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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엔지니어가 부끄러운 세상 최상위 계층에서도 노예에 머무르는 천박한 인식 보여. 박경범(작가)  |  2026-05-23
에스엔에스를 보다가는 가끔 허튼소리를 질문하는 자들이 있다. 지독히도 할 일 없는 자들로서 이를테면 ‘젊음과 돈 중에 뭘 선택할래?’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심심풀이로 에스엔에스를 살피다가도 그런 것을 만나면 당연히 무시하고 넘어간다. 그런데 일전에 한 네티즌의 그러한 유형의 발설을 보았다.
  
  krk*:
  니가 지금 원하는걸 할수 있어
  하이닉스 vs 의사
  뭐가 하고싶어???
  
  여기에 내가 기왕에 인지하던 네티즌은 답하길
  
  lad*:
  무조건 의사.
  
  했는데 나는 여기다 이윽고 설명을 적었다.
  
  par*:
  돈은 똑같이 벌어도
  남들에게 중요한 역할 하면서 존중받는 것이
  조직의 부속품 주제에
  일 안하겠다고 떼써서 더 뜯어내는 저급인생보다 낫지
  
  이것은 근래의 사건을 지나온 뒤 어느 특정한 기업이나 단체에 관한 견해를 넘어, 직종 전반에 걸친 경멸감으로 우러나온 거침없는 발설이었다. 最上位 엔지니어들의 천박한 행위가 있게 한 것은 사회 전반의 역량수준 답보도 한 몫 했다. 현재 영향력을 자랑하는 人士들에게서 나오는 저들에게의 대응논리가 고작 1987년 민주화 바람을 타고 基層 노동자들의 이익분배 주장이 터져 나왔을 때의 “이익이 났다고 더 받아야 한다면 손해가 났을 때 덜 받아야 한다.”는 기초단계에 그치고 있으니 저들은 우월감을 접지 않을 만하다.
  
  인간은 노동을 한다. 그런데 그 노동의 결과가 결국 그 노동자의 위상을 어찌 정해줄 것인가는 그 노동자의 志向에 달려 있다.
  
  ‘특정’ 성향의 정치사회 운동가들은 노동의 신성함을 강조하며 자본가와 노동자의 이분구도에서 노동자의 편에 서는 것을 正義와 동일시한다. 이것이 틀리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노동이 자본보다 善이라면 이유도 밝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善의 定議부터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일단 利他的 행위를 선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개미도 이타심에서는 인간을 능가하기도 한다. (물론 그렇기에 의로운 벌레라하여 의(蟻)라 칭하기는 한다.) 이타의 행위는 업보를 개선하는 효과는 있으나 선의 완성이라 하기에는 부족하다. 스페인의 철학자 우나무노는 “善함이란 의식의 보전과 의식의 영속과 의식의 풍요성에 조금이라도 더 공헌하는데 있다.”고 했다.
  
  노동의 神聖함 즉 노동이 상대적으로 善하게 되는 것은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 설명된다. 자본가 對 노동자의 구도에서 자본가는 대체로 물려받은 자본을 바탕으로, 일하지 않고 이익을 취하는 반면 노동자는 地上에서 世上加工의 노력을 통해 자기를 단련하고 존재를 强化하여 靈的으로 성장한다. 노동자는 노동으로 세상을 바꾸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실현해 나간다. 초기 단계에서는 資本家가 주인이고 노동자는 노예의 위치에 있을지라도 노동자는 일을 통해 끊임없이 성장하여 결국 주인으로 올라설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즉, 노동이 신성하고 자본보다 가치 있게 인정받을 이유는 노동자는 언젠가 노예의 굴레를 벗고 주인이 될 수 있는 '미래의 약속과 잠재력'이 있기 때문이다. 노동의 신성함은 노동자의 主人 될 잠재력에 있다.
  
  오늘 한국의 기술정규직 노조는 非勞動을 존재감과 力量의 표출수단으로 한다. 지속적인 노동을 통한 주인과의 位相逆轉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대신에 被使役者로서의 존재의 點滅만을 거듭하는 것은 계속 노예에 머물겠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職群 중에 최상위에 達한 자들에게서도 변함없이 나타난다면 그 직군의 한계가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파업으로 경영자에 치명타를 가할 힘을 가진 것은 증권사나 법무법인의 종사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비록 임금은 비슷하겠지만 증권사나 법무법인 종사자가 파업을 존재감 강화의 무기로 한 적은 없다. 다 같이 노동을 해도 주인과 노예의 순환이 가능한 노동자와 그렇지 않은 노동자와의 수준차이가 여기서 드러난다. 서두에 언급한 醫師도 ‘파업’하지 않았느냐고 하겠지만 그래도 의료정책의 결정권 요구 등 주인으로서의 認定鬪爭의 과정이었다. 노예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은 極上 엔지니어들의 파업과는 다르다.
  
  그 전부터 한국의 理工 인력은 중고교까지 ‘제대로 되지 않은’ 국어교육을 받은 이후 대학에서는 전공을 영어로만 배우니 용어의 槪念을 體得하지 못하고 公式 풀이에만 그쳐 낮은 知的素養을 가졌다고 지적한 바 있었다. 대학에서 기술을 배웠으니 지적소양이 철학 등을 공부한 인문학 전공자들보다 못한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인간의 지적소양은 반드시 인문학의 지식으로만 향상되는 것이 아니다. 理工學으로 사물의 의미를 앎으로서도 세상의 이치는 파악된다. 노예에 머무는 기술자가 아닌 주인의 잠재력을 가진 技術者群의 養成이 시급하다.
삼성전자 뉴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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