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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둥이 기자의 짧은 회고록 ⑬ 20만t 슈퍼 탱커의 대곡예! 말라카 해협 아슬아슬 통과記 趙甲濟  |  2026-08-21

투수 이덕인 선장은 5km 앞에서 공을 던져 1km 너비의 스트라이크 존(통항 가능 수로)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 공이 길이가 330m, 너비가 50m나 되고 반응신경이 무딘 놈이란 점이었다. 다행히 이 선장은 20년 동안의 바다 생활 중 백 번 이상 여기서 그런 투구를 해 본 사람이었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예민한 감각으로 그는 이 둔중한 괴물을 부드럽게 몰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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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패덤 뱅크’로 불리는 이 해저 모래톱에는 쓰레기통을 닮은 말뚝 부이가 우뚝 박혀 

항해자들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다.

 

 

실론(스리랑카)에서 말라카 해협 입구까지의 동서(東西) 거리는 약 1600km. 제주도에서 만주 한복판까지에 해당한다. 20만 톤 초대형 유조선 동해2호의 순항 속도로 4일쯤 걸리는 거리다. 이 항로의 3분의 2쯤을 달린 1982년 2월 13일 토요일, 동해2호에선 소방훈련이 실시됐다. 오후 1시에 화재를 알리는 경적이 울렸다. 이덕인 선장은 선교에서 ‘4번 센터에 불!’이란 상황 설정을 했다. 훈련은 시종 완전무결하게 진행되었다.

 

“실제로 불이 나면 이렇게 손발이 맞을까요?”

 

“실전에선 이보다 훨씬 더 잘하죠.”

 

이 선장은 잘라말했다.

 

“불을 끄지 못하면 우리가 죽어야 한다, 달아날 곳은 바다뿐이라는 걸 우리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요. 그런 인식이 분명하니까 일단 비상사태가 터지면 무섭게 용감해지죠. 특히 책임을 진 사관(士官)들이 위험에 앞장섭니다.”

 

“사고가 났을 때는 선장의 태도가 사활(死活)을 결정합니다”라면서 윤 기관장이 경험담을 늘어놓았다.

 

“몇 년 전 사우디에서 기름을 싣던 우리 탱커에 벼락이 떨어져 배기가스탑에 불이 붙었죠. 그 옆에 있던 갑판원은 그 충격으로 갑판 위에 나뒹굴었어요. 그래도 워키토키를 꼭 붙들고는 ‘부, 부, 불…’이라고 중얼거리더군요. 우리는 상황 판단을 빨리 해야 했습니다. 불길을 못 잡을 바에는 아예 배를 포기하고 선원들 목숨을 구해야죠. 더구나 기름을 싣던 중인지라 불이 크게 번지면 배가 그대로 소이탄(燒夷彈)이 되는 거예요.

 

이때 선장이 침착하게 선내 방송을 했습니다. ‘이 불은 끌 수 있는 거다. 냉정하게 대처하라, 퇴선(退船)은 못 한다’고 차분하게 설득하듯 했죠. 망설이던 선원들이 여기에 용기를 얻어 우르르 몰려가 단박에 불길을 잡았습니다.”

 

 

고래와 충돌?   

 

말라카 해협이 가까워 오면서 바다 풍경도 바뀌어 갔다. 무풍(無風) 상태의 습도 높은 후덥지근한 대기가 부옇게 깔리고, 바다의 물색도 탁한 푸른 빛을 띠기 시작했다. 야트막한 너울이 해면(海面)을 사막의 굴곡진 모래 언덕처럼 보이게 했다. 그냥 수평으로 잔잔할 때보다 더욱 부드러운, 포근한 분위기를 풍겼다. 바다가 너무 평온하면 누구나 ‘과연 저기에 뛰어내리면 정말 죽을까?’ 하는 생각을 한번쯤 해 보게 된다. 그래서 배를 처음 타는 선원에게는 잔잔한 바다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기온이 섭씨 35도까지 오르자 선상(船上) 수영장이 개장되었다. 다음 날 새벽 3시 45분에 윤 기관장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 5초간 “더덜덜…” 하는 진동을 느낀 것이었다. 그는 전화기를 들었다. 기관실 당직자를 불렀다. 기관실엔 아무런 이상이 없으나 그도 배가 크게 흔들리는 걸 분명히 느꼈다는 답이었다. 기관장은 다시 브리지[배의 조종실로 선교(船橋)라고 한다]의 당직사관에게 “뭐냐?”고 다그쳤다. 아무 일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직사관도 큰 진동을 느꼈다고 했다.

 

이날 잠에서 놀라 깨어난 사람은 기관장만이 아니었다. 가장 곤하게 잘 시간인데도 많은 선원들이 ‘사고다!’라고 느끼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음이 이날 아침 식당에서 밝혀졌다.

 

“큰 고래와 충돌한 것 같은데….”

 

별별 추리가 다 나왔으나 확실한 원인은 알 수가 없었다. 1항사는 스크루의 이상 유무를 점검케 했는데 별다른 흔적이 없었다. 며칠 뒤 해도(海圖)를 살피던 2항사가 그럴 듯한 답을 찾아냈다. 수마트라 북단에서 약 250km 서쪽 해상의 강력한 소용돌이가 탱커를 흔든 것이 틀림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날 저녁 6시부터 오른쪽으로 수마트라섬의 해안이 보이기 시작했다. 스리랑카의 땅을 본 지 닷새 만의 일이었다. 키 큰 방풍림이 석양에 물든 해안을 따라 뻗어 있었다. 다이아몬드 포인트 등대가 있는 해안이었다. 이 등대는 쿠웨이트~울산 항로의 중간 지점이며 말라카 해협 북쪽 출입구의 수문장 구실을 하고 있다. 이 등대를 지나 남진(南進)하는 배는 ‘이제부터 말라카 해협이다’라고 긴장하게 된다.

 

이 해협은 벵골만과 남중국해, 더 넓게 보면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길목이다. 북서~남동 방향으로 뚫린 말라카 해협은 길이 약 800km, 폭이 가장 넓은 곳이 250km, 가장 좁은 곳은 64km로 넓지만, 슈퍼탱커가 지날 수 있는 길목은 2km 이내로 좁혀진다. 해협의 양안(兩岸)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가 있다. 선박 통항량(通航量)과 물동량(物動量)에서 세계 1위인 해협이다.

 

 

해적 

 

1982년에도 그러했지만 2026년의 말라카 해협은 세계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더 커져 가히 압도적이다. 세계 무역량의 약 3분의 1이 이 해협과 연결된 남중국해를 통과하며, 2025년 기준 하루 약 2320만 배럴의 원유가 이곳을 지나는데 이는 세계 해상 원유 수송량의 약 29%이다. 전자제품, 자동차, 기계류, 소비재, 곡물, 콩 등 주요 상품이 이 항로를 통해 이동한다. 세계 자동차 해상 운송의 약 25%가 이 해협을 거친다.

 

말라카 해협은 특히 한국, 일본, 중국의 경제안보에 사활적(死活的) 중요성을 가졌다. 중국은 이 해협 의존도가 가장 높다. 중국 석유 수입의 약 75%, 해상 무역액의 약 60%가 말라카 해협과 남중국해를 통과한다. 일본은 원유 수입량의 약 90%, 전체 무역량의 약 18%가 이 항로를 이용한다. 한국은 원유 수입량의 약 90%, 전체 무역량의 약 13%. 말라카 해협의 안전보장은 세계적인 과제이다. 페르시아만에서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유조선은 거의가 이 해협을 지나다닌다. 다만 30만 톤 이상의 극초대형 유조선(ULCC)은 기름을 실었을 땐 남쪽의 인도네시아령 롬보크 해협으로 둘러 간다.

 

동해2호가 말라카 해협으로 들어간 이날 브리지에는 당직자가 한 사람 늘었다. 제주도 역도 선수 출신의 갑판원 변기찬씨. 근육질인 그는 해적 감시원으로 파견되었다. 선교 발코니에서 뱃전과 선미(船尾) 쪽으로 강력 회중전등을 휘휘 비추며 혹시나 해적선이 접근하지 않나 지키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하지만 정말 해적선이 달려들 때 손 쓸 뚜렷한 방도를 갖고 있는 건 아니다. 고압 소방 호스로 물을 뿌려 뱃전으로 기어오르지 못하게 한다는 얘기도 있지만, 그것이 총 든 해적한테 통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총을 쏘아 먼저 배를 멈추게 한 뒤 로프를 걸어 높이 5m의 뱃전을 타고 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날 밤 8시20분쯤 동해2호 바로 앞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불빛이 번쩍 했다. 당직사관은 엉겁결에 경적을 울렸다. 레이더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해적선 아닌가?”

 

변기찬씨가 회중전등을 우현 쪽 바다로 비추었다. 작은 어선이었다. 동해2호의 진로를 오른쪽으로 아슬아슬하게 가로지른 어선은 날쌔게 달아나 버렸다. 벵골만에선 조용하던 VHF도 통항 선박의 많음을 반영, 시끄러워졌다.

 

“와이 유 체인지 코스(왜 변침하느냐)?” 다급한 질문이 들렸다.

 

조금 있다가 같은 목소리가 신경질을 냈다. “아 유 크레이지(돌았나)?!”

 

말라카 해협 어디에선가 아슬아슬한 교차항해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동해2호는 인도네시아 어선들이 많이 조업하는 해역을 통과 중이었다. 레이더에는 10해리 이내에 선박으로 보이는 영상이 15개나 나타나 있었다.

 

 

노곤한 赤道 바다 

 

다음 날 아침은 흐렸다. 잿빛 뭉게구름이 나직하게 깔리고 바다도 회색으로 변했다. 밀폐된 공간 속을 지나는 것같이 답답해졌다.

 

이날 아침부터 키잡이는 수동으로 바뀌었다. 오랜만에 조타수가 키를 빙빙 돌리며 항해사의 명령을 받고 있었다.

 

“하드 스타보드 서!”

 

“밋찝 서!”

 

“원 투 제로, 스테디 서!”

 

지금까지 유조선을 인도해 온 것은 자동항해기(Autopilot)였다. 이 항해기는 침로(針路)를 기억시켜 놓으면 계기가 스스로 알아서 방향을 잡아 간다. 그러나 말라카 해협처럼 변침(變針)을 자주 해야 하고 통항량이 많은 수로(水路)에선 역시 사람이 직접 키를 잡아야 안전하다. 또 수동 작동이 자동항해기보다 더 정확하게 배의 침로를 잡아 간다고 한다. 자동항해 상태에선 항해사가 배를 모는 게 아니라 기계가 배를 몬다. 항해사는 그 기계의 보조자일 뿐이다.

 

“인공위성이 위치를 잘 알려 주니까, 천측(天測)을 게을리하는 버릇이 요즘 항해사들한테 생기고 있어요. 해와 별자리를 읽고서 자신의 위치를 알아 내는 건 선사(先史)시대부터 이어 온 뱃사람들의 지혜가 아니겠습니까. 사고나 풍랑으로 다른 계기가 작동하지 않더라도 이 천측만으로 항로를 잡을 수가 있어, 이건 우리가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언덕이거든요. 하루에 한 번씩 하게 되어 있는 천측을 일주일, 열흘이 가도 한 번 할까 말까 하지요. 이런 큰 배보다는 저런 배의 선원이 진짜 마도로스지요.”

 

동승선장 최씨가 오른쪽으로 날렵하게 지나치는 작은 잡화선을 가리키며 부러운 듯 말했다.

 

동해2호는 왼쪽 10km 해상에 반달 모양으로 볼록 솟아오른 자라크섬을 지나 앞을 가로막은 구름의 장막을 향해 곧장 가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북위 5도선을 지나 적도를 향해 남동진하고 있는 것이었다. 적도에 가까운 말라카 해협은 연중 기온 변화가 거의 없는 바다다. 습도는 늘 80%를 넘어 칙칙한 기분을 준다. 맑게 갠 날을 보기는 어렵고 스콜이 하루에 한두 차례 내린다. 가끔 용오름(waterspouts)의 장관이 펼쳐지기도 하는 곳이다.

 

동해2호의 둘레는 이제 어두운 구름의 장막이다. 정면의 구름 커튼은 회색이었는데 그 가운데 검은 부분이 깔때기 모양으로 바다에서 하늘로 뻗어 있었다. 동해2호는 그 깔때기를 향해 가고 있었다.

 

30분쯤 지나 그 검은 장막 속으로 들어가니 폭우가 쏟아졌다. 갑판엔 홍수가 났다. 갑판에서 넘친 물이 폭포수처럼 콸콸 바다로 떨어졌다. 약한 바람이 해면을 쓸고 가며 주름살을 남겼다. 이 비기둥 사이를 빠져나오는 데 30분쯤 걸렸다. 천둥소리가 음산하게 울려 왔다. 이때는 레이더스코프도 부옇게 되어 배의 항적(航跡)을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공포의 ‘원 패덤 뱅크’ 

 

동해2호가 스콜의 장막을 막 헤치고 나오는 순간, 왼쪽 11시 방향에서 안개 사이로 불쑥 거체(巨體)가 드러났다. 초록색 탱커였다. 우리와의 거리는 1해리쯤. 소스라친 항해사가 경적을 연거푸 울렸다. 약 2km나 떨어졌는데 뭘 그러냐고 할지 모르지만, 초대형 유조선에게 이 거리는 방향을 바꾸기엔 너무나 짧은 거리다.

 

“유조선은 절대로 자동차처럼 갑자기 부딪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다가오는 것을 뻔히 보면서, 몇 분 뒤에는 박살이 난다는 걸 알면서 충돌하는 겁니다. 한 5분간은 서로의 배를 쳐다보며 그냥 ‘어! 어!’ 소리만 내고 있는 거예요. 그때쯤 되면 전속 후진을 걸어도 급선회를 걸어도 이미 늦어요. 20만 톤짜리를 택시처럼 홱홱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誤算)이지요. 그래서 유조선 선장은 자동차 운전은 못 할 겁니다. 도대체 시차 감각이 다르거든요.”

 

이덕인 선장의 말이었다.

 

초록색 탱커는 경적을 받고 방향을 틀었는지 좌현으로 500m쯤 거리를 두고 지나갔다. 뱃전에 쓰인 ‘DOCENAVE’란 글자가 맨눈으로도 보였다.

 

오후가 되자 구름이 서서히 걷혀 갔다. 스콜 뒤의 공기는 상당히 맑아졌다. 동해2호의 전후좌우에는 배들이 쫙 깔리다시피 했다.

 

동해2호는 해협에 들어서면서 마스트에 그물로 만든 원통을 달았다. 흘수(吃水)가 깊은 배라는 표시다. 통신사는 싱가포르 무선국으로부터 다른 대형 유조선의 말라카 해협 통과 시간표를 받아 항해사에게 전달했다.

 

서해만큼이나 넓은 해협이지만 그중 흘수가 20m나 되는 VLCC가 지나다닐 수 있는 뱃길은 좁고, 파친코 속의 미로(迷路)처럼 난관이 많고 복잡하다. 이 좁은 뱃길에서 자칫 벗어나면 좌초. 만선(滿船)한 유조선은 그럴 때 두 동강 나기 십상이다. 그러면 원유 대유출로 이어진다. 공중줄타기 하는 곡예사처럼, 이 거대한 선체는 좁디좁은 항로 위에서 발을 헛디디면 대파멸이다.

 

동해2호는 이제 첫째 관문을 향해 10노트 속도로 다가가고 있었다.

 

‘원 패덤 뱅크(One Fathom Bank).’ 세계 유조선 선원들의 소름을 돋게 하는 이름이다. 말 그대로 수심(水深)이 한 길밖에 안 된다는 길쭉한 모래톱이다. 물론 이 모래톱은 해면 밑에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수심 3~15m면 유조선이 얹히기 안성맞춤이다. 원 패덤 뱅크 근방에는 같은 방향의 길다란 모래톱들이 여러 개 뻗어 있다. VLCC급 유조선들은 이 모래톱 사이의 좁은 공간을 통해 빠져나가야 한다. 그것은 바늘구멍에 낙타 지나갈 정도는 아니지만 바늘을 서너 개 나란히 세워 놓고 한꺼번에 실을 꿰는 것만큼 어려운 곡예다.

 

원 패덤 뱅크는 한국행 유조선에는 말라카 해협의 실질적인 시작을, 페르시아만행 유조선에는 긴장의 해소를 알려 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이 모래톱에서 싱가포르까지의 약 400km가 총 길이 800km의 말라카 해협의 위험 수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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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카 해협에서 18년 동안 유조선을 찍은 항공 촬영 전문가 피터 폭슬리.

 

말라카에서 만난 유조선 전문 항공사진사 

 

말라카 해협의 이름은 이 해협의 북안(北岸)에 있는 말레이시아 항구도시에서 따온 것이다. 우리 취재팀(조갑제, 박상원)은 중동으로 가는 길에 말라카를 찾았었다.

 

말라카는 원래 인도 문화권이었다. 15세기 중국 명(明)나라 영락제 때 정화(鄭和)의 대함대가 두 번 기항(寄港)한 적이 있다. 이를 계기로 중국인들이 이 지역으로 이민해 와 지금 말레이시아 인구의 36%를 차지하고 있었다.

 

1511년, 신흥 해양국 포르투갈이 말라카를 점령, 동양 진출의 교두보로 삼고 제수이트(예수회) 교단이 인도·일본·중국 선교의 기지로 삼았다. 예수회의 공동창립자 중 한 사람인 프란시스코 하비에르(Francis Xavier·1506~ 1552년)는 말라카에서 인도네시아, 그리고 1549년 일본의 가고시마에 상륙, 선교 활동을 이어 갔다. 그는 일본의 문화적 배후가 중국이라고 판단, 중국 입국을 준비하던 중 1552년에 사망, 말라카에 잠시 묻혔다가 인도의 고아로 이장(移葬)되었다.

 

1641년 네덜란드가 해상 봉쇄 끝에 말라카를 점령, 인도네시아와 연계시켜 운영하다가 1795년 영국에 관할권을 넘긴다. 한때 세계의 4분의 1을 통치한 해양제국 영국은 지브롤터 해협을 장악해 지중해와 대서양을 통제하고, 수에즈 운하로 인도양과 페르시아만을 통제하고, 싱가포르와 말라카 해협으로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을 영향권에 두는 구조였다.

 

나는 말라카에서 18년 동안 경비행기로 이 해협을 통과하는 유조선을 사진 찍어 먹고사는 뉴질랜드인 피터 폭슬리(Peter Foxley) 씨를 만났다. 그가 찍은 3만 장의 사진 속에는 세계의 슈퍼탱커들이 거의 망라되어 있었다. 해협을 무대로 해적질하고 밀수하는 배들의 현장 사진도 많이 찍었다. 나에게는 부산 선적의 참치독항선이 수상한 싱가포르 소형 선박과 접선해 밀수품 보따리를 건네 주는 것으로 보인다는 설명과 함께 몇 장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원래 선장 출신인데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군의 포로가 된 적도 있고 한국전 때는 탄약 운반선을 몰고 부산항에도 자주 들렀다고 한다.

 

최근, 당시 58세이던 그의 근황에 대하여 AI에 물었더니 사망했다고 나온다. 그가 찍은 수많은 사진은 세계 해운사(海運史)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난파선들 

 

이덕인 선장이 오랜만에 직접 항해를 지휘하기 위해 브리지에 올라온 것은 원 패덤 뱅크 통과를 앞둔 날 오후였다. 그는 조류의 방향과 조석의 차이를 수시로 체크하도록 항해사에게 지시하고 스크루 회전수, 레이더스코프, 해도를 훑어 가며 바늘구멍 통과작전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오후 2시쯤 동해2호는 인도네시아 어선들이 그물을 치고 있는 어장 바로 옆을 지나갔다. 어부들의 모습이 쌍안경에 잡혔다. 쿠웨이트를 떠난 뒤 외계의 인간을 구경하기는 이것이 처음.

 

오후 3시쯤 오른쪽 수평선에 작은 바위섬들이 점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배의 진로에 따라 암초는 하나 둘씩 새로 등장했다. 해면은 검푸른 색을 벗어 던지고 초록 빛깔로 갈아입고 있었다. 초록색은 바다가 얕다는 암시다. 바다 위에 잉크를 뿌려 놓은 것 같은 이 암초밭에는 살롱 알랑, 투홍 신방, 바투 벨라야, 바투 만디 따위의 이름을 가진 무인 바위섬이 열몇 개나 솟아 있었다. 개중에는 해면 바로 밑에 잠겨 있는 암초도 있어 휜 물결이 그 위에서 일고 있었다. 이 선장이 말했다.

 

“저렇게 보이는 암초는 겁이 안 납니다. 안 보이는 게 문제지요.”

 

이 암초밭을 지나고 있을 때인 3시30분경 레이더스코프에 반짝이는 영상이 나타났다. 11시 방향으로 약 15해리 떨어져 있었다. 그 영상은 30초마다 한 번씩 스코프에 잡히고 있었다. 원 패덤 뱅크에 설치된 전파반사기였다. 모래톱의 위치를 접근하는 선박의 레이더에 알려 주는 구실을 한다. 브리지엔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 선장은 느릿느릿 항해실을 오가며 입을 굳게 닫고 있었다. 항해사는 레이더스코프에, 조타수는 키에 매달려 있었다. 여느 때의 풀어진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 같은 관람객은 말을 붙이기가 미안할 정도로 브리지의 공기는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고 그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동해2호는 수심 25~30m의 바다를 지나가고 있었다. 선체를 19.5m나 물속에 잠근 채였다.

 

오후 4시30분쯤 1항사가 “보인다!”고 조용히 말했다. 선원들의 눈은 워낙 좋다. 1항사가 맨눈으로 찾아낸 것을 나는 쌍안경으로 겨우 발견했다. 10시 방향으로 등대가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흰 바탕에 검은 테를 두른 등대는 장난감처럼 좀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그러나 그 주변의 표정은 살벌했다. 등대 바로 옆에는 검은 암초, 등대 앞쪽에는 굴뚝과 마스트를 내어 놓고 모로 쓰러진 난파선이 있었다. 잡화선인 듯한 이 침몰선은 말라카 해협을 오가는 선원들에 대한 영원한 경고로서 처음부터 그렇게 있었다는 착각이 들었다.

 

원 패덤 뱅크 쪽으로 동해2호가 바다를 지쳐 가고 있던 오후 5시30분, 정면 바다에서 갑자기 허수아비가 솟아났다―고 나는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확 트인 바다에 불쑥 솟은 빨간 쇠기둥은 주변 풍경과 너무나 어울리지 않게 톡 튀어나와 있어, 허수아비가 방금 바다 밑에서 솟은 것처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찬찬히 훑어보니 이 허수아비 모양의 쇠기둥은 서울의 길가에 박아 둔 철제 원통형 쓰레기통과 닮았다. 높이 10m쯤의 이것을 부이(buoy)라고 부르는데, 아무래도 적당하지 않은 이름인 것 같다. 이 빨강 허수아비 뒤편 오른쪽에는 파란 부이가 하나 또 바다에 말뚝처럼 박혀 있었다.

 

 

20만t의 곡예 항해 

 

이 두 개의 말뚝 사이로 지나가야 하는 것이 동해2호 같은 VLCC의 숙명이다. 말뚝 사이의 간격은 1350m. 쿠웨이트에서 여기까지 달려온 것도 한 뼘밖에 안 되는 이 목구멍을 지나기 위함이었다. 붉은 부이의 바깥으로 조금만 벗어나면 수심 14m의 모래톱, 파랑 부이의 바깥은 폭발물 투기장과 깊이 12m의 모래톱. 두 부이 사이의 수심은 24m. 동해2호의 흘수는 19.5m니 5.5m의 여유가 있다. 그러나 10노트로 달리면 선수가 1미터쯤 가라앉으므로 여유수심은 더욱 좁아진다. 동해2호보다 더 큰 26만 톤 코리아 선, 코리아 배너, 코리아 스타호는 24만 톤의 기름을 싣고 여기를 지나는데 여유수심이 3m 안쪽일 때도 있다.

 

1974년 한국 선장으로선 처음으로 24만 톤급 VLCC 천우호를 몰고 말라카 해협을 지난 김태덕씨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선저(船底)와 해저 사이의 여유가 1m도 안 된 적이 있었습니다. 수심측정기를 들여다보면 배 밑창이 해저에 붙은 것처럼 나오지요. 이럴 때 배가 흔들린다든지 파도가 치면 박살이 안 나고 견디겠습니까?”

 

코리아 배너 같은 배들은 흘수가 20m를 넘는다. 해면이 가장 높아지는 밀물 때를 기다렸다가 그 대조기(大潮期)를 틈타 황급히 얕은 길목을 빠져나가기도 한다. 이때 선장들은 “해도야, 제발 틀리지 마라”고 기도하는 심정이 된다. 그들의 모든 행동은 해도에 나타난 수심(해도의 수심은 해면이 가장 낮아졌을 때의 깊이)의 정확성을 믿고 하는 것이다.

 

수심 측량은 해저를 훑는 게 아니라 몇 군데의 표본 조사라는 한계가 있다. 해저의 이변으로 모래톱이 생기거나 바위가 굴러와 있을 수도 있다. 말라카 해협의 인도네시아 쪽 수심 자료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정평으로 되어 있었다. 이 해협의 수심 표시는 세계 최고 권위의 영국 해군 수로국(水路局) 것보다 일본 수로국의 해도가 더 정확하다고 한다. 일본은 해협 연안국과 합동으로 해마다 이곳의 수심 측량을 실시하고 있다. 일본의 유조선들이 가장 많이 이 해협을 이용하고 있는 데 대한 일종의 보상이다.

 

오후 5시30분 동해2호는 두 말뚝 사이 한가운데를 지나갔다. 빨강 부이를 통과하면서 이 선장은 107도에서 116도로 변침 지시를 내렸다. 107도 방향으로 곧장 가면 5km 앞에 있는 또 다른 침몰선 부근을 지나가게 되어 있었다. 이 침몰선은 해면 위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그 부근은 수심 15~18m. 그 바로 남쪽에는 제3의 침몰선이 묻혀 있다. 첫 관문을 통과한 동해2호는 두 번째 난관인 침몰선 골목을 빠져나가야 했고, 그래서 5km를 앞두고 변침한 것이었다.

 

곧은 물길이 배 꽁무니에서 큼직한 원호를 그리기 시작했다. 두 침몰선 사이의 거리는 약 1000m. 투수 이덕인 선장은 5km 앞에서 공을 던져 1km 너비의 스트라이크 존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 공이 길이가 330m, 너비가 50m나 되고 반응신경이 무딘 놈이란 점이었다. 다행히 이 선장은 20년 동안의 바다 생활 중 백 번 이상 여기서 그런 투구를 해 본 사람이었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예민한 감각으로 그는 이 둔중한 괴물을 부드럽게 몰고 갔다.

 

이 선장은 두 시간에 걸쳐 세 곳의 관문을 더 통과해야 했다. 동해2호는 노련한 조련사의 지휘를 받는 코끼리처럼 외길 항로의 줄을 아슬아슬하게 타고 가며 다섯 개의 바늘구멍을 항로라는 굵은 실로 차례차례 꿰어 갔다. 구슬 꿰기가 대충 끝난 것은 밤 8시가 넘었을 때였다.

 

“무슨 일 있으면 불러!”

 

이 선장은 어둠이 깔린 해협을 항해사에게 넘겨 주고 브리지를 떠나 식당으로 내려갔다. 이제부터 싱가포르까지는 별문제가 없을 것임을 잘 안다. 이제 남은 건 필립 채널(水路) 하나다. 그는 이번 시험에서도 무사히 합격한 안도감에 잠시 젖었다. 그러나 내일의 시험은? 유조선 선장에겐 오직 백전백승이 있을 뿐이다. 100전 99승 1패는 뱃사람들에겐 파멸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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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는 중동과 극동을 오가는 오일로드의 중간 보급 기지다.

 

음식이 배의 분위기 좌우 

 

야식(夜食)이 나왔다. 떡과 감주. 원 패덤 뱅크의 ‘바늘구멍’을 무사히 통과한 2월 15일의 밤이었다. ‘살롱’ 이영우씨가 선실을 돌면서 배달해 주기도 했다. ‘살롱 보이’라는 애칭을 가진 이씨는 서른 살인데도 앳된 동안으로 보여 그렇게 불리고 있었다. 선실 청소, 선내 매점 운영 등을 맡고 있는 그는 유조선만 타느라고 혼기(婚期)를 놓쳤다고 했다. 야식은 배에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울산 출항 때 실어 보관한 것이었다. 동해2호 선원들은 하나같이 “사주장을 잘 만났다”고 했다.

 

“선내 분위기를 좌우하는 이는 선장과 사주장이다”라는 말이 있다. 사주장, 곧 취사부의 책임자가 어떤 요리 솜씨와 성의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선원들의 기분이 흐렸다 개었다 한다는 것이다.

 

유조선 선원들의 미각(味覺)은 예민하다. 고립된 무기항 항해, 달리 욕구를 발산시킬 출구가 없다. 막혀서 충만해진 욕구는 미각에 집중되고 ‘먹는 재미’를 갈구하게 된다.

 

“다른 배 같으면 음식에 좀 불만이 있더라도 항구에 닿으면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배설할 수 있어 쌓인 스트레스가 풀립니다. 탱커에서는 그렇게 안 되지요. 설상가상으로 부식 조달에 애로가 많습니다. 출항 때 한번 실으면 그걸로 두 달을 견뎌야 합니다. 지금과 같은 귀항길에는 김치 등 채소가 동이 나는 수가 많아요. 그러면 고기만 내놓게 되는데….”

 

사주장 박도석씨의 말이다.

 

“음식 솜씨도 좋아야 하지만 사주부의 사교술도 중요합니다. 평소에 선원들과 잘 어울려 인간관계를 돈독히 해 놓으면 우리의 작은 실수는 묻혀 넘어가 버립니다. 요리가 언제나 좋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군중심리라 할까요, 누가 먼저 음식 투정을 하기 시작하면 너도나도 들고나와 사주부를 집중 공격하게 됩니다. 이런 불만의 집결과 폭발을 막으려면 평소에 정치를 잘해야 한다 말입니다, 허허….”

 

조리수 김동훈씨는 얼마 전에 선원들로부터 밀리다시피 하여 하선한 어느 사주장의 사례를 들면서 말했다.

 

 

뱃사람들에 대한 무지 

 

“밤에도 정말 배가 가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요.”

 

늘 반바지 차림으로 알몸을 드러내 놓고 다니는 펌프맨 김무씨가 휴게실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뭍사람들의 뱃사람들에 대한 무식을 비꼬고 있었다.


배는 밤에도 분명히 가고 있었다.

 

“윤정희가 여(女)선장으로 나오는 영화가 있었죠? 선장이 키를 잡지 않나, 갑판장이 선장에게 말을 놓고, 하역 중인데 출항명령이 떨어지질 않나…. 개판 오 분 전 같은 영화 말입니다.”

 

윤 기관장이 화가 치민 듯 내뱉었다.

 

대다수 육지 사람들이 가진 선장의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마도로스 모자를 약간 치켜 쓰고 파이프 담배를 지그시 문 채 키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털보 사나이―통선이면 몰라도 큰 배의 선장은 절대로 키를 잡지 않는다. 비록 그것이 멋은 있겠지만, 키를 돌리는 건 조타수의 임무이며 그것도 위험한 항로를 지날 때만 그런다. 90% 이상의 시간은 자동항해기에 맡겨 두고 브리지 안을 어슬렁어슬렁 왔다갔다 하는 게 조타수의 일이다.

 

말라카 해협에 들어선 이후 선원들은 한결 들떠 보였다. 휴게실 텔레비전 수상기에선 인도네시아 방송이 잡히다가 말레이시아 방송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휴게실은 시청자들로 흥청대고 있었다.

 

“내일 싱가포르를 지난다.”

 

선원들의 표정은 그 기대로 밝았다. ‘내일 소풍 간다’는 희망에 들뜬 초등학생들처럼.

 

다음 날 아침은 부옇게 밝았다. 욕실의 수증기처럼 진한 공기가 해면을 얕게 덮어 누르고 있었다. 동해2호는 새벽 3시에 말라카 항구 앞바다를 지나 싱가포르로 다가갔다.

 

우리는 한 달 전의 약속에 따라 사흘 전에 말라카시에 있는 유조선 촬영 전문가 폭슬리 씨에게 동해2호의 항공 촬영을 재차 부탁하는 전문을 보냈다. 말라카 비행장에서 동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해상을 지날 때의 시각(오전 10시)을 미리 알려 주고 비행기의 출현을 기다렸으나, 말라카 현지의 날씨 때문인지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동해2호는 새벽부터 각양각색의 선박들에 둘러싸여 싱가포르로 접근하고 있었다. 말라카 해협은 선박 전시장이다. 맨눈으로도 열한 척의 탱커, 어선, 컨테이너선들이 오가는 걸 볼 수 있었다. 배들이 500~ 600m 간격을 두고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바다가 좁게 느껴졌다. 바닷물 색은 텁텁한 초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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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협수로는 출퇴근 시간의 차량 행렬처럼 번잡했다. 

컨테이너들선이 수백 미터 간격을 두고 동해2호를 스쳐가고, 이덕인 선장은 직접 브리지에서 

진두지휘를 하기 시작했다. 자동항법에서 수동으로 바뀌면서 조타수가 비로소 키를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바늘구멍’ 

 

정오 무렵 동해2호는 드디어 말레이시아 해역을 벗어나 싱가포르 남쪽의 필립 협수로에 진입했다. 다도해 같은 섬밭 사이를 지나가기 시작했다. 섬마을의 방파제와 쇠탑이 보일 정도로 가깝게 스쳐갔다. 동해2호의 앞뒤로 탱커, 컨테이너선, 자동차 전용선들이 줄을 서 있었다. 거선들의 행진―그것은 광화문 네거리의 자동차 행렬과는 다른 스케일로 적도의 바다를 꽉 채우고 있었다. 동해2호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번잡한 항로에 들어선 것이었다. 동해2호는 정면에서 앞장서 달리는 컨테이너선과 자동차 전용선의 물길을 뒤따라가고 있었다. 뒤 1km쯤에서는 탱커가 따라오고 있었다.

 

오후 1시, 동해2호는 싱가포르의 주룽 정유공장지대 앞을 통과했다. 묘박지(錨泊地)에는 탱커들이 열세 척 와글와글 떠 있었다.

 

1시35분, 앞서 가던 컨테이너선이 좌회전했다. 35분 뒤 이 선장은 동해의 선수를 북동쪽인 056도 방향으로 돌렸다. 왼쪽으로 싱가포르의 고층건물군이 어렴풋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싱가포르 항내의 누런 바닷물이 초록색의 외양수(外洋水)와 맞닿은 곳에는 뚜렷한 경계선이 그어져 있었다. 동해2호는 그 경계선을 돌파해 녹슨 해수 속으로 들어갔다. 수증기가 걷히고 하늘은 유리알같이 맑아졌다.

 

동해2호는 싱가포르에서 인도네시아 쪽으로 징검다리처럼 놓인 섬들의 띠를 향해 항진하면서 싱가포르 쪽 타콩섬과 인도네시아 쪽 타본섬 사이를 지나는 항로를 밟아 갔다. 이 항로는 국제 지정 항로이며 중앙분리선이 있고 배들은 우측 통항을 해야 한다. 타콩섬 바로 앞에 가면 20만 톤 이상의 슈퍼탱커가 지날 수 있는 항로의 너비가 1000m로 좁아진다. 양쪽에는 부이가 떠 있어 항로의 한계를 명시하고 있었다. 1000m 너비의 항로는 중앙분리선에 의해 다시 쪼개어진다. 동해2호는 오른쪽의 너비 500m 항로를 지나가야 한다. 이 항로에서 벗어나면 충돌이나 좌초의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윈 패덤 뱅크의 너비 1350m보다 더 좁은 ‘바늘구멍’이다.

 

동해2호는 이 바늘구멍을 1km 앞두고 침로를 056도에서 040도로 변침했다. 선체는 덜덜 진동하며 완만한 원호의 물길을 그리며 방향을 바꾸었다.

 

“중앙분리선에 바짝 붙여 지나가야 안심이 됩니다. 이때 마주 오는 배의 선장이 당황하면 큰일 납니다. 이쪽은 자신이 있기에 중앙선으로 붙는데 상대방은 이쪽이 중앙선을 넘는 줄 알고 황급히 키를 돌려 피한다는 것이 중앙선을 넘어와 충돌 사고를 빚기도 합니다. 몇 년 전 그런 사고가 이 부근에서 났지요. 중앙선을 침범해 들이받은 것은 한국인 선장이 몰던 일본 탱커였고, 들이받힌 쪽은 일본인 선장이 몰던 일본 탱커였지요. 침몰한 일본인 선장의 탱커가 최근까지도 마스트를 드러내 놓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국인 선장에게 ‘이순신’이란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이 선장은 항해사와 조타수에게 수시로 명령을 내리면서도 구경꾼인 나에게 해설을 해 주는 여유를 보였다.

 

 

‘싱가포르 假입항’ 

 

싱가포르 해협 통과 시간을 꼭 낮으로 잡는 것은 이 부근의 통항량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거선들이 줄지어 이 ‘바늘구멍’을 쉴새없이 들락거리는 그 시간에도 요트, 돛단배, 경비정, 원목 운반선 등 연안 선박들이 탱커 항로를 요리조리 가로질러 다니며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동해2호는 연방 경적을 울려 댔다. 하늘에선 싱가포르 전투기들이 폭음을 내면서 공중전 연습에 열중해 해협의 긴장감을 더해 주었다. 지휘권을 선장에게 넘긴 2항사 이종권씨는 진땀을 흘리며 필립 채널 부근의 확대판 해도에다가 10분마다 한 번씩 배의 위치를 그려 넣고 있었다. 항해실 안의 팽팽한 긴장과는 달리 브리지 발코니엔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아이들처럼 재잘대고 있었다. 최화섭 동승선장, 최용선 2기사, 안장렬 통신장 등은 점점 또렷이 다가오는 싱가포르의 시가(市街) 풍경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2시50분, 동해2호는 타콩섬의 등대와 암초밭을 왼쪽으로 바라보며 ‘바늘구멍’을 벗어났다. 그러나 아직 안심은 금물. 수심 19m의 얕은 해저가 오른쪽으로 길쭉하게 달리고 있었고 동해2호는 그것을 피하기 위해 039도로 다시 변침해야만 했다. 2항사는 이제는 2분마다 한 번씩 위치를 내고 있었다. 항해 계기만 믿고 있다가 조류에 밀려 좌초해 버리는 사고를 막기 위함이다.

 

한 달 전 들른 기억으로 나에게는 안면이 있는 싱가포르 시가지는 이제 손에 잡힐 듯 가깝게 왼쪽으로 뻗어 있었다. 정유공장의 울긋불긋한 굴뚝, 마운트 페이버의 케이블카, 47층짜리 DBS빌딩, 52층짜리 OCBD빌딩들이 보였다. 해안 매립 공사장의 작업선과 쌓아 둔 모랫더미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동해2호의 구경꾼들은 넋 빠진 듯 뭍의 풍경에 매달려 있었다. 그들은 입항(入港) 기분을 내고 있었다. 왕복 6만 리의 오일로드에서 항구를 이처럼 가깝게 스치는 건 싱가포르뿐이다. 가수면(假睡眠) 상태와 닮은 ‘가입항’의 환상에 얼이 빠진 선원들은 난간에 턱을 괴고 하염없이 향수 어린 시선을 던져 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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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서 싱가포르로 향하는 싱가포르 항공사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유조선들. 

위쪽 배는 기름을 가득 실어 판자 조각처럼 납작하게 보인다.

 

 

남중국해로! 

 

싱가포르 수역을 빠져나와 다시 말레이시아 동해안으로 들어선 것은 오후 5시. 노을이 지기 시작한 말레이시아 어촌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군데군데 솟아오르고 있었다.

 

싱가포르를 벗어나면 남중국해! 바람결부터 달라졌다. 서늘하고 세찬 맞바람에 물결도 거세어지고 가끔 백파(白波)도 보이기 시작했다. 선수에서 파도가 쳐올라 오기 시작했다. 바다 색깔도 초록에서 검푸른 대양(大洋)의 물색으로 바뀌었다.

 

새로운 바다, 그것은 새로운 나라였다. 국경을 넘어 낯선 나라로 들어간 것처럼 풍경과 냄새와 색깔과 분위기도 급변했다. 싱가포르의 적도적(赤道的)인 정물화 풍경은 사라지고 남성적인 역동적 바다가 펼쳐지고 있었다. 발코니의 구경꾼들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 식당으로 사라져 갔다.

 

저녁 7시25분, 동해2호는 호스버그 등대 바로 앞을 지나 남중국해 종단 항해로 돌입했다. 호스버그 등대는 바다 한가운데의 암초 위에 버티고 있었다. 어둑한 바다 속에서 파도를 맞고 있는 얼룩무늬 등대는 겨울의 남중국해, 그 시작을 알리는 상징답게 처절한 인상을 주었다. 등대 바로 뒤에는 침몰선이 마스트만 비스듬히 내놓고 모로 누워 있었다. 말라카 해협 위험 수로의 양쪽 입구인 원 패덤 뱅크와 호스버그 등대 곁에는 이런 침몰선이 유적으로 남아 겁을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26시간 만에 두 침몰선 사이를 주파한 것이었다.


삼성전자 뉴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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