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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권력자나 재벌 앞에서 비굴하지 않는 방법 잘 살라고 하니까 문제지 죽겠다고 하면 어떤 것도 문제가 될 수 없다. 엄상익(변호사)  |  2019-09-12
뜬금없이 문자 메시지 한 통이 왔다. 스캔해서 보낸 공소장과 함께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이 사건은 검사장 출신 변호사가 집행유예를 조건으로 2억3천만 원의 수임료를 받았다가 당사자가 구속되는 바람에 실패한 사건입니다. 구속된 사람은 수임료를 30억 원 주겠다고 합니다. 검토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래 전 내가 군 판사로 있을 때 서기로 근무하던 분의 메시지였다. 공소장의 내용을 보면 도박사이트를 운영했던 사람이 잡혀 들어간 것 같았다. 도박이나 마약 근처에는 돈이 폭포같이 몰리는 것 같았다. 내가 아는 부잣집 아들은 정선의 카지노에서만 백억을 날렸다고 고백했었다.
  
  나는 그 사건을 상담조차 거절했다. 나라는 상품 브랜드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이 보내주는 사건만 맡는다는 나름대로의 직업적 철학을 준수해 왔다. 모함을 당하거나 억울한 사람을 대신해서 입이 되어 싸워주고 그의 십자가를 함께 져 주는 일이었다. 돈 때문에 실없는 웃음을 흘리면서 교만한 판사 앞에서 비굴하기 싫었다.
  
  의뢰인이 제시하는 큰 돈 속에는 반드시 악마의 낚시 바늘이 숨겨져 있다. 그걸 무는 순간 아가미가 꿰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낚싯대를 잡고 있는 악마에게 생포되는 것이다.
  
  몇 년 전 신문에서 읽은 한 기사가 떠올랐다. 고위직 판사를 지냈던 여성 변호사가 구치소를 찾아갔다가 수감된 회장에게 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는 그들 사이에 거액의 수임료가 오고 갔다고 폭로하고 있었다. 그 여성 변호사는 존경받던 판사였었다. 법관 사이에서 평판도 좋았다. 결국 돈에 자기를 팔았다가 혹독한 대가를 치른 것이다. 구속되어 후배 판사들에게 재판을 받았다.
  
  변호사를 해 오면서 나는 전문직들에게 필요한 건 자존심이라는 게 나의 주관적 사견이다. 돈만 벌 수 있다면 얻어맞고 무시당해도 괜찮다는 변호사를 보았다. 의뢰인을 만족시킨다면 증거인멸도 범죄도 할 수 있다는 변호사를 보았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첨병이고 고용된 양심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그들을 파우스트 박사처럼 악마에게 넘어간 변호사라고 본다. 그러나 현실에서 자존심을 지키기는 정말 어려웠다. 씁쓸한 패배의 경험이 있다.
  
  한 재벌그룹의 회장의 친동생이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었다. 그 그룹의 법무실에는 이백 명 가량의 변호사가 소속되어 일하고 있었다. 어느 날 회장실에서 연락이 왔다. 회장 동생이 구속된 사건을 선임하려고 하니 오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회장님이 나의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 회장은 오지 않았다.
  
  며칠 후 그 그룹의 동경지사에 근무하던 처남이 회장의 소환명령을 받고 귀국해서 나를 찾아왔다. 처남은 난감한 표정으로 회장실로 가달라고 사정했다. 그룹의 법무실에는 쟁쟁한 실력의 변호사들이 많았다. 왜 별 볼 일 없는 변호사인 나를 지목했느냐고 물었다. 처남은 그 사건을 담당하는 재판장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가장 친한 친구가 나라고 결론이 났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라면 더욱 사건을 맡기가 싫었다. 우정을 상품화해서 팔아먹는 배신이라는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전관예우라는 것도 그 비슷했다. 같은 조직에서 근무한 인연을 상품화하는 배신 행위였다.
  
  인질이 된 처남 때문에 항복을 하고 회장실로 갔다. 한 시간이 넘게 대기실에서 기다렸는데도 회장은 부르지 않았다. 일부러 그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뒤늦게 들어간 회장실에는 몇 명의 임원들이 앉아 있었다. 고교 동기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에 알 수 없는 그림자가 보였다. 순간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힘의 과시였다. 나는 회장 앞에서 허리를 굽혔다. 처남이나 친구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모두 나간 후 회장과 둘이서만 있을 때였다.
  
  “꼭 이런 식으로 유치하게 행동하셔야겠습니까? 회장님.”
  
  회장이라는 사람이 천박하게 보였다. 권력자나 재벌 앞에서 비굴하지 않는 방법은 간단하다. 자리나 돈에 대한 욕심을 내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말이 자유롭게 튀어나왔다. 나이 든 회장의 얼굴이 순간 변하는 것 같았다. 짧은 침묵이 흐른 후에 내가 다시 이렇게 말했다.
  
  “저에게 꼭 부탁하실 것이 있다면 내일이고 모레고 혼자 저의 사무실로 오세요. 회장님도 그룹의 브랜드를 싸게 팔기 싫어서 이러실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시면 제가 동네 가게에서 국수 한 그릇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며칠 후 늦은 저녁 회장이 혼자 조용히 찾아왔다. 나는 근처 음식점으로 그를 데려가 국수를 샀다. 그 순간 서로의 마음문이 활짝 열리는 것 같았다. 나는 하나님에게 굶어 죽을 용기를 가지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한다. 잘 살라고 하니까 문제지 죽겠다고 하면 어떤 것도 문제가 될 수 없다는 마음이다.
  
삼성전자 뉴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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