 황제가 열네 번째 아이를 낳다가 일찍 죽은 아내(세 번째 황비)를 위하여 지은 무덤. 1632년에 착공, 22년 만에, 페르샤 기술자가 중심이 되어 半투명 백색 대리석을 사용, 완성한 寶石 같은 건물이다. 페르샤, 오스만 투르크, 인도의 건축양식이 융합된 걸작이다. 약 2만 명의 기술진이 동원되었다.

타지마할 이외에도 모스크, 門 등 여러 부속 건물들이 컴플렉스를 이룬다. 철저하게 대칭이다. 네 개의 미나렛(탑)은 넘어질 때를 대비하여 바깥으로 약간 기울게 세웠다. 샤자한은 이 건물을 완성한 직후 아들(아우랑제브)의 쿠데타로 인근 아그라 성의 한 방에 유폐되었다. 7년간 창 너머로 타지마할을 바라보면서 살다가 죽어 아내 옆에 묻혔다. 거창하고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의 결과로 지금 인도인들은 많은 관광수입을 올린다. 예술적 건축은 당대엔 낭비 같지만 길게 봐야 한다. 매년 300만 명이 이곳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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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서부 라자스탄 자이푸르 근교 암베르 성-궁전의 풍경, 인도의 건물은 황색이 많은데 사암이 자재로 쓰인 덕분이다. 이 성-궁전은 17세기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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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베르 궁전 천장의 내부 장식. 페르샤-이슬람 식 紋樣(문양)이다.


 

 

印度엔 人道가 없다

인도(印度, India)엔 人道(인도)가 없다. 대부분 대도시의 大路(대로)에도 인도가 없다. 어제 찾은 간지스 강가의 힌두교 성지인, 인구 150만 명의 바라나시(Varanasi)도 그랬다.

車道(차도)엔 중앙선만 있고 신호등도, 차선도, 횡단보도도 없다. 포장된 공간일 뿐이다. 이곳으로 인파가 쏟아져 들어온다. 사람, 자전거, 오토바이, 인력거, 소, 개가 뒤범벅이다. ‘빵- 빵- 빵-’ 하는 소음은 충돌을 피하려는 몸부림인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길가도 인간, 동물, 기계, 상점의 공존장이다. 오늘 아침에 보니 길가에서 담요를 뒤집어쓴 사람과 소떼가 함께 자고 있었다. 인도에선 힌두교도, 이슬람신도, 기독교도, 불교도, 시크교도가 공존할 뿐 아니라 인간과 동물도 같이 산다.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도 심하지 않다. 북새통 속에서 인구 13억이 세계 최대의 민주국가를 유지한다. 약 80%의 힌두교가 민주주의의 핵심인 다양성과 포용력 및 관용의 정신을 공유하고 있는 덕분이다.

사람, 기계, 동물로 가득 찬 바라나시의 大路를 소음 속에서 걷는 건 평생 잊을 수 없는 체험이 된다. 아수라장이 이런 곳이구나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 기적이 있다. 시끄러움 속에서 싸우는 소리가 없다. 뒤범벅된 가운데서도 사고가 거의 없다. 빵빵거리며 질주하다가도 충돌 2초 전에 서로 양보한다. 무질서 속의 질서이고 아수라장의 구원이다. 인도엔 人道가 없지만 인도인의 마음속엔 人道가 있다.

어떻게 이슬람을 믿는 몽골系가 인도를 다스렸나?

무갈제국의 창설자 자하루딘 무하마드 바부르는 1483년 2월24일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에서 왕자로 태어났다. 父系(부계)로는 티무르 大帝의 5代孫, 어머니 쪽 혈통으로는 징기스칸에 연결된다고 한다. 그는 투르크語와 페르시아語를 배웠고 戰時(전시)에도 詩를 지었으며 감동적인 회고록을 남겼다.

 

11세에 왕이 된 그는 20代에 지금의 우즈벡을 통일하여 티무르 제국을 회복하려다가 우즈벡族에게 쫓겨 아프가니스탄으로 피해 갔다. 패전에도 불구하고 1만2000명의 기병이 그를 따랐다. 카불에 본거지를 구축한 그는 북쪽으로 재진격하여 失地(실지)를 회복하려 했으나 패전을 거듭했다. 그는 고향 페르가나를 못 잊어 하였다. 땅이 비옥하여 과일과 곡식이 풍성하게 산출되는 곳이다.

1512년 北進이 실패로 끝나자 그는 방향을 돌렸다. 지금의 파키스탄, 인도 쪽으로 南進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南征(남정)의 피날레는 1526년 4월12일 뉴델리 근교 파니파트에서 벌어진, 로디 王朝의 아이브라힘王이 지휘하는 10만 군대와의 결전이었다.

이때 바부르의 병력은 2만도 안되었으나 전형적인 유목 기마전술에다가 총포부대를 결합시켜 10만 병력의 敵(적)을 섬멸했다. 이 전투는 인도의 역사를 바꾸었다. 몽골系 무갈제국을 탄생시킨 전투였다. 무갈은 이란어로 몽골이란 뜻이다. 바부르는 인도 북부를 점령했으나 더운 날씨에 질려버렸다고 한다. 부하들도 시원한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지대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바부르와 그 후손들은 가는 곳마다 페르시아式 정원을 만들어 그들이 두고 온 녹색지대를 再現(재현), 스스로를 달랬다.

이 무갈제국을 세운 바부르는 교양 있는 영웅이었다. 47세에 죽은 그가 남긴 회고록은 솔직하고 정확하며 문학적이고 드라마틱하다. 겨울의 아프가니스탄에서 부하들과 눈보라 속을 헤쳐 나가다가 동굴을 발견했을 때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동굴은 너무 작았다. 나는 동굴 입구에서 삽으로 눈을 파고 앉았다. 몇 사람이 나만 동굴에 들어가라고 했으나 나는 거절했다. 내 부하들이 눈보라를 맞고 있는데 나만 동굴에 들어가서 잔다는 것은 남자답지도, 동지적이지도 못하다고 생각했다. 페르샤의 속담이 생각났다. '친구와 함께 하는 죽음은 축제이다.' 눈보라는 계속되었고 나의 등과 귀는 눈에 덮였다. 귀는 凍傷(동상)에 걸렸다. 이때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온 부하가 소리쳤다. '동굴이 아주 큽니다. 모두 다 들어갈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눈을 털고 부하 戰士(전사)들을 불러 모아 굴 속으로 들어갔다. 40-50명이 편하게 앉을 만한 넓이였다. 모든 사람들이 식량과 휴대품을 갖고 들어왔다. 심한 추위와 눈보라 속에서 이렇게 따뜻하고 안전한 공간을 발견하다니!>

바부르(호랑이란 뜻)는 아들 후마윤이 重病(중병)으로 死境(사경)을 헤매자 매일 그 病床(병상)을 돌면서 알라神에게 “아들의 병을 저에게 옮겨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소원대로 아버지는 병을 얻어 죽고 아들은 나았다고 한다. 2代 황제 후마윤은 아버지가 건설한 제국을 다 잃어버리고 한때는 페르시아王의 보호 속에서 延命(연명)하기도 했었다. 그의 아들 아크바르가 무갈제국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방글라데시를 포함한 약 320만 평방킬로미터를 정복, 너그럽게 다스렸다. 전성기인 1700년 무갈제국의 인구는 약 1억5000만 명으로서 중국(당시 청, 1억2000만)보다 많았다. 國力과 인구 면에서 당시 세계 최대의 제국이었다.

무갈제국의 판도를 지금에 대입하면 인구가 16억쯤 되어 역시 중국보다 많다. 무갈제국을 세운 사람들은 투르크-몽골族의 피가 흐르는 이들이었으나 이 제국을 다스린 세력은 페르샤 관료들과 이슬람 文化였다. 수니派 이슬람에 속했던 무갈의 왕들은 힌두교 등 他종교를 존중하고 효율적인 관료제도를 정착시켜 수많은 종족들을 잘 다스리면서 다양성이 풍부하고 활력 있는 문화를 만들었다.

무갈제국의 전성기는 아크바르 大王 시절부터 약 150년간이다. 아그라의 타지마할을 만든 샤자한은 4代 王이다. 그는 열네 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은 세 번째 부인을 위하여 세계에서 가장 호화판 무덤인 타지마할을 건설하였다. 흰 대리석으로 빛나는 보석 같은 건물이다. 샤자한은 타지마할이 완공된(1653년) 직후 아들에 의하여 廢位(폐위)되어 2.5km 떨어진 아그라 요새의 한 건물에 幽閉(유폐)되었다. 발코니에서, 사랑한 王妃(왕비)가 묻힌 타지마할을 바라보면서 살다가 죽어 왕비 옆에 안장되었다.

파키스탄의 古都(고도) 라호르에도 무갈제국의 城 안에 궁전과 모스크가 있다. 궁전은 동시대의 베르사유에 못지않은 규모이다. 아우랑제브 황제가 건설한 바드샤히 모스크도 장대하다. 주황색 砂岩(사암)으로 만든 이 모스크는 1678년에 완공되었다. 정원은 170×170m의 정사각형으로서 10만 명의 수용능력을 가졌다. 1986년까지 313년 동안 세계 최대의 모스크였다. 지금은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에 있는 파이잘 모스크가 가장 크다.

인도의 타지마할과 파키스탄의 라호르城이란 2대 볼거리를 만든 나라의 이름이 몽골(무갈)제국이란 점에서 흥미롭다. 17세기 세계 6大 강국은 게르만족이 세운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몽골계 북방 기마민족이 건설한 오스만 터키, 淸, 무갈제국이었다. 몽골계 騎馬(기마)군단의 시대가 끝나는 것은 소총이 발명되고 艦船(함선)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이 해양세력의 대표인 영국이 19세기 중반 무갈제국을 멸망시키고 인도를 식민지로 만든다. 그때부터 중국, 인도가 100년 이상 서양 제국주의의 東進(동진)으로 온갖 수모를 겪는다. 이제 30억 인구를 가진 두 巨大 국가가 다시 일어서고 있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다. 말을 잘 타던 민족이 세계를 정복한 뒤엔 배를 잘 모는 이들이 나타나 바다를 장악, 육지의 대부분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지금은 하늘을 지배하는 시대를 거쳐 사이버 세상이 각축장이다.

무갈제국은 이슬람을 믿는 몽골-투르크族의 군사집단이 토착국가를 점령하고 인도에 건설한 나라였다. 그런데도 힌두교도가 다수인 인도에서도 무갈帝國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영국 식민지 시대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인도 사람들은 많지만 몽골(무갈)의 식민지였던 시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인도인은 만날 수가 없었다. 異敎徒(이교도)의, 異民族(이민족)의 지배를 왜 그리워하고 자랑하는가.

인도 뉴델리 시내 네루대학의 무갈제국 전공 역사학자 하즈반스 무키아 교수를 만나 물어보았다. 자택에서 기자를 맞은 무키아 교수는 『무갈제국의 창건자 바부르는 「원래 우리 할아버지 티무르大帝가 인도를 점령했었는데 그 뒤를 이어받아 내가 다스리는 것은 당연하다」는 식으로 제국의 정통성을 확립하려고 했었다』고 운을 뗐다.

『그러나 3代 아크바르 황제는 정복이 아닌 문화적인 기반에 제국의 정통성을 뿌리박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정의, 화목, 평화가 정통성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원래 무갈제국의 지배층은 57%의 몽골-투르크族과 나머지는 이란人으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아크바르는 지배층을 확대 개편하면서 어떤 종족도 4분의 1이 넘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슬람을 힌두교도에게 강요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힌두교의 문화와 관습을 궁정에서 많이 받아들였습니다. 인도를 통치했던 前 왕조와 다른 점이 바로 이런 현지화(現地化)였습니다. 이런 정치적 통합과 폭넓은 참여 위에서 문화가 꽃피게 되었습니다. 무갈제국을 세운 바부르는 시인이자 작곡가로, 또 작가이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자서전은 명문입니다. 그를 이은 무갈제국의 황제들도 문학-학술-그림-건축에 대단한 열정과 재능을 가진 교양인들이었습니다. 이 분들이 경쟁적으로 건축한 놀라운 모스크, 정원, 기념물들이 지금도 우리의 자랑거리입니다. 이런 文化的 건설이 또한 무갈제국의 정통성을 강화시켰습니다. 영국통치 시절인 19세기에 인도에서 反英(반영)봉기가 일어났을 때도 정신적인 지주는 무갈王祖였습니다. 그때는 허수아비가 돼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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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新세계 7大 불가사의가 세계 네티즌들의 투표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 중국의 만리장성 ▲ 페루의 잉카 유적지 마추픽추 ▲ 브라질의 거대 예수상 ▲ 멕시코 치첸이차의 마야 유적지 ▲ 로마의 콜로세움 ▲ 인도의 타지마할 ▲ 요르단의 고대도시 페트라.

스위스의 영화제작자인 베르나르드 베버가 주도하는 재단은 21개 최종 후보를 선정했었고, 이들을 대상으로 세계적인 범위에서 인터넷 투표가 진행되었다. 21개중엔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 터키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 러시아의 크렘린궁과 聖 바실리 성당,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스페인의 알함브라 궁전, 칠레 이스터섬 石像,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 등도 포함됐었다.
서양의 古代에 선정된 7大 불가사의는 ▲ 이집트의 기자 피라미드 ▲ 메소포타미아 바빌론의 공중정원 ▲ 올림피아의 제우스 상 ▲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로스 靈墓(영묘) ▲ 로도스 항구의 크로이소스 巨像(거상) ▲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등이다. 이 중에서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기자 피라미드뿐이다. 2007년에 선정된 7大 불가사의 중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브라질 리오데 자네이로에 있는 1930년대에 세워진 그리스도像이다. 산꼭대기에 있는 38미터의 石像은 도시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어 유명하지만 제작기술이나 완성도에서 결코 불가사의하지는 않다.

기자는 7개중 4곳을 구경했다. 페트라, 치첸이차의 마야유적, 만리장성, 그리고 콜로세움. 2007년 3월에 요르단의 페트라에 갔더니 7大 불가사의 선정을 위한 서명운동을 현장에서 펼치고 있었다. 뽑히면 관광객들이 많이 몰리기 때문이다. 페트라는 돌산의 狹路(협로)를 지나 만나는 1700~2000년 전의 신전 건물터인데 자연경관은 경이롭지만 건물은 그렇게 감동적이지 않았다. '인디아나 존스' 라는 영화에 등장하여 더 유명해졌다.



2014년 여름, 이탈리아 알프스 돌로미테 山群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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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탈리아 돌로미테(Dolomite) 바위산 지대의 마을 코르티나 담페조(Cortina d'Ampezzo)는 3000m급 바위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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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티나 담페조는 유럽의 부자들이 많이 온다. 돌산이 병풍처럼 에워싸 카메라에 항상 이런 모습이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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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파네(Tofane) 암벽. 영화 <클리프행어(Cliffhanger, 1993)>의 촬영지가 이 돌산 근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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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미테의 가장 유명한 트레 치메 디 라바레도(Tre cime di lavaredo). 삼봉산(三峰山)이란 뜻인데 실제는 네 봉우리이다. 높이는 3000m, 직벽은 60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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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미테의 여러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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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미테 돌산은 눈 녹은 물이 급류(急流)를 이룬다.




2013 여름 파리 퐁피두 센터, 앵발리드, 노트르담 성당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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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피두 센터 현대미술 전시실 창으로 바라본 파리의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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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피두 센터 屋上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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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피두 센터 옥상 공원의 비둘기와 멀리 보이는 노트르담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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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피두 센터의 옥상 조각. 화를 참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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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는 조각상과 즐기는 청춘(퐁피두 센터 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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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피두 센터는 샤갈(▲사진), 마티스, 피카소 등 20세기 대표 작가들의 그림이 가장 많은 곳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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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피두 센터에서 본 에펠탑. 쇠를 주된 資材(자재)로 썼다는 점에서 세계 건축사의 획기적 건물이다. 1889년 파리의 세계박람회를 기념하여 만들어진 324m의 이 철탑은 돈을 내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건물이다. 2011년엔 710만 명이 입장료를 내고 이 철탑 전망대를 올라 파리를 둘러 보았다. 이 건물을 지은 구스타프 에펠은 자유의 여신상 내부도 만들었다. 퐁피두 센터는 1997년에 건축되었다. 영국 건축가 리처드 로저스와 이탈리아의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미래형 건물이다. 바깥으로 파이프와 철근을 노출시켜, 정유공장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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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피두 센터는 승강기와 통로를 외부에 배치하고 파이프와 철근 등 內腸(내장)을 다 드러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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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년 전에 지어진 노트르담 성당은 유럽 최고의 고딕 건축물이다. 프랑스의 전성기인 13세기를 대표한다.

클 뿐 아니라 완벽한 造形美를 갖춘 성당이다. 1163년 루이 7세 시절에 건축이 시작되어 200년간 걸렸다. 내부는 길이 130m, 폭 48m, 천장까지 높이가 35m이고, 두 탑의 높이는 69m이다.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 때 과격파에 의하여 수난을 당하였다. 종은 녹여 쇠로 쓰고, 성당 내부는 음식 창고로 이용되었다. 빅톨 유고가 1831년에 쓴 소설 '노트르담의 곱추'가 한 계기가 되어 20년간 복원 사업이 펼쳐져 오늘의 모습을 되찾았다. 이 성당 앞에는 관광객들을 노려서 무슨 서명을 받는 소녀들이 있는데 소매치기들인 경우가 있다. 성당 마당에 프랑스 도로의 元標(원표)가 있다. 모든도로 길이는 이 점을 기준으로 설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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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전쟁이 超人的 건물을 만든다. 구원받기 위하여, 살아남기 위하여 만든 건축물은 위대하다.
(노트르담 성당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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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느강에 걸린 37개의 다리 중 가장 아름답다는 알렉산더3세 다리 입구. 프랑스와 러시아의 동맹관계를 기념하여 니콜라이 2세가 선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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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의 군사박물관 앵발리드. 상이군인 구호시설을 개조한 것이다. 무기박물관, 戰史박물관이 있는데 사르코지 대통령 시절에 드골 기념실을 추가하였다. 약50만 점의 전시품목을 자랑한다. 1789년 파리의 군중은 이곳에서 2만6000정의 총기를 탈취,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큰 전쟁을 가장 많이 한 나라이다. 많이 이기고 많이 졌다. 富가 있으니 强兵을 길러 전쟁을 하고, 그 富를 지키기 위하여 또 전쟁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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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軍事박물관 앵발리드에 있는 성당 안의 나폴레옹 棺. 나폴레옹은 1815년 6월18일 워털루 전투에서 진 5일 뒤에 퇴위하고, 영국 해군에 붙들려 센트헬레나 섬에 유배당하여 1821년 5월5일 51세에 죽었는데 1840년에 유해가 조국으로 송환되어 1861년에 이곳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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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棺을 내려다보는 돔의 장엄한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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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三色旗는 혁명의 상징이다. 프랑스는 대혁명, 7월혁명, 2월혁명, 파리코뮌 등 流血(유혈)의 이념 갈등이 많았던 나라이다. 左右 대결의 元祖 나라이다. 국기를 삼색기로 쓰는 나라는 거의가 혁명이나 전쟁으로 독립을 쟁취하거나 공화국을 세운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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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지하철 역이름엔 미국의 루즈벨트, 케네디, 영국의 조지5세 등 외국인이 등장한다. 고마움을 멋지게 표현할 줄 아는 이들이다. 자유의 여신상을 미국에 선물한 나라가 프랑스이다. 여신상의 내부는 에펠탑을 지은 에펠이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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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연간 관광수입의 3배를 버는 회사가 삼성전자이다. 역시 國力(국력)은 제조업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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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를 먹는 파리의 비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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