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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識人의 良心’이 세상을 바꿉니다 ‘연방제’ 트럭으로 국민을 치어 죽이는 미치광이 운전자를 끌어낼 한국판 본회퍼, 에밀 졸라는 어디 있습니까? 최응표(뉴욕에서)  |  2020-07-31
한 노인이 목욕탕에서 나오는데,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탕 안에 사람이 많으냐?”고. 노인은 “한 명도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목욕탕 안으로 들어간 그 사람은 탕 안에 사람들이 꽉 차 있는 것을 보고 밖으로 나와 노인에게 화를 냈습니다.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돼지 새끼는 많던데 사람은 없더군.”
  
  이 노인은 바로 고대 그리스의 견우학파(犬儒學派)를 대표하는 디오게네스(Diogenes)였습니다. ‘정직한 사람’을 찾기 위해 대낮에도 늘 등불을 들고 다닌 디오게네스, 그는 무엇보다도 自由(자유)를 사랑했고, 힘 있는 사람들에게 眞實(진실) 말하기(正義)를 꺼려하지 않았으며,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지식인 최고의 덕목을 몸으로 실천한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인간의 정신이 망가져 가는 데 분노한 시대의 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문명을 거부하고 길거리 나무통에서 살며 ‘무소유(無所有)’를 실천했던 철학자였습니다.
  
  그런 숭고한 정신의 소유자 디오게네스가 만약 대한민국이라는 ‘목욕탕’을 들여다본다면 과연 무어라고 할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분명 이런 말을 하며 침을 뱉을 것입니다.
  
  “동물의 썩은 사체(死體)까지 게걸스레 뜯어먹는 붉은 하이에나떼만 우글댈 뿐, 사람은 없더군.”
  
  완장 부대의 사냥개들에게 물어 뜯겨 제 몸 하나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게 된 대한민국, 디오게네스의 눈에는 당연히 그렇게 비쳤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여러분이 무엇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진실을 말하는 것이 거짓말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세상’을 살고 있는지 고민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지식인의 양심’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처해있는 암울한 현실을 사람 본연의 입장에서 성찰해보자는 뜻에서 정직과 진실과 정의를 사랑한 디오게네스에 얽힌 일화 한 토막을 적어 보았습니다.
  
  1898년 1월13일, 프랑스의 문호(文豪) 에밀 졸라(Emile Zola)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치욕으로 기록된 드레퓌스 은폐 날조사건을 고발할 당시 “眞實(진실)이 진전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늪지대를 지나야 하는가”라며 썩어빠진 프랑스 사회에 대한 고민을 토로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에밀 졸라가 그처럼 비통하게 세상을 한탄하던 것 이상으로 참담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良心(양심)이 고통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마비돼있는 ‘소시오패스(sociopath=일종의 정신장애로 자기 이득을 위해선 살인이나 범죄를 범하고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며, 언제나 기만적이고 선동적)형 인간’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드레퓌스 사건이 주는 역사적 교훈의 가치가 더 돋보이는지 모릅니다.
  
  드레퓌스(Dreyfus) 사건이란 19세기 말, 보불전쟁(1870~1871) 패배의 충격으로 프랑스 전체가 멘붕 상태에 빠지고, 여론은 극도로 악화된 상태에서 국면전환이 절실해진 프랑스 정부는 패배원인이 국가배신(반역) 행위에 있다는 거짓으로 국민을 속이고, 국가권력을 동원해 공작을 꾸미는 과정에서 유대인인 드레퓌스 포병 대위를 스파이로 조작해 희생시킨 사건입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전쟁 패배의 후유증이 국가 존망의 위기로까지 몰아갈 수 있다는 심각성이 가져온 국가적 범죄행위였지만,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은 청와대 점령군에 의해 마구잡이로 자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죄질이 더 고약한 것입니다.
  
  약 1년 후 진범이 밝혀졌지만 프랑스군은 그를 오히려 해외로 전출시켰고, 군법회의는 진범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하지만 거짓으로 진실을 덮으려던 프랑스 정부는 ‘眞實의 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결국 프랑스 정부는 1899년 9월 드레퓌스를 특별 사면했습니다. 이 사건은 ‘지식인의 양심’이 세상을 바꾼다는 값진 교훈을 남긴 고귀한 역사적 사례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보면서 권력의 사냥개로 전락한 한국의 재판부와 검찰과 권력기관(전체가 아닌)이 진범을 해외로 도주시키고 무죄를 선언한 프랑스 ‘군법회의’를 벤치마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실은 반드시 드러난다는 교훈과 함께 제아무리 거대한 국가권력이라도 良心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는 산 교훈을 얻게 됩니다. 백여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생생하게 현실로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知識人(지식인)의 良心’이 세상을 바꾼다는 眞理(진리)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겐 그 어느 때보다도 지식인의 역할이 요구되는 때입니다. 우리는 지식인이란 ‘성향이 진보이든, 보수이든 올바른 사회를 만들기 위해 사회에 적극 참여하는 사람들이라고 믿고 존경해왔습니다.
  
  우리가 에밀 졸라를 지식인의 상징적 인물로 보는 이유도 바로 사회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분별력(교양)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고발한다’에서 인간 본연의 양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에밀 졸라의 진면목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한다면 어느 교양인의 말대로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옳은 목소리를 내며, 세상과 거짓 없이 소통하고, 순수하게 살아가는 사람, 기본에 충실하고 자신이 가진 학문과 지식을 사회에서 일을 통해 실현하는 사람이 지식인’이라고 믿기 때문에 우리의 어려움을 ‘지식인 사회’에 호소해 왔습니다.
  
  지식의 상품화 내지 출세의 도구화, 또는 전통적 지식인 사회의 붕괴와 그에 따른 지식인의 양심의 마비 현상, 그리고 지식인의 비굴성(소심)과 자기편의주의에 빠져있는 지식인 사회의 타락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무기력한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죽어가는 국민정신을 깨울 수 있는 힘, 惡(악)의 세력과 싸울 힘도 지식인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잘못된 현실을 바로 잡는 방법론은 사실의 존재를 그대로 파악하는 데서 찾아진다”고 한 류성룡의 말처럼, 이제는 대놓고 ‘연방제’로 가겠다며 국가시스템을 뿌리째 뒤집어 놓으면서도 큰소리치는 촛불 완장부대의 힘이 어디서 나오느냐는 것과 어떻게 풀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국민 스스로가 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 거짓말과 괴담(怪談)을 듣는 귀는 무한대로 진화한 반면, 진실과 양심의 소리를 듣는 귀는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퇴화(退化)한 상태에서 붉은 선전선동을 아무 생각 없이 사실로 받아들이는 데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거기다가 지나친 민주주의와 지나친 자유, 그리고 분에 넘치는 풍요에 젖어 사리(私利) 분별을 못하고, 그저 잘살고 즐겁게 살자는 생물학적 충동에 빠져 살아가는 국민이 촛불 완장부대의 먹잇감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1950년 12월13일, 미 해병 제1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장군은 흥남철수작전이 시작되기 직전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해병대원들의 임시묘지(흥남)를 찾았습니다. 무덤 앞에 선 스미스 장군은 “너희들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다. 이 민족은 피를 흘려서라도 구원해야 할 가치 있는 민족이다”라는 말을 하며 전사한 부하들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스미스 장군은 항공으로 철수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어겨가며 한국인 피난민을 살리기 위해 부상병들만 항공으로 후송하고 일반 장병들은 피난민을 보호하며 피난민과 같이 육로로 철수했습니다. 스미스 장군은 죽음을 각오하고 자유를 찾아 나선 피난민을 지옥의 땅에 그대로 내버려 두고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스미스 장군은 우리의 어떤 면을 보고 피를 흘려서라도 구원해야 할 가치 있는 민족이라고 했을까요? 그렇게 외국 군대가 피를 흘려서라도 구원해야 할 가치 있는 민족으로 비쳐졌던 우리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추락했는지 뼈를 깎는 자기성찰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스미스 장군이 다시 살아 돌아와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보고도 똑같은 말을 할 건인가? 사뭇 궁금해집니다.
  
  미치광이 히틀러가 트럭으로 사람을 마구 치어 죽이던 나치 독일에는 신학자이면서 시대의 양심이었던 지식인 디트리히 본회퍼가 있었고, 국가권력이 꾸민 날조된 드레퓌스 사건으로 진실이 죽어가던 프랑스에는 ‘지식인의 양심’ 에밀 졸라가 있었습니다. 지금 연방제라는 트럭을 타고 거리를 질주하며 국민을 마구 치어 죽이는 이 미치광이 운전자를 운전대에서 끌어낼 한국판 본회퍼, 에밀 졸라는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불문율을 깨고 쇠파이프와 회칼로 상대 영역(나와바리)을 접수(강탈)하는 저질스럽고 흉포(凶暴)한 조폭들보다도 더 간악한 수단과 방법으로 입법, 사법, 언론, 문화, 종교, 교육현장과 국가권력기관을 접수해가는 촛불혁명세력의 광포(狂暴)하고 악마적인 행동들을 지켜봐 왔습니다.
  
  지금 청와대 안방에는 주사파식 ‘프로크루스테스 침대’를 설치해놓고 나라를 자기들 입맛에 맞게 요리하고 있습니다. ‘프로크루스테스 침대’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흉악한 강도 프로크루스테스가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아 자신의 침대에 눕힌 다음 행인의 키가 침대보다 크면 침대 길이에 맞게 잘라내고, 키가 작으면 침대 길이에 맞도록 억지로 늘려서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침대에는 길이를 조정하는 비밀장치가 있어서 그 누구도 침대 길이에 맞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흉악한 프로크루스테스의 악행도 테세우스라는 영웅에 의해 끝이 납니다. 테세우스는 프로크루스테스를 잡아 같은 침대에 눕히고 똑같은 방법으로 머리와 다리를 잘라 처치해버렸습니다.
  
  촛불혁명세력은 바로 이런 침대를 청와대 안방에 설치해놓고 대한민국이라는 이 거목(巨木)을 그 침대에 맞게 뿌리부터 잘라내고 있습니다. 헌법은 물론 어떤 법, 어떤 관행, 어떤 원칙도 이 침대를 통과할 수 없습니다. 거기 설치된 비밀장치로 마음대로 요리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대한민국 현주소입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악행을 끝장낸 영웅 테세우스처럼, 한국판 테세우스(본회퍼와 에밀 졸라)의 출현이 절실한 때입니다. 지식인의 몫은 거짓으로 왜곡된 진실을 바로 잡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지식인의 양심’이 세상을 바꾼다는 평범한 이 진리가 죽어가는 국민의 영혼을 깨우고, 우리의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힐 때, 한국판 테세우스, 본회퍼, 에밀 졸라는 우리 곁을 찾아올 것입니다. 한국판 프로크루스테스 침대의 악행은 반드시 국민의 손으로 처치해야 합니다. 물론 그 뒷받침은 지식인의 몫이 되겠지요.
  
  ‘知識人의 良心이 세상을 바꾼다’ 만고의 진리입니다.
  
  
  2020. 7. 29.
  
삼성전자 뉴스룸
  • 越百 2020-07-31 오후 2:10:00
    美 海兵 第1師團長 올리버 스미스 將軍이 護送한 避難民 중 文 某氏 한 사람만 뺐더라면 지금 우리 民族이 겪고 있는 모진 桎梏 속에 있지 않을텐데 當時에 그 분에게 그런 眼目이 있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 큰 不幸입니다.
  • naidn 2020-07-31 오후 1:35:00
    양심있는 지식인들의 분발이 火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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