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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표정의 全 대통령-“모든 직위 걸고라도 軍 출동 막겠다”는 盧 대표 1987년 6월19일 全斗煥은 비상계엄령 준비를 명령했다!(3) 趙甲濟·金永男  |  2020-01-24
 밝은 표정의 대통령
 
  당초 계획은 밤 8시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해 비상조치권을 발동하는 절차를 밟고 9시 생방송을 통해 비상조치에 관한 담화를 발표하는 것이었다. 김성익씨는 “사태는 매우 긴박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라며 “그러나 군 핵심 간부들과의 회의에서 전 대통령의 표정에는 긴장감이나 무거운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명랑하다고 할 정도로 활기가 있었다”고 했다.
 
  당시 비상조치가 실천될 목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는 또 하나 있다. 전 대통령은 군 핵심 간부들과의 회의가 끝난 뒤인 오후 2시에 릴리 주한 미국대사를 만났다. 비상조치를 강행할 생각이었다면 조치 이후로 만남을 연기, 즉 미국이 이를 눈치채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릴리 대사는 청와대에 와서 전 대통령이 레이건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 대한 회신을 전달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군부대가 출동하여… 없기를 바란다”고 했다. 전 대통령은 “합리적인 생각이라고 본다. 나는 항상 정치문제는 정치적 대화로 풀어가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전 대통령은 릴리 대사와 만난 직후인 오후 4시경 출동 명령을 취소했다. 이 때문에 릴리 대사가 계엄령 선포를 막았다는 설(說)이 돌았다.
 
  노태우 대통령의 회고록에도 군 동원이 검토되던 6월 18~19일의 긴박한 상황이 담겨 있다. 그는 당시의 현행 헌법하에서는 대통령 선거를 치를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직선제로 가고 김대중씨를 사면·복권하기로 마음을 먹은 상황이었다고 했다. 그는 군 출동 준비 지시가 내려졌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盧 “모든 직위 걸고라도 軍 출동 막겠다 결심”
 
  〈6월 18일 자정에 전 대통령이 고명승 국군 보안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20일 새벽 4시를 기해 부산 지역에 위수령 발동을 전제로 한 군 출동 준비 태세를 갖추라고 지시했다는 것이었다. 청와대로부터 직접 통보를 받지는 못했으나 국방부와 군 쪽에서 알려준 내용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만일 이번 사태에 군을 동원한다면 이 정권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성심 강한 군 간부들도 군이 출동하면 불행한 사태를 맞게 될 것이라는 의견들이었다. 동원된 군이 누구 편에 서게 될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전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는 라인에 있는 이기백 국방장관, 안무혁 안기부장, 권복경(權福慶) 치안본부장 등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군의 출동만은 불가(不可)하다는 점을 건의해달라고 했다. 특히 권 치안본부장의 손을 잡고 “경찰력만으로 시위를 해결해야 군 출동을 막을 수 있다”고 당부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전 대통령이 끝까지 이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나의 모든 직위를 걸고서라도 군 출동을 막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다행히 6월 19일 오후 전 대통령은 이기백 국방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군 출동을 유보시켰다.〉
 
  김성익씨의 관찰은 이렇다.
 
  〈전 대통령은 집권 말기인 86년 하반기부터 비상조치나 군부 동원에 관한 얘기를 많이 했다. 정국이 어려워지기 시작한 86년 말에는 실제로 비상조치권 발동에 관한 일부의 건의를 받고 검토를 시킨 일도 있었다.
 
  87년에 접어들어 정부 여당이 밀리는 상황으로 나가면서 각종 회합에서 비상조치를 언급하는 횟수는 더욱 빈번해지는 것을 목격했다. 전 대통령은 그러면서도 자신의 속을 털어놓을 상대에게는 군부 동원은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것임을 확실히 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심리전술을 통치에 원용,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군부 동원의 실감을 줄 수 있다는 계산 아래 힘을 과시하려는, 바둑으로 말하면 ‘사석작전(捨石作戰)’ 같은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전 대통령 자신은 퇴임 후 이때의 상황을 언급, “나는 이미 극적인 방안을 결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 동원 지시는 별개 문제였다”면서 “군 동원 지시는 치안 차원에서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서 예방적 효과도 감안해서 지시한 것”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극적 조치’는 물론 직선제 수용과 김대중씨 사면·복권을 가리킨다.〉
 
 
  “전두환이 먼저 직선제 제안”
 
노태우 대표를 대선 후보로 확정한 1987년 6월 10일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함께 손을 잡고 인사하는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표. 두 사람은 6·29선언으로 가는 과정에서 역할분담을 하고 협조했다.
  전두환 대통령의 군 동원 계획이 유보된 열흘 후, 노태우 당시 후보의 6·29선언이 발표됐다. 직선제 수용 등 8개 항이 담겼다. 그는 “오늘의 이 시점에서 저는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고 국민적 화해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대통령 직선제를 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국민은 나라의 주인이며, 국민의 뜻은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렇게 대한민국은 새로운 민주주의의 길로 가게 됐다. 이와 관련해 오랫동안 논란이 돼온 것은 전두환과 노태우 중 누가 6·29선언의 주역(主役)인가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6월 17일 오전,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어 있던 노태우 대표를 청와대로 불러 직선제를 수용할 것을 제안했다면서, 노 대표는 직선제 개헌을 선택할 경우 후보직을 사퇴하겠다는 발언을 했다고 적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소요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비상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는데 군대를 동원하는 일을 끝까지 피하고 싶다며 노 대표를 설득했다고 한다. “비상조치를 취하게 되면 경제에도 악영향을 주고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에도 장애요인이 될 우려가 있다”고 했다. “직선제로 해도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사례를 들며 자신감을 불어넣어 줬다는 것이다.
 
  6월 17일은 전 대통령과 노 대표가 청와대에서 저녁을 함께 하며 ‘떠나가는 김삿갓’을 합창한 날이다. 김성익씨는 이렇게 기록했다.
 
  〈노 대표가 참석자들에게 백성이 원하는 바를 초점으로 하는 것이 대통령의 뜻이라고 말한 것은 전 대통령과 노 대표 사이에 참석자들이 그 내용을 모르는 어떤 얘기가 별도로 진행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것은 직선제 수용에 관한 얘기였다. 이 모임이 시작되기 전 대통령은 노 대표위원과 따로 비밀리에 만나 얘기를 나눈 뒤 다른 참석자들보다 늦게 이 자리에 나타났다.〉 (계속)
삼성전자 뉴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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