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닷컴

  1. 칼럼
실명(失明)한 코미디언의 겉과 속 갑자기 그의 튀어나온 배가 미워 보이지 않았다. 엄상익(변호사)  |  2019-06-10
텔레비전의 한 프로에서 코미디언 이용식씨가 나와서 얘기하고 있었다. 유난히 튀어나온 배와 늘어진 턱살을 가진 나이 먹은 희극인이었다. 어쩌다 화면에 비친 그의 모습을 보면 호감이 가지 않았었다. 말 한 마디, 표정 하나에도 사람들을 가볍게 웃기려고 하는 의도가 엿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에로 같은 그의 삶은 짙은 슬픔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망막의 핏줄이 터져 제가 한쪽 눈이 보이지 않게 됐습니다. 눈동자가 허공의 한 곳을 향해 움직임이 정지됐습니다. 그런데 제 눈을 보세요. 그렇지 않죠? 정상으로 보이려고 얼마나 연습을 했으면 이렇겠습니까?”
  
  그의 양쪽 눈이 카메라를 통해 클로즈업 됐다. 겉으로 보아서는 그가 실명한 사람 같지 않았다. 무대 위에 서는 그는 자신의 장애보다 관객들이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이 중요한 것 같았다. 나 역시 한쪽 눈이 녹내장으로 시야가 가려지고 안개낀 듯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우울해지고 절망감이 엄습할 때가 많다. 그나 나나 모두 칠십을 향해 가는 노인들이다. 늙는다는 건 눈도 안보이고 귀도 잘 안들리고 몸의 여기저기가 고장이 나기 마련이다. 풍화와 소멸의 과정을 섭리로 받아들여야 할 때다. 프로에서 그가 어릴 적 살던 인천의 바닷가 산동네 골목을 걸으면서 말을 한다.
  
  “여기 판자집들이 많았어요. 제가 어릴 때 거기서 살았죠.”
  
  그의 표정에 감회가 떠올랐다. 그 감회가 어떤 것인지 그와 동시대를 살아온 나는 알 것 같았다. 나도 판자집이 바닷가의 굴껍질 같이 닥지닥지 붙은 낙산 아래 살았다. 집에서 몇 분만 걸으면 판자집이 어깨를 맞대고 붙어 있는 청계천의 구정물이 보였다. 방글라데시의 빈민촌에 사는 소년들처럼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크는 아이들이었다. 화면이 바뀌어 이용식씨가 집의 식탁 앞에서 가족과 함께 즐겁게 먹고 마시는 장면이 나왔다. 먹음직스러운 붉은 고기 조각이 끓는 냄비 옆 접시 위에 놓여있었다. 그가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평안도 사람인데 아버지가 어느 날 처자식을 두고 남쪽으로 내려가 버리셨어요. 가족을 버리고 혼자 도망을 간 거죠. 북한의 내무서에서는 어머니를 잡아다가 아버지가 있는 곳을 대라고 손톱 사이에 가시를 박아넣으면서 고문을 하기도 했어요. 후에 어머니는 인천으로 피난을 내려와 죽을 때까지 자식만 위해서 살았어요. 새벽 네 시가 되면 양철 다라이를 머리에 이고 선착장에 가서 생선을 받아다가 행상을 하신 거죠.”
  
  흙수저 출신인 그의 성장 과정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갑자기 그의 튀어나온 배가 미워 보이지 않았다. 어릴 적 배고플 때의 소망이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어머니는 나중까지 새벽기도를 빼놓지 않으셨어요. 산동네 예배당에서 새벽기도를 마치고 돌아와 집 앞에 앉으셨는데 그런 모습으로 조용히 돌아가셨어요. 지나가는 사람들은 어머니가 쉬시는 줄 알았지 돌아가신 줄을 전혀 몰랐대요.”
  
  말을 들으면서 나의 그에 대한 선입견은 변하고 있었다. 무대 위의 피에로 같은 그의 겉만 봤던 것이다. 그가 직접 표현은 안 했지만 어머니의 기도가 쌓인 그는 결코 헛웃음이나 짓는 공허한 인간일 수 없었다. 세상 사람들은 금수저를 선망하고 흙수저로 태어났음을 원망한다. 그러나 나는 믿음은 그걸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준다고 생각한다. 흙수저도 불의 시련을 받으면 귀한 도자기가 된다. 내면에 성령(聖靈)의 불이 들어와서 활활 타면 어떤 현실에서도 가진 것에 만족하는 부자가 된다고 믿는다. 이백억을 얻고 싶은 사람에게 백억은 가난이다.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는 사람은 없어도 부자다. 흙수저 출신 코미디언 이용식씨는 이조백자 같이 귀한 대스타가 되었다. 나는 마음속에서 성원의 박수를 보냈다.
  
  
삼성전자 뉴스룸
  • 무학산 2019-06-10 오후 4:11:00
    무언가를 생각케하는 글입니다
    전 엄변호사 님과 달리 저는 처음부터 이용식 씨를 좋아했습니다. 그냥 좋아했죠 사람을 웃기는 그 모습이 다른 희극인과는 달리 어딘가 순수성이 있어 보였습니다.
    저런 어머니 밑에서 자란 덕분에 얻은 순수성인지도 모르죠
  • 나라가 바로서야 2019-06-10 오후 3:41:00
    아하!! 이용식 선생이 이런 분이시군요^^^ 존경합니다~~~
  • 글쓴이
  • 비밀번호
  • 비밀번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