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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지상천국 크루즈선을 지옥으로 만드는 사람들 엄상익(변호사)  |  2020-06-04
​2019년 세계 일주를 하는 이태리 크루즈선에 탄 적이 있다. 베네치아에서 출발해서 세계를 한 바퀴 돌아서 다시 베네치아로 돌아오는 배였다. 나는 그 배의 중간 정박지인 싱가폴에서 타서 인도양을 건넜다.
  
  배 안에는 여러 명의 한국인들이 보였다. 재벌 회장의 아들 부부가 있었다. 전직 고위 경찰 관료 부부가 타고 있었다. 사업을 해서 부자가 됐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반면에 전혀 부자가 아닌 사람들도 있었다. 동사무소에서 평생 말단 공무원으로 지내다가 정년퇴직을 하고 세계 일주 크루즈 선에 올랐다는 독신여성이 타고 있었다. 시골에서 일생 농사만 짓다가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구경하고 싶어 배에 올랐다는 노인 부부도 있었다. 지하상가에서 작은 가게를 하다가 나이 오십부터는 집을 팔아서라도 놀다가 죽겠다고 결심한 부부도 있었다. 서울의 아파트를 팔고 지방으로 이사를 하면서 그 차액의 돈으로 크루즈선을 탄 노인 부부도 있었다.
  
  이미 몇 달간 항해를 해 온 그들은 그 안에서 편이 갈려 원수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지상천국인 세계 일주 크루즈선 안에서 그들은 싸우면서 지옥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양쪽의 사람들은 도중에 배에 올라탄 내가 누구의 편일까 궁금해 하고 서로 자기 쪽으로 끌려고 하고 있었다. 서울 근교도시로 아파트를 옮기고 도중에 남은 돈으로 크루즈선을 탄 부인이 내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경찰청장을 지냈다는 사람이 얼마나 우쭐대고 교만한지 모르겠어요. 밥을 먹을 때도 제일 상석에 앉으려고 하고 온 사람들을 은근히 깔아뭉개는 거에요. 농사짓다 온 노인네 부부는 그 앞에서 주눅이 들어서 꼼짝을 못해요. 내 돈 내고 여행을 와서 이게 뭔지 모르겠어요.”
  
  동사무소에서 평생 공무원으로 근무했다는 독신 여성이 한번은 갑판에서 만나 이렇게 하소연을 했다.
  “정박지마다 버스를 타고 옵션 여행을 하는데 재벌 아들이라는 부부한테 제가 먼저 인사를 했어요. 그런데 한 번도 제대로 인사를 받지 않는 거에요. 무시당했다는 기분도 들고 모멸감이 들어요. 제가 반드시 사과를 받아내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좋죠?”
  
  또 다른 특이한 부부가 있었다. 그들은 한국인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고 백인들하고만 어울리고 있었다. 하루는 그남편에게 다가가 내가 먼저 인사를 했다. 그와 잠시 대화를 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우익이에요. 좌파가 설치는 한국에서 못 살겠어요. 한국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번 말해보세요. 저는 노력해서 부자가 됐어요. 그리고 책도 많이 읽었죠. 명사들이 참여하는 독서클럽에도 나가고 있어요. 그리고 말이죠, 어제 저녁을 먹을 때 한국여행객 중에 예수쟁이 아주머니가 전도하려고 하길래 불같이 화가 났었어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도 하지 못하면서 무슨 놈의 전도를 하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는 마음 깊은 곳에 가난하고 무식했던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 같았다. 아름다운 바다 위에 떠가는 지상천국인 세계일주 크루즈선 안에서 그들의 마음은 모두 지옥 속에 빠져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매일매일 싫은 사람을 마주하는 것은 고통이 분명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안의 사람들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재벌의 아들은 나름대로의 슬픔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계속 취해 있었다. 교만하다는 경찰 출신은 경찰청장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부자라고 자랑하던 사람의 내면은 아직도 빈궁해 보였다. 나름대로 자기가 만든 불행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매일 아침바다와 점심 그리고 해질녘의 바다를 보곤 했다. 아침바다는 수평선 저쪽의 어둠을 밀치면서 서서히 붉은 빛으로 다가왔다. 하연 포말을 머리에 얹은 점심 무렵의 파도는 그 싱싱한 푸름이 가슴 속까지 저릿하게 했다. 저녁 햇살에 빗긴 남색의 바다는 명상적이었다. 바다는 그때 그때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나는 천국 속을 흘러갔다. 천국은 보려고 하는 자 들으려고 하는 자에게는 언제나 열려있는 것 같다. 눈이 아니라 가슴을 통해서 내가 소풍을 온 지구를 구경하려고 한다. 가슴으로 모아야 전에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다. 처마에 달린 고드름 속에 들어있는 무지개를 보는 것도 그런 가슴이 아닐까.
  
삼성전자 뉴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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