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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행이야기
세계사의 수수께끼/어떻게 스웨덴 군대가 뮌헨을 점령했는가? 趙甲濟  |  2019-07-10

  독일 바이에른 주의 중심인 뮌헨에서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은 舊시가지에 있는 마리엔 광장이다. 두 개의 돔이 멋진 프라우엔 교회, 新시청 등이 있는 광장에서 신시청(Neue Rathaus)은 네오 고딕 식으로 1900년대에 지었다. 성당인 줄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인형극을 벌이는 시계탑과 전망대, 그리고 시청 마당의 식당이 인기다. 시청 앞에 기념비가 있고 꼭대기에 마리아상이 서 있다. 새겨진 글을 읽어보니 1638년 건립인데 스웨덴 군대가 뮌헨 등 바이에른 지방에서 철수한 것을 기념하여 만들었다. 머나 먼 北歐의 스웨덴 군대가 왜 독일남쪽을 점령하였는가?
  
  고등학교 때 역사 과목을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인류역사상 가장 잔인한 전쟁으로 꼽히는 新舊敎 대결의 30년 전쟁(종교전쟁으로도 불린다)이 1618~1648년까지 있었고 웨스트팔리아 조약으로 마무리되었다는 기억을 되살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 조약으로 유럽에서 종교 문제는 정치 갈등 요인으로 잦아들게 되고, 오늘의 유럽 국경선이 대충 결정되었다. 독일 인구의 약3분의 1이 죽은 데 따른 역사의 진보였다. 약800만 명이 죽었다고 한다. 독일인들은 400년 뒤 2차 세계 대전 때까지는 이런 참화를 겪지 않는다.
  
  바이에른은 비텔스바흐(Haus Wittelsbach) 가문이 11~20세기까지 900년간 단절 없이 다스린 덕분에 경제적, 문화적, 예술적 번영을 이뤘다(1871년 독일 통일 이후엔 명목상). 남쪽으로는 바이에른 알프스에 닿아 있는 비옥한 땅으로서 생산력이 풍부하였다. 지금 독일은 연방국가인데 바이에른 지역은 특히 독자성이 강하다. 準독립국가처럼 보이기도 한다. 면적은 7만 평방킬로미터이고 인구는 약1300만으로서 나라로 치면 스위스보다 크다. 주민 소득도 높은 편이다. 뮌헨은 유럽으로 들어오는 이민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뮌헨 공항 이름은 슈트라우스인데 이곳에서 장기집권하고 있는 기독교사회당의 작고한 당수 이름이다.
  
  오랜만에 지난달 뮌헨을 찾았다. 이민자, 노숙자, 거지가 많이 보였다. 시리아 내전으로 촉발된 유럽의 난민 사태 영향이 크다고 한다. 도시도 다소 불결해졌지만 치안은 좋다. BMW 알리안츠 지멘스 등 세계적 대기업이 있어 실업률이 낮다. 거리에 나서면 인종전시작 같다. 행인들의 발걸음이 빠르고 활기에 찬 모습이 뉴욕과 닮았다. 뮌헨은 옛날에 ‘독일의 파리’로 불렸지만 지금은 이런 호칭에 불만이 많을 것이다. 살기 좋은 도시 랭킹에서 비엔나를 젖히고 1등을 하는 경우도 있다.
  
  마리엔 광장에서 가까운 루드비히 거리는 압도적 중량감을 준다. 거리 양쪽에 즐비한 옛왕궁(지금은 박물관), 元帥의 홀, 극장교회, 관청건물은 큰 나라의 수도에서나 느낄 수 있는 무게이다. 원수의 홀에는 두 사람의 동상이 있다. 한 사람은 30년 전쟁 때 舊敎 군대를 지휘하였던 틸리 원수, 그리고 나폴레옹 전쟁 때 바이에른 장군이었던 사람이다.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는 17세기 30년 전쟁 때 합스부르크 황제가 이끌던 신성로마제국 군대와 손잡았던 바이에른 주축의 가톨릭 동맹군 사령관이었다. 그는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다스리던 지금의 벨기에 출신이었는데 30년 전쟁 때 신성로마제국의 일원으로서 신교도 세력을 소탕하기 위하여 나선 바이에른 選帝侯(신성로마제국 황제 선출권을 가진 영주) 막시밀리언 1세에 의하여 가톨릭 동맹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632년 73세에 죽을 때까지 유럽에서 일어난 수많은 전투에 참여하였다. 가톨릭에선 ‘갑옷을 입은 수도사’로 칭송받기도, 프로테스탄트로부터는 ‘마그데부르크의 도살자’로 욕을 먹기도 하였다.
  뮌헨 시청 앞에 있는 스웨덴 군대 철수 기념탑과 틸리의 운명이 연결되어 있다. 30년 종교전쟁의 발단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결정되어 있던 합스부르크의 페르디난트 2세가 지금의 체코인 보헤미아에서 일어난 신교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군대를 동원한 것이다. 프라하 왕궁에는 30년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는 창문이 있다. 신교도들이 황제의 신하를 창밖으로 던짐으로써 도전장을 냈다는 것이다.
  30년 전쟁에서 가톨릭 세력의 세 축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를 중심으로 한 신성로마제국과 바이에른이 중심이 된 가톨릭 동맹군, 그리고 합스부르크 왕조의 스페인이었다. 황제군은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 지휘하였고 동맹군은 틸리가 사령관이었다. 초장에는 가톨릭 군대가 연전연승하였다. 틸리는 화이트마운틴 전투에서 보헤미아의 신교도 반란군을 소탕하였고 가톨릭 군대는 독일 북쪽의 신교도 거점을 차례로 접수해갔다. 덴마크와 작센 공국을 중심으로 한 신교도 세력은 영국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황제군과 가톨릭 동맹군에 밀려 항복 직전으로 밀렸다.
  
  이때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푸스 왕이다. ‘현대전의 아버지’ 니 ‘북방의 獅子’로 불리는 30대 왕이 정예 부대 2만 명을 이끌고 독일 북부에 나타난 것이 1630년, 라이프치히 근교 브라이텐펠트에서 가톨릭 군대와 會戰한 것은 1631년 9월17일이었다. 신교도 측엔 스웨덴군 2만3000명, 작센군 1만7000명, 대포가 100문이었다. 가톨릭 측엔 황제군과 동맹군을 합쳐 3만2000명, 대포는 30여 문이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스웨덴군의 포병 기병 보병을 결합시킨 조직적인 공격이 선을 보인다. 작센군은 초장에 이탈했지만 스웨덴군은 압승을 거두어 가톨릭 군대를 거의 전멸시켰다. 전사 7600명, 포로 6000명, 부상자 1만2400명. 스웨덴군의 전사자는 2000명 정도였다. 이 전투는, 가톨릭으로 보면 다 이긴 30년 전쟁을 역전 시킨 것이고 신교도로 보면 起死回生의 승리였으며 스웨덴을 유럽의 강국으로 밀어올린 계기였다. 구스타프는, 스웨덴군을 비엔나까지 질주시켜 합스부르크의 사령부를 장악할 꿈도 꾸었지만 라인강을 따라서 남하, 틸리의 군대를 한번 더 격파한 뒤 드디어 뮌헨 등 바이에른 지방을 점거한다. 1632년의 일이었다.
  
  그해 11월16일 구스타프의 스웨덴군은 발렌슈타인이 지휘하는 황제군을 뤼첸에서 맞아 대승하는데 자신은 기병돌격을 지휘하던 도중에 戰死하였다. 스웨덴군의 저력은 왕의 戰死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승리로 가져간 점에서 잘 드러난다. 스웨덴군은 구스타프 왕이 38세에 죽은 뒤에도 독일의 약 반을 점령한 상태에서 1648년의 종전까지 가톨릭 군대와 싸웠다.
  
  30년 전쟁 후반기에 이 스웨덴을 돕고 나선 나라가 프랑스이다. 프랑스의 루이 13세는 재상 리슐리외의 보좌를 받아 가톨릭 국가인데도 합스부르크를 유럽의 라이벌로 인식, 스웨덴과 동맹, 가톨릭 세력을 친다. 30년 전쟁에서 완승하지 못한 합스부르크는 그 뒤 유럽의 패권을 잃게 되고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霸者가 된다. 스웨덴은 발틱해 南岸의 안전을 확보, 북구에서 霸者가 되었다가 60여년 뒤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의 도전을 받는다. 스웨덴-러시아 북방전쟁에서 패배한 쪽은 스웨덴으로서 그 뒤 국제적 영향력이 쇠퇴하는 대신에 러시아가 유럽의 새로운 강자로 올라서게 되었다.
  
  구스타프 아돌푸스는 유럽의 戰史에선 알렉산더, 한니발, 시저, 나폴레옹 급의 군사적 천재로 꼽힌다. 특히 현대 군사제도의 원형을 만든 점에서 평가가 높다.
  
  1. 유럽에서 처음으로 징집제를 실시, 용병 대신에 상비군을 건설하였다.
  2.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20년간 軍籍을 가져야 했는데 국가에서 월급과 땅을 나눠주었다. 로마 시대 이후 유럽 최초로 군인을 직업으로 격상시킨 사람이다.
  3. 보병, 기병, 포병을 결합시키고, 중대 대대 여단으로 편성, 각개전투가 아닌 조직적 전투를 할 수 있도록 교육과 훈련에 집중하였다.
  4. 기동성에 중점을 둔 편제와 무기와 전술을 개발하였다. 대포는 무게를 줄이고 집중사격을 했다. 보병도 편제를 집중사격이 가능하도록 바꿨다. 기병은 혼전할 때는 실효성이 떨어지는 권총 대신에 창검을 뽑아들고 돌격하였다.
  5. 전투를 뒷받침하는 기지와 보급의 확보에 신경을 썼다. 루터교도였던 그는 개신교의 수호자라는 대의명분에 맞게 軍律도 엄격하게 유지하려 하였다.
  
  구스타프는 소년 시절부터 군사 및 인문 교육을 잘 받았다. 마치 알렉산더 대왕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지도를 받았듯이. 戰場에 나가 있을 때는 신임하는 재상에게 內治를 맡겨 오로지 전쟁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가 30년 전쟁에서 활약한 것은 불과 2년이지만 세계사를 바꾼 2년이기도 했다.
삼성전자 뉴스룸
  • 홍일점 2020-01-17 오후 10:14:00
    알고 싶은 역사이야기 정말 잘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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