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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이 친일파, 박정희·전두환은 극일파(克日波) ‘토착왜구’ 연구(下) 趙甲濟  |  2020-06-22

대륙낭인 우치다 료헤이
 
 반일 대통령의 딸이 자유의지로 선택한 대학이 하필 왜 조선 침략 인맥이 세운 우익 학교냐에 대한 설명을 청와대가 한 적은 없다. 반일 대통령의 딸이 다닌 이 극우대학의 건학 이념과 닿아 있는 대륙낭인의 숨결을 느끼려면 도쿄 교외 다마레엔(多磨靈園) 공원묘지에 갈 필요가 있다. 36년 전 여름, 나는 이 묘지의 14구(區) 1종(種) 9속(屬) 12호를 찾았다. 한일합병의 막후 실력자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의 화장한 뼛가루가 묻혀 있는 묘가 거기에 있었다. 돌난간으로 둘러 처진 약 30평 되는 큰 무덤. 우람한 비석이, 묻힌 인물의 크기를 말하는 듯했다. 나를 안내한 우치다 연구가 다키자와 마코도 씨(瀧澤誠 당시 45세·저술가)가 분향, 묵념했다.
 우치다는 일본 우익사상의 뿌리에 터잡고 있는 대륙낭인이다. 우치다는 1874년에 ‘국권(國權)주의와 대륙 팽창주의의 요람’이라고 불린 후쿠오카에서 검객(劍客) 집안의 아들로 났다. 그는 숙부 히로오카 고타로(平岡浩太郞)로부터 글과 칼을 함께 배우며 자랐다. 검도, 유도의 달인이 된 우치다는 히로오카가 창립한 정치결사이자 일본 우익단체의 효시 현양사(玄洋社)에 들어갔다. 이 현양사는 반일 대통령 문재인 씨 딸이 다닌 대학의 정신적 모태이기도 하다.
 우치다가 반도와 대륙에서 활동무대를 찾게 된 것은 청일전쟁 뒤였다. 일본의 가상 적(敵)으로 등장한 러시아에 대해 일본 국론(國論)이 ‘민족주의의 발흥’을 보이고 있을 때였다. 우치다는 1895년 블라디보스토크에 유도 도장을 차렸다. 이 도장은 대륙낭인과 일군(日軍) 첩보원들의 기지가 되었다. 그는 흑룡강변을 여행하면서 이렇게 썼다.
 <아시아의 전(全)사회를 이처럼 아름다운 꽃밭으로 가꾸는 것이 일본의 사명이다. …누가 광활한 황야를 러시아로부터 지킬 것인가. 그 일은 우리 일본이 해야 하며, 그러려면 일본의 국력을 흑룡강까지 뻗게 해야 하고, 그러기에는 지금이 가장 적절한 시기다.>
 뒤에 그가 조직한 우익 단체가 흑룡회란 이름을 딴 것도 만주 벌판에 대한 우치다의 집착을 상징한 것이었다.
 
 
 伊藤博文이 탄 名馬-우치다
 
 우치다는 시베리아 철도를 경유, 러시아를 돌면서 정탐 여행을 했다. 러일전쟁 뒤 우치다의 관심은 다시 한반도로 기울었다. 메이지 정계(政界)의 막후 거물인 스기야마 시게마루는 초대 통감으로 부임해 가는 이토 히로부미에게 말했다.
 “지금 일본에는 비길 데 없는 명마가 한 필 있습니다만, 불행하게도 그 말을 부릴 수 있는 인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각하께서 그 말에 재갈을 물리고 한번 부려 봄이 어떻겠습니까?”
 이토는 “그 말에 한번 타고 싶군요”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일본 우익의 준마 우치다 료헤이는 이토의 개인 참모로 서울에 왔다. 여기서 우치다와 이용구의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진다. 한 사람은 나라를 팔고, 다른 한 사람은 나라를 사는 그런 관계의 만남이었다. 우치다는 한국과 일본이 대등한 합방을 한다고 순진한 이용구를 설득, 이용해먹었고, 이용구는 합방이 아니라 합병임을 알고는 실의(失意) 속에서 일찍 죽었다는 스토리가 이어진다. 일본 우익들은 ‘우리도 정권에 속았다’고 변명하는데 다 짜고 하는 이야기이다.
 
 
 속은 자와 속인 자

 
 이용구(李容九)는 1868년 경북 상주의 양반 가문에서 났다. 12세 때 동학 교주 최시형의 문하로 들어갔다.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전봉준의 참모로 참여했다. 공주 전투에서 일본토벌군과 싸우다가 오른쪽 발에 총상을 입었다. 러시아, 일본이 각축하자 이용구는 일본 편으로 기울었다. 반일(反日)의 손병희와 헤어져 송병준과 함께 일진회(一進會)를 조직했다. 러일전쟁 때 이용구는 일진회를 동원, 일본군의 보급 활동을 지원했다. 철도 부설, 일군(日軍)을 위한 첩보 활동 등에 동원된 일진회원은 10여만 명이었다고 한다. 당시 대중조직으로서 일진회만큼 큰 단체는 없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참모로 한국에 온 우치다가 주목한 것은 일진회의 이런 대중 동원력이었다. 우치다는 일진회 고문이 되었다. 그는 일진회 운영경비를 대며 이 조직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우치다는 일진회를 이용, 여론을 조작하여 한일합병에 써먹었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 직후 이용구는 우리나라를 일본 천황의 은덕 아래 맡기자는 상주문을 대한제국 황제, 총리, 통감에게 보냈다. 이와는 별도로 가츠라 일본수상에게는 합방청원서를 보냈다. 일본은 합방 아닌 합병을 강행한 뒤 이용가치가 없어진 일진회도 해산시켜버렸다. 해산명령이 난 다음 날 이용구는 피를 쏟고 입원했다. 서른아홉 살의 우치다는 이즈음 자작시(自作詩)를 읊었다.
 <한의(韓衣)는 일본 옷으로 변하고 / 오늘부터 압록강에서 목욕하고 / 아마데라스 오미카미의 그림자를 우러러보리.>
 이용구는 심한 신경증상과 폐병으로 쇠약해져 갔다. 일본 효고현의 해안(海岸)에서 요양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일본정부가 내린 작위도 거부했다.

 
 이용구 아들, 최후의 인터뷰

 
 이용구의 아들 오히가시 쿠니오(大東國男)는 우치다 료헤이의 무덤에서 십 리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도쿄 교외 기치조지(吉祥寺)시의 조용한 주택가에 살고 있었다. 우치다의 무덤보다도 작은 건평 20평 정도의 초라한 일본식 목조 건물. 그 다다미방 한구석에서 칠십 노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1984년 여름). 앙상하게 뼈만 남은 그는 허리를 못 쓰고 몇 달째 반듯이 누워 지내고 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듬성듬성한 수염, 갸름한 얼굴 속에서 깊게 파인 두 눈동자만은 범상치 않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육십 노인의 몸으로 지금도 지압사로 일하며 남편을 부양하고 있는 일본인 부인의 부축을 받고 그는 비스듬히 돌아누웠다.
 그는 턱을 괴더니 이야기를 쏟아놓기 시작했다. 두서가 없고 중복이 많은 이야기였다. 옆에서는 그의 아내가 “그 이야기는 아까 했는데…”라고 속삭이며 조심스럽게 말리곤 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목소리 좋고 발음 정확한 표준 일본어였다. 표현은 절묘했고, 향수와 분노와 절통함에 떠는 그의 손짓도 격렬했다. 나는 연 사흘 동안, 그의 집에 출근(?)하여 총 15시간에 걸쳐 폭포수 같은 이야기 세례를 받았다. 그는 “죽기 전에 이것만은 꼭…”이라고 말하며 최단시간 내에 최대량의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조급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사흘째 날 밤늦게 헤어질 때 그의 부인은 남편에게 농담을 했다.
 “이제 속 시원히 한국 기자에게 털어놓았으니 죽어도 원이 없겠군요.”
 이야기의 주제는 아시아주의에 속은 아버지를 위한 변명이었다. 문다혜 씨가 다닌 대학이 이용구를 이용하여 합병에 써먹었던 우치다의 현양사 인맥이 만들었고 선택한 학과가 하필 ‘21세기 아시아학과’이기에 ‘20세기 아시아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시아주의의 종언
 
 후쿠오카에서 만난 현양사 거두 스기야마 시게마루(杉山茂丸. 우치다를 이토에게 소개한 사람)의 손자 스기야마 다쓰마루(杉山龍丸)도 한일합병의 모든 책임을 일본 국가에 돌렸다. 할아버지는 대등한 ‘합방’을 원했지 한일합병에는 절대로 반대했다는 거다. 하지만 일본에서 나온 연구서조차도 스기야마 시게마루를 합병의 주모자로 지목하고 있다.
 일본 우익은 서양 제국주의에 대항, 아시아민족(주로 한·일·중국)끼리 연방을 결성하자고 주장했지만, 동시에 천황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부정은커녕 일본 천황 중심의 합방을 주장하고 있다. 이 모순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아시아주의’는 이론상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다. 천황 산하에서의 합방, 즉 천황을 절대자로 받아들이는 합방이란 곧 병합을 의미하지 않을 수 없다. 대륙낭인이나 우익의 주장이 실천 단계에 가서는 꼭 왜곡되고야 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익의 이 허구성을 역이용한 것이 바로 일본정부였다. 대륙낭인들을 앞장세워 이상론으로 이용구를 유혹하고 실천 단계에선 나라를 빼앗아버린 것이 일본이었다. 일본이 특징은 그러한 이중적 연극을 각자의 배역들이 너무나 진지하게 수행한다는 점이다. 일본에서 가장 솔직하게(?) 조선 통치를 사죄, 반성하는 것은 우익이다. 사죄는 교묘한 변명이다. “우리도 속았다”고 함으로써 즉 합병의 모든 책임을 정부에 돌림으로써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변신하려는 것이 우익의 실체다.
  

 문재인이 친일파, 전두환은 극일파

 2020년 5월28일자 조선일보 칼럼 ‘누가 친일파인가’에서 이하원 도쿄 특파원은 결론을 이렇게 맺었다.
 <여당과 친문(親文)세력이 자주 활용하는 ‘친일파’는 오래전에 유효기간이 끝난 개념이다. 그럼에도 친일파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그들의 주장을 인정한다면, 지난 3년간 일본 사회의 친한(親韓)세력을 위축시키고 혐한세력의 힘을 키워준 문 대통령과 주변세력을 친일파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문재인이 반일(反日)로 위장한 친일파였다면 전두환·박정희는 친일(親日)로 위장한 극일파(克日派)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래 한일 경제성장률 비교 통계가 증명한다.
 전두환은 집권과정에서 비민주적 방법을 취한 점은 있지만 6·29선언을 통하여 한국의 민주화 흐름을 수용하였을 뿐 아니라 건국(建國) 이후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1980년대 연평균 10.1%로 세계 1위)을 기록, 민주국가의 든든한 버팀목인 중산층을 육성한 공이 더 크다.
 특히 전두환 정부 시절 한·미·일 동맹이 원활하게 작동하였다. 이것이 북한의 거듭된 도발을 저지하고 서울올림픽을 성공시키면서 사상(史上) 최고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게 만든 안보 구조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반일종족주의로 망친 한일 관계는 필연적으로 한미동맹을 약화시키고 한국의 기업활동을 저해할 것이다. 전두환의 자주적, 실용적 대일(對日)외교에서 배울 바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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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통계는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전두환-노태우(盧泰愚) 집권기 12년 동안 극일(克日)이 이뤄졌다. 전두환 정부는 일본 교과서 파동이 일어났을 때 반일을 넘어 극일, 즉 일본을 이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 약속은 실천되었다. 1981~1992년 한국 경제는 일본보다 거의 세 배나 빨리 성장하였다. 이 시기는 민주화 운동의 열풍(熱風)이 분 때이지만 튼튼한 경제가 그 충격을 흡수, 직선제 개헌(改憲)과 평화적 정권 교대가 이뤄졌다. 당시 일본도 호황(好況)이었지만 한국은 성장률에서 세계 최고였다. ‘일본을 따라잡는다’는 말이 비로소 현실성을 띠게 되었다. 그 여세(餘勢)를 몰아 10년 내 한국은 구매력 기준으로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을 능가한다.
 
 
 대한민국의 한반도 유일 합법성을 포기, 일본을 결정적으로 돕고 있는 문재인

 
  문재인이야말로 진짜 ‘친일파(토착왜구)’라고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례가 있다. 그가 즐기고 있는 역사조작이 일본에 대한 대한민국의 입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킨 점이 그것이다. 그가 주도한 역사조작의 지향점은,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과 국가적 정당성을 허물어 북한정권이 한민족의 챔피언이고 한반도의 유일한 정통국가임을 뒷받침하는 방향이다. 김일성식 역사관으로 다가가는 조작이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박근혜 정부의 역사 교과서 바로잡기 사업을 중단시키고 교과서를 개악했다. 대한민국 건국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유엔 총회가 공인해준 1948년 12월12일 결의문을 조작, 대한민국이 한반도 전체의 정통정부가 이 나라 38도선 이남에서만 정통정부라고 교과서에 싣도록 한 것이다. 이는 1965년 한일국교 수립 협상 때 우리가 쟁취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무효화하여 일본에 대한민국과 북한정권을 동격으로 대하도록 프리핸드를 주는 반역적 역사조작이다.
 한일 국교 정상화의 주역이었던 김종필의 생전 증언을 듣는다.
 “한국-미국-일본과의 동맹관계는 선진국과의 동맹관계, 해양문화권과의 동맹관계 그리고 자유진영과의 동맹관계였습니다. 덕분에 한국 사람들의 행동반경이 넓어졌죠. 우리나라는 38선으로 북쪽이 막히는 바람에 사실상 섬이 되었습니다. 섬이 되었으니까 얼마나 외롭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북쪽을 포기하는 대신에, 세계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동맹 관계를 맺었습니다. 북한을 잃은 대신에 세계를 얻은 거죠. 세계를 얻도록 한 것이 한미(韓美)동맹과 한일(韓日)수교였다 하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965년 6월에 서로 사인한 한일 기본조약에서 중요한 것은 3조의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연합 결의 제195호에 따라 한반도에 있어서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확인한다’는 내용입니다. 한일 수교에서 일본은 한반도를 대표하는 주권국가는 한국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협상과정에서 오랫동안 시비가 붙었죠. 일본 측은 ‘북한도 있으니까, 북한을 놓고 어떻게 대한민국만 정통성 있는 유일한 합법국가로 인정할 수 있느냐’며 여러 가지로 발을 뺐는데, 우리 정부는 양보하지 않았어요. 앞으로도 일본이 북한과 수교를 하게 된다면 이 조항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 한반도에서 유일한 정통성 있는 국가는 대한민국뿐이라는 것은 우리 헌법에 정해진 바입니다. 이 헌법의 정신을 한일 기본조약에 포함시키기 위해 박정희 정부가 애를 썼고 그것이 성공을 했다는 점, 이것이 한일 기본 조약의 중요한 의미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 기본조약 3조에 따라 앞으로 일본이 북한과 수교하려 할 때 우리는 일본에 여러 가지 요구를 할 수 있고 견제도 가능하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은 유엔결의 195호를 조작, 북한지역에 대한 대한민국의 대표성을 포기한 셈이다. 이는 대한민국 헌법 제3조가 북한지역을 우리 영토로 규정하고 있는 것의 실효(失效)를 의미할 수도 있다. 영토의 포기는 헌법상 대통령 책무를 정면으로 위반한 것으로 탄핵은 물론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 이런 사람이 ‘친일파’나 ‘토착왜구’가 아니라면 그 누구인가?●(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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