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
재벌그룹 회장의 동생이 뇌물죄로 구속이 됐었다. 장관과 대통령에게 돈을 건네준 것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것이다. 큰 사건이었다. 그 재벌그룹에는 수백 명의 자문변호사가 있었다. 그런데도 회장은 구속된 동생의 사건을 내게 맡기겠다고 통보했다. 그룹의 변호사들이 담당 재판장의 신상을 조사했던 것 같다. 그 재판장과 가장 막역하고 허물없는 친구가 나라고 그들은 판정을 한 것이다.
회장이 비서진을 통해 자신의 사무실로 오라고 연락을 했다. 그때 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곰곰 생각해 보았다. 부자 앞에서 비굴하기 싫었다. 그들 앞에서 마음이 위축되는 것은 돈을 많이 얻어 볼 수 있을까 하는 욕심이 있기 때문이었다. 지식노동자로서 보통의 품값 이외에는 받지 않겠다고 평소에 생각했었다. 그것을 넘은 많은 돈은 그 속에 낚시 바늘이 숨어있기 마련이다. 다음으로 그들이 사려는 것은 나와 재판장의 어려서부터 맺어온 우정이라는 막역한 관계였다. 나는 그런 우정을 상품화하는 것이 싫었다. 법조계에서 전관예우라는 말이 도는 걸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같은 직장에서 맺은 관계를 상품화하는 행위였다. 믿음과 신뢰에 대한 일종의 배신일 수 있었다. 물론 나의 주관적 사견이다.
당당하려면 평소 나름대로 많은 기도와 훈련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나는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곤 했다. 그런 기도가 핏속에서 용해되어 행동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여러 시험과 세월이 필요하기도 했다. 나는 그 회장이 나의 사무실로 찾아오라고 했다. 그게 전문가로서는 당연한 태도라고 생각했다. 삼성의 회장이 집으로 오라는 요구에 트롯가수 나훈아가 했다는 행동이 있다. 노래를 들으시려면 자신의 공연장에 와서 보시라고 하면서 집으로 가서 노래하기를 거절했다는 얘기였다. 가서 노래 한 곡만 불러도 수천만 원을 받는다고 했다. 나훈아는 그걸 거절했다는 소리를 들었었다. 삼성의 회장은 나훈아의 노래를 듣기 위해 가지 않았지만 동생이 구속된 재벌그룹의 회장은 어쩔 수 없이 나의 사무실을 찾아왔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 그건 강한 힘의 원천이었다. 삼십대 중반이 조금 넘을 무렵 권력의 실세인 분이 나에게 그의 보좌관이 될 생각이 없느냐고 제의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당시 권력가와 보좌관의 관계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운명을 같이 하는 강한 인연으로 묶이는 사이였다. 권력가를 보좌하면 어떤 큰 대가를 반드시 바라기 마련이다. 나는 일을 시작하면서 기도했다. 그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해달라고 진심으로 기도했다. 바라는 것이 있으면 섭섭함이 생길 수 있고 관계의 끝이 좋지 못한 게 일반적이었다.
모시는 분의 개인적인 심부름을 하기 위해 청와대로 가기도 했다. 대통령의 최측근 실세는 나의 앞날이 좋을 것이라면서 은근한 기대감을 불어넣기도 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사람을 부리는 방법 같았다. 재벌들도 마찬가지였다. 뭔가 줄 듯 줄 듯 하면서 사람을 부리고 주지 않는 때가 많았다.
혼자 우뚝 서고 강해지는 방법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다. 그게 정말 나의 것이라면 때가 되면 하나님이 내게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이 주는 것이라면 내게 왔어도 하나님이 회수해 가실 것이라고 믿었다. 꿀 한 방울에 수많은 벌레가 모여들 듯이 어떤 자리나 이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그걸 잡을 만한 영리함이나 약삭바름이 없는 걸 일찍 깨달은 편이다. 어려서 집이 가난해도 요구하는 게 별로 없었던 셈이다. 그래서 가난은 이미 고통이 아니었다. 명예욕도 그런 것 같다.
반장을 하는 아이들은 보통 아이들이 서는 줄에 같이 서 있는 걸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았다. 따로 서서 아이들을 통제하면서 ‘나는 특별해요’라고 하고 싶은 것 같았다. 나는 그런 반장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희망하지도 않았다. 그냥 갈매기 조나단처럼 나는 나이고 싶었다. 평생을 변호사로 개인법률사무소를 하고 있다. 명예욕이 없으면 지위가 높고 낮은 것은 자랑도 아무런 괴로움도 될 수 없다.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삶을 살 때 참으로 아름다운 이 세상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