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인도로부터 배워야 할 것
1차 세계대전이 후반부에 이른 1918년 4월에 인도 총독은 간디를 델리에서 개최된 전쟁회의에 초청하였다. 아마도 제국에 대한 지지를 보여주고 인도 독립에 도움을 얻기 위해서 간디는 전쟁 수행에 인도인들을 적극적으로 모병하기로 동의하였던 것 같다.〉
1901년 빅토리아 여왕이 서거하였을 때 인도의 인구는 3억이었다. 그런데도 亞大陸(아대륙) 인도를 통치하는 인도행정청의 영국인은 1000명에 불과하였다. 영국인 한 명이 인도인 공무원들의 보좌를 받아가며 30만의 인도인들을 다스렸던 것이다. 영국 행정관들은 인도인들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받으며 언어와 종족과 종교와 역사에 있어서 대단히 다양한 나라를 효율적으로 다스렸다. 영국 관리들의 부패 불가능, 업무처리에 있어서 절대公正(공정)이 이것을 가능케 하였던 주된 요인이었을 것이다. 영국은 또한 경찰과 군대도 병력의 대부분을 인도인들로 충원하였다. 그래서인지 영국의 식민통치에 대한 인도인들의 거부감은 그렇게 크지 않았던 것 같다.
많은 인도인들이 親英派(친영파, Anglophile)가 되어 영국적인 것을 사랑하게 되었고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인도를 위해서는 독립하는 것보다는 영국 체제를 유지하기를 원하는 사람도 많았다. 위대한 독립운동가 간디가 지도하는 국민회의黨 멤버들도 독립파와 反독립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독립을 반대한다고 해서 반역자나 매국노로 낙인되는 것은 아니었다. 1857년 10만 명이나 죽은 세포이(sepoys) 亂(난)의 요인도 독립을 위한 것보다는 주로 종교적인 갈등 때문이었다. 反軍 진압에 인도의 지방 호족과 인도 용병들이 자진해서 대거 참여하였다.
인도인들은 영국이 수행하는 많은 전쟁에도 영국군에 자원입대하여 싸웠다. 간디도 1900년 보아전쟁에 참전하여 훈장까지 받았고 1차 세계전쟁 때는 '입대 호소문'까지 만들어서 “군에 입대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며 인도인들의 참전을 독려하였다. 150만 명의 인도인들이 영국군에 지원하였다. 간디는 2차 세계대전 동안에도 나치스와 싸우는 영국군에 '비폭력적, 도덕적 지원'을 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국민회의 일부 지도자들이 인도인 대표자와 상의 없이 영국이 일방적으로 인도의 참전을 결정하였다며 반발하자 간디는 숙고 끝에 “자유를 위해 싸운다면서 인도에게는 자유를 주지 않는 전쟁에는 참여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국민회의 당원들과 많은 정치집단이 나치 독일과 싸우는 영국을 지원하지 않는 것은 비윤리적이라고 비판하였다.
2차 대전에서 인도인 250만 명이 영국군에 자원입대하였다. 인도인들은 또 많은 물자도 지원하였다. 인도군은 에티오피아, 北아프리카, 中東 전선에서 영국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인도군은 동남아시아 전선에서도 일본 地上軍에 史上 최대의 패배를 안겨주었다. 인도병사들의 충성심은 대단하였다. 아프리카 전선의 한 인도군 병사는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의 경애하는 국왕폐하(注:영국 국왕)께서 이 나라를 정복하셨습니다”라고 자랑하기도 하였다.
인도는 영국과 독립전쟁을 하지 않고도 영국의 축하를 받으며 독립하였다. 독립 후에도 영국과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 지금도 親英派들이 많다. 인도의 상류층 자녀들은 거의 전부 영어전용학교에 다닌다. 인도경제 발전에 영어능력이 크게 기여하고 있다, 미국이나 영국의 기업들이 언어의 장벽이 없고 임금이 저렴한 인도에 투자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인도는 또 영국 식민지였던 나라들의 친목단체인 英聯邦(영연방) 창립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300년 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영국이 어려울 때 영국을 도와가며, 영국의 축하를 받으며 평화적으로 독립을 획득하고, 간디처럼 영국에 적극 협조한 사람들이나, 영국과 싸운 사람들이나 모두 애국자로 기리며, 全세계 사람들에게 善한 이미지를 깊이 각인시키고 있는 인도인들이 존경스럽다. 對일본 증오 집단 히스테리에 걸려 이성이 마비되어 가고 있는 한국인들이 全세계 사람들에게 어떤 이미지로 비쳐지고 있을까? 한국은 인도로부터 많이 배워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