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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만 먹게 돼도 핵개발”이라는 부토 총리 앞에 나타난 젊은 파키스탄 유학생 파키스탄의 핵개발과 핵확산, 그리고 A. Q. 칸 박사 (1) 金永男  |  2020-08-06

북한 핵문제와 관련해 꾸준히 언급되는 인물 중 하나는 압둘 카디르 칸 박사(1936~)다. 그는 파키스탄을 이슬람 최초의 핵보유국으로 만든 인물로 ‘파키스탄 핵의 아버지’라는 평을 받는다. 칸을 통해 북한으로 핵무기 기술이 확산됐다. 어느 정도의 기술, 혹은 실제 핵개발 관련 기기들이 북한에 유입됐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북한으로부터 미사일 기술 및 돈을 받는 대가로 파키스탄의 핵 관련 기술이 북한에 들어가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파키스탄은 어떻게 핵무기를 만들 수 있게 됐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깊숙이 파고든 책들이 여럿 출간됐다. 하나는 영국의 선데이타임즈와 가디언에서 탐사보도 기자로 활동한 애이드리언 레비와 캐서린 스콧-클라크가 쓴 ‘디셉션(기만)’이라는 책이다. 이들은 기밀해제 된 여러 나라의 기밀문서는 물론, 당시 핵개발 중심에 있었던 인물들을 인터뷰해 상황을 재조명했다. 또 한 권의 책은 미국 워싱턴의 국방대학교 교수인 하산 아바스가 쓴 ‘파키스탄의 핵무기’라는 책이다. 이 두 책 모두 파키스탄이 어떻게 핵개발에 나섰고, 이를 어떻게 숨겼으며, 미국 등 국제사회가 왜 이를 묵인했는가를 다뤘다. 이들의 책에는 북한 핵무기를 머리 위에 지고 생활하는 한국인들에게 주는 교훈이 많다. 파키스탄에선 국민영웅으로 칭송받는 ‘핵의 아버지’, 한편에선 북핵 위기 상황을 초래하는데 일조한 ‘북핵 조력자’라는 두 개의 평을 받는 A. Q. 칸. 그는 가난한 나라에서 어떻게 핵을 만들어냈고, 어떤 이유로, 또 어떻게 이 위험한 무기 기술을 다른 나라에 확산시켰을까?

“풀만 먹는 한이 있더라도 핵을 개발할 것”

정확한 시점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지만 파키스탄은 1998년 핵실험을 성공시킨 이후 사실상의 핵 보유국으로 인정됐다. 파키스탄이 핵을 보유하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숙적(宿敵)인 인도가 핵무기를 보유했기 때문이다. 1947년 영국의 식민지에서 분리 독립된 인도와 파키스탄은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1947년 10월에 1차 전쟁이 일어났다. 오랫동안 지속돼 온 이슬람교와 힌두교 간의 종교적 대립이었다. 1971년에는 이슬람교의 西파키스탄과 힌두교의 東파키스탄으로 나뉘어져 또 한차례 전쟁을 치렀다. 인도는 동파키스탄을 지원했고 전쟁은 2주 만에 동파키스탄의 승리로 끝났다. 이에 따라 당시의 동파키스탄 지역은 방글라데시로 독립됐다.

3년 뒤인 1974년 5월 18일 인도는 서부 사막 지역에서 핵실험을 강행했다. 인도는 원자력 개발을 한다는 명목으로 서방세계로부터 핵 관련 기술을 수입해 비밀리에 핵을 개발했다. 파키스탄의 줄피카르 알리 부토(Zulfikar Ali Bhutto) 총리는 충격에 빠졌다. 그는 미국 측에 불만을 표하며 핵우산을 제공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던 헨리 키신저는 파키스탄에 핵우산을 제공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사하브자다 야쿱 칸 駐美 파키스탄 대사에게 “인도의 핵실험 (성공은) 기정사실이며 파키스탄은 이런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파키스탄은 자신들이 중동지역에서 미국의 우방 역할을 한다고 믿었으나 배신감을 느끼게 됐다. 1947년 이후 국가가 두 차례 쪼개지는 상황을 겪으면서도 믿었던 미국이 어떤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배신감이었다. 부토 총리는 핵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핵을 보유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그는 인도와의 전쟁 중이던 1965년 당시 “인도가 (핵) 폭탄을 만든다면 풀이나 나뭇잎만 먹고 배고픔을 겪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것 역시 만들어낼 것이다. 우리에겐 다른 선택권이 없다. 원자폭탄에는 원자폭탄이다”라고 했다.

젊은 유학생 칸이 보낸 편지

1974년 7월, 고민으로 가득했던 부토 총리실로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발신지는 ’71 암스트르가, 즈완부르크’이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근교에 위치한 곳이다. 이 편지는 브뤼셀에 있는 파키스탄 대사관을 경유해 총리실까지 전달됐다. 총리실 직원들은 이 편지를 총리에게 전달하기 전에 여러 차례 검토했다. 발신자는 자신의 이름이 압둘 카디르 칸(A.Q. 칸)이라며 파키스탄에서 일자리를 잡지 못하는 등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한탄하는 내용으로 글을 시작했다. 이를 검토했던 직원들은 집안이 부유해 해외 유학을 했으나 본국에서 일자리를 잡지 못해 이런 푸념을 하는 많은 유학생 중 한 명일 것으로 생각했다. 

칸은 자신이 유럽에 있는 핵 관련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물리학자라고 소개했다. 그는 최근 유럽에서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에 대한 최고급 기밀에 해당하는 청사진을 직접 확인했다고 했다. 1974년 당시 부토 정부의 외교장관이었던 아가 샤히는 훗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파키스탄을 도와주는 방향으로 협상이 진행됐다면 압둘 카디르 칸이라는 이름이 세계에 알려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파키스탄에는 ‘카라치 원자력시설’로 불리는 핵시설이 한 개 있을 뿐이었다. 파키스탄은 1965년 캐나다로부터 이 시설을 수입했다. 이 시설은 1971년에 처음 가동됐다. 플루토늄을 생산해낼 수 있었지만 핵무기로 만들기 위해서는 재처리 기술이 필요했다. 프랑스는 3억 달러에 관련 기술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파키스탄이 부담하기에는 너무 큰 금액이었고 주변 강대국들도 프랑스와 파키스탄이 이런 계약을 체결하지 못하도록 압박했다. 이런 상황에서 칸이라는 젊은 과학자의 편지가 도착한 것이다.

샤히 외무장관은 이 편지를 읽어본 부토 총리와 나눈 당시 대화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부토는 ‘유럽에서는 핵물질을 만들기 위해 원심분리기를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압둘 카디르 칸이라는 사람이 있다’고 내게 말했다. 나는 그에게 ‘내가 원심분리기에 대해 아는 건 몇 년 전 뉴욕에서 열린 한 만찬장에서 옆에 앉아 있던 증권중개인이 말한 게 전부다’라고 했다. 나는 의심스러웠지만 부토에게 ‘칸에게 기회를 줘보자’라고 조언했다. 우리가 잃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취업 실패로 분노에 찼던 청년

핵무기에 대해 거의 지식이 없던 부토 총리 및 고위관료들에게 외국에서 활동한 '이상한 과학자'가 나타난 것이다. 물론 부토 정부는 1972년 이른바 ‘물탄 회의’를 열고 측근들과 핵개발 계획을 논의했다. 부토는 “3년 안에 핵무기를 개발하라”고 회의 참석자들을 여러 차례 압박했다. 그러나 외국 정부의 도움을 받는 방법도 한정적이었고 자체적으로 핵기술을 개발하기에는 인재가 부족했다. 그렇게 2년이 흐른 상황에서 칸의 편지를 입수한 부토 총리는 기대에 가득 찼다.  

정보당국은 칸에 대한 신원조회를 실시했다. 그는 금속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가 편지에서 주장했듯 파키스탄에 있는 회사에 지원했으나 떨어진 적이 있었다. 그가 지원한 회사는 ‘인민(人民)의 제철소’였다.

칸은 부토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국과 독일, 그리고 네덜란드 3국이 운영하는 우라늄농축 컨소시엄 우렌코(URENCO)의 존재에 대해 소개했다. 자신이 이곳에서 근무를 하고 있으며 고급 정보를 입수했다는 것이었다. 칸은 영어와 네덜란드어, 독일어를 할 줄 알았다. 금속공학을 전공한 그는 그의 언어 능력을 장점으로 내걸어 우렌코에 입사했다. 그의 주요 업무는 번역이었다. 부토 총리는 1974년 8월 칸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얘기를 자세히 듣고 싶다고 했다.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던 번역가가 국제적 스파이로 거듭나게 되는 순간이었다.

점쟁이의 예언

칸은 영국 식민지 당시인 1936년 4월 27일 무슬림 인구가 다수였던 보팔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출생하자 점쟁이를 찾아갔다. 점쟁이는 “이 아이는 매우 운(運)이 좋은 아이입니다. 그의 조국을 위해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엄청난 존경을 받을 아이입니다”라고 칸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파키스탄 정보국(ISI)은 칸이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고 부모가 모두 40대였다는 점 등을 언급하며 칸이 응석꾸러기였고 철이 들지 않았다고 분석한 기록도 있다.

칸이 인도를 증오하게 되는 이유도 충분했다. 1947년 8월 15일 독립 이후 칸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힌두교를 피해 무슬림 지역으로 도망을 가게 됐다. 그는 인도를 탈출하던 과정을 한 인터뷰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불같이 뜨거운 모래밭길 위를 맨발로 걸으며 국경을 건넜다. 머리에 상자를 이고 한 손에는 신발을 들고 있었다. 파키스탄 영토에 들어오게 되자 나는 창살 속에 갇혀 있다 자유를 찾은 한 마리의 새가 된 기분이었다”라고 했다.

그는 파키스탄의 D.J. 신드 거버먼트 사이언스 컬리지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항상 코란을 몸에 지고 다녔으며 언젠가는 유럽에서 공부를 할 것이라는 꿈을 갖고 독일어를 공부했다. 그는 1960년 카라치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ISI의 조사 결과 그는 졸업 후 동네 우체국에서 적은 임금을 받고 일하는 등 큰 인정을 받지 못했다.

1961년 그는 미국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추진하던 ‘평화를 위한 원자력’ 정책과 관련한 설명회에 참석했다. 그는 금속공학이 핵프로그램의 핵심이라는 것을 배웠다. 당시 파키스탄에는 금속공학을 교육하는 기관이 없었다. 그는 친형에게 돈을 빌려 독일 뒤셀도르프로 가는 편도 교통비를 마련했다. 그는 유학길에 나서기 전 또 한 번 점쟁이를 찾아갔다. 칸은 당시 점쟁이가 이런 말을 했다고 주장했다.

<당신의 유학 초기 과정은 매우 고통스럽고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에 당신은 목적을 달성해낼 것입니다. 외국인과 결혼하게 될 것입니다. 공부를 마치면 그곳에서 기술적인 일을 얼마간 하다가 파키스탄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파키스탄 사람들은 당신에게 엄청난 존경심을 갖게 됩니다. 당신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남아공(南阿共) 여성과의 만남

유학생활이 그리 평탄치만은 않았다. 그는 먼 사촌이 사는 집에 얹혀 살며 여러 차례 입학 탈락 통지서를 받았다. 1961년 12월 그는 네덜란드 헤이그로 떠나게 됐다. 얼마 후인 1962년 1월,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여성 헨리 돈커스를 만난다. 헨리의 부모는 모두 네덜란드인이었고 2차세계대전 당시 남아공으로 이주했다. 헨리는 잠비아에서 유년시절을 대부분 보냈으며 심리학을 공부하기 위해 유럽에 돌아온 지 얼마 안됐다. 유럽 생활에 어려움을 겪으며 자신들의 고향을 그리워하던 이들에게는 일종의 연대감이 생겼다. 둘은 편지를 주고받는 관계로 발전하게 됐다.

1962년 9월 칸은 드디어 웨스트 베를린 공과대학교로부터 합격 통지서를 받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금속공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헨리를 초청해 같이 생활하게 된다. 기독교 출신의 여성, 무슬림 출신의 남성이 타지(他地)에서 만나 생활하게 되는데 당시의 종교 상황으로 봤을 때는 매우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1963년 9월 칸과 헨리는 네덜란드로 가게 됐다. 칸은 델프트 공과대학교에서 공부하게 됐다. 1964년, 27세의 칸은 21세의 돈커스와 결혼하게 된다. 결혼식은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파키스탄 대사관에서 치러졌다. 헨리는 자신의 부모님 모두 결혼에 찬성한다고 했지만 어느 누구도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결혼식에는 가족과 知人이 거의 없었다. 유일하게 참석한 사람은 칸의 학교 동료 헨크 슬레보스였다. 앞으로 소개하게 되겠지만 이 슬레보스는 칸의 핵개발 및 확산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1965년 칸은 델프트 대학교 석사 과정에 합격했다. 핵과학자로 유명한 W.G 버거스 박사가 그의 지도교수가 됐다. ISI에 따르면 버거스는 “칸은 특출나지도 뒤떨어지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칸이 아주 매력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는 점이다”라고 했다. 1965년 칸은 파키스탄으로 돌아와 ‘인민의 제철소’에 지원했으나 떨어졌다. 유럽으로 다시 돌아간 그는 1968년 벨기에에 있는 루벤 가톨릭대학교 연구원으로 발탁됐다. 칸은 루벤 대학교에서 지도교수로 마틴 브라버스를 만나게 된다. 브라버스는 훗날 언론 인터뷰에서 ‘칸은 외적으로는 서구화가 된 것 같았지만 충성심만큼은 파키스탄을 향해 있던 학생’으로 기억했다. 칸은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에 매우 분노한 상황이었고 계속해서 파키스탄에 있는 회사에 지원서를 넣었지만 떨어졌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델프트와 루벤에서 여러 인맥을 쌓게 됐다. 이 인맥들이 나중의 그의 핵 개발 과정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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