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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장녀 박재옥 씨 별세 분위기가 육영수 여사와 비슷하여 친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박근혜 대통령의 이복언니 조갑제닷컴  |  2020-07-08

박정희 前 대통령의 장녀이자 박근혜 前 대통령의 이복 언니 박재옥(朴在玉) 씨가 7일 별세했다. 향년 83세. 고인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첫째 부인 김호남 여사 슬하의 장녀다. 박정희 대통령이 대구 사범 5학년 시절(만 19세)인 1937년 10월22일(음력) 태어난 고인은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아버지와 함께 살 수 있었다. 혁명 전 박정희·육영수 부부와 함께 지냈던 고인은 분위기가 陸 여사와 비슷하여 친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고인의 남편인 한병기 前 의원은 박정희 대통령이 5사단장 시절 전속 부관으로 1958년 10월 고인과 결혼했고, 2017년 세상을 떠났다. 한 前 의원은 유엔 주재 대사, 설악케이블카 회장 등을 지냈다.

유족으로 아들 한태준(전 중앙대 교수)·한태현(설악케이블카 회장), 딸 한유진(대유몽베르CC 고문), 사위 박영우(대유위니아그룹 회장) 씨가 있다. 빈소는 신촌 세브란스 병원, 발인 7월10일 8시다. 



<박정희는 1936년 대구 사범 5학년 시절(만 19세) 여름방학 때 세 살 아래인 김호남(金浩南) 처녀와 결혼했다. 음력으로 1937년 10월22일에 김 씨는 큰딸 박재옥(朴在玉)을 낳았다.
 박정희는 아버지가 서둘러 시킨 이 결혼에 불만이 많았다. 1937년 4월1일 문경보통학교의 교사로 부임한 그는 아내를 데리고 가지 않고, 혼자서 하숙을 했다. 이때부터 사실상의 이혼 상태였다.> 이용문, 젊은 거인의 초상―‘여순사건과 박정희의 수난’ 中


<박재옥은 어머니와 할머니의 과보호 속에서 다섯 살 때까지 젖을 먹었다. 남편의 사랑을 잃은 김호남의 딸에 대한 집착, 그런 어머니에 대한 딸의 집착도 그만큼 강했다. 김호남은 이윽고 박재옥을 데리고 구미를 떠나 버렸다. 죽은 박상희의 아내 조귀분에게만 이야기하고 사라졌다. 백남의 할머니는 며느리와 손녀를 찾아 헤맸으나 알 길이 없었다. 박재옥에 따르면 母女는 대구로 갔다고 한다.
“대구로 가 보니 어머니에게도 이미 다른 남자가 있었다. 나이에 비해서 조숙하고 눈치가 빠른 나는 대번에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상황이 싫었다. 결사적으로 그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반기를 들었다. 열 살 남짓한 계집아이가 할 수 있는 거부의 표시라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어떤 조리 있는 말로 어머니를 설득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저 울었다. 밤새도록 울고 또 울었다. 그것이 내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박정희전기 2권 전쟁과 사랑―‘첫딸 朴在玉’ 中


 <박정희와 이혼한 金浩南(김호남) 사이에서 난 첫딸 在玉(재옥)은 이즈음 고향(선산군 상모동)에서 살면서 주로 편지로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박정희의 조카 朴在錫(박재석)의 집에 살 때 재옥은 아버지에게 원망하는 편지를 자주 썼다.
 “아버지, 제게는 부모님이 모두 계신데 저는 왜 이렇게 남의 집에 얹혀살아야 합니까. 사촌오빠가 저까지 데리고 살아야 하니 얼마나 귀찮고 성가시겠어요. 저는 또 얼마나 미안한지 아세요? 오빠도 고생스럽고 저도 힘들고요.” 
 이런 편지에 대해서 박정희는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도 못 사는 것이니 열심히 살아라’는 요지의 답장을 학교 公納金(공납금)과 함께 보냈다. 박재옥이 아버지의 재혼 소식을 들은 것은 구미여중에 다니고 있던 때였다. 근혜가 태어난 직후였다. 재옥은 집안 어른이 전해주는 그 소식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고 한다. 벌써 오래전에 어머니로부터 ‘아버지에게는 다른 여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박정희전기 2권 전쟁과 사랑―‘아내와 딸’ 中


<이즈음 큰딸 박재옥은 김종필·朴榮玉(박영옥) 부부와 함께 서울 제기동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육영수가 예고 없이 제기동 집에 나타났다. 육영수는 동덕여고에 다니고 있던 재옥을 데리러 온 것이었다. 재옥이 처음 보는 육영수는 ‘깔끔한 한복을 입은 조용한 사람’이었다. 재옥은 두말 없이 새엄마를 따라나섰다. 속으로는 영옥이 언니가 섭섭하게 생각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나에게 너무나 잘해 주었던 언니가 미련없이 떠나는 나를 보고는 다 소용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매를 맞고 살아도 아버지와 함께 살고 싶었다’는 것이다. 다음은 박재옥의 증언이다.
“그때의 나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서 나중에는 繼母(계모)든 庶母(서모)든, 아픈 어머니든 미친 어머니든 내겐 어머니란 존재가 필요했다. 나는 노량진의 아버지 집으로 가면서 몇 번이고 다짐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 때문에 아버지와 육 여사가 싸우는 일은 없도록 최대한 조심하자고.”> 박정희전기 3권 혁명전야―‘전속 부관 韓丙起’ 中


<박정희·육영수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박재옥을 딸이라고 적극적으로 소개하지 않아 박환영 당번병은 오랫동안 육영수의 친척 동생 정도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손님이 오면 박재옥은 조용히 2층 방으로 올라가곤 했는데 분위기와 행동거지가 육영수와 매우 닮았었다고 한다. 육영수는 미혼인 남편의 부하들이 들르면 넌지시 “고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좋은 閨秀(규수)가 한 사람 있는데…”라고 말하면서 눈치를 보곤 했다.> 박정희전기 3권 혁명전야―‘부부 싸움’ 中


<1958년 10월3일 박정희와 첫 부인 김호남 사이의 첫딸 박재옥이 전속 부관 한병기 대위와 결혼식을 올렸다. 종로 동원예식장에서 있었던 결혼식에서 주례는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생도 시절부터 따랐던 元容德(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이었다. 박정희는 이날 ‘기분이 좋아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착잡한 것 같았고 술을 많이 마셨다’고 한다(박재옥의 기억). 
  박재옥은 이부자리 한 채와 백금반지 하나가 婚需(혼수)의 전부였다고 기억한다. 결혼식 의상도 따로 짓지 않고 한복으로 때웠다. 한병기는 반지도 구리로 하자고 했다. 보석으로 만들면 가난으로 팔아버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란 것이었다. 이것만은 박재옥이 반대했다. 신혼부부는 경주로 여행을 갔다. 박재옥은 어머니가 경주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기 때문에 혹시 만날 수 있을까 해서였다.> 박정희전기 3권 혁명전야―‘무심한 가장’ 中


<이날 오후 경회루에서 열린 축하연에는 … 朴正熙와 첫 부인 김호남 사이에 난 첫 딸 朴在玉(박재옥)은 남편 韓丙起(한병기·건설협회 공제 조합 이사장)와 함께 나타났다. 그녀는 陸英修(육영수) 여사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朴 씨는 혁명 전 陸英修와 함께 살았는데, 분위기가 陸 여사와 비슷하여 친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한병기는 박정희 사단장의 부관으로 있다가 박재옥과 결혼했었다. 5·16 군사혁명 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미국 신문에 한국 政情(정정)이 어지럽다는 기사가 연일 실려 울화통이 치밀었다. ‘이런 짓거리 하려면 5·16은 무엇하러 했는가’하는 생각이 나더라고 한다.
그는 곧바로 서울로 날아왔다. 청와대에 들어가니 육영수 여사가 그의 손을 붙들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그것을 보고 더욱 화가 치민 한병기는 장인을 만나면 싫은 소리를 해야겠다고 별렀다. 그날따라 박 대통령은 잔뜩 화가 나서 청와대로 돌아왔다. 한 씨가 집무실로 들어가니 박 대통령은 “왜 왔어?”라고 쏘아붙이듯 말했다.
“정치를 이 따위로 하시려면 윤보선 씨한테 줘버리는 게 낫겠습니다.”
“이놈이!”
박 대통령이 재떨이를 집어던졌다. 韓 씨는 이를 피했다. ‘와장창’하는 소리를 듣고 이후락 비서실장이 뛰어 들어왔다. 박 대통령은 나가라고 했다. 韓 씨는 박 대통령에게 계속 대들어 한 30분간 서로 언성을 높였다고 한다.> 박정희전기 9권 총 들고 건설하며 보람에 산다―‘民營고속도로 發想’ 中


<朴 대통령과 첫째 부인 金浩南 사이에 난 큰딸 朴在玉은 이날 駐 캐나다 대사인 남편 韓丙起(한병기)를 따라서 카리브海의 작은 섬나라 도미니카 공화국에 가 있었다. 韓 대사는 이 나라의 대사직도 겸임하고 있었다. 그는 이 나라의 독립기념일 행사에 초청되어 온 것이었다. 박재옥은 1년 반 전에 서울로 가서 아버지를 만난 것이 마지막이었다. 남편이 귀국하여 장인을 만나려고 해도 허가가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아버지와 자신의 접촉을 고의로 차단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독재자라는 아버지가 딸과 사위도 마음대로 부를 수 없다니 무슨 독재자가 이렇단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병기·박재옥 부부가 도미니카 공화국에 도착해보니 이 가난한 나라는 며칠 전에 덮친 허리케인 때문에 엉망이 되어 있었다. 투숙한 호텔의 지붕도 날아가 없었다. 별이 총총 뜬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잠을 청하는 데 駐 캐나다 한국대사관에서 급히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한국에서 큰일이 생긴 것 같다는 것이었다. 박재옥은 가슴부터 철렁했다. 예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전날 밤 그녀는 꿈속에서 아버지를 보았다. 꿈에 박재옥은 남편이 그 전에 대사로 근무했던 칠레에 가 있었다. 무슨 큰 행사인지 피노체트 대통령도 나와 있었다. 그때 검은색 자동차가 건물 앞으로 미끄러져 들어 왔다. 그 차에서 검은색 옷을 입은 아버지와 육영수 여사가 내리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과 차례로 인사를 나누다가 큰딸 앞을 그냥 지나가지 않는가. 피노체트 대통령이 朴 대통령을 붙들고 “당신 딸이 여기 있다”고 소개했는데도 아버지는 모른 체하고 그냥 휙 돌아서는 것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박재옥은 식은땀을 흘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검은색 옷은 좋지 않은 징조라는데…… 박재옥은 캐나다에 있을 때도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에 외교관 부인들과 함께 청와대를 방문했다. 朴 대통령은 누군가에 쫓기기라도 하듯이 허둥지둥 무엇을 찾고 있었다.
  “나는 가야 하는데…… 빨리 가야 돼. 아홉 시까지는 가야 돼. 그런데 이게 어디 갔나.” 
  대통령은 열쇠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박재옥은 “아버지 왜 그러세요. 뭘 찾으세요. 제가 찾아드릴 테니 혼자 가지 마세요”라고 애타게 말을 걸었으나 아버지는 계속해서 서두르면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검은 옷을 차려 입은 외교관 부인들이 울고 있었다. 
 한병기 대사 부부는 캐나다 대사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대통령 有故’라는 대답이 왔다. 박재옥은 이 생경한 말이 아버지의 죽음을 의미한다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은 뉴욕으로 갔다. 한병기 대사의 친구들이 나와서 귀국을 말리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대통령이 돌아가신 것 같다. 여기서 사태의 추이를 살펴보다가 들어가는 것이 안전할 것 같다.” 
  韓 대사 부부는 바로 도쿄行 비행기로 갈아탔다. 박재옥은 ‘유고’의 의미가 납치나 부상이 아닐까 하고 일말의 희망을 걸었다. 도쿄에서 마중 나온 駐日한국대사관의 李元洪 공사가 ‘대통령 서거’를 전해 주었다.> 박정희전기 13권 마지막 하루―‘큰딸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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