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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在寅의 金元鳳 관련 주장은 金九의 ‘白凡逸志’가 全面 否定하는 허구 이동복  |  2019-06-13

  


   文在寅에게는 정치적, 도의적, 형사적 책임이 추궁되어야 한다  
  


  


   광복군에는 무정부주의 세력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서 약산 김원봉(金元鳳)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어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집결했다. 통합된 광복군 대원들의 불굴의 항쟁 의지, 연합군과 함께 기른 군사적 역량은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한·미동맹의 토대가 되었다이상은 대통령 문재인(文在寅 ) 씨가 지난 6일 그가 발표한 현충일 기념사에서 김원봉과 그가 이끌던 조선의용대에 관하여 언급한 대목이다. 그러나, 문재인 씨의 이 같은 언급 내용은 1945년 충칭(重慶)에서 광복군 창설을 주도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그의 자서전 백범일지(白凡逸志)’에서 설명해 놓은 당시의 사정과는 동떨어지게 상이(相異)한 것이다.   
  


  


   백범일지의 관련 대목을 아무리 뜯어보아도 거기에는 문제의 김원봉의 행적이 문재인 씨가 거듭거듭 주장하는 내용으로 기술되어 있지 않은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김구는 그와는 반대로 백범일지에서 공산당 그리고 김두봉김원봉이 이끌던 의열단과 임시정부 사이에 전개되었던 갈등 관계를 여러 차례 언급하면서 공산당과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관계라고 혹평했을 뿐 아니라 광복군에 관하여 언급한 대목에서도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 당시의 임시정부 사정에 관해서는 김구의 자서전인 백범일지이상으로 권위 있는 기록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자타(自他)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만큼 문재인 씨와 그의 추종자들은 김원봉에 관하여 백범일지의 내용과 상치(相馳)되는 내용을 주장함으로써 역사를 왜곡할 뿐 아니라 이 같이 왜곡된 사실을 토대로 김원봉에 대한 서훈(敍勳)’을 획책하여 대한민국의 건국과 호국을 위해 순국한 전몰 장병들의 명예를 훼손한 데 대한 정치적도의적형사적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참고로, 다음은 범우사1984년부터 2002년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서 중간(重刊)백범일지에서 관련 대목을 발췌한 것이다. 애국 시민들이라면, 그리고 특히 젊은 세대들이 이 백범일지의 관련 대목을 읽고 이에 근거하여 문재인 씨와 그의 추종자들을 문죄(問罪)하는 일에 동참하기를 바란다.   
  


  


   이때 대일전선(對日戰線) 통일동맹이라는 것이 발동하여 또 통일론이 일어났다. 김원봉(金元鳳)이 내게 특별히 만나기를 청하기로 너느 날 진회(秦淮)에서 만났더니 그는 자기도 통일운동에 참가하겠은즉 나더러도 참가하라는 것이었다. 그가 이 운동에 참가하는 동기는 통일의 목적인 것보다 중국인에게 김원봉은 공산당이라는 혐의를 면하기 위함이라 하기로 나는 통일은 좋으나 그런 한 이불 속에서 딴 꿈을 꾸려는 통일운동에는 참가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얼마 후에 소위 5(五黨) 통일회의라는 것이 개최되어 의열단(義烈團)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미주대한인독립당(美洲大韓人獨立黨)이 통일하여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이 되어 나왔다. 이 통일에 주동자가 된 김원봉김두봉(金枓奉) 등 의열단은 임시정부를 눈에 든 가시 같이 싫어하는 패라 임시정부의 해소를 극렬하게 주장하였고, 당시 임시정부 국무위원이던 김규식(金奎植)조소앙(趙素昻)최동오(崔東旿)송병조(宋秉祚)차이석(車利錫)양기탁(梁起鐸)유동열(柳東說) 일곱 사람 중에 차이석송병조 두 사람을 내어놓고 그 외 다섯 사람이 통일이라는 말에 취하여 임시정부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니 김두봉은 좋다고 하고 임시정부 소재지인 항주(杭州)로 가서 차이석송병조 양씨에게 5당이 통일되어 이름만 남은 임시정부는 취소해 버리자고 강경하게 주장하였으나 송병조차이석 두 사람은 굳세게 반대하고 임시정부의 문패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일곱 사람 중에서 다섯 사람이 빠졌으니 국무회의를 열 수도 없어서 사실상 무정부 상태였다.   
  


  


   조완구(趙琓九) 형이 편지로 내게 이런 사정을 전하였으므로 나는 분개하여 즉시 항주로 달려 갔다. 이때에 김철은 이미 작고(作故)하여 없고 5당 통일에 참가하였던 조소앙은 벌써 거기서 탈퇴하고 없었다. 나는 이시영(李始榮)조완구김붕준(金朋濬)양소벽(楊小碧)송병조차이석 제씨와 임시정부 유지 문제를 협의할 결거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져서 일동이 가흥(嘉興)으로 가서 거기 있던 이동녕(李東寧)안공근(安恭根)안경근(安敬根)엄항섭(嚴恒燮) 등을 가()하여 남호(南湖)의 놀잇배 한 척을 얻어 타고 호상(湖上)에 뜬 중(船中)에서 의회를 열고 국무위원 세 사람을 더 뽑으니 이동녕조완구와 김구(金九)였다. 이에 송병조차이석을 합하여 국무위원이 다섯 사람이 되었으니 이제는 국무회의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264265 
  


  


   노구교(蘆溝橋) 사건이 일어나자 중국은 일본에 대하여 항전(抗戰)을 개시하였다. 이에 재중(在中) 한인들의 인심도 매우 불안하게 되어서 5당 통일로 되었던 민족혁명당이 쪽쪽이 분열되어 조선혁명당이 새로 생기고 미주대한인독립당은 탙퇴해서 본래의 의열단 분자들만이 민족혁명당 이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분열된 원인은 의열단 분자가 민족운동의 가면을 쓰고 속으로는 공산주의를 실행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민족혁명당이 분열되는 반면에 민족주의자의 결합이 생기니 곧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조선혁명당 및 한국독립당과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보든 애국단체들이 연결하여 임시정부를 지지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임시정부는 점점 힘을 얻게 되었다....[266267 
  


  


   중경(重慶) 도착한 나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와 민족혁명당 본부를 찾았다. 그 당수 김약산(金若山)은 계림(桂林)에 있었으나 윤기섭(尹琦燮)성주식(成周湜)김홍서(金弘敍)석정(石丁)김두봉최석순(崔錫淳)김상덕(金商德) 등 간부들이 나를 위하여 환영연을 베풀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모든 단체들을 통합하여 민족주의 단일 정당을 만들 것을 제의하였더니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일치하여 찬성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단체들에게도 참가를 권유하기로 결의하였다.   
  


  


   미주와 하와이에서는 곧 회답이 왔다. 통일에는 찬성이나 김약산은 공산주의자인즉 만일 내가 그와 일을 같이 한다면 그들은 나와의 관계까지도 끊어버리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김약산과 상의한 결과 그와 내가 (連名)으로 민족운동이야 말로 조국 광복에 필요하다는 뜻으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의외의 고장이 생겼으니 그것은 한국국민당 간부들이 연합으로 하는 통일은 좋으나 있던 당을 해산하고 공산주의자들을 합친 단일 정당을 조직하는 데는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주의가 서로 다른 자와는 도저히 한 조직체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나는 병을 무릅쓰고 기강으로 가서 한국국민당 전체회의를 열고 노력한 지 1개월 만에 비로소 단일 정당으로 모든 당들을 통일하자는 의견에 대해 한국국민당의 합의를 이룰 수 있었다. 그래서 민족진영인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과 공산주의 전선인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민족전위동맹조선혁명자연맹 등 일곱 정당이 참가하는 7당 통일회의를 열게 되었다.   
  


  


   회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민족운동 편으로 대세가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조선해방동맹과 조선민족전위동맹은 민족운동을 위하여 공산주의 조직을 해체할 수 없다면서 퇴석하였다. 이렇게 되니 7당이 5당으로 축소되어서 순수하게 민족주의적인 새 정당을 조직하기로 한다는 8개 조항의 협정에 5당 당수들이 서명하였다. 이에 좌우 5당의 통일에 성공하였음으로 며칠을 쉬고 있던 차에 이미 해산했어야 할 조선민족혁명당 대표 김약산이 돌연히 탈퇴를 선언했으니 그 이유는 당의 간부들 및 그가 거느리는 청년의용대가 아무리 해도 공산주의를 버릴 수 없으니 8개 조항의 협정 내용을 수정하지 않을 때는 그들이 모두 달아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리 하여 5당 통일도 실패하게 되어서 나는 민족진영 3당의 동지들과 미주, 하와이 여러 단체에게 나의 불명한 허물을 사과하였고 이어서 원동(遠東)에 있는 3개 정당만을 통일하여 새로이 한국독립당이 생기게 되었다. 그런데 하와이 애국단과 하와이 단회회가 각기 해체하고 한국독립당 하와이 지부가 되었으니 역시 5당 통일은 이루어진 셈이 되었다....... 임시 의정원에서는 나를 국무회의의 주석으로 선거하였는데 주석(主席)을 국무위원들이 번갈아 가면서 하던 종래의 제도를 고쳐서 대내대외에 책임을 지도록 하였다. 그리고 미국서울워싱턴에 외교위원부를 설치하고 이승만(李承晩) 박사를 그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278280 
  


  


   이 무렵 중국 중앙정부의 서은증(徐恩曾) 씨로부터 나에게 오래 동안 중국에서 활동해 왔으니 무언가 일을 하나 남기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면서 사업 계획서를 제출해 달라는 제의가 있어서 나는 이에 응하여 장차 독립한 한국의 국군의 기초가 될 광복군 조직 계획서를 제출했더니 곧 좋은 의견이라는 회답이 왔다. 이렇게 되어서 임시정부에서는 이청천(李靑天)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있는 힘(미주와 하와이에서 보내온 돈 4만원)을 모두 들여서 중경 가릉빈관(嘉陵賓館)으로 중국인과 서양인 등 중요 인사들을 손님으로 초청하여 한국광복군 성립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우선 30여명 간부들을 서안(西安)으로 보내서 미리 가 있던 조성환 등과 합하여 한국광복군 사령부를 서안에 설치하는 한편 이범석(李範奭)을 제1지대장으로 하여 산서(山西) 방면으로, 고운기(高雲起본명 公鎭遠)를 제2지대장으로 하여 수원(綏遠) 방면으로, 김학규를 제3지대장으로 하여 산동(山東) 방면으로 각기 보내고 나월환(羅月煥) 등의 한국쳥년전지공작대를 광복군에 편입시켜 제5지대로 편성하였다. 그리고 김문호(金文鎬)를 광복군 징모쳐(徵募處) 3분처 주임으로 임명하고 그 밑에 신정숙(申貞淑)을 회계조장, 이지일(李志一)을 정보조장, 한도명을 훈련조장으로 각기 임명하여 상요(上饒)로 파견했다. 한국독립당과 임시정부 및 광복군의 일체 비용은 미주, 멕시코,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이 보내는 돈으로 썼다. 장개석(蔣介石) 부인 송미령(宋美齡)이 대표하는 부녀위로 총회로부터 1만 원의 기부가 있었다......[281283]
  


  

 


  
  • 이위공문대 2019-06-13 오전 9:55:00
    잘읽었습니다.
  • 이위공문대 2019-06-13 오전 9:55:00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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