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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 혼란 속 우라늄 농축에 성공…“서방세계의 독점 장벽을 깼다” 파키스탄의 핵개발과 핵확산, 그리고 A. Q. 칸 박사 (5)/英 정부, 칸 박사의 조력자 피터 그리핀을 회유·협박 金永男  |  2020-08-10

코너에 몰린 부토 총리

자신감에 넘치던 부토 총리에게 예상치 못한 위기가 찾아왔다. 1977년 1월 지미 카터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는 전세계에서의 핵무기 비확산과 인권문제 개선을 주요 공약으로 들고 나왔다. 파키스탄으로서는 두 공약 모두 부담스러운 사안이었다. 파키스탄 국내 지지세력을 공고히하려는 목적이었던 부토 총리는 그해 3월에 조기선거를 치르겠다고 발표했다. 부토가 이끄는 파키스탄인민당은 1970년 선거에서 저소득층의 큰 지지를 받아 압승했다. 부토는 이번 선거에서도 무난히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봤다. 그러나 민심은 이미 떠난 상황이었다. 부토의 권위주의적 정치 행태와 보수적 경제정책 등에 지지층이 이탈했다. 야당세력은 마울라나 마우두디가 이끄는 자맛-에-이슬라미 정당 쪽으로 결집했다. 마우두디는 파키스탄을 더욱 엄격한 이슬람 종교 정책을 기반으로 한 국가로 만들겠다고 했다. 학생과 노조의 지지를 받았던 이 정당은 중산층과 시골 지역 저소득층의 지지까지 받게 됐다.

1977년 3월 7일 치러진 선거에서 부토는 크게 패배했다. 부토는 선거 당일 속속 나오는 선거 결과를 믿지 못하며 폭음했다. 부토의 파키스탄인민당은 선거 결과를 조작하기로 했다. 국회의석 200개 중 155개를 인민당이 따냈다고 발표했다. 이런 조작된 결과에 분노한 시민들이 길거리로 뛰쳐나왔다. 마우두디는 총파업을 선포했고 부토가 알코올중독자이자 무신론자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부토는 카라치와 라호르를 비롯한 대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시위대와 군부의 충돌로 200명 이상이 숨졌다.

코너에 몰린 부토는 미국이 파키스탄 국내정치에 개입했다는 주장을 하고 나섰다. 자신의 핵개발 야욕에 불만을 가진 미국이 정권교체를 하려 한다는 주장이었다. 부토는 의회에서 한 연설에서 헨리 키신저를 언급하며 자신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했다. 키신저가 지난해 파키스탄을 방문했을 때 파키스탄이 핵과 관련해 정확한 입장을 취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을 시 뒤따를 불이익을 부토에게 보여줌으로써 선례를 남기겠다고 했다고 주장했다. 미국이 파키스탄 정권교체에 개입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입장에서는 부토의 핵개발 움직임이 부담스러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군부(軍部)나 다른 강경파가 권력을 잡아 협상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을 더 우려했다. 

지아의 쿠데타…수감되는 부토

부토에게 불만을 가졌던 사람 중 한 명은 부토 행정부에서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모하메드 지아 울하크(1924~1988)였다. 1977년 5월 지아 장군은 미국 대사관저에서 열린 독립기념일 행사에 참석한 부토 총리를 체포했다. 파키스탄 독립 이후 일어난 세 번째의 쿠데타였다. 부토는 2주 후에 풀려났고 권력을 잡은 지아 장군은 재선거를 실시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마음을 바꾼 지아 장군은 9월 3일 부토를 다시 체포하고 라호르에 있는 감옥에 가뒀다. 지아는 부토가 살인을 저질렀다며 여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1975년 발생한 한 야당 정치인의 부친이 숨진 사건 배후에 부토가 있다고 주장했다. 지아는 다시 치르기로 한 선거를 18일 앞두고 선거를 무기한 연기하겠다고 했다.

부토에 대한 재판은 10월 11일 시작됐다. 그는 살인죄를 비롯한 다른 중범죄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부토는 재판부에 파키스탄의 핵개발을 막기 위해 미국이 개입한 것이라는 주장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부토의 딸인 베나지르 부토는 미국 하버드 대학교와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를 다닌 뒤 파키스탄에 돌아와 있었다. 훗날 파키스탄 총리를 지내게 되는 베나지르는 책 ‘디셉션’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소개했다. 감옥에 있는 부토 총리를 자주 찾아온 사람 중 한 명은 파키스탄원자력위원회(PAEC)의 무니르 아메드 칸 의장이었다고 한다. 그는 부토를 만나 그가 맡고 있는 플루토늄 기반의 핵개발 계획에 대해 계속 보고했다. 베나지르 부토는 “아버지는 수감생활 내내 무니르 칸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무니르 칸은 오렌지와 비타민을 갖고 아버지를 찾아오곤 했다. 무니르는 플루토늄과 프랑스 재처리시설 협상 문제에 대해 계속 얘기를 꺼냈지만 아버지가 궁금했던 건 카후타의 (우라늄 농축) 시설이었다”고 했다.

이때 A. Q. 칸 박사는 네덜란드에서 훔쳐온 CNOR 원심분리기를 파키스탄식으로 다시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여러 어려움이 있었으나 원심분리기를 만들어 작동을 시킬 수 있게 됐다. 칸은 UF6를 원심분리기에 주입해 우라늄을 처음으로 농축해보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네덜란드 회사 FDO에서 번역가로 일하던 사람이 2년 만에 일궈낸 엄청난 진전이었다.

우라늄 농축에 성공하는 칸

라호르 고등법원은 1978년 3월 18일 부토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딸 베나지르는 영국에서 살고 있던 오빠 무르타자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할 때라고 했다. 무르타자는 미국 워싱턴으로 향했다. 그는 베나지르가 하버드 대학교에서 함께 생활했던 피터 갈브리스를 만나 도움을 청했다. 당시 갈브리스는 미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자문위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미국 정계의 고위층과 연락해 부토 총리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했다. 무르타자는 열심히 노력했다. 미국 정계 인사들이 부토 사면(赦免)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가 파키스탄으로도 들어갔다. 지아 장군은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지아는 “어느 누구도 법을 피할 수 없다. 또한 어느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 높이 올라간 사람일수록 더 세게 추락하는 법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A. Q. 칸은 부토의 사형선고 문제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1978년 4월 4일, 칸 박사는 부인 헨리에게 핵개발 프로젝트가 완전히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밝힌다. 헨리는 훗날 인터뷰를 통해 당시 칸이 육불화우라늄(UF6)을 자신이 개발한 파키스탄식 원심분리기인 P-1에 주입해 우라늄을 농축하는 데 성공했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헨리는 당시 인터뷰에서 “내가 파키스탄이 서방세계의 (핵개발) 독점시장 장벽을 깨뜨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의 첫 번째 사람 중 한 명이었다”고 회고했다. 칸은 실험 성공 사실을 굴람 이샤크 칸 재무장관과 아가 샤히 외무장관에게 알렸다.

지아 장군은 권력을 잡은 뒤 핵개발 프로그램을 자신의 측근인 군인이 총괄하도록 지시했다. 군대가 핵프로그램을 담당하는 것을 우려했던 부토 총리와는 정반대의 정책을 편 것이다. 부토는 군대가 카후타 핵시설 건설과 보안 문제만을 담당하도록 해왔다. 유럽에서 핵관련 부품을 조달하는 역할은 파키스탄 정보국에 맡겨왔다. 지아는 부토 총리 하에서 핵을 관리하던 민간 위원회를 해체시켰다. 그리고는 자신의 비서실장인 칼리드 마흐무드 아리프 장군을 핵프로그램 총괄 자리에 앉혔다. 칸은 이때부터 파키스탄 군부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게 됐다. 아리프 장군은 지아 장군이 정권을 잡은 약 10년간 파키스탄 2인자로 군림하게 된다.

지아 장군은 코란의 가르침에 따르자는 지도자였다. 또한 그는 칸 박사의 핵무기가 완성된다면 이는 파키스탄만의 소유물이 아니라 全이슬람 세계가 공유할 수 있는 무기로 만들려고 했다. 이즈음 부토 총리는 감옥에서 파키스탄 원자력위원회의 무니르 칸 의장을 통해 A. Q. 칸의 우라늄 농축이 성공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칸 박사는 캐나다 몬트리올로 이민을 간 그의 오래된 친구인 전기기기 엔지니어 아지즈에게 편지를 보냈다. 파키스탄의 핵프로그램의 진전 상황을 소개하며 파키스탄으로 돌아와 함께 일하자는 요청이었다. 칸의 첫 번째 편지가 몬트리올에 도착한 것은 1978년 6월 13일이었다. 칸은 유럽에서 새로 구입한 장비들을 사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도움을 청했다. 그는 이날 편지에서 자신이 만들어낸 파키스탄식 원심분리기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했다. 그는 “6월 4일은 우리 모두에게 역사적인 날이었다. 그날 우리는 기계에 ‘기체’를 주입했고 제대로 된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했다. 그가 말한 기체는 UF6였고 결과물은 농축우라늄이었다. 그는 “예산을 지원받기 위해 이에 대한 내용을 상부에 알렸다. 이를 소개하자 그들은 무척 기뻐했고 우리를 축하해줬다”고 했다. 아지즈는 파키스탄에 와달라는 칸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뒤늦게 눈치를 챈 영국 정부

1978년 여름 영국 정부는 자국 내에서 파키스탄으로 수출되는 물품 중 핵무기에 사용되는 물품이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칸 박사는 영국의 네트워크를 통해 인버터 등을 수입해왔는데 영국이 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1978년 7월 영국 에너지부는 관련 수사를 지시하고 파키스탄으로 향하는 모든 물품의 수출을 중단시켰다. 조사를 벌인 영국 의회는 1977년 12월 우라늄 농축에 사용되는 인버터 20여 개가 파키스탄에 수출된 것을 파악했다. 수출한 회사는 영국의 에머슨이라는 회사였다. 에머슨의 한 전직 직원은 의회 조사 과정에서 이 인버터가 우라늄 농축에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파키스탄이 우라늄을 농축할 정도의 기술이 없다고 판단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파키스탄이 이런 고난이도의 기기를 운영하는 방법을 절대 알지 못한다고 확신했고 인버터가 녹이 슬어 부서질 때까지 쓰일 일이 없을 것으로 봤다”고 했다.

영국 정부는 인버터가 수출 금지 품목에 포함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관련자들을 처벌하지는 못했다. 1979년 11월 고주파 인버터를 수출 규제 품목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칸 박사의 조력자인 영국의 피터 그리핀은 새로 도입된 규제로 어려움을 겪게 됐다. 그는 영국 정부의 감시명단에 포함됐다. 그는 영국 세관 담당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파키스탄이 무엇을 하는지 전혀 궁금해하지도, 이를 물어보지도 않았다. 나는 수출 규제법을 제대로 따르며 합법적인 일만 했다. 나는 사업가다. 나는 총알을 팔지도 않았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물건을 팔지 않았다. 핵과 관련돼 있을까 봐 당신들이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아는 한 A. Q. 칸은 평화로운 목적의 원자력 개발을 하고 있다. 나는 모든 국가가 평화로운 목적으로 원자력 개발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들(영국 정부)이 아프리카 국가들에 무기와 수갑, 고문 도구들을 수출하는 일을 멈추면 나도 멈추겠다.>

그리핀은 경찰이 수시로 자신을 검문했다고 했다. 과속이나 음주운전 등의 혐의로 그를 체포하려 했다고 했다. 그리핀은 책 ‘디셉션’ 저자와의 인터뷰에서는 영국 정보당국 직원이 그를 찾아와 돈으로 매수하려 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 스완지에 있던 그의 사무실을 찾은 영국 정보국 직원들은 사무실 물건 이것저것을 가리키며 사용 용도를 물었다고 했다. 그중 한 명은 “파키스탄이 (핵) 폭탄을 만들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겠느냐”라고 물었다고 했다. 그는 “알고 있는 것을 다 말해주면 많은 돈을 제공할 수도 있다”고 했다고 한다. 그리핀은 “얼마나 많은 돈을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 직원은 5만 파운드를 제시했다고 한다. 그리핀은 “돈이 얼마가 됐든 내가 쌓아온 (그들과의) 신뢰를 깨지 않을 것”이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고도화되는 파키스탄의 원심분리기

영국에서 활동하던 그리핀과 파키스탄 사업가 압두스 살람은 영국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들은 자유무역지구인 아랍에밀리트의 두바이로 가기로 했다. 영국에서 두바이로 향하는 수출 품목은 파키스탄만큼 까다롭게 관리되지 않았을 때였다.

부토 전 총리의 재판은 막바지를 향해갔다. 부토는 항소이유서를 통해 미국이 정권교체에 개입했다는 주장을 거듭했다.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도 부토의 사면을 요구한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대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아 장군 측근들 역시 전직 총리를 살인죄로 처벌하려는 시도에 불만을 갖는 상황이었다. 국가 위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부토는 코너에 몰렸지만 끝까지 자신이 추진한 비밀 핵개발 계획에 대해서는 털어놓지 않았다.

칸 박사는 캐나다에 있는 친구 아지즈에게 또 편지를 썼다. 그는 이 편지에서 자신이 원심분리기 여러 개를 직렬 및 병렬로 연결한 캐스캐이드 방식의 실험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여러 원심분리기를 연결해 우라늄을 농축해야만 무기화할 수 있는 수준의 농축 우라늄을 만들어낼 수 있다. 칸 박사는 1979년 3월 원심분리기 캐스캐이드의 실험에 성공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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