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공으로 탄생한 남한도 노동절을 올해부터 휴일로 기념한다. 이날에 북한에서 겪은 노동절을 기록해 본다. 자본주의 남한도 기념하는 노동자 명절은 정작 노동자 나라라는 북한에서는 별로이다. 김일성 탄생일 기념에 밀려버린 것이다.
1960년대까지 가장 큰 명절은 5.1 노동절, 815해방절, 9.9절 공화국 창건일이었다. 정확히 김일성 유일체제가 완성된 1970년 이전까지이다. 이 3대 명절 때엔 각지역 군·도 들에서 체육대회를 비롯한 성대한 경축행사를 하였다. 경축 행사는 곧 체육대회가 중심이었으며 공설 운동장에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편 운동장 주변에 천막을 치고 평시에 먹을 수 없는 풍요한 음식들을 잔치하듯 팔기도 하였다.
1960년대 후반, 이때만 해도 이런 여유가 있었지만 1970년대에는 메말라갔다. 내가 이를 겪은 장소는 인민학교(초등학교) 시절인 1966-1969년 황북도 서흥군이다. 서흥군 읍을 신막이라고 했는데 일제 때부터 기차를 수리하는 큰 기관구가 있어 제법 큰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군 체육행사에서 큰 인기를 끈 종목은 축구와 씨름이었다. 1966년 런던 월드컵 8강에 오른 북한 축구의 바람이 이를 부추겼다. 북한에서는 월드컵이 아니라 세계축구선수대회라고 한다. 월드컵 8강에 진출한 것은 아시아 나라에서 처음이라고 한다. 당시는 TV가 없을 때이므로 마을마다 있는 대형 스피커에서 말로 듣는 축구 장면을 들으려 구름떼처럼 모여들 때이다. 아직도 박두익 공격수, 이찬명 기파(문지기) 선수의 이름이 잊혀지지 않는다. 씨름은 두 형제 즉 형·동생이 나온 이들이 항상 1, 2등을 했는데 추후 성분이 나빠 추방되어 사라졌다.
TV를 처음 본 것은 1968년 체신소(우체국)에서이다. 쪼무래기들이 공짜로 영화보는 곳이 있다고 해 몰려가 본 것이다. 난생 처음이어서 TV에서 본 첫 영화제목도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영화 제목은 625 전쟁 때를 묘사한 <수송전사의 노래>. 북한 영화는 거의가 전쟁 영화 아니면 혁명투쟁 영화들이다. 1970년 이후부터는 수령우상화 장면이 도배를 하여 재미가 반감되었다.
TV가 한 개 군 체신소에 한 대 있을 정도로 1960년대 말은 그랬다. 그러니 대형스피커에서 말로 듣는 축구장면에 열광했다. 군 체육대회에서 항상 1등은 기관구 팀이었다. 이 팀의 5번 김성수 선수는 유일하게 아직도 기억할 정도로 유명하였다. 저런 선수가 되고 싶은 게 열 살 먹은 나의 소망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7년 후엔 고등기술학교(전문학교) 축구팀의 최종 방어수 2번이 되기도 했다. 아래 남동생도 형인 내가 주선하여 학교 축구선수로 되었다.
내가 겪어 기억하는 1960년대 후반은 북한 역사상 가장 잘살 때이다. 잘산다는 것은 식량배급을 제 양대로 제때에 줄 때이고 돈을 가지고 질 낮은 물건이라도 마음대로 살 수 있었다. 쿠바에서 수입한 사탕가루가 풍족해서인지 사탕 과자를 상점에서 살 수 있었다. 돈이 없어 못 사는 것이다.
월급 수준은 500g 사탕이나 과자가 든 종이로 포장된 곽을 20개 정도 살 수 있었다. 하루 벌어 한 곽을 사기가 힘들 정도로 비싼 것이다. 그러니 마음대로 산다고는 하지만 부담되는 가격이다. 그럼에도 손님으로 갈 때에는 이런 사탕 과자를 한 곽씩 사갈 수 있는 행복한 시대였다. 이러한 행복한 시대는 1960년대까지이고 1970년대에 들어서자 싹 사라지기 시작했다. 다시는 이런 시기가 영원히 오지 않았다.
1970년 조선노동당 창건 6차대회 기념 학교 합창단 단원이었는데 한 달 전부터 과외에 노래 연습하느라 고생하였다고 20여 명에게 사탕 한 곽을 먹으라고 주는 선물이었다. 사탕 한 곽을 놓고 20여 명이 먹자니 못 먹는 이가 있을까 서로 눈치를 보며 언뜻 손을 못 대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 지내보면 김일성유일체제가 완성되는 동시에 상품은 말라갔다. 정확히 1970년부터이다. 우상화와 인민생활은 반비례 관계였다. 1960년대 3대 명절 중 5.1절, 8.15일은 맥 빠진 명절이 되었다. 그 대신 1970년부터 김일성 탄생일이 민족최대의 명절로 바뀌어 갔고 9.9절은 그런대로 유지되었다. 김일성 수령이 창건한 건국절이라는 명분 때문이다.
노동자 나라에서 5.1 노동절, 나라가 해방된 815가 왜 외면돼 갔는지? 유일권력인 수령우상화가 되니 노동자 눈치 볼 것이 없어진 것이다. 815 명절 절하(切下)는 수령이 나라를 해방시켰다고 선전하지만 사실은 미국과 소련의 역할로 나라가 해방된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북한이 잘 살았다는 것은 그래도 견제구조가 있을 때라는 것이다.
공산주의 원리대로 노동자를 위한 유일당 공산당이 돼야 한다며 야당을 없앴다. 공산당이 유일당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서 견제 구조가 남아있었다. 북한에서는 종파분자들이라고 한다. 하지만 6·25 전후 바로 박헌영 남로당파를 제거했다. 연이어 허가이 소련파, 최창익 연안파를 1956년과 1968년에 제거했다. 항일 빨찌산파만 남았는데 그 안에서 갑산파를 최종 제거한 것이 1967년이다.
1968년부터 학교들에서는 김일성 도록판을 세우고 김일성 혁명역사를 외워야 집에 보내기 시작했다. 김일성 정치는 성공하였지만 인민생활은 이때부터 하강을 긋다가 300만 아사로 김일성 사망과 함께 결말을 지어졌다.
민주주의가 왜 견제 구조를 가지는 것인가를 북한 역사로 가장 잘 말해준다. 어떤 탈북자는 좌파 놈들은 싹 없애야 한다고 한다. 북한 꼴을 당해보고도 견제구조가 왜 중요한지 의식이 없으면 도루묵이 된다. 진정한 노동자 명절과 세상은 견제구조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별개의 얘기이지만 5월 1일은 부친의 생일이기도 하다. 남한 출신임에도 노동자 세상을 향해 월북하였지만 생의 마감 때에 노동자 세상이 아님을 통탄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