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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천억 재산가가 처음 맛본 ‘허연 수염을 한 영감이 만든 닭고기’ 엄상익(변호사)  |  2019-09-11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오후였다. 종로3가의 거리를 걷던 나는 여기저기 건물 귀퉁이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초라한 모습의 노인들을 보았다. 기운이 없는 눈길로 망연히 회색 구름이 낀 하늘을 쳐다보고 있기도 했다. 순간 가난한 그들이 죽음을 향한 마지막 여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시절의 가난은 미래의 꿈으로 그 통증을 마비시켰다. 그러나 늙어서의 궁핍은 체념으로 건너뛰어야 하지 않을까. 영원할 것 같은 젊음이 어느 순간 잦아들고 내 또래들은 모두 나이를 먹었다. 모두들 직장에서 퇴직을 하고 세상과의 인연의 줄이 끊어졌다. 대부분 성실하게 일했다. 노후를 대비해서 저축들도 하고 연금에 들기도 했다. 그런데도 가난은 저항할 수 없는 눈사태처럼 우리 모두에게 소리 없는 공포로 다가오는 것이다. 게으름의 결과도 아니고 나태의 죄값을 받는 것도 아니다.
  
  나의 아버지도 그랬다. 삼십 년간 시계추 같이 규칙적으로 회사를 다니고 정년퇴직을 했다. 그 다음 날 아버지는 황망한 표정이었다. 아들인 나에게 “회사를 안 가니까 이상해, 오늘은 뭘하지?” 하고 말했다. 삶 자체였던 일이 없어진 것이다. 얼마 되지 않은 퇴직금도 금세 날아갔다. 병이 찾아오고 아버지는 일찍 이 세상을 떠났다. 하나님이 데리고 가지 않으셨으면 노후 가난의 고통을 더 받았을지도 모른다.
  
  노년의 가난은 아버지만이 아닌 것 같았다. 도서관에서 죽은 조병화 시인이 노인 시절 쓴 시를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돈이 거의 다 떨어졌는데 언제 죽음의 천사를 보내시려느냐고 하나님께 묻고 있었다. 하나님의 계획이 차질이 없길 바란다는 시를 써서 하늘나라에 보내고 있었다. 반면에 돈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도 거지인 노인들이 있었다.
  
  천억의 재산가인 노인이 있었다. 부두 노동자로 시작한 그는 청계천의 판잣집에서 찌그러진 냄비에 길바닥에서 주은 배추 줄거리로 끓인 된장국에 보리밥을 먹으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돈이 생기면 판자집 비닐을 깐 바닥에 소중히 보관했다. 돈을 벌기만 하고 쓰는 걸 망각한 그는 노년에 부자가 됐다. 은행통장에 수십억 원이 잠겨 있었다. 그러나 담당 지점장은 ‘가난한 노인’이라고 했다. 노인 영혼에 전족이 됐던 가난은 부자가 되어서도 풀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지점장이 선물한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을 처음 먹어본다고 하면서 ‘허연 수염을 한 영감이 만든 닭고기’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노인은 그렇게 죽어갔다.
  
  또 다른 부자 노인을 봤다. 철공소 흙바닥에서 잠을 자며 선반을 돌리고 쇠를 깎던 그는 부자가 됐다. 그에게는 돈이 신이었다. 임종을 앞둔 순간까지 그는 산소마스크를 쓴 채 돈을 헤아리고 있었다. 그의 침대 매트리스 밑에는 재산목록인 종이쪽지가 있었다. 그 쪽지를 손에 꼭 쥐고 노인은 죽었다. 그는 자기 돈으로 기름진 음식을 사 먹은 적이 거의 없었다. 주위에 베풀지도 못했다. 그의 내면에 얼어붙은 가난이 그를 죽을 때까지 춥게 했다. 부자라도 그들은 노후의 가난을 면하지 못했다.
  
  노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곰곰 생각해 본다. 세상에 대처하는 마음은 여러 가지다. 가난하지만 행복한 노인 몇 명을 보았다.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혼자 사는 칠십대 중반의 친척 누님이 있다. 남편이 죽고 빈 집에서 유일한 친구인 강아지와 살고 있다. 평생이 고난의 연속이었다. 일찍 아버지를 잃었고 품팔이 바느질을 하는 엄마와 가난하게 세상을 떠돌았다. 결혼도 놓치고 혼자 일하면서 외롭게 살았다. 양지보다는 사회의 그늘에서 평생을 살아왔다. 그런 친척 누님이 걱정되어 찾아간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 살 만해. 주민센터에서 한 달에 10킬로그램 쌀을 줘. 그거면 나 혼자 충분히 먹어. 거기다 읍사무소에서 연금도 줘. 복지사가 수시로 찾아와 도와주기도 하고. 살 만해. 주민센터에 가서 컴퓨터 게임을 배웠어. 이만하면 행복해.”
  친척 누님의 죽은 남편이 쓰던 방에는 기도하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우연히 지혜로운 어떤 할머니의 노년을 듣기도 했다. 아들 며느리에게 얹혀살던 할머니가 어느 날 독립선언을 했다. 가지고 있던 땅을 팔아서 그 돈으로 오피스텔을 얻어 나갔다. 할머니는 돈을 쓰기 시작했다. 손자들이 올 때마다 몇십만 원씩 용돈을 챙겨 주었다. 찾아온 며느리에게도 잊지 않고 돈을 주었다. 병원을 갈 때면 콜택시를 불러 탔다. 할머니는 주변의 늙은 친구들에게 마음이 담긴 선물을 했다. 평소 신세를 지던 지압사에게도 의료의자를 선물했다. 그동안 수고에 대한 보답의 의미였다. 그리고 그 할머니는 이 세상을 떠났다. 아들이 열어본 할머니의 장롱 속 통장에는 아직도 돈이 남아 있었다. 모두들 그 할머니에게 감사했다.
  
  노년은 대개 가난해지기 마련이다. 나는 백 년 전 일본의 한 가난했던 노인이 쓴 글을 봤다. 그는 노년의 행복을 믿음에 기대어 볼 것을 조용히 권하고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자신의 골방에서 성경을 읽고 십자가의 예수를 우러러본다. 늙고 돈이 없다고 눈치 주면 교회에 굳이 나갈 필요가 없다. 무당에게 신이 내리듯 영이 다가온다. 예수의 영이다. 노인은 예수는 지금도 영으로 살아 있다고 했다. 영이 들어오면 그 힘에 의해 인간이 변한다고 한다. 어떤 고통도 견디어지고 세상이 환희와 만족의 세상으로 바뀐다고 했다. 나는 그 일본 노인의 비결을 믿고 싶다.
  
삼성전자 뉴스룸
  • 정답과오답 2019-09-11 오후 5:01:00
    늙고 돈이 없다고 눈치 주면 교회에 굳이 나갈 필요가 없다. 무당에게 신이 내리듯 영이 다가온다. 예수의 영이다
    저는 예수의 영이아니고 저의 수호령이 있습니다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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