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훈아 공연 며칠 전 원로 방송인이 문무대왕이란 필명으로 조갑제닷컴에 '나훈아를 대통령 후보로 추천한다'는 제목의 글을 보냈다.
<새벽 산책을 하는 바닷가 둘레길에서 어느 여인 세 명이 이런 얘기를 주고 받으며 지나갔다.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들어 소개한다.
여인A: 이 봐라,동생아, 오는 9월30일 공연되는 "나훈아쇼"가 엄청 재미있어 보이제, 니(너)는 어째(어떻게) 생각하노? 온라인 공연인가, 뭔가 해서 난리 아이더나? 1000명 제한의 예약을 위해 접속서버가 불통이 되고,난리 법구통이 됐다 아이가. 대단하제. 나훈아는 역시 인기가 있어 그제.
여인B: 언니야, 니도 그래(그렇게)생각하나? 나도 언니 생각하고 똑 같다 아이가. 나훈아는 노래 잘 하제, 인물 좋고 건강하제, 무대메너 좋제, 관객과 호흡이 척척 잘 맞제. 나무랄 데가 없는기라. 그럴깨(그러니까) 청중들이 손벽치고 미쳐 나자빠지는기라. 흥분하고 열광하는 기라. 언니야, 내말 맞제?
여인C: 나훈아가 그래(그렇게)좋으면 대통령 한번 나와보라 하지.대통령 별수 없더라 아이가. 국민에게 하는 말은 모두 거짓말이고, 자식새끼 챙기는 연놈들만 보듬아주고 말이제. 북한놈들이 바다에 떠 있는 우리 공무원을 총쏴 죽이고 불태워 버렸는데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뭐라고 야단도 치지 않았다 안카나 말이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잠만 자고 말이다. 참 분통터질 일이제? 참, 이상하제. 대통령은 도대체 숨어서 뭘하고 있노 이 말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나훈아 보고 대통령 한번 해보라카면 시원시원하게 잘할 거 아이가?
여인 A,B,C: 맞다 맞아, 나훈아 보고 대통령 한번 나와보라하자. 알겠제? 이렇게 이어지는 강한 사투리의 이바구(이야기)는 산책거리 간격이 멀어지며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이런 대화를 소개한 뒤 그는 김정은이 불러도 안가는 나훈아의 배짱을 칭찬한 뒤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세계적으로 볼때 연예인들이 대통령이 된 사례도 많다. 배우 출신 로널드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이 되어 소련의 고르바초프와 함께 냉전시대를 종식시켰다. 코미디배우 출신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우크라이나 현직 대통령이다. 소신과 결단과 여민동락의 뛰어 난 예인(藝人) 나훈아가 공연무대가 아닌 정치무대에서 멋진 공연을 펼치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 나훈아의 선택이 관건(關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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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는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즈음하여 1985년엔 한국 측 공연단의 일원으로 평양에 가서 노래를 부른 적이 있다. 2003년엔 가지 않고 서울에서 공연했다. 이 자리에서 북한에 가지 않은 이유를 직접 밝혔다. 이게 유일한 설명일 것이다.
*2003년 9월28일 올림픽공원 콘서트 중 멘트 녹취
여러분, 원래 이 공연이 평양에서 하기로 되어 있었던 공연입니다. 그런데 이 공연이 오늘 서울 평화의 문 앞에서 하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습니다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공연이 누구의 제재를 받고 누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간섭을 받고는 이런 공연은 절대 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저는 간섭을 받기보다는 서울에서 공연을 하는 걸로 결정을 했습니다.
(관객 환호 함성)
여러분, 얼마 전에 남쪽 북쪽 이산가족이 만나는 거 뉴스를 보고 아마 마음 아프시고 속상하시고 하신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우리 이산가족이 천만이 넘는답니다. 억지로, 좀 봐주는듯이 해서 한 몇백 명 만나게 해주는데… 일 년에 천 명이라고 봅시다. 천만 명이 만나려면 만 년을 기다려야 됩니다.
(관객 환호 함성)
남쪽 북쪽 할 거 없이 정신차려야 합니다.
(코러스: "우리의 소원은 통일" 합창)
시끄럽다. 저는 이 노래를 제일 싫어합니다. 4분의 3박자, 느려터져가지고 한두 소절만 들으면 눈물이 나려고 그러고. 이 노래 부를 때 여러분 보셨습니까? 손잡고 그저 울고 앉았어.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언제 통일합니까? 통일의 노래는 힘이 있어야 되고 빠른 템포에 힘이 있어야 합니다.
갑니다. 여러분 도와주십시오.
(코러스/관객: "통일 쾌지나 칭칭 나네" 합창)
이렇게 "쾌지나 칭칭 나네" 해가지고는 북쪽이 안들리니까, 북쪽이 들리게 크게, 왜냐면 같이 정신차려야 되니까. 다시 한번 갑니다! 쾌지나 칭칭 나네(중략)
언제 해도 해야 되는 통일입니다. 빠르면 빠를 수록 좋고요. 우리 마음을 모아서 빨리 통일합시다.
그 1년 전 월간조선(吳効鎭)과 인터뷰한 나훈아 씨는 "내가 가야 할 자리를 골라서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누가 말해도 설 자리가 아니면 절대 안 섭니다"라고 했었다. "그러면 너무 비싸게 군다고 안 할까요?"라고 물으니 이렇게 답했다.
"욕을 먹어야지요. 미국서 제가 신문을 보니까, 일반대중 가운데 30%는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야 슈퍼스타가 된답니다. 너나 나나 다 좋아하는 사람은 슈퍼스타가 아니라 그냥 스타라는 겁니다. 싫어하는 사람 30%가 있어야 좋아하는 사람들이 미칠 정도로 좋아한다는 겁니다. 저는 욕을 많이 먹습니다. 방송사에서 제일 많이 욕먹는 사람이 바로 접니다. 출연 교섭 한번 할래도 '더러워서 죽겠다'고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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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것은 조용필도 2003년 무렵엔 평양공연에 대한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2003년 10월호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북한에서 공연 제의가 들어오면 할 의향이 있나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동안 네 번 정도 제의가 왔었어요. 스케줄이 안 맞아서 못했어요. 1년간 스케줄이 꽉 차 있어요. 몇 개월 후에 할 수 있냐고 제의가 오면 안 되죠. 1년 반 전에 이야기하면 모를까. 매년 하는 것이 정해져 있어서 중간에 움직일 수가 없어요."
―북한 공연에 특별한 의미를 두고는 있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북한 주민들이 내 노래를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고, 또 거기서 몇 명 모아 놓고 공연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 있나요. 우리처럼 TV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월드컵 때 그쪽(북한)에서 제 노래 CD를 요청하더라고요. 50여 장 요청했는데 사가라고 했어요."
―남한의 大스타가 북한 주민을 위해 노래를 부른다면 좋아할 텐데요.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온 북한 여자 응원단원이 현수막 뜯어가는 것을 보고…. 아휴."
―그 장면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참, 통일되어도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던 그가 2005년 노무현 정권 때 평양공연을 했다. 2008년 월간조선과 한 인터뷰에서 일허게 말하였다.
"저의 심적인 변화보다는 저쪽에서 제의를 바꿨어요. 그전부터 우리 가수들이 북한에 많이 갔잖아요. 한 사람이 단독으로 가기보다는 여러 팀이 가서 한 프로그램 만들고 내려옵니다. 그쪽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 해요. 그러면 거기서 뭘 남겨 놓을 수 있겠어요. 그렇게 하라면 난 안 간다고 했죠."
―북측에서 어떻게 제안을 바꿨습니까.
"팩스가 왔어요. 단독으로 공연하고, 장비까지 다 들고 와도 된다고. 그래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모든 걸 직접 기획하고 연출했어요."
2018년 4월27일, 조용필이 판문점에서 김정은과 인사를 나눌 때 허리를 '너무 많이' 굽혀 화제가 되었다. 조용필 측 관계자는 언론에 "기사가 나온 뒤 인사논란에 대해 인지했다"면서 "하지만 조용필은 평소에도 그렇게 인사를 한다. 특정인을 의식했다거나 특별한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밝혔다. 그는 판문점 만찬장에서 '그 겨울의 찻집'을 불렀다. 김정일이 좋아한 노래라고도 한다.
조용필과 인연이 깊은 한 작곡가는 판문점 회담 직전, 평양에 가자는 정권 측의 요청을 거절한 나훈아와 비교하면서 못마땅해 하였다. 김정은은 나훈아가 왜 평양에 오지 않았느냐고 문화부 장관에게 물었다고 한다. 바빠서 못 왔다고 하니 국가가 부르면 와야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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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치하의 서울에서 숨어지내면서 인간이 봐선 안 될 참상을 목도하였던 유호(兪湖)씨는 1950년 9월 수복이 되자 오랜 만에 시내를 거닐며 자유로운 공기를 실컷 들이켰다. "선발대로 청파동에 들어온 해병대가 철로길을 삭삭 스쳐 지나갈 때의 기분이 최고였어요. 그날 소공동에 있는 경향신문에 나갔더니 문화부 평기자는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선지 당분간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고 방(榜)을 붙여 놓았어. 명동(明洞)에 가서 막걸리나 한잔 하자고 생각하고 길을 건너다가 밀짚 벙거지를 쓴 작곡가 박시춘(朴是春)씨를 만났어요. 시골에 피란 갔다가 돌아온 박씨는 명동이 그리워 가족은 필동 집으로 보내고 나오던 길이었대요. 우리는 술집에서 통음(痛飮)을 했죠. 밤 12시가 가까워지자필동에 있는 박씨의 적산가옥으로 옮겼습니다. 박시춘 씨가 먼저 '우린 살았다. 북진통일이 임박했으니까 군인들의 사기를 돋울 노래를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유호 씨가 한 절의 노랫말을 지어 박씨에게 내놓으면 그는 기타를 튕겨 가며 멜로디를 오선지(五線紙)에 그려 나갔다. 두 사람은 아침까지 한숨도 자지 않고, 곡을 마무리한 후, 해장국을 먹으러 나갔다고 한다. 兪湖씨는 4절까지의 가사를 힘들이지 않고 단숨에 지어 냈다고 한다.
"3개월 동안 몇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기니까 화가 치밀어 올랐어요. 술기운도 있고 기분도 좋겠다. 오랜 피란살이에 통일이 된다니까 마음이 날아갈 것 같았어요."
"가사가 짧으니까 자연히 4절이 됐어요. 노랫말을 구성하는데, 군인들이 낙동강까지 쫓겨갔다가 올라온 것이니까 1절을 낙동강, 2절은 추풍령, 3절은 한강수, 4절은 삼팔선으로 잡았어요."
"박시춘 씨가 아는 정훈장교가 가져가서 정훈국에서 발표를 했어요. 아무튼 북진하는 국군이 부를 만한 군가가 없었던 참에 잘 된 거지요. 이 노래는 혼자 부르면 심심하고, 여럿이 부르면 힘이 막 나지요."
"담배를 나누어 먹던"이라고 돼 있는데, 제가 작사할 때는 '담배를 나누어 피던'으로 했을 겁니다. 상식적으로 담배를 피운다고 하지, 먹는다고는 안 하거든요."
북진장병의 주제곡이 되었던 이 노래는 중공군의 침입으로 1·4 후퇴를 할 무렵에는 금지곡이 된다. 육군에서는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란 대목이 불길하다는 것이었다. 휴전 이후에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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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들이 지나가며 남긴 얘기를 반추해보니 현실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요, 위정자들에 대한 성토(聲討)처럼 들렸다. 정치를 혹자들은 예술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래서 공연(公演)과 정치는 공통점이 많다.
첫째, 대중을 상대로 한다. 공연예술에서의 대중은 관객들이고, 정치에서의 대중은 유권자들이다. 관객과 유권자는 모두 국민들이다. 둘째, 공연에서는 관객들이 많이 호응해줘야 하고 정치에서는 많이 지지해줘야만 성공할 수 있다. 셋째, 공연과 정치는 무대(舞臺)가 있다. 정치무대요, 공연무대다. 넷째, 공연이든 정치든 열렬한 지지와 성원이 있고 환호와 박수가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 다섯째, 공연은 치밀한 기획과 연출 등 레퍼토리와 콘텐츠가 있어야 하고, 정치도 국민이 공감하는 정책과 실천이 있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
지지와 환호가 없는 무응답, 무호응의 공연과 무대는 생명을 잃은 송장(送葬)과 같다. 공연의 달인(達人)인 나훈아가 정치를 하면 잘할 것 같다고 믿는 여인들의 속내에 수긍이 가기도 하는 일면이다.
그럼 나훈아는 어떤 사람인가? 나훈아는 본명이 최홍기로 부산 초량 출신이다. 1947년생이다. 오십 수 년간 트로트 가수로 활동하면서 갈고 닦은 노래실력이 가왕(歌王)의 경지를 넘어 황제(黃帝)의 반열에 올라 있다. 심지어 어떤 대중음악평론가는 가성(歌聖)이라고도 부른다. 이런 나훈아를 대통령감으로 추천하는 여인네들의 판단에 공감이 가기도 한다. 비록 아녀자들의 지나가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그럴 듯한 이유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대중음악, 특히 트로트 장르에서 정진해 온 나훈아는 작사, 작곡, 노래 등 모든 분야에서 우리 시대 최고의 경지에 이르러 있다. 구성지게 꺾고 넘어가는 창법(唱法)과 가창력(歌唱力)은 물론, 인간본성에 파고드는 가사와 작곡의 내적충실(내공)은 독보적이다. 공연은 기획에서부터 연출, 관객을 울리고 웃기는 무대와 청중장악력 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래서 나훈아의 공연은 관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그만큼 대중(관객)친화적이란 것이다. 공연을 열광적이고도 성공적으로 이끌고 간다는 것은 나훈아 자신의 리더십과 능력이다. 나훈아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끝없는 노력과 연습에서 부터 비롯된다. 나훈아는 프로근성의 함양은 "무한한 노력과 연습"에 있다고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나훈아는 전문적인 직업관과 국가관도 투철하다. 노무현 정권 때 많은 가수와 연예인들에겐 평양공연이 유행이었다. 이미자, 조용필, 안도현이 그랬고 공영방송들도 평양공연을 앞다투어 추진했다. 나훈아도 2003년, 평양공연을 준비했었다. 그러나 나훈아는 평양공연계획을 갑자기 취소하고 준비한 "아리수"(한강의 별칭) 공연을 MBC전파에 실어 보냈다. 취소 이유는 간단명료했다.
자신의 공연에 대해 북한당국이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것이 싫다고 했다. 평양공연을 하면 "북한당국으로 부터 출연료를 받아도 신통찮을 건데, 그렇지 않고 돈이나 선물보따리를 들고 가서 북한당국의 비위(脾胃)나 맞추며 그들의 지시대로 놀아나는 것은 대한민국의 트로트 황제 나훈아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라고도 했다.
당시 북한당국은 우리가수들의 평양공연에 대해 사전검열을 했다. 이를테면 "굳세어라 금순아 ""한많은 대동강" "단장의 미아리고개" "이별의 부산정거장" 같은 6·25와 북한지명 관련 가사의 노래는 금지시켰다. 북한지역이 고향인 연예인들에 대해서는 자신의 고향을 무대에서 말하지 못하게도 했다. 나훈아는 이같은 북한측의 제재와 간섭을 단호히 거부하는 소신과 결단을 보였었다. 이번에도 코로나19로 고통받는 국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국민위로 무료공연을 자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가관이 투철하고 국민과의 고통나누기를 함께 하려는 예능 재능기부(藝能 才能寄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권세가들이 수전노처럼 놀아나는 황금만능시대에 보기 드문 일이다. 짜증나고 우울해 하는 국민들과 함께 여민동락(與民同樂)에 나선 것은 아주 훌륭한 미담이 아닐 수 없다. 여민동락은 지도자들이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중의 하나이지만 현직대통령도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 공무원이 북한괴뢰로부터 총살당하고 시신이 불태워지는 참혹한 지경인데도 최고지도자는 33시간이나 묵묵부답이었다는 언론보도는 깨어있는 국민들이 복장을 치게 한다.
그래서 트로트 황제 나훈아가 보여주고 있는 결단과 소신과 어려운 국민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야 말로 어느 정치지도자보다도 뛰어나고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새벽 산책에 나선 여인들의 대화가 바로 그렇다. 그래서 나훈아를 대통령 후보로 한번 추천해보자는 얘기가 나왔는지도 모른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요리전문 방송출연자 백종원의 대중친화력과 상대에 대한 배려를 높이 평가한 적이 있다. 그때 많은 언론과 집권여당 사람들은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시대는 변하고 있다. BTS가 세계무대를주름잡으며 국위(國威)를 떨치고 UN에서 연설까지 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오스카 대상을 수상했다. 한국의 예능과 영화 등 공연, 영화예술이 세계적 수준에 올라 있다. 변화하는 시대조류에 따라 우리도 사고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에 서 있다.
무능하고 거짓말하며 협잡배(挾雜輩) 같은 엉터리 위선자들이 권력을 휘두르는 공정하지 못하고 양심불량과 정의롭지 못 한 이 나라를 진정 개혁하려고 한다면 구(舊)적폐와 신(新)적폐를 함께 청소해야만 밝은 미래가 도래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이 고통받고 힘들어 할 때 함께 어깨동무하고 쾌자나 칭칭나네를 불러 주며 위무(慰撫)해 줄 수 있는 포용력 있는 지도자가 진정한 지도자일 것이다. 편협하고 악랄하며 편파적인 소인배들은 물리쳐야 할 더러운 찌꺼기들이다. ○○○ 운동권 세력이라는 지나간 시대의 철지난 구제(舊製)품을 팔아먹고 사는 탕아(蕩兒)같은 장돌뱅이들이다.
세계적으로 볼때 연예인들이 대통령이 된 사례도 많다. 배우 출신 로널드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이 되어 소련의 고르바초프와 함께 냉전시대를 종식시켰다. 코미디배우 출신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우크라이나 현직 대통령이다. 소신과 결단과 여민동락의 뛰어 난 예인(藝人) 나훈아가 공연무대가 아닌 정치무대에서 멋진 공연을 펼치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 나훈아의 선택이 관건(關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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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 월간조선(오효진)과 인터뷰한 가수 나훈아 씨는 "저는 누가 말해도 설 자리가 아니면 절대 안 섭니다"라고 단언하였다. 그는 지난 4월 남북회담 事前행사로 열린 한국 예술단 평양공연 때도 따라가지 않아 김정은이 화를 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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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효진: 무절제하게 오라는 대로 다 가면 안 되겠군요.
『그렇죠! 내가 가야 할 자리를 골라서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누가 말해도 설 자리가 아니면 절대 안 섭니다』
―그러면 너무 비싸게 군다고 안 할까요?
『욕을 먹어야지요. 미국서 제가 신문을 보니까, 일반대중 가운데 30%는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야 슈퍼스타가 된답니다. 너나 나나 다 좋아하는 사람은 슈퍼스타가 아니라 그냥 스타라는 겁니다. 싫어하는 사람 30%가 있어야 좋아하는 사람들이 미칠 정도로 좋아한다는 겁니다. 저는 욕을 많이 먹습니다. 방송사에서 제일 많이 욕먹는 사람이 바로 접니다. 출연 교섭 한번 할래도 「더러워서 죽겠다」고 그래요.
우리 가수 가운데 학벌 좋고 공부 잘하고 노래 잘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런 분이 쇼하면 손님 안 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아주 점잖고, 교양 있는 말만 하고, 그러니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교수 같잖아요. 그러니까 안 가는 겁니다.
뭔지 모르지만 스캔들도 있고, 뭔가 좀 삐딱하게 굴기도 하고, 뭐 하나 할락카면 정신없이 난릴 직여 뿔고, 그러니까, 도대체 저게 뭐야, 한번 가보자, 이런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혹시 돈 많이 안 줘서 안 온다는 소리는 안 듣습니까?
『돈 많이 안 주면 안 갑니다. 그기 당연한 거 아니에요. 누가 대한민국에서 젤 비싸냐? 제가 젤 비쌉니다. 제가 2등의 열 곱은 더 받습니다』
―방송사에 모시려면 한 1억은 내야 합니까?
『방송사에선 가수들한테 출연료를 10만∼20만원밖에 안 줍니다. 그건 뭐냐? 내가 출연시켜 주니까 너희들 홍보가 되지 않느냐 이겁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는 안 합니다. 저를 출연시킬려면 적어도 2천만원 이상을 내야 돼요. 큰 프로그램에 나갈 때는 물론 1억이 넘어야지요』
―그러고 보니 오늘 이 인터뷰도 돈으로 따지면 수천만원 나가겠는데요.
『예, 인터뷰도 그렇습니다. 저와 인터뷰하기가 쉬운지 한번 물어 보십시오. 보세요, 이렇게 어려우니까 月刊朝鮮에서 吳 선생님 같은 분이 오신 겁니다. 그건 제가 만들어야 합니다.
제 공연을 보고 나서도 사람들이 만족을 하고, 밖에 나가서 자랑을 하게 해야 합니다. 관객들은 최고로 비싼 (보통 15만원) 입장료를 내고 왔지만, 내가 또 최고의 무대를 만들어 주거든요. 그러면 사람들이 내가 최고의 입장료를 내고 최고의 무대를 보고 왔다고 자랑을 하게 되는 겁니다. 가수는 이렇게 자랑거리를 만들어 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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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출처: 유튜브 the rightTV
(2003년 9월28일 올림픽공원 콘서트 중 멘트 녹취)
여러분, 원래 이 공연이 평양에서 하기로 되어 있었던 공연입니다. 그런데 이 공연이 오늘 서울 평화의 문 앞에서 하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습니다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공연이 누구의 제재를 받고 누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간섭을 받고는 이런 공연은 절대 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저는 간섭을 받기보다는 서울에서 공연을 하는 걸로 결정을 했습니다.
(관객 환호 함성)
여러분, 얼마 전에 남쪽 북쪽 이산가족이 만나는 거 뉴스를 보고 아마 마음 아프시고 속상하시고 하신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우리 이산가족이 천만이 넘는답니다. 억지로, 좀 봐주는듯이 해서 한 몇백 명 만나게 해주는데… 일 년에 천 명이라고 봅시다. 천만 명이 만나려면 만 년을 기다려야 됩니다.
(관객 환호 함성)
남쪽 북쪽 할 거 없이 정신차려야 합니다.
(코러스: "우리의 소원은 통일" 합창)
시끄럽다. 저는 이 노래를 제일 싫어합니다. 4분의 3박자, 느려터져가지고 한두 소절만 들으면 눈물이 나려고 그러고. 이 노래 부를 때 여러분 보셨습니까? 손잡고 그저 울고 앉았어.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언제 통일합니까? 통일의 노래는 힘이 있어야 되고 빠른 템포에 힘이 있어야 합니다.
갑니다. 여러분 도와주십시오.
(코러스/관객: "통일 쾌지나 칭칭 나네" 합창)
이렇게 "쾌지나 칭칭 나네" 해가지고는 북쪽이 안들리니까, 북쪽이 들리게 크게, 왜냐면 같이 정신차려야 되니까.
다시 한번 갑니다! 쾌지나 칭칭 나네
어쨌든 해야 돼 쾌지나 칭칭 나네
빠르면 더 좋아 쾌지나 칭칭 나네
언젠가는 해야 해 쾌지나 칭칭 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우리는 해야 돼 쾌지나 칭칭 나네
빠르면 더 좋아 쾌지나 칭칭 나네
제주도도 우리 섬 쾌지나 칭칭 나네
독도도 우리 섬 쾌지나 칭칭 나네
금강산도 우리 산 쾌지나 칭칭 나네
백두산도 우리 산 쾌지나 칭칭 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서울도 우리 땅 쾌지나 칭칭 나네
평양도 우리 땅 쾌지나 칭칭 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우리 모두 통일하자 쾌지나 칭칭 나네
아버지 때문에 통일하자 쾌지나 칭칭 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자꾸만 통일하자 쾌지나 칭칭 나네
자꾸만 칭칭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쾌지나 칭칭 나네
언제 해도 해야 되는 통일입니다.
빠르면 빠를 수록 좋고요. 우리 마음을 모아서 빨리 통일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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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전 TV조선의 트롯100년 어워즈 행사에선 상이 쏟아졌다. ‘트롯 100년 남자 베스트 가수상’엔 진성, 조항조, 박현빈, 신유가 수상했고, 베스트 여자 가수상엔 금잔디, 홍진영, 김용임, 김혜연이 뽑혔다.
‘트롯 100년 작가상’을 받은 작곡가 정풍송 선생의 묵직한 수상 소감도 화제가 됐다고 조선일보는 평했다. 정풍송 선생은 '석별' '옛생각' ‘허공’ ‘미워미워미워’ ‘갈색추억’ ‘웨딩드레스’ 등 2000여곡이 넘는 곡을 작곡한 원로인데, 패티김 이미자 최희준 조영남 조용필 인순이 최진희 김연자 설운도 주현미 등 당대 인기가수들이 그의 노래를 불렀다.
작가상 시상에 나선 ‘전국노래자랑’의 MC 송해 씨는 "늘, 아플 때나 외로울 때나 어려울 때나 불렀던 우리 트로트가 금년으로 100년을 맞았다고 한다. 내 생년월일이 1927년 4월 27일인데 트로트 역사와 거의 같은 세월을 지내왔구나 싶다”고 했다.
정풍송 선생은, 뼈 있는 한 마디를 했다.
“감사합니다. 너무나 험난했던 우리나라였습니다. 일제 탄압의 고통 속에서나 불법남침의 6.25 전쟁에서 버틸 수 있던 건 대중가요 역할이 컸던 것 같습니다”고 하더니 이렇게 당부하였다.
“그만큼 앞으로 역할도 큽니다. TV조선에서 대중가요를 다시 조명해 주고 앞으로 길 을 여는 데 큰일 해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 대중가요가 앞으로 더욱 발전해서 우리 대한민국이 완전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자리 잡는 데 같이 이바지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더욱 노력하겠습니다”고 했다.
고달픈 인생의 응원가였던 트롯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무기일 수 있다는 암시였다. 작년 그는 조국 사태를 비꼰 '빗자루'를 발표, 문재인 정권의 위선을 풍자하였다. 경남 밀양 출신인 그는 작사가로도 유명한데, 히트 송이 가장 많은 박시춘 선생과 동향이며 우리나라 최고의 가곡 작곡가 김동진 선생의 제자이기도 하다. 2000년에 김동진 선생은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기자가 "후배들 중 최고의 작곡가는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정풍송 이름을 댔다.
"후배라기보다 내 제자 중에 이수인이라고 있는데 아주 유망했지. 그리고 대중음악 쪽이지만 정풍송이도 노래가 품위 있고 좋아."
나는 근년에 정풍송 선생을 몇 번 만나 오랜 대화를 가졌다. 그와 한 인터뷰가, 조갑제TV에도 올라 있다. 건장한 체격답게 정신이 건강한 분이고 정의감이 대단하다. 시국에 대한 울분을 노래로 표현한다. 정 선생은, 나훈아가 김정은이 불러도 북한에 가지 않는 점을 들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노래 기술에 대한 칭찬보다 인간됨에 대한 칭찬이 더했다. 희대의 히트송인 '허공'도 민주화를 갈망하는 가사였는데 검열을 피하기 위하여 한 단어를 바꿨다고 한다. 아래 가사에 나오는 '그대'는 원래 '민주'였다고 한다.
정풍송 선생은 가수로는 패티김을 가장 높게 평가한다. 무슨 노래이든지 그가 부르면 명곡이 된다면서 국력이 강한 시절이었으면 세계적 가수가 되었을 것이라고 극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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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노래 조용필, 작사 작곡 정풍송)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아쉬움남아
가슴 태우며 기다리기엔
너무나도 멀어진 그대
사랑했던 마음도
미워했던 마음도
허공속에 묻어야 만될
슬픈옛 이야기
스쳐버린 그 날들
잊어야 할 그 날들
허공속에 묻힐 그 날들
잊는다고 생각 하기엔
너무나도 미련이 남아
돌아선 마음 달래 보기엔
너무나도 멀어진 그대
설레이던 마음도
기다리던 마음도
허공속에 묻어야 만될
슬픈옛 이야기
스쳐버린 그 약속
잊어야 할 그 약속
허공속에 묻힐 그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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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문무대왕(조갑제닷컴 회원)의 글 '정풍송과 빗자루'
풍자가요(諷刺歌謠) "빗자루"가 국민들의 애창곡이 되어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다. 돌개바람처럼 휘몰아치고 있다. 조국과 정경심 부류의 부패의혹투성이 쓰레기군상(群像)들에게 폐부(肺腑)를 찌르고 있다. "빗자루"는 이 시대의 위대한 음악가 정풍송(鄭豊松) 선생 작곡, 작사(作詞) 정욱(정풍송의 다른 이름)에 팝페라 가수 "인치엘로"가 노래했다.
가사의 줄거리는 "표리부동한 위선자들이 국민을 속이며 나라를 거덜내고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태롭게 하는 무능하고 파렴치한 부패정권을 빗자루로 싹싹 쓸어내어 피땀흘려 이룩한 자랑스런 대한민국을 후손들에게 물려 주자"로 일관된 세태풍자 가요이다. 작곡가 정풍송 선생은 "김진TV"와의 전화인터뷰에서 "나라돼 가는 꼴이 너무 걱정되고 염려스러워서 위정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고자 가요를 제작했다"고 밝혔다. "나라가 이래 돼서야 되겠는가? 하는 국민들의 우려와 걱정을 노래가사에 담았다"고 했다.
"국민들이 가지는 보편적인 상식에 반하는 권력자들의 횡포를 용납할 수 없어서 용기를 냈다"고도 했다. "한 나라의 국무위원쯤 되면 국민들이 존중하고 인정하며 따를 만한 덕망과 인품을 갖춰야 하는데 범죄의혹이 잡범수준의 형편없는 자를 장관으로 임명하고 그런 사람을 비호하며 감싸고 도는 패거리들의 몰상식한 짓거리가 너무 한심하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이에 동조하는 사이비 예술나부랭이들이 참된 예술가들의 자존심을 짓밟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문이 간다.
"가족사기단이란 언론의 지적이 나올 정도에다 조국의 부인,동생,조카 등 3명이 구속됐는데도 서초동에 몰려가서 "조국만큼 깨끗한 사람 어디 있느냐" 며 헛소리나발 불어대는 정치인, 작가, 가수들은 과연 무슨 양심과 자존심으로 문학을 팔고 음악을 팔아대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고도 했다.
"아무리 세상이 썪어 빠지고 지식인이 타락하고 권력의 비굴한 노예가 되어도 그래도 양심과 정의감에 불타는 예술인이 살아 있어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고도 했다. 인기팝페라 "인치엘로"는 이태리에서 제대로 음악공부를 했고 장래가 기대되는 젊은 음악도들이라고도 소개 했다. 정풍송 선생의 이같은 고발과 발언을 들으면서 느껴 진 것은 그래도 이 난장판 세상에 양심과 정의감에 충만한 원로음악인이 건재하고 있다는 든든한 버팀목에 대한 기대가 솟아 나왔다. 조국 전 장관을 마치 의인이요, 개혁의 적임자인 것처럼 헛소리를 나불거려 된 유시민, 박지원, 소설가 이○수,황○영,공○영,가수 이○미,개그맨 노○렬, 그리고 청문회와 국정감사장에서 조국호위 무사를 자처한 표○원,이○희,김○민,박○민,박○미 등의 국회의원 등도 "빗자루"를 노래 듣고 부를까?
정풍송 선생은 경남 밀양출신이다. 해병대 164기 출신으로 청룡부대 제1진으로 월남전에 참전한 국가관이 투철한 역전의 용사다. 젊은 시절 한때 부산MBC에서 근무한 방송인이자 음악가이다. 음악에 대한열정과 집념을 크게 이룩하고자 서울로 올라 와서 음악인생의 새로운 장을 개척했다. 2000여 곡의 노래를 작곡,작사하기도 했다. 정풍송 선생이 작사,작곡한 작품 가운데는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애창곡이 수두룩하다. 조용필의 "허공""미워미워미워",한상일의 "웨딩드레스",조영남의 "옛생각", 홍민의 "석별", 한예진의 "갈색추억", 김연자의 "진정인가요"등이 있다.
김연자의 "진정인가요"는 "TV조선"의 "미스트롯"에서 재조명돼 무려 37년만에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 난세(亂世)에 정풍송 선생 같은 위대한 음악인이 건재함을 다행하게 생각한다. 정풍송 선생의 음악공간이 더 확대되고 그의 작품이 국민들로부터 사랑받기를 기원한다. "빗자루"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거짓말 없는 정직한 세상
우리 모두 꿈꾸던 세상
자유와 평등 공정과 정의
온 천하에 약속했었지
피땀 흘려 목숨바쳐
지켜왔던 우리의 조국
영원토록 지켜가야 할
자유민주주의 조국
사랑하는 우리 후손들
길이길이 살아 갈 이땅
건강하게 물려줘야지
오염투성이들은 못 해
하나뿐인 우리의 조국
오직 오직 영광일 뿐
표리부동 위선자들
쓰레기더미 궤변가들
빗자루로 모두 모두 싹싹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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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생각
노래 조영남
작사 : 강상숙
작곡 : 정풍송
뒷동산 아지랑~이
할미~꽃 피면
꽃댕기 매고 놀~던
옛 친구 생각난다
그 시절 그리~워
동산에 올라보면
놀던 바위 외롭고
흰구름만 흘러간~다
모두 다 어디갔나
모두 다 어디갔나
나 혼자 여기 서서
지난 날을 그~리~네
그 시절 그리~워
동산에 올라보면
놀던 바위 외롭고
흰구름만 흘러간~다
모두 다 어디갔나
모두 다 어디갔나
나 혼자 여기 서서
지난 날을 그~리~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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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가 "나는 이래라 저래라 하는 곳에 안갑니다"고 거절하였던 평양공연은 앞으로도 안해야 한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평양 공연엔 자유가 없다. 곡을 마음대로 고를 수 없고, 아무나 공연을 볼 수가 없다.
2. 평양 공연은 북한주민들에게는 비공개이고, 김정은과 노동당 간부들만 본다. 독재자의 즐거움을 위하여 북한주민들을 외면하니 이게 反민주, 反민족적이다. 평양공연은 한국에선 공개되어 순진한 국민들에 대한 선동에 이용되고 있다. 다수 한국인들은 북한사람들도 같이 보고 공감한다고 착각한다.
3. 가수들이 출연료를 받기는커녕 북한에 갈 때 선물을 들고 간 경우도 있다고 한다. 상호주의에 위반된다.
4. 자유진영의 예술인이 스탈린, 히틀러 같은 독재자들만을 위한 공연이나 연주를 하면 이는 독재에 동조하는 행위로 간주된다. 바그너 곡을 이스라엘에서 공개적으로 연주할 수 없는 이유는 바그너가 反유태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민족반역자이고 反인도범죄자인 김정은 일당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돈을 써가면서 서비스하는 것은 가수가 아니라 기생도 해선 안 될 일이다.
5. 정부는 앞으로 이런 정치적, 패륜적 공연을 하지 않아야 하고 무엇보다도 가수들에게 압력을 행사해선 안 되며 가수들 스스로 결단을 해야 한다. 나훈아처럼. 나라가 정상화되면 친북가수 명단에 올라갈지 모른다.
6. 유태인 가수가 히틀러 앞에서 재롱을 부렸다면? 평양공연은, 아우슈비츠 같은 데서 독일군이 수용된 유태인들로 악단을 조직, 베토벤을 연주하게 하고 즐기는 것과 같은 反인도범죄이다.
7. 이런 평양공연은 '우리민족끼리'가 아니라 '민족반역자끼리'나 할 짓이다. 평양공연으로 우리민족끼리를 외쳤지만 그들은 표류해온 한국인을 구조하지 않고 사살, 시신을 불태웠다. 감상적 노래가 분단현실을 뭉갤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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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의 작금 인기는 그가 김정은이 부른 평양공연에 가지 않았다는 점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아무리 노래 기술자라고 해도 민족반역자 도살자 反인도범죄자 전쟁범죄자인 김정은에게 영합하는 노래를 열창할 수 있는가? 이스라엘에선 지금도 反유태인 작곡가 바그너의 음악을 공개적으로 연주, 방송하지 못한다.
2018년 4월4일 미국의 소리(VOA) 방송은, 한국 예술단의 평양공연은 북한 정권의 선전 캠페인으로 북한 주민이나 한국인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미국의 일부 전문가들의 견해를 빌어 비판한 적이 있다. 특히 북한 당국의 요청으로 한국 가수가 김정일의 애창곡을 부른 게 알려지면서 한국 문화를 접할 수 없는 북한주민들과 엘리트들의 대조적인 현실을 분명히 보여줬다고 지적했다. 김정은은 그해 신년사에서 비사회주의 현상을 뿌리뽑기 위한 투쟁을 드세게 벌여야 한다고 강조했었다.
김영권 기자의 보도 내용을 소개한다.
<한국 가수 최진희 씨가 지난 1일 동평양 극장에서 부른 현이와 덕이의 ‘뒤늦은 후회.’
[녹취: ‘뒤늦은 후회’] “외로운 나에겐 아무 것도 남은 게 없구요. 순간에 잊혀져 갈 사랑이라면 생각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살아온 나에게도 잘못이 있으니까요”
이 노래는 남매 가수인 현이와 덕이가 1985년에 부른 곡으로 이별에 대한 외로움과 후회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최진희 씨는 취재진에게 준비위원회 측 요구로 이 노래를 불렀다며 나중에 김정은 위원장이 악수하며 “그 노래를 불러줘서 고맙다”고 말했다고 전했습니다. 한국 언론들은 이 노래가 김정일의 애창곡 중 하나였기 때문에 아들인 김 위원장이 특별 요청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습니다.
국가 최고지도자가 일반 시민들처럼 대중가요나 드라마, 외국의 팝송을 즐겨 듣는 것은 자유 사회에서 이례적인 게 아닙니다. 과거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 부부는 한국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후진타오 전 주석 부부는 ‘대장금’을 즐겨 시청했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는 한국 가수 계은숙의 오랜 팬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가요를 비사회주의 요소로 엄격히 금지하는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한국 가요를 즐겨 듣는 모습은 매우 위선적이라고 일부 북한 인권 전문가들은 지적합니다.
과거 평양과학기술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친 뒤 ‘평양의 영어선생님’을 펴내는 등 작가로 활동 중인 수키 김 씨는 3일 VOA에 최진희 씨 등 한국 연예인들의 공연 소식을 들으며 “씁쓸하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수키 킴] “씁쓸한 것 같아요. 너무 프로파간다로 사용되는 게. 쇼잖아요 결국. 최은희와 신상옥 씨 케이스부터 북한 지도자의 (한국) 연예인 편력은 놀랍지가 않은데 여기에 더 실망스러운 것은 남한 정부의 태도인 것 같아요. 남한 정부가 연예인들을 정치적 이슈를 위해 사용하는 거잖아요. 남한과 북한의 화해는 연예인이 가서 노래를 부른다고 이뤄지는 게 아니니까 북한 시민들은 남한 노래를 들을 수 없잖아요. 김정은이 거기 참석하고 공연장이 꽉 찼다는 것은 그저 노동당 간부들로 관객을 메운 건데. 이게 쇼가 아니면 뭔가요?”
한국 청와대는 그러나 남한 공연단의 평양 공연이 남북 화해와 대화를 진전시켜나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적지 않은 언론과 전문가들도 북한 최고지도자가 한국 예술단의 공연을 관람한 것은 최초라며 한류 문화가 북한에 활발하게 흐르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2008년 뉴욕 필하모닉의 평양 공연을 직접 취재하기도 했던 수키 김 씨는 당시 오케스트라의 공연이나 한국 연예인들의 이번 공연 모두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고 지적했습니다. 결국 북한 정권의 선전에 활용됐을 뿐이란 겁니다.
[녹취: 수키 킴] “제가 커버했었던 뉴욕 필하모닉의 콘서트와 그렇게 차이가 없습니다. 지금 이건 대중가요란 게 차이점이잖아요. 미국 오케스트라가 들어갔든, 최진희 씨가 노래를 부르고 레드벨벳이 춤을 췄든 비슷비슷한 거죠. 이거 다 북한 시민들은 들을 수 없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서 주는 메시지는 김정은이 참석하고 간부들이 자리를 꽉 채우고 그래서 마치 북한 사회가 그런 자유가 있는 나라처럼 포장하는 건데, 그런 포장을 하는 선전에 남한의 젊은 아티스트들이 사용됐다는 것은 참 씁쓸한 것 같아요. 굉장히 실망스럽고요. 남한 정부에. 북한 정부는 놀라울 게 없어요. 늘 하던 짓이니까”
북한 정권은 실제로 주민들이 남한 가요 등 자본주의 문화를 접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해 12월 개최한 당세포위원장 대회 연설에서 “비사회주의적 현상과 섬멸전을 벌리라(벌이라)”고 지시했다고 ‘조선중앙TV’는 전했었습니다.
김 위원장은 특히 “우리 내부에 불건전하고 이색적인 사상 독소를 퍼뜨리고 비사회주의적 현상들을 조장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며 이런 자본주의 요소들이 “청년들과 인민들의 혁명의식과 계급의식을 마비시키고 우리의 사회주의 혁명 진지를 허무는 매우 위험한 작용”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올해 신년사에서도 비사회의주적 현상을 뿌리뽑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런 지시는 비밀리에 한국 가요와 드라마를 즐기는 북한 주민들이 늘고 있는 데 대한 대응 조치로 풀이됩니다.
김일성종합대 출신 탈북민인 김수연 한국 통일문화연구소 전문위원은 최근 언론 기고에서 “북한 주민들이 ‘이별’, ‘좋은 날’, ‘이등병의 편지’ 등의 가요와 엑소를 비롯한 아이돌 그룹 노래를 부르거나 전파했다는 이유로 평양에서 추방되거나 처벌당했고 심지어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전문가들은 북한 수뇌부가 한국 문화의 유입을 정권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보기 때문에 오랫동안 차단에 주력해 왔다고 지적합니다. 워싱턴에 있는 북한인권위원회(HRNK)의 그레그 스칼라튜 사무총장은 3일 VOA에 북한의 일반 주민이 한국 가요를 들으면 교화소에 갇힌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일반 주민들이 즐길 수 없는 한국 예술단의 평양 공연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스칼라튜 총장] “This means nothing! Absolutely nothing in terms of exposing the ordinary people of North Korea to South Korea or outside world”
한국 예술단의 공연은 “북한 정권의 프로파간다 캠페인의 일환으로 북한의 엘리트들만이 공연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주민들이나 한국, 외부 세계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스칼라튜 총장은 북한 정권이 왜 이 시점에서 이런 유화적 공세를 펴는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북한 주민들에게 같은 민족인 한국인들의 음악을 들려주려는 게 아니라 국제사회의 강력한 제재압박을 모면하려는 의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최근 풍선과 무인기 등을 통해 북한에 저렴한 방법으로 외부 정보는 보내는 방안을 연구해 보고서를 발표한 미 랜드연구소의 리처드 메이슨 선임기술연구원은 VOA에 이 때문에 북한에 객관적인 외부정보의 전달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녹취: 메이슨 연구원] “I think it’s important to get information into North Korea. Terrible thing is North Korea cut off…”:
북한 정권이 모든 외부정보를 차단하는 상황에서 정치적이든, 종교적이든, 어떤 내용이든 북한 주민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중요하다는 겁니다.
전문가들은 김정은 위원장이 자신뿐 아니라 모든 북한 주민들이 한국 대중가요를 자유롭게 듣고 부를 수 있도록 허가한다면 이번 한국예술단의 평양공연을 선전한 진정성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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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스마가 있는 노래「그리운 금강산」의 40년 생애
『우리 다 맺힌 원한 풀릴 때까지… 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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閔庚燦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음악학과 교수
작사자 韓相億
1915년 강화 출생, 1992년 작고. 시인, 그리운 금강산 작사자, 경기신보 논설위원, 예총인천지부장 역임. 시집으로 「평행선의 대결」, 「창변은유」 등이 있음.
작곡가 崔永燮
1929년 강화 출생. 그리운 금강산 작곡자, 서울대 작곡과, 비엔나 국립음대 대학원(석사). 한국작곡가회 부회장, 한국예술가곡진흥회 회장. 작품으로 「망향」, 「도라지꽃」 등.
누구의 주제런가/맑고 고운 산/그리운 만이천봉/말은 없어도/이제야 자유 만민/옷깃 여미며/그 이름 다시 부를/우리 금강산/수수만년 아름다운 산/더럽힌 지 몇 해/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금강산은 부른다
비로봉 그 봉우리/짓밟힌 자리/흰 구름 솔바람도/무심히 가나/발 아래 산해 만리/보이지 마라/우리 다 맺힌 원한/풀릴 때까지/수수만년 아름다운 산/더럽힌 지 몇 해/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금강산은 부른다
기괴한 만물상과/묘한 총석정/풀마다 바위마다/변함 없는가/구룡폭 안개비와/명경대물도/장안사 자고향도/예대로인가/수수만년 아름다운 산/더럽힌 지 몇 해/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
韓民族의 頌歌
분단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가슴에 가장 와 닿는 노래를 꼽으라면 누구나 주저 없이 「그리운 금강산」을 꼽을 것이다. 가곡 「그리운 금강산」은 분단이라는 비극과 통일의 염원을 아름다운 詩想으로 승화시킨 詩文學(시문학)과 그 詩가 주는 감동으로 빚어진 樂想의 결합으로 결실을 맺었다.
비록 분단 체제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태어난 노래지만, 단순히 가곡이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통일 주제가」로, 「국민 가곡」으로 불리고 있으며, 듣는 사람 부르는 사람 모두 경건하게 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汎민족적 노래로 사랑을 받고 있다.
거기에는 분단의 고통과 망향의 恨(한)이 서려 있지만, 단지 슬픈 아름다움이 아니라 민족적 서정으로 승화된 건강한 아름다움이 내재되어 있다.
그 때문인지 들으면 들을수록 애틋한 悲哀(비애)가 가슴 깊은 곳으로 고여들고, 부르면 부를수록 깊이 간직했던 슬픈 鄕愁(향수)가 스며나고, 민족의 염원에 대한 宗敎(종교)와도 같은 경건한 마음을 자아내고, 통일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운 금강산」을 歌曲(가곡)이라기보다는 「한민족의 頌歌(송가)」로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2000년 8월15일 인천시 남동구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가 섰다. 회관 광장에 세워진 이 노래비는 너비 6.4m, 높이 3.8m, 무게 30t의 자연석에 악보와 가사를 새긴 것으로 새얼문화재단이 1999년 1월부터 추진해 온 것.
이 노래가 국민가곡으로 자리매김한 데다 작곡가 崔永燮(최영섭·72)씨와 작사가 韓相億(한상억·1992년 작고)씨 모두가 인천 강화 출신이라는 데서 사업이 계획됐다고 한다.
한국가곡 80年史에 있어서 「그리운 금강산」만큼이나 반응을 불러일으킨 화제작은 없을 것이다. 남북 적십자회담, 남북 이산가족 상봉, 남북 예술단 교환 공연 등 남북 행사에 즈음해서 언제나 「통일주제가」로서 민족 화해와 통일의 무드를 조성해 주는 곡이 「그리운 금강산」이며, 聲樂家(성악가)들이 제일 부르고 싶어하는 가곡, 가장 많은 성악가들이 음반으로 취입한 가곡,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가곡, 한국 가곡사 최고의 히트작, 저작권료를 가장 많이 받는 가곡 등 각종 기록을 가지고 있는 곡이 바로 「그리운 금강산」이다. 또한 4중창, 무드음악, 경음악 등 다양한 형태로 編曲(편곡)되어 국민들에게 친숙해져 있는 곡이며, 발표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어느 음악회에서는 성악가들이 서로 이 곡을 부르려고 해, 할 수 없이 출연자 전원에게 合唱(합창)을 시켰다는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는 곡이기도 하다.
「그리운 금강산」은 통일 주제가라기보다는 「反共(반공) 주제가」로 이 땅에 태어났다. 그러던 것이 자유 통일을 상징하는 노래로 進化하였고, 지금은 한국민이라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좋아하는 국민가곡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는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을 포함해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우리 민족 모두에게 사랑을 받는 「민족의 노래」로서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운 금강산」을 사람으로 치면 이미 不惑(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1961년「反共 주제가」로 탄생
공연이 끝난 후 다른 곡들에 대해서는 『남조선 음악은 국적불명의 頹廢的(퇴폐적)인 음악』이라고 비난을 했지만, 「그리운 금강산」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이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공개적인 찬사를 보낼 수 없어 묵시적으로나마 동조를 한 것이라는 說에서부터, 공연 당시에는 歌詞(가사)를 알아 들을 수 없어 무슨 뜻이지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분노를 하였다는 說, 대외적으로는 침묵을 하였지만 대내적으로는 『그리운 금강산이란 북조선 체제를 그리워하는 남조선 인민들의 열망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금강산을 빌어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고 逆선전에 이용하였다는 說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리운 금강산」의 原가사는 종종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민족 화합을 조성하는 데 있어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어 왔다. 「더럽힌 지 몇 해」, 「우리 다 맺힌 원한」, 「더럽힌 자리」 등의 가사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북한 정권에 대한 적대 감정을 가지고 금강산을 묘사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1985년 9월에 있었던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예술단 교환 공연」과 같은 민족의 화합의 마당을 마련하는 자리에서 북한을 자극하는 내용의 노래를 선택했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었다.
「더럽힌 지 몇 해」가 「못 가본 지 몇 해」로
이 때문인지 아니면 작사자 자신도 가사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또 아니면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가사로 개작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인지 그 후 가사를 일부 수정했다. 「더럽힌 지 몇 해」가 「못 가본 지 몇 해」, 「우리 다 맺힌 원한」이 「우리 다 맺힌 슬픔」으로, 「더럽힌 자리」가 「예대로인가」로 바뀐 것이다.
우리나라의 가곡은 서정성과 낭만성을 총체적인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반면 서사적인 요소와 사실주의적 요소가 약하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리운 금강산」은 서정성과 낭만성을 기조로 하면서 거기에 서사성을 가미한 「敍事的(서사적)인 抒情(서정)가곡」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분단 체제라는 특수한 상황 아래서, 이 시대의 고통과 이 시대의 현실과 이 시대의 정서를 호소력 있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현실을 直視(직시)하게 하고 그것을 되새기게 하는 사실주의 가곡의 성격도 가진다. 즉, 하나의 노래를 통해 다양한 음악적 정서를 體得(체득)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아카데믹한 가곡보다는 旋律美(선율미)가 풍부한 가곡을 더 좋아하고, 피아노 반주보다는 오케스트라 반주를 더 좋아한다. 가곡을 오케스트라 반주로 연주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특수한 현상인데, 오케스트라 반주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효과를 줄 뿐 아니라 다양한 효과를 낼 수 있고 청중들에게 친근감을 주기 쉽다.
선율 중심의 가곡인 동시에 악상의 변화가 잦고 音色的인 대비와 극적인 효과를 요구하는 「그리운 금강산」의 경우, 피아노보다 오케스트라로 반주를 해야 그 맛을 효과적으로 낼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우리나라의 대중적 음악 기호와 잘 맞아 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감미로운 선율, 곡 전체를 감도는 서정미, 억압된 감정의 표출에서 오는 카타르시스, 극적 효과 등 대중들이 좋아할 요소들이 그 안에 전부 녹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운 금강산」은 원래 칸타타(cantata·17~18세기 바로크 시대에 발전한 성악곡의 한 형식으로 독창·중창·합창과 기악 반주로 이루어지는 交聲曲)로 작곡되었으나 지금은 가곡이 되었고, 또 세미 클래식이 발달되지 않은 한국적 음악 상황에서 세미 클래식의 기능과 함께 감상용 경음악, 무드음악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이는 대중적 인기가 「그리운 금강산」으로 하여금 다양한 역할을 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작곡자가 아니라 대중들에 의해 그 음악 양식이 바뀐 것은 아마 「그리운 금강산」이 유일할 것이다.
카리스마가 있는 노래
성악가들이 「그리운 금강산」 부르기를 좋아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우선 자기의 음악적 기량을 마음껏 펼 수 있다는 데 있다. 우리나라의 성악가들은 감정 표출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리운 금강산」을 부르면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는 주인공과도 같은 카리스마로 청중을 압도할 수 있다. 또한 거기에는 예술 가곡을 부르는 것 같은 섬세함이 있고, 애창곡을 부르는 것 같은 다정다감한 친근감이 있고, 종교음악을 대하는 것 같은 경건함이 있고, 우리 음악에서만 느낄 수 있는 한국적 서정이 있다.
「그리운 금강산」이 그토록 빠른 시간 안에 널리 보급이 된 데에는 전파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가곡은 음반을 통해 보급이 되거나 음악교과서에 수록돼 알려지는 데 비해 「그리운 금강산」은 방송을 통해 제작·보급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방송을 통한 가곡의 보급은 방송의 특성인 同時性(동시성)과 廣播性(광파성) 기능에 의하여 효율적인 효과를 나타내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그리운 금강산」이다. 「그리운 금강산」은 다른 가곡들과는 달리 방송용 가곡으로서 적합한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방송용 가곡은 일부 계층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너무 길어도 안 되고 너무 짧아도 안 되며, 어려워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쉬워도 안 되고 다양한 형태로 편곡·연주될 수 있어야 하고, 同시대적 정서에 맞아야 하는 등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조건에 맞는 곡이 바로 「그리운 금강산」이다.
한 노래는 작사자와 작곡가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그 노래의 運命(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사회의 구성원과 구성 요소이다. 「그리운 금강산」은 시인 韓相億과 작곡가 崔永燮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우리 시대의 비극과 고통과 염원을 대변하는 노래로서 기능을 하였고, 同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국민가곡」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금강산은 이제 「갈 수 없는 山」이 아니라 「갈 수 있는 山」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운 금강산」은 여전히 愛唱(애창)되고 있고 오히려 더 절실하게 우리의 가슴에 와 닿고 있다. 단순히 금강산을 그리워하는 노래가 아니라 통일을 염원하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그리운 금강산」이 불리는 상태보다 안 불리는 상태를 동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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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진짜 사나이)
"꽃피면 더욱 슬퍼 삼팔선의 봄
죽음에 시달리는 북녘 내 고향
그 동포 웃는 얼굴 보고 싶구나."
(삼팔선의 봄)
"우리 모두 굳세게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워서
영광된 새 조국에 새역사 창조하여
영원토록 후손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세"
(나의 조국, 새마을 노래)
"자유통일 위해서 길러온 힘이기에
조국의 이름으로 어딘들 못가리까"
(맹호들은 간다)
"멧도적 오랑캐를
하~늘의 힘을 빌어
모~조리 쳐부수어
흘~려온 값진 피의
원한을 풀으리"
(6.25의 노래)
"오곡 백과 풍성한 금수강산 옥토 낙원
완전통일 이루어 영원한 자유 평화"
(조국찬가)
"올해는 일하는 해 모두 나서라
일하는 팔다리에 힘이 솟는다"
(일하는 해의 노래)
"내 마을 내 직장은 내가 지키고
내 조국 내 민족은 내가 지킨다"
(민방위의 노래)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다"
"나오라 붉은 무리 침략자들아
예비군 가는 길에 승리 뿐이다"
(향토예비군의 노래)
한 손에 망치 들고 다른 손에 총칼 들고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웠던 시절의 다짐과 情感이 담긴 노래말들이다. 월남파병 시절의 유명한 軍歌 '맹호들은 간다'에 나오는 "자유통일 위해서 길러온 힘이기에 조국의 이름으로 어딘들 못가리까"라는 귀절은 이렇게 우리를 채찍질 한다.
<자유통일을 위하여 이렇게 國力을 길러놓았는데 무슨 이유로 머뭇거리는가? 대한민국이 결심하면 북한동포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어딘들, 무엇이든 못하겠는가.>
'삼팔선의 봄'에서 가장 찡한 대목은, "꽃피면 더욱 슬퍼 삼팔선의 봄/죽음에 시달리는 북녘 내 고향/그 동포 웃는 얼굴 보고 싶구나"이다. 꽃이 피면 즐거워야 하는데 38선이 죽음과 삶을 갈라놓은 현실을 생각하면, 또 죽음에 시달리는 북녘 동포들을 생각하면, 꽃이 필수록 더욱 슬퍼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자유통일하여 '오곡 백과 풍성한 금수강산 옥토 낙원에 영원한 자유 평화'를 건설, '그 동포 웃는 얼굴'을 보고싶은 것이다. 이런 세상을 만들려면 모든 국민들이 "우리 모두 굳세게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워서 새 조국"을 만들 것을 다짐하고, "내 마을 내 직장은 내가 지키고 내 조국 내 민족은 내가 지킨다"는 自主국방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 朴正熙 대통령도 '나의 조국'이란 軍歌를 작사, 작곡하였다. 그는 "영광된 새 조국에 새역사 창조하여 영원토록 후손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세"라고 노래했다. 대통령뿐 아니라 대중가요 작사가들까지 오늘의 정치인들보다 더 나라를 생각하고 더 통일을 염원하고 북녘동포들을 더 사랑하던 시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 전통을 이어받은 분인 정풍송 선생은 TV조선으로부터 '트로트 100년 작가상'을 받는 자리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대중가요가 一翼을 맡아야 한다"는 취지의 인사말을 했다. 반공애국정신을 노래말에 가장 많이 담은 작사가는 '전우여 잘자라'의 유호 선생이다.
맹호들은 간다(유호 작사. 이희목 작곡)
1.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같은 겨레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
한결같은 겨레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
2. 자유통일 위해서 길러온 힘이기에
조국의 이름으로 어딘들 못가리까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남북으로 갈린 땅 월남의 하늘 아래
화랑도의 높은 기상 우리들이 보여주자
화랑도의 높은 기상 우리들이 보여주자
3. 보내는 가슴에도 떠나는 가슴에도
대한의 한 마음이 뭉치고 뭉쳤으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태극깃발 가는 곳 적이야 다를소냐
무찌르고 싸워 이겨 그 이름을 떨치리라
무찌르고 싸워 이겨 그 이름을 떨치리라
동영상: http://channel.pandora.tv/channel/video.ptv?ref=google&redirect=prg&ch_userid=boss90&prgid=6179967&categid=
진짜 사나이(유호 작사, 이흥렬 작곡)
1.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전투와 전투속에 맺어진 전우야
산봉우리에 해뜨고 해가 질 적에
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
2. 입으로만 큰소리쳐 사나이라드냐
너와 나 겨레 지키는 결심에 살았다
훈련과 훈련속에 맺어진 전우야
국군용사의 자랑을 가슴에 안고
내고향에 돌아갈 땐 농군의 용사다
3. 겉으로만 잘난 체해 사나이라드냐
너와 나 진짜사나이 명예에 살았다
멋있는 군복입고 휴가간 전우야
새로운 나라 세우는 형제들에게
새로워진 우리생활 알리고 오리라
일하는 해의 노래(이원수 작사, 김동진 작곡)
1. 올해는 일하는 해 모두 나서라 새 살림 일깨우는 태양이 떴다
새로운 뜻 부푼 꿈을 일손에 모아 가난을 물리치자
행복을 심자 일하는 즐거움을 어디다 비기랴 일하자 올해는 일하는 해다
2. 올해는 일하는 해 모두 나서라 일하는 팔다리에 힘이 솟는다
노래하며 씨 뿌리며 웃으며 가꿔 이제는 누려보자
잘살아보자 일하는 즐거움을 어디다 비기랴 일하자 올해는 일하는 해다
3. 올해는 일하는 해 모두 나서라 일하는 이웃끼리 다정도 하다
따사로운 숨결 속에 서로 도우며 보람의 쌓인 나날
꽃피우리라 일하는 즐거움을 어디다 비기랴 일하자 올해는 일하는 해다
민방위의 노래(내무부 작사, 김성태 작곡)
1. 조국에 부름받아 일어선 우리
침략막고 재난 막는 향토의 방패
나라 위해 바친 몸 다시 바치랴
민방위 깃발 아래 굳게 굳게 뭉쳤다.
내 마을 내 직장은 내가 지키고
내 조국 내 민족은 내가 지킨다.
2. 겨레의 부름 받아 일어선 우리
민방위 있는 곳에 재난은 없다.
안전과 번영 위해 몸을 바치랴
민방위 깃발 아래 굳게 굳게 뭉쳤다.
내 마을 내 직장은 내가 지키고
내 조국 내 민족은 내가 지킨다.
3. 역사의 부름 받아 일어선 우리
철통 같은 방위속에 드높은 함성
조국통일 위하여 몸을 바치랴
민방위 깃발 아래 굳게 굳게 뭉쳤다.
내 마을 내 직장은 내가 지키고
내 조국 내 민족은 내가 지킨다.
새마을 노래 (박정희 작사 / 작곡)
1.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2.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푸른동산 만들어 / 알뜰살뜰 다듬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3. 서로서로 도와서 땀흘려서 일하고 소득증대 힘써서 / 부자마을 만드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4. 우리 모두 굳세게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워서 / 새조국을 만드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나의 조국(박정희 작사·작곡)
1. 백두산의 푸른 정기 이 땅을 수호하고
한라산의 높은기상 이 겨레 지켜왔네
무궁화꽃 피고져도 유구한 우리 역사
굳세게도 살아왔네 슬기로운 우리 겨레
2. 영롱한 아침해가 동해에 떠오르면
우람할 손 금수강산 여기는 나의 조국
조상들의 피땀어린 빛나는 문화유산
우리 모두 정성 다해 길이 길이 보전하세
3. 삼국통일 이룩한 화랑의 옛 정신을
오늘에 이어받아 새마을 정신으로
영광된 새 조국에 새역사 창조하여
영원토록 후손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세
향토예비군의 노래(전우 작사, 이희목 작곡)
1.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다
직장마다 피가 끓어 드높은 사기
총을 들고 건설하며 보람에 산다
우리는 대한의 향토예비군
나오라 붉은 무리 침략자들아
예비군 가는 길에 승리뿐이다
2. 반공의 투사들이 굳게 뭉쳤다
마을마다 힘찬 고동 메아리 소리
서로 돕는 일터에서 나라 지킨다
우리는 막강한 향토예비군
나오라 붉은 무리 침략자들아
예비군 가는 길에 승리뿐이다
3. 역전의 전우들이 다시 뭉쳤다
나라 위한 일편단심 뜨거운 핏줄
철통같은 제2전선 힘이 넘친다
우리는 무적의 향토 예비군
나오라 붉은무리 침략자들아
예비군 가는 길에 승리 뿐이다
조국찬가(양명문 작사, 김동진 작곡)
1. 동방에 아름다운 대한민국 나의 조국
반만년 역사 위에 찬란하다 우리 문화
오곡 백과 풍성한 금수강산 옥토 낙원
완전통일 이루어 영원한 자유 평화
태극기 휘날리며 벅차게 노래 불러
자유대한 나의 조국 길이 빛내리라
2. 꽃피는 마을마다 고기잡는 해변마다
공장에서 광산에서 생산 경쟁 높은 기세
푸르른 거리엔 재건부흥 노래소리
늠름하게 나가는 새 세기의 젊은 세대
태극기 휘날리며 벅차게 노래 불러
자유 대한 나의 조국 길이 빛내리라
6.25의 노래(박두진, 김동진)
1.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 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2.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불의의 역도들을
멧도적 오랑캐를
하~늘의 힘을 빌어
모~조리 쳐부수어
흘~려온 값진 피의
원한을 풀으리
이제야 갚으리
그 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전우여 잘 자라(박시춘 작곡, 유호 작사)
1. 전우의 시체를 넘고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사라져간 전우야 잘자라
2.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
달빛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3. 고개를 넘어서 물을 건너
앞으로 앞으로 한강수야 잘 있더냐
우리는 돌아왔다.
들국화도 송이송이 피어나 반기어주는
노들강변 언덕 위에 잠들은 전우야
4. 터지는 포탄을 무릅쓰고
앞으로 앞으로 우리들이 가는 곳에
삼팔선 무너진다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떠오른다 네 얼굴이 꽃같이 별같이
삼팔선의 봄(노래 최갑석, 박춘석 자곡, 김석민 작사)
1.눈 녹인 산골짝에 꽃이 피누나
철조망은 녹슬고 총칼은 빛나
세월을 한탄하랴 삼팔선의 봄
싸워서 공을 세워 대장도 싫소
이등병 목숨 바쳐 고향 찾으리.
2.눈 녹인 산골짝에 꽃이 피는데
설한에 젖은 마음 풀릴 길 없고
꽃피면 더욱 슬퍼 삼팔선의 봄
죽음에 시달리는 북녘 내 고향
그 동포 웃는 얼굴 보고 싶구나.
전선야곡(작사 유호, 작곡 박시춘)
1.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가운데
단 잠을 못 이루고 돌아눕는 귓가에
장부의 길 일러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아 그 목소리 그리워
2. 들려오는 총 소리를 자장가 삼아
꿈 길 속에 달려간 내 고향 내 집에는
정안수 떠 놓고서 이 아들의 공 비는
어머님의 흰 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소
아 쓸어안고 싶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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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1일
그날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국빈 방문한 알제리의 부테플리카 대통령과 막 정상회담을 끝냈다. 양국 간 경제협력이 주요 議題였다.
다음 일정인 만찬장으로 옮겨갈 때였다. 그런데 만찬장이 완전히 정돈되지 않았다. 양국 대통령은 대기실에서 15분쯤 기다려야 했다. 그 자리에는 통역사 한 명만 남겨졌다. 당초 그는 노 대통령의 통역을, 알제리 대통령에게는 다른 통역사가 있었다. 하지만 딱 3명만 남게 된 방에서 그가 양쪽 통역을 다 맡게 됐다.
알제리 대통령이 먼저 "북한에 가보니 김일성 지도자는…" 말문을 열었다. "북한 주민을 위해 정말 열성적으로 일했다. 그 아들 김정일도 못지않게 헌신적이고…" 개인적으로 김일성 부자와 오랜 친분이 있는지 칭찬을 한참 이어나갔다. 한국의 대통령 면전에서 북한의 독재자 김일성·김정일의 치적에 대해 떠드는 것은 외교적 결례였다.
통역사는 난감했다. 통역을 안 할 수도, 자의적으로 그 내용을 줄일 수도 없는 것이다. 결국 알제리 대통령의 말을 그대로 통역했다. 순간 노 대통령의 표정이 굳어졌다. 통역사는 분위기를 읽고 조마조마했다. 노 대통령은 "하나도 빼지 말고 통역해주세요"하며 그를 쳐다봤다.
"김일성 김정일을 말하지만 북한 주민 상당수가 굶고 있습니다. 우리 남쪽에는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그때까지 못살던 농촌과 지방을 바꾸어서 잘살게 만들었습니다. 새마을 운동이라는 걸 했습니다. 우리가 북한보다 잘살게 된 것이 바로 박 대통령 때부터입니다. 그분이 지은 '새마을 노래'라는 게 있습니다.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그러면서 노 대통령은 힘차게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우리 모두 일어나…" 노래를 불렀다. 꽉 쥔 주먹을 흔들며 박자를 맞췄다. 노 대통령 임기 첫해인 2003년 12월 9일 저녁이었다.
통역사가 이 일화(逸話)를 내게 들려준 것은, 노 전 대통령의 자살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감상적인 기분이 들었던 탓이다. 이 장면을 과장되게 해석할 것은 없지만, '우리가 몰랐던' 노 전 대통령의 한 얼굴이 잠깐 드러났던 게 아닐까. 그는 "정치적으로 오해받을까 봐 어디서도 얘기할 수 없었다"고 했다.
노무현과 박정희가 연결되는 것에 대해 좌·우파 어느 쪽도 못마땅할 것이다. 한쪽에서는 노 전 대통령의 사후(死後) 인기가 박정희와 겹쳐 또 더 올라갈까 걱정할지 모른다. 반면 촛불과 사진을 들고 아직도 덕수궁 주변을 왔다 갔다 하는 그의 추종세력들은 외국정상 앞에서 '박정희의 새마을 노래'를 우렁차게 부르는 노 전 대통령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내 몸의 반쪽을 잃은 것 같다"며 '동질성'을 강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더 괴로울 것이다. 자신의 동지이며 계승자로 믿고 싶었던 그의 잠재의식에 '박정희'가 들어 있다는 것을.
물론 노 전 대통령은 현실에서 박정희 편도 아니었고, 실제 그런 업적을 남기지도 못했다. 재임 기간 내내 소란스러운 말의 갈등과 반목, 적개심이 끊이질 않았을 뿐이다. 자기가 마음먹었던 것, 자신의 내면(內面)에서 닮고 싶었던 것과는 어쩌면 다른 길을 걸어갔는지 모른다. 대부분 '섣부르고 무모한' 이념추종자들이 그의 동반자였다.
그때는 몰랐지만, 세월이 지나면 자기가 꿈꾸던 자리에서 얼마나 다른 쪽으로 휩쓸려왔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출발할 때 털끝의 차이가 나중에는 천리(千里)나 벌어져 있다. 심지어 "결코 그렇게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상대를 비웃던 자신이 눈떠 보니 그 비웃음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날 청와대 회담이 있었을 때, 국내에는 굵직굵직한 뉴스들이 쏟아졌다. 대선에서 패배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겨냥한 대선 자금 수사가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우리가 받은 돈이 10분의 1이 넘으면 대통령을 그만둘 것"이라는 노 대통령은 당당했고, '차떼기당' 낙인이 찍힌 한나라당은 "거미줄에 걸린 파리 신세"라며 절망에 떨었다. 집권 정당인 민주당도 '구(舊)세력'으로 몰려 정치 무대의 뒷전으로 밀려갔다. '100년 정당' 열린우리당만이 찬란한 해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이제 그 시절 풍경은 거의 형체도 없어졌다. 몇 번이나 세월의 '반전(反轉)'이 이뤄졌다. 오늘 한나라당은 '웰빙'하며 떵떵거리고, 민주당은 "놀고 지내니 세비를 반납해라"는 비난에 귀 막고 농성하며, 휩쓸려나갔던 친노(親盧)세력이 노 전 대통령의 죽음에 올라타 되살아나는 중이다. 세월은 어떤 식으로든 냉정하게 답할 것이다.
'
[군가] "통일 행진곡"
김광섭 작사/ 전국취주악연맹 작곡
< 1 >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
싸우고 싸워서 세운 이나라
공산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
공산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
자유의 이민들 피를 흘린다
동포여 일어나라 나라를 위해
손잡고 백두산에 태극기 날리자
< 2 >
살거나 죽거나 이땅의 겨레
무찌르고 넘어진 용사와 함께
이북은 부른다 눈물의 강토
이북은 부른다 눈물의 강토
민주통일 독립을 싸워서 찾자
동포여 일어나라 나라를 위해
손잡고 백두산에 태극기 날리자
/////////////////////////////////////////////////
몇 년 전 경남 密陽(밀양)시청에서 강연을 한 일이 있었다. KTX를 타고 가서 밀양역에서 내렸다. 나는 車中에서 밀양시민들에게 작곡가 朴是春(박시춘) 선생 이야기를 맨 먼저 꺼내야겠다고 별렀다. 이 위대한 대중 가요 작곡가를 친일파로 모는 고향 사람들이 있어 살던 집을 復原(복원)하고도 문을 열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朴 선생이 살던 집은 강을 내려다 보는 언덕 위 영남루 옆에 있었다. 작은 초가집 한 채였다. 가수나 작곡가는 강가나 바닷가 사람들이 많다는 말이 있다. 그런 곳에서 자라야 감수성이 풍부한 노래를 부르거나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朴是春 선생은 이 초가집에서 10代 초반까지 살았다고 한다.
그 몇 달 전까지 이 옛집 앞엔 관람 중단 이유를 밝히는 이런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우리 고장 출신이며 한국가요계의 거목인 박시춘 선생의 업적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2001년에 박시춘 옛집을 복원하여 문을 열어 왔으나 2005. 9. 25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에서 발표한 친일인사 명단에 박시춘 선생도 포함되어 2005. 10. 16부터 관람을 중단한 적이 있습니다. 박시춘 선생은 「신라의 달밤」「애수의 소야곡」「이별의 부산정거장」「럭키서울」등 대중의 사랑을 받은 가요 3,000여 곡을 작곡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들의 혈서」「목단강 편지」「결사대의 안해」「혈서지원」등 네 곡의 친일작품을 남겨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앞으로 시민의 뜻을 모아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밀양의 전통을 잇는 올바른 방향을 찾아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2006. 11 밀양시장.>
그런데 그날 가 보니 안내문이 바뀌고 관람도 허용되고 있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조갑제닷컴에 金榮(김영·前부산MBC 사장·現 방송문화진흥회 감사)씨가 써 올린 글이 밀양 民心을 흔들고 행정을 움직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金榮씨의 글 全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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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작곡가 朴是春을 핍박하는 고향사람들
朴是春(박시춘)이 작곡한 3000여 곡 중 네 곡이 親日성향이라고 민족문제연구소는 분류했다. 그래서 그는 親日작곡가가 됐다.
金榮(전 부산MBC 사장)
누구에게나 어릴 적 살았던 옛집은 추억으로 와 닿는다.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것이든 힘들고 어려웠던 기억이든 간에 그곳은 성장기의 애환이 서려있는 보금자리였기 때문이다. 옛집을 생각하면 어머니의 품안처럼 포근하고 따뜻했던 고향의 온돌방 아랫목 이불 밑이 그리워진다. 그런데 박시춘의 옛집은 그렇지 못하고 지금 수모를 겪고 있다.
밀양 영남루 뒤편에 가면 이상한 안내문 하나가 게시되어 있다.
<우리 고장 출신이며 한국가요계의 거목인 박시춘 선생의 업적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2001년에 박시춘 옛집을 복원하여 문을 열어 왔으나 2005. 9. 25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에서 발표한 친일인사 명단에 박시춘 선생도 포함되어 2005. 10. 16부터 관람을 중단한 적이 있습니다. 박시춘 선생은 「신라의 달밤」「애수의 소야곡」「이별의 부산정거장」「럭키서울」등 대중의 사랑을 받은 가요 3,000여 곡을 작곡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들의 혈서」「목단강 편지」「결사대의 안해」「혈서지원」등 네 곡의 친일작품을 남겨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앞으로 시민의 뜻을 모아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밀양의 전통을 잇는 올바른 방향을 찾아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2006. 11 밀양시장>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도 안내문은 버젓이 붙어있다. 구차하고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은 장본인은 밀양시장이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한국 가요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떠나간 박시춘의 음악적 업적을 자랑하고 기리며 추모하자는 것인지? 아니면 박시춘을 친일파로 몰아세워 짓밟고 매도하고 저주하자는 것인지, 그 저의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박시춘이 뛰어난 작곡가요, 밀양의 자랑이긴 하지만 친일성향의 작곡 몇 편이 있어 부담스럽다는 요지인 것 같다.
그렇다면 시장은 아직도 시민의 뜻을 한 곳으로 모으지 못했는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밀양의 전통을 잇는 올바른 방향을 찾지 못했는가? 참으로 어리버리하다는 생각이 든다. 소신도 없고 확신도 없는 우유부단의 극치다. 그렇게도 자신이 없는가? 이같은 안내문을 내건 밀양시장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러나 밀양시장은 고장의 명예와 자존심을 무시하거나 희롱해서는 안 된다. 애매모호한 안내문을 내걸 당시 밀양은 세계적인 영화의 현장이란 명성을 얻었다. ‘시크리트 선샤인(密陽)’이란 국산영화의 주인공 전도연이 칸느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함으로써 밀양은 빛나는 명예를 차지했다. 비록 어린이 유괴의 도시라는 부끄러운 면도 있었지만 어쨌든 유명한 고을이 됐다.
박시춘이 있었기에 밀양은 자랑스러운 대중가요의 산실이 되었다. 그 밀양이 이름난 영화의 현장도 됐다. 그런데도 밀양시장은 그 명예와 긍지를 제대로 지키고 떳떳하게 자랑하지도 못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그렇게도 겁이 나는가? 그들이 만들고 있는 친일인명사전이 그렇게도 무서웠던가? 시민의 뜻을 모으겠다고 했으면 빨리 여론을 수렴해 제대로 마무리 지었어야지 그대로 버려두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박시춘은 과연 그의 옛집을 개방하지 못할 정도로 열렬한 친일분자였던가? 그렇지 않다는 반론이 강력하게 제기됐다.
박시춘은 1913년 10월28일 태어나 1993년 6월3일 83세를 일기로 그의 파란만장했던 음악 인생은 끝났다. 그의 데뷔곡은 '희망의 노래'였다. 그가 만든 노래는 일제강점기는 물론 해방과 6.25동란 등 힘들고 어려웠던 시련기에 민족의 아픔과 고통을 달래줬다. 국민들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 넣어 준 위안이요, 위로의 청량제였다. 주옥같은 국민애창곡도 수두룩하다. 해방의 환희와 기쁨을 노래한 ‘럭키서울’, ‘신라의 달밤’, 남북분단의 아픔을 그린 ‘가거라 삼팔선’, 조국을 지키다가 산화한 국군 용사들을 추모한 ‘전우야 잘자라’, 전쟁 통에 고통 받고 시달리는 피난민들을 어루만져 준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이 있다. 박시춘은 3000여 곡의 노래를 작곡했다. 그 가운데 네 곡이 친일성향이라고 민족문제연구소는 분류했다. 그래서 그는 친일작곡가가 됐다. 그의 옛집을 복원했으나 떳떳하게 개방하지도 못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부정적 시각과는 달리 박시춘의 음악은 긍정적으로 재조명, 재평가되고 있다.
2009년 10월21일 ‘한국가요 작사가 협회’는 박시춘의 음악적 업적을 재조명하는 심포지엄을 가졌다. 음악 평론가 박성서는 “박시춘이 남긴 3000여 곡에 이르는 노래와 악상(樂想)은 근대한국 대중가요의 초석이자 근간이었다”고 평가했다. 이동순 교수도 “민족문제연구소가 박시춘이 전심전력으로 친일을 향해 질주한 것처럼 평가한 것은 어설픈 방식에 의해 일방적으로 매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친일성향 4편이 그가 작곡한 전부를 함축할 정도로 분량과 품질의 측면에서 과연 문제가 있는가를 그들에게 반문한다”고 했다.
박시춘 음악을 연구해온 향토출신 오태환도“어떤 사람이 뭐라고 하더라도 박시춘은 식어버린 조국의 아픈 심장에 뜨거운 민족의 노래를 심어준 선구자였다”고 주장했다. 일제강점치하에서 가슴 치며 울었던 아픈 역사와 함께 우리민족의 애환을 노래로 달래준 박시춘을 욕하며 침을 뱉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의 노래는 나라 잃은 서러움의 통곡이었고 울분이었으며 살아 숨쉬는 민족의 혼이었다고 강조했다. 이 땅의 수많은 음악계 선각자들의 먼지 같은 사소한 약점을 잡아 친일 예술인으로 짓밟고 왜곡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발상이며 슬픈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암울하고 불행했던 시대에 어렵게 예술 활동을 했던 선배들을 인민재판식 단두대에 올려놓고 그 공과를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한 친일논쟁은 역사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므로 심히 걱정스럽고 안타까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친일규정의 논리와 주장에도 다양한 반박과 평가가 있다. 그들의 기준대로라면 손기정 선수도 친일인사여야 하는가?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손기정이 아닌 ‘손기떼이’라는 이름으로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것은 일본의 국위를 세계만방에 과시한 것이므로 친일중의 친일임에 분명하지 않은가? 손 선수가 친일로 몰리지 않은 것은 다행한 일이다. 친일행각을 단죄한다면 왕족의 신분을 유지하면서 일본 황족들과 혼인한 조선왕조의 왕족들을 빼놓을 수 없지 않은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기고 조선 백성을 일본의 2등 국민으로 전락 귀속시킨 자들이 누구인가? 영친왕은 일본 육군 중장의 계급장을 어깨에 달고 연합군에 맞서 싸우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문제를 삼으려면 나라와 백성을 통째로 일본에 넘겨준 을사오적과 군왕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일제의 압력을 견뎌내지 못해 소극적으로 협력하였거나 어린 시절 일본 제도를 따라가고 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친일로 몰아붙이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는 지적이 많다. 비슷한 조건에 처했던 사람들 가운데 유독 대한민국을 위해 크게 기여한 인물들만을 찾아내 친일로 몰아세우는 것은 그 저의(底意)가 무엇인지 의심 받고 있다.
‘한국가요 작사가 협회’는 심포지엄에 이어 박시춘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13년 남양주시에 박시춘 기념관을 건립하기로 했다. 밀양시장의 이중적이고 어정쩡한 행동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몇 줄 안 되는 박시춘 생가의 안내문이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갈등과 모순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역사에 대한 평가는 단편적이거나 주관적이어서는 안 된다. 보편타당해야 한다. 객관적이고 전체를 바라봐야 한다. 일방적인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역사의 평가와 심판은 또다른 심판을 받게 되는 악순환만 되풀이 하게 될 것이다.
영남루 아래를 흐르는 남천강, 강 언덕 저편에서 어린 순동(順東-박시춘의 본명)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식민지의 아이로 태어나 친일이 뭔지도 모르고 뛰어놀았을 해맑은 그 얼굴, 그 모습이 푸른 강물 위에 비치는 듯 어른거린다. 그의 대표곡 ‘애수의 소야곡’을 고향의 강물 위에 띄워 보내며 복원된 그의 옛집이 떳떳하게 빨리 개방되기를 기대한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만은 /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 그 누가 불러주나 휘파람 소리 / 차라리 잊으리라 맹세하건만 / 못 잊을 미련인가 생각하는 밤 /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으면…>(수필문학 4월호) ]
이 글을 읽은 密陽 유지들이 화를 내곤 행동에 들어갔다고 한다. "고향사람들이, 위대한 예술가를 핍박하다니, 잠자코 있을 수 없다"면서 여론을 만들고 밀양시청에 건의하여 2009년 7월 문제의 안내문을 내리고 옛집 관람도 정상화되었다. 엄용수 밀양시장은 "박시춘 음악제를 주최해오다가 일부 시민단체에서 반발, 이름을 바꾸었는데 원래 이름을 다시 살릴 생각이다"고 했다.
그날 나는 밀양시민들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이 朴是春 선생 덕분에 마음을 달랠 수 있었습니까? 日帝(일제)의 탄압, 전쟁의 상처, 근대화 과정의 희비극을 거치면서 삭막해진 한국인들이 '애수의 소야곡' '신라의 달밤' '전우여 잘 자라' '이별의 부산정거장' 같은 노래를 부르면서 많은 위안을 받았습니다. 어느 국회의원, 어느 국무총리가 박시춘 선생 같은 일을 하였습니까? 이런 분이 작곡한 노래가 3000곡인데, 그 가운데 네 곡이 친일적이라고 해서 그를 親日派(친일파)라고 모는 것은 인간 말살입니다. 김연아 선수가 엉덩방아 찧는 장면만 틀어주면서 김연아는 3流라고 욕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친일적인 노래를 작곡한 것은 사실이고 이는 기록해두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人生 전체 중 극히 일부를 과장하여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가요를 가장 많이 작곡한 천재의 人生 전체를 깡그리 부정하는 작태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다행히 밀양시민들과 밀양시청이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신 데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한 언론인이 화를 참지 못하고 조갑제닷컴에 써올린 글이 朴是春씨를 위하여, 密陽을 위하여, 그리고 대한민국을 위하여 좋은 일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해졌다. 작은 일 같지만 의미가 큰 일이다. 한국은 아직 常識(상식)이 통하는 곳이 있다는 위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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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伊桑이 작곡한 부산고등학교 校歌
公安당국도, 독재자 편으로 넘어가기 전에 영혼이 맑았을 때 지은 校歌에 무슨 죄가 있겠는가라고 너그럽게 생각한 덕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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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名門 釜山高의 校歌는 유치환(柳致環) 작사, 윤이상(尹伊桑) 작곡이다. 윤이상씨는 독일에 가서 작곡가로 大成하였으나 북한정권의 꾐에 넘어가 민족반역 정권에 혼을 팔았다. 그럼에도 박정희, 전두환 정부 시절 윤이상이 작곡한 이 교가는 중단 없이 불렸다. 公安당국도, 독재자 편으로 넘어가기 전에 영혼이 맑았을 때 지은 校歌에 무슨 죄가 있겠는가라고 너그럽게 생각한 덕분일 것이다.
예술엔 국경은 없지만 예술인엔 국경이 있다고 한다. 예술인 윤이상은 조국을 배반한 사람이 되었다. 그 윤이상을 기리는 재단이 있고, 음악당 건축이 정부 차원에서 추진되고 있다. 윤이상이 조국의 품에 있을 때 지은 노래를 부르는 것과 민족반역자의 품에 안긴 사실을 알고도 기념관을 짓는 것은 전혀 다른 행위이다. 세계 文明국가로서 반역자를 국가가 나서서 기리는 곳은 없다.
예술의 자유와 예술인의 不自由,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이다.
작사 : 유치환, 작곡 : 윤이상
(1952년 10월 7일 교가 제작)
(1절) 아스라이 한 겨레가 오천재를 밴 꿈이
세기(世紀)의 굽잇물에 산맥처럼 부푸놋다
배움의 도가니에 불리는 이 슬기야
스스로 기약하여 우리들이 지님이라
스스로 기약하여 우리들이 지님이라.
(2절) 사나이의 크낙한 뜻 바다처럼 호호(浩浩)코저
진리의 창문가에 절은 단성(丹誠) 후련서니
오륙도 어린 섬들 낙조(落照)에 젖어 있고
연찬(練鑽)에 겨운 배들 가물가물 돌아온다
연찬(練鑽)에 겨운 배들 가물가물 돌아온다
이 노래에 대하여 부산고등학교측이 붙인 해설은 다음과 같다.
수난의 역사 오천 재 --- 한 많은 고갯길 용하게도 걸어온 이 민족, 국토를 달려온 산맥이 한반도의 남단 이 항구에서 오륙도 어린 섬을 바라보고 구봉산 아래에 그 정기를 마지막 토했으니 바로 이 배움의 터전 부산고일지니, 오롯이 붉은 정성으로 절인 진리의 터전에서 우리들 갈고 닦아 이제 바다처럼 넓은 사나이의 가슴으로 커서 시원히 서리라.
그리고 부고인이여 저 푸른 해원을 향하야 도약하자. 어부의 작업이 모두 끝난 어느 날 우리 모두 이 교가비 앞에 돌아와야지. 그리고 저 오륙도 섬들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노래하자.
( 교내 '교가비문'에서)
아스라이 한 겨레가 ~ ( 글 : 박지홍 - 전 부산고 교사, 국어학자)
부산고 교가는 당시 김하득(金夏得) 교장께서 서로 가까이 지내던 시인 유치환(柳致環)님에게 당신의'부산고에 대한 포부'를 물어보시면서, 그런 뜻의 교가를 지어 주기를 부탁한 후 유치환님과 동향이며 서로 트인 사이였던 부산고 음악 교사였던 작곡가 윤이상(尹伊桑)님에게 곡을 붙이게 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1952년판 부산고 교지 [청조(靑潮)] 제2호를 보면, 책머리에 부산고 교가가 실려 있는데 이것이 대외 홍보용으로 인쇄된 것으로는 최초의 것이다.
그 의미를 한 구절씩 음미해보면, 아스라이 한겨레가 오천재를 밴 꿈이 세기의 굽잇물에 산맥처럼 부푸놋다.
-한민족을 흔히 한겨레라 한다. 그러나 우리 민족을 한겨레로 일컫기는 우리의 교가로 비롯된 것임을 생각할 때 얼마나 자긍심이 넘치는 일인가?
이 첫구의 뜻은 아득히 머나먼 옛날부터 한민족이 오천년 동안을 밴(잉태해 온) 꿈은 과연 무엇일까? 그 꿈이 이제 밖으로 나오려 하는 것이다. 쉬운 말로 옮겨 보면, '아득히 머나먼 옛날로부터 한민족이 오천년 동안을 품고 온 꿈이 20세기 후반기의 굽이치는 물결 속에서 아, 산맥처럼 부풀어 오르는구나.' 그 꿈은 바로 '홍익인간'의 꿈으로 널리 인간 세계를 유익하게 한다는 꿈이다
세기의 굽잇물에 산맥처럼 부푸놋다
-세기는 '철혈시대'에서 '인본시대'로 접어들었으므로 부산고 학생들도 고식에서 '적극'으로, 회의에서 '용단'으로 고갈에서 '윤택'으로 들어서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서 홍익인간을 실천하려는 꿈이 부풀어 오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그 뜻은 '20세기 후반기로 들어서는 자유 민주의 새 사조 속에서 아-우리들 부산고 학생들이 장차 홍익인간을 실천하려는 푸른 꿈이 반공으로 치솟는 크나큰 산의 물결 산맥처럼 부풀어 오르는구나 !'가 된다.
배움의 도가니에 불리는 이 슬기야 스스로 기약하여 우리들이 지님이라
-'연수의 용광로 속에서 정련되는 이 슬기에 가득찬 우리들 부산고 학생들은 모두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대동단결하여 이 생각을 지녀보자'는 뜻이다.
사나이의 크낙한 뜻 바다처럼 浩浩코저
-여기서 '크낙한'이란 '크나큰'이란 말을 강하게 하기 위해 크낙(어근) + 한(접미사)으로 다듬어 만든 것인데, 이 구절의 의미는, '부산고 학생들 우리들은 사나이. 우리들은 미래에 대한 포부를 저기 바라다 보이는 부산만의 푸른 바다처럼 크게 넓게 가지고 싶구나!'의 뜻이다.
진리의 창문가에 절은 단성 후련서니
-'절은 단성(丹誠 )'은 '단성이 절었다.'의 뜻인데, '단성'은 붉은 피, 순정의 피가 소용돌이 치는 그 정성, 즉 참다운 마음'의 의미다. 여기서는 의인법으로서 단성은 부산고 학생을 가리킨다. 또 '절다'는 물체에 어떤 성분이 속속들이 배어들다'의 의미이다. 한편 '후련서니'는 형용사 '후련하다'에서 갈리어 나온 부사이다. '씩씩한 기상으로 늠름히, 시원스레'의 뜻으로, 이 구절 전체의 의미는, '단성을 온몸에 지니고 미래에 대한 푸른 꿈을 안고 연찬에 열중하고 있는 부산고 학생들이 씩씩한 기상으로 늠름히 일어서니'의 뜻이 되겠다.
오륙도 어린 섬들 낙조에 젖어 있고 연찬에 겨운 배들 가물가물 돌아온다.
-'연찬(硏鑽)'은 '갈고(硏) 뚫는다(鑽)'의 뜻인데 사물의 도리를 깊이 연구한다는 뜻이다. 또 '겨운'은 '힘겹다'의 준말이다. 즉 '연찬에 겨운 배들' 은 종일 힘겨운 작업에 종사한 고기잡이들을 태운 배를 가리킨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고기잡이'이다. 여기서는 부산시민의 대명사로 사용된 말이다. 부산고의 절은 단성들은 이런 광경을 지켜보며 두 입술을 다물고서 내일의 조국 중흥을 다지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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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일포럼]'낙동강'에서 만난 윤이상과 이은상
경남일보
| 승인 2018.04.09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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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점석(창원 YMCA 명예총장)
첫 번째 휴전선 종주를 하고 온 이은상은 1965년부터 한국청년운동협의회 회장으로 무려 17년간 있으면서 반공청년운동을 죽을 때까지 열심히 하였다. 반공청년들과 함께 하는 여러 행사에서 ‘짧은 일생을 영원한 조국에’ 바치자는 북진통일을 강조하여 많은 감동을 주었다. 두 차례나 휴전선을 종주한 이은상은 절절한 나라사랑을 담은 시조 '고지가 바로 저긴데', '나의 조국 나의 시', '너라고 불러보는 조국아', '기원' 등을 썼다. 한편 휴전한 지 3년이 지난 1956년,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가 이듬해인 1957년 독일로 옮긴 윤이상은 세계적인 작곡가 되었다. 그는 남북통일과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다가 분단의 희생양, 독재 권력의 국면전환용이라는 동백림사건으로 투옥되어 징역을 살기도 했다. 윤이상은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광주여 영원히', 북한국립교향악단이 초연한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를 작곡하였다. 이 두 분이 6.25전쟁 시기에 부산에서 만나 작사, 작곡한 노래가 그 유명한 '낙동강'이다.
노산은 1년간 서울에 있다가 6.25전쟁이 발발한 후인 1951년 1월부터 1년간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했다. 같은 해에 부산향토문화연구회가 나서서 경상남도 후원으로 감독 전창근, 제작 김재문, 각본편집 전창근, 배우 이택근, 최지희가 출연하여 영화 '낙동강'을 만들었다. 이 영화의 삽입곡을 이은상이 작사하고, 윤이상이 작곡하였다. 윤이상은 부산사범학교 교사였다.
보아라 가야신라 빛나는 역사
흐른 듯 잠겨있는 기나긴 강물
잊지 마라 예서 자란 사나이들아
이 강물 네 혈관에 피가 된 줄을
오! 낙동강, 낙동강
끊임없이 흐르는 전통의 낙동강
…………
두 언덕 고을고을 정든 내 고장
불타고 다 깨어진 쓸쓸한 폐허
돋아오는 아침 햇빛 가슴에 안고
나가라 네 힘으로 다시 세우라
오! 낙동강, 낙동강
늠실늠실 흐르는 희망의 낙동강
요즈음도 60여 년 전 중학교 시절에 배운 이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초등학교 때 학교 운동회를 하면서 기마전을 할 때 부르기도 했다. 진의장 전 통영시장은 이 노래가 ‘경남도민의 노래’처럼 불렸다고 한다. 마산의 영화전문가 이승기 선생은 경남지역 학교에서 조례 때마다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윤이상이 작곡했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어 지난 반세기동안 전혀 들을 수 없었다.
노산은 6.25 전쟁 중에 가장 치열했던 경북 칠곡군 낙동강 전투를 생각하며 폐허를 딛고 일어서는 희망의 낙동강을 노래했다. 낙동강 전투는 그야말로 치열하였다. 1950년 8월 1일 미군 워커 중장은 워크라인이라는 낙동강 방어선을 설치했다. 이에 따라 8월 3일 왜관 전 주민에게 소개령이 내려졌고 낙동강 방어선의 교량도 모두 폭파되었다. 8월 16일 인민군 4만 여명이 집결하여 대규모 도하작전을 시작하였고 워크 중장은 일본에 있는 맥아더 원수에게 융단폭격을 급히 요청했다. 이 요청에 따라 일본에서 출발한 비행기 B29, 98대가 왜관 서북방 67㎢에 26분 동안 90톤이나 되는 폭탄을 투하했다. 이 폭격으로 약목역 근처는 초토화되었다. 피로 물든 낙동강이었다. 윤이상과 이은상은 「낙동강」을 만들어 전쟁 중인 젊은이들에게 조국수호의 의지를 고취시켰던 것이다.
'귀향'을 주제로 통영국제음악제가 열리는 지난 4월 5일, 국제음악당 콘서트홀에서 '낙동강의 詩'가 공연되었다. 1악장 프롤로그, 2악장 낙동강의 저녁, 3악장 춤곡(舞曲)으로 되어 있다. 6.25전쟁 시기에 영화음악으로 작곡한 것을 그 후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할 때인 1956년 11월 29일에 완성한 작품을 최근에 유족들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은상과 윤이상은 조국의 통일에 대해서는 같은 마음이었지만 방법론은 전혀 달랐다. 극과 극이었다.
전점석(창원 YMCA 명예총장)
2003년 10월 가수 이선희 씨가 평양 시민들 앞에 섰다. 류경정주영체육관 '통일음악회'에서 이씨는 대표곡인 'J에게'에 이어 '아름다운 강산'을 불렀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에너지를 북한 관객들은 숨을 죽이고 바라봤다.
남북이 예술단 공연 관련 세부 사항을 협의하기 시작했다. 2006년 남한 공연단이 방북해 공연한 이후 12년 만에 재개된 것이다. 이번 공연은 다음달 말로 예정된 남북정상회담의 사전 행사이면서 북한 삼지연관현악단의 지난달 방남 공연에 대한 답방 행사다. 예술단 음악감독으로는 인기 가수였던 음악 프로듀서 윤상 씨가 남측 수석대표로 임명됐다. 공연단과 가수들이 방북해 펼쳤던 주요 공연 면면을 살펴봤다.
북한 평양대극장 자료화면 [사진=연합뉴스]이미지 확대
▲ 북한 평양대극장 자료화면 [사진=연합뉴스]
1. 첫 방북 예술단 1985년
1985년 첫 방북 공연으로 남북교류행사가 시작됐다. 당시 남북 적십자사는 1985년 5월 '8·15광복절 40년'을 계기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단의 교환방문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이를 위해 그해 5월 27일 서울에서 남북적십자회담의 8차 회담이 열렸으며 같은 해 8월 27일 평양에서 열린 제9차 본회담에서 양측은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교환방문에 관한 합의서 문안에 양측 수석대표가 서명했다.
이후 남북고향방문단 교환방문과 함께 예술공연이 펼쳐졌다. 분단 40년 만에 처음으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과 함께 예술공연단이 서울과 평양을 동시에 방문한 것이다. 남측에서는 가수 김정구, 나훈아, 김희갑, 남보원 등 50명이 평양대국장에서 공연했다. 공연은 북한 평양역 인근 2200석 규모의 평양대극장에서 현대무용, 민속무용, 민요합창, 가곡, 코미디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됐다.
1990년 12월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송년 통일전통음악회"가 열렸다. 남북 예술인들이 합동공연을 선보였으며, 마지막 곡 "우리의 소원"은 7차례 부르는 등 "통일 화음"을 이뤘다. [사진출처-e영상역사관]이미지 확대
▲ 1990년 12월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송년 통일전통음악회"가 열렸다. 남북 예술인들이 합동공연을 선보였으며, 마지막 곡 "우리의 소원"은 7차례 부르는 등 "통일 화음"을 이뤘다. [사진출처-e영상역사관]
2. 최초 민간 공연 1990년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방북 음악회라는 범민족통일음악회는 국악 공연으로 구성됐다. 1990년 10월 18~23일 남북한 연주자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연주했다. 남한에서는 서울전통음악연주단이라는 공연단이 꾸려졌다.
평양 2·8문화회관, 봉화예술극장 등 6개 공연장에서 열린 음악회에는 남측 가야금 연주자 황병기 씨를 단장으로 작곡가 윤이상 등이 참가했다. 서울전통음악연주단과 평양음악단이 함께 합동 연주했다. '창 내고자 창을 내고자' 같은 시조에서부터 민족 등을 노래한 곡이 연주됐으며 성악·판소리 등도 포함됐다. 남한은 평양 공연 두 달 뒤 북측 '평양민족음악단'을 서울로 초청해 '송년통일음악회'를 열었다.
3. 어린이 공연단 1998년
1998년 5월 2~12일 리틀엔젤스 공연단이 평양에서 공연을 펼쳤고 같은 해 10월 31일부터 11월 7일까지 윤이상통일음악회 평양 공연이 열렸다. 리틀엔젤스는 평양을 방문해 세 차례 공연했다. 공연은 클래식과 국악 혼합 공연으로 진행됐다. 어린이들로 구성된 공연단은 북한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예술단과 함께 민요 '몽금포 타령' '우리의 소원' 등을 불러 감동적인 무대를 만들었다. 만경대학생소년궁전예술단과 '통일의 노래'를 합창했다. 2년 뒤 북한 소년예술단은 서울로 답방해 남북 어린이들은 놀이공원도 함께 구경하기도 했다. 같은 해 10월 31일~11월 7일 윤이상통일음악회 평양 공연이 열렸다.
북한봉화예술극장 자료화면 [사진=연합뉴스]이미지 확대
▲ 북한봉화예술극장 자료화면 [사진=연합뉴스]
4. 대중가요 시작 1999년
방송사 최초의 공연은 1999년 12월 5일 SBS의 '평화친선음악회'와 12월 22일 MBC의 '민족통일음악회'였다. 평화친선음악회에는 패티김, 태진아, 최진희, 설운도 등 중견 가수와 젝스키스, 핑클 등이 참여해 대중가요를 불렀다. 평화친선음악회는 미국과 공동 주최한 행사였다.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의 동생인 가수 로저 클린턴도 노래를 불렀다.
MBC는 1999년 12월22일 평양봉화예술극장에서 '민족통일음악회'를 개최했다. 남측에서 신형원 안치환 김종환 현철 민요가수 오정혜가 출연했으며 북한에서는 배우 전혜영, 리경숙 등이 출연해 군밤타령, 양산도를 부르고 발레극 돈키호테의 '집시춤'도 공연했다. 두 공연 모두 남한에서 방송됐지만 북한에는 봉화예술극장에 참석한 관객들만 관람이 가능하고 북한 전역에 방송되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5. 김정일 참관 2001년
김일성 생일 행사에 초청된 김연자 씨는 2001년 4월 5~12일 평양을 방문해 단독 공연했다. 북한 방송은 두 차례 김연자 씨 평양 공연을 라디오와 TV를 통해 녹화중계했고 이후 북한 유명 예술인 대담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등 큰 관심을 보였다. 대담 프로그램에서 만수대예술단 지휘자 조정림 등은 "김연자 씨의 대단한 평판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듣고 있었지만 노래를 직접 듣고 보니 과연 듣던 바 그대로"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연자 씨를 두고 전통적인 민요창 법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여러 가지 창법을 잘 배합해 독특한 형상적 경지를 개척했다고 평가했다. 그해 4월 7일 평양 공연, 11일 함흥 공연이 열렸고 김정일은 함흥 공연을 관람한 후 김연자 씨에게 꽃바구니를 전달하고 만찬까지 열기도 했다.
'2002 MBC 평양특별공연 오! 코리아' 에서 윤도현밴드가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캡쳐=MBC]이미지 확대
▲ '2002 MBC 평양특별공연 오! 코리아' 에서 윤도현밴드가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캡쳐=MBC]
6 . 아이돌 가수 등장 2003년
2002년 9월에는 가수 이미자, 최진희 씨와 윤도현밴드 등이 출연한 MBC 평양특별공연이 열렸다. 이듬해인 2003년 류경정주영체육관 개관기념 통일음악회에는 조영남, 이선희, 설운도, 신화, 베이비복스 등의 가수와 바리톤 김동규 등이 출연했다.
2003년 10월 중계된 '통일음악회'는 한국 방송 사상 최초로 자체 장비와 기술진을 북한에 보내 평양에서 생방송 중계를 했다. 음악회가 열린 류경정주영체육관은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대북사업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7. 홀로아리랑 합창 2005년
올해로 데뷔 50주년이 된 가수 조용필은 2005년 8월 23일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단독 콘서트 '조용필 평양 2005'를 열어 큰 호응을 얻었다. 당시 콘서트에서 노래 '홀로아리랑'을 북한 관객 대다수가 따라 부르기도 했다.
조씨는 공연 도중 "예전부터 꼭 와보고 싶었던 평양이었다"면서 "수십 년간 세계 곳곳에서 공연을 했지만 이렇게 떨리기는 처음"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당시 조씨는 '친구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허공' 등의 대표곡과 함께 북한 가요 '자장가' '험난한 풍파 넘어 다시 만나네' 등을 불렀다. 조씨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평양의 만수대의사당에서 만나 환담을 나눴다.
8. 마지막 방북 공연 2006년
2006년 북한 금강산 문화회관에서 윤이상평화재단 주최로 남북 음악인들이 함께하는 윤이상 기념 음악회가 열렸다. 당시 1·2부를 남북이 각각 나눠 맡는 방식으로 행사가 진행됐다. 남북 간의 대규모 합동문화행사는 이 행사가 마지막이었다.
이후 2008년 6월 금강산에서 열린 6·15 공동선언 8주년 기념 민족통일대회 공연을 끝으로 남북 간 행사는 열리지 않았다. 특히 그해 7월 금강산에서 관광객 박왕자 씨가 북한군 초병의 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남북관계는 급격히 경색됐다. 2011년 9월 서울시향 음악감독인 정명훈 지휘자가 방북해 남북합동공연을 협의했지만 방북 공연은 불발됐다. 2012년 3월 북측 '은하수관현악단'이 프랑스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과 합동연주하는 데 그쳤다.
오는 4월 예정된 평양 공연에서는 가수 조용필과 이선희 씨가 예술단과 함께 평양을 찾아 무대에 설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범 기자]
[9911/월간조선] 20세기 한국최고의 노래.
월간조선 설문조사-한국의 현역 작사가, 작곡가 1백인이 뽑은 노래
한국의 현역 작사가, 작곡가 1백인이 뽑은 「20세기 한국 최고의 노 래, 가수, 작곡
가, 작사가」
- 개인 선호도 떠나 대중가요사에 끼친 영향력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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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제일 인기 있는 노래는 어떤 곡일까」하는 생각은 누구나가 한 번
쯤 해보았을 것이다. 아무리 열광적인 사랑을 받더라 도 시간이 흐르면 새로운 노래
에게 1위의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것 이 대중가요의 屬性(속성)인데 한국 대중가요
사 8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변함없이 사랑받고 불려지는 노래는 과연 어떤 노래일
까. 그리 고 그 노래를 부르고 만든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이에 대해서는 그동
안 몇가지 설문조사가 있었다. 작년 7월 MBC와 한국갤럽은 「建國(건국) 50년 가수
선호도에 대한 조사」를 실시 했다. 10대에서는 H.O.T와 유승준, 20∼30대에서는 趙
容弼(조용필) 과 신승훈, 40대 이상에서는 李美子(이미자), 趙容弼, 나훈아 順(순)
으로 결과가 나왔다. 1992년에는 「한국인의 애창곡」이라는 설문조 사가 실시되어
「소양강 처녀」가 1위로 뽑혔고 「만남」이 2위, 「눈물젖은 두만강」이 3위를 차
지했다. 하지만 이런 조사들은 모두 일반인을 대상으로 실시됐기 때문에 작품성보다
는 개인적인 선호도 와 조사 당시의 유행 여부가 결과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크
다. 그렇다면 과연 대중가요의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음악 인들도 이와
같은 생각일까. 한국음악저작권협회(회장 김영광)에 문 의해본 결과 협회에 소속된
현역 작사가와 작곡가가 직접 설문에 참여해서 한국을 대표할 만한 가수 또는 노래
를 뽑는 조사는 아직 까지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물론 작사가와 작곡가에 대한 체
계적인 평가도 마찬가지다.
이에 따라 月刊朝鮮은 192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 대중가요를 전문 가의 시각에서 정
리하기 위해 9월28일부터 10월6일까지 전화와 팩 스를 통해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대상은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서 추천한 2백명의 현역 작사가와 작곡가. 설문
내용은 「20세기 한 국 최고의 노래 세 곡과 최고의 가수 다섯 명, 그리고 작곡가와
작 사가를 각각 세 명씩 추천하고 그 이유를 간략하게 적어달라」는 것이었다. 최
종적인 분석은 1백명을 대상으로 했는데 시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대중가요
의 성격상 응답자의 연령이 결과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판단해 50대 이상 40명
, 40대 40명, 30대 20 명으로 연령에 따라 응답자의 숫자를 제한했다.
개인적인 선호도를 떠나서 한국 대중가요사에 미친 영향력과 작품 성 위주로 추천을
받은 결과 20세기 한국 최고의 노래로는 「돌아 와요 부산항에」(황선우 작사·작
곡, 조용필 노래)가 선정되었다. 이 노래를 부른 趙容弼씨는 최고의 가수로도 뽑혔
는데 1백명 중 67명 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작곡가는 43명의 추천을 받은 朴椿石(
박춘 석)씨가, 작사가는 37명의 추천을 받은 半夜月씨가 선정됐다.
- 대통령이 히트시킨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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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스타 趙容弼의 존재를 알린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모 두 22명으로부터
추천을 받았다. 「눈물젖은 두만강」(19명)은 2위. 50대 이상의 장년층이 「돌아와
요 부산항에」를 주로 추천한 반면 에 30∼40대층에서는 「창밖의 여자」를 많이 선
택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 노래를 추천한 이유로 「많은 사람이 좋 아하기
때문에」라는, 참으로 非(비)전문적(?)인 이유를 내세운 응답 자가 많았다는 사실이
다. 2위와 3위를 차지한 「눈물젖은 두만강」 과 「아침이슬」(17명)에 대해서는 일
제시대와 「유신 독재」 시대 의 정서를 대변하며 사람들의 아픔을 달래준 역사적
의의를 높이 평가한 반면에 이 노래는 그저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라는
이유가 많았다. 「10대에서 80대까지 남녀노소 누구나, 우리나 라 사람뿐 아니라
일본 사람들까지도 좋아하는 노래」(작곡가 金南祚)라든가 「노래방에 가면 누구나
한번은 부르니까」(작사가 安陽子)라는 대답처럼 말이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역
시 「재일교포 의 恨(한)」이라는 시대적 아픔이 반영된 노래인데도 불구하고 응답
자들이 이처럼 이 노래의 역사적 의의보다는 대중성에 더 큰 가치 를 부여하고 있다
는 점이 흥미롭다.
「비내리는 영동교」의 작곡가 南國人(남국인·58)씨는 「위대한 가수 趙容弼을 탄
생시킨 노래」라는 점을 추천 이유로 들었다. 趙容弼씨가 한국 대중가요사에 끼친
영향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 가 수를 세상에 알린 노래 역시 그 의미가 크다는 것
이다. 작곡가 李範熙(이범희·48)씨는 「기존의 트로트와는 다른 세련된 트로트」라
는 점을 강조했다. 「찬찬찬」의 작사가 金炳杰(김병걸·43)씨도 「똑 같은 4분의 4
박자 트로트인데도 창법이나 편곡 기법에서 새로움을 추구했다」면서 「록 스타일의
연주에 트로트적인 선율과 쿵짝거리 는 리듬을 결합한 새로운 연주 스타일로 1980
년대 중반까지 트로트 를 주도적으로 이끈 노래」라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35년간
음악 PD로 활동한 작사가 朴昌鶴(박창학·60)씨에 의하면 이 노래는 朴正熙 前 대통
령이 히트시킨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한 다.
『이 노래는 1972년에 나온 조용필씨의 첫 음반에 실렸던 곡입니다. 그때는 그룹사
운드의 반주가 아니라 통기타를 치면서 불렀어요. 이 음반은 레코드사의 사정 때문
에 제대로 홍보도 못하고 그냥 흐지부 지됐는데 다른 레코드사로 간 조용필씨가 새
음반을 내면서 다시 이 노래를 실었어요. 우리가 조용필씨의 첫 앨범이라고 생각하
는 음 반이 바로 이겁니다. 물론 이때는 정식으로 그룹사운드 반주에 맞춰 서 불렀
지요.
그런데 이때가 바로 조총련계 재일동포의 모국방문이 시작된 때라 시기적으로 아주
잘 맞아떨어졌어요. 「형제 떠난 부산항」이라든가 「돌아왔다 그리운 내 형제여」
라는 구절들이 몇십년 동안 얼굴도 한 번 못 보고 살아야 했던 민족의 비극을 아주
잘 표현했기 때문 이죠. 조용필씨는 이 노래 한 곡으로 일약 대스타로 떠올랐지만
이 노래를 만든 황선우씨는 이후에 별다른 히트곡을 내지 못했습니 다』
-반세기 넘도록 애창되는 최대의 민족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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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치하의 설움과 恨을 애절하게 표현한 노래 「눈물젖은 두만 강」(김용호 작사
, 이시우 작곡, 김정구 노래)은 19명의 추천을 받았 다. 드라마 「초대」의 방송음
악을 담당하고 있는 작곡가 安智弘(안 지홍·39)씨는 「세대가 다르고 정서가 다른
만큼 그 노래에 공감 하긴 어렵지만 60년이라는 긴시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에
게 불 리는 생명력을 인정해야 한다」는 이유에서 자신의 취향과는 별도 로 「눈물
젖은 두만강」을 최고의 노래로 추천했다. 작곡가 金南祚(김남조·48)씨는 「일제시
대와 6·25 등 민족의 비애 를 상징적으로 묘사한 수많은 곡 중에서 가장 애절한 노
래」라는 점에서, 「젊은 그대」의 작사가 安陽子(안양자·55)씨는 「60년 동 안 끊
임없이 불리고 또 사랑받고 있는 최고의 민족가요」라는 점에 서 이 노래를 높이 평
가했다.
라디오 드라마 「김삿갓 방랑기」의 테마음악으로 쓰이면서 더욱 더 유명해진 이 노
래에는 가슴 절절한 사연이 담겨 있다. 일제 치하 였던 1930년대 중반, 작곡가 이시
우씨가 만주에서 공연할 때의 이야 기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젊은 여인의 울음소
리가 가슴을 저밀 듯이 애절하게 들려와 그 사연을 알아보니 독립군에 참가한 남편
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왔는데 남편이 戰死(전사)했다는 소리를 듣고 그렇게 서럽
게 울었다는 것이다. 여인의 통곡이 민족의 恨이었음을 통감한 이시우씨가 멜로디를
만들고 당시 조선악단의 사업부장으로 있던 김용호씨가 노래말을 만들어 발표한 노
래가 바로 「눈물젖은 두만강」이다. 이 노래는 일제 치하의 암울한 현실을 살던 대
중들에 게 동병상련적인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는데 노래를
부른 김정구씨 역시 이 노래에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무대 에 설 때마다 불렀다고
한다.
1970년대 청년문화의 대표곡인 「아침이슬」(김민기 작사·작곡, 양 희은 노래)은 1
7명의 추천을 받았다. 연극평론가 李英美(이영미· 38)씨가 『일관성 있는 이미지
전개와 음악적 구성의 탄탄함이 최 고의 대중가요라는 칭송을 받기에 부끄럽지 않다
』고 말한 바 있듯 이 이 노래는 음악적 완성도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대중가요가 수행해야 할 역할을 가르쳐주는 교과서 같은 노래입 니다. 포크의 서
정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깊이 있는 시각으로 세계와 인간을 直視(직시)하고 있어요
』(가수 姜仁遠·44)
『1970∼8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겐 노래 이면에 깔려 있는 저항 의 정서가 가슴깊
게 와닿습니다. 노래말이 굉장히 은유적이지만 그 의미를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고
들어도 충분히 감동적일 만큼 아 름다운 곡입니다』(작곡가 安智弘)
해바라기의 李柱浩(이주호·43)씨는 「문화를 이끌어가는 젊은 정신 에 커다란 힘과
자유를 불어넣었다」는 점에서, 裵哲秀(배철수·46) 씨는 「청년정신을 대표하며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노 래」라는 점에서, 그리고 작사가 尹雪喜(윤설
희·44)씨는 「대중을 하나로 묶어주는 가요의 힘을 보여준 곡」이라는 이유에서 이
노래 를 추천했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평가를 내린 40대층의 응답자와 달리 30대층의 평가에는 주관적
인 감정이 많이 개입된 것처럼 보인다. 「金敏基씨 의 작품 모두가 명곡이라고 생
각한다」고 대답한 노영심(33)씨가 그 대표적인 경우. 최연소 응답자인 작사가 나현
욱(30)씨는 「한국 사람이라면 언제 들어도 가슴이 저려오는 민족의 명곡」이라며
「아침이슬」을 1위로 뽑았다.
「난 알아요」(15명), 「동백아가씨」(12명), 「목포의 눈물」(9명), 「아름다운 강
산」(9명), 「황성옛터」(7명), 「노란 샤스의 사나 이」(6명), 「하숙생」(6명) 같
은 노래들이 비록 순위에는 들지 못했 지만 많은 추천을 받았다.
이 중에서 비교적 최근곡인 申重鉉(신중현)씨의 「아름다운 강산」 과 서태지와 아
이들의 「난 알아요」가 눈에 들어온다. 「아름다운 강산」은 「申重鉉의 천재성이
만들어낸 대작으로 사운드의 장중함 과 화려함,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충족시키
는 노래말이 압권」이 라는 평가를 받았고, 「난 알아요」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
든 기 존 가요계의 흐름을 1백80도 바꿔놓은 영향력」을 높이 인정받았다.
- 趙容弼과 李美子의 각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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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두세 표 차이로 순위가 결정된 노래 부문과 달리 가수 부문에 서는 趙容弼씨
와 李美子씨가 일찌감치 선두에 나섰다. 이 두 사람이 1, 2위를 차지하는 것은 분명
한 사실인데 과연 누가 1위겠느냐 하는 문제만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결국 67명의
추천을 받은 趙容弼씨가 20세기 최고의 가수로 뽑히며 슈퍼스타의 자리를 재확인했
다. 李美子씨를 추천한 응답자는 58명.
趙容弼씨를 최고의 가수로 뽑은 응답자들의 이야기는 크게 세 가지 로 요약할 수가
있다. 모든 사람이 좋아한다는 것, 끝없는 음악적 변화로 우리나라의 가요 수준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는 것, 그리고 항상 노력한다는 것.
오빠 부대와 팬 클럽의 元祖(원조)격인 趙容弼씨는 가장 오랜 시간 동안 톱가수의
위치를 지키며 가장 넓은 층의 사랑을 받고 있다. 全 (전)연령층, 全계층에게 호소
력을 가지고 그들의 다양한 취향을 만 족시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예
를 들어 李美子씨를 좋 아하는 사람은 패티김을 좋아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1970년
대 포크 가수들은 기성세대로부터 외면당했고 서태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러나
趙容弼씨는 항상 실험적인 자세로 록에서 트로트, 민요풍에 이 르기까지 모든 장르
에 도전했고, 「각 장르마다 대중의 취향을 만족 시켰다」(작곡가 周贊權·44), 「
폭과 깊이를 갖추고 가슴으로 부 르는 영혼의 노래」(작사가 金熙甲·63)라며 그의
가창력을 높이 산 대답이 있는가 하면 金秀哲(김수철)씨는 「가수는 노래만 잘한다
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趙容弼씨는 작사와 작곡에도 뛰어난데 싱어 송라이터로
서의 면모가 부각되지 않는 것이 아쉽다」고 지적했다. 작사가 兪英建(유영건·46)
씨 역시 「작사와 작곡을 겸하는, 자신만 의 음악 세계가 있는 가수」라는 점을 높
이 평가했다. 가수 金鐘書(김종서·34)씨는 「음악가로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 세
」를 존경한다며 「조금씩 나태해질 때마다 다시 한번 자세를 가 다듬게 만드는 자
극제」와 같다고 이야기한다. 「타고난 음악적 끼 를 끊임없는 노력으로 승화시킨
가수」(작곡가 金南祚), 「어려운 좌절을 넘고 일어서는 끈기와 노력에서 인간적인
매력과 존경심을 느낀다」(작사가 黃相現·48)는 대답도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겠
다.
응답자들의 말에 따르면 趙容弼씨의 원래 목소리는 여자처럼 작고 가냘펐다고 한다.
작은 키에 왜소한 몸집도 힘 있는 소리를 내는 데 불리하다. 요컨대 선천적으로 타
고난 가수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趙容弼씨는 이 작은 목소리를 힘있는 목소리로 만
들기 위해서 국악인 들처럼 목에서 피가 나도록 연습했다고 한다. 그 결과 지금처럼
음 량도 풍부해지고 약간은 허스키한 듯한 음색을 지니게 된 것이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인기를 얻은 뒤 곧바로 대마초 사건에 연 루되어 활동을 정지당해 금
방 사라질 가수처럼 보였던 그가 「창밖 의 여자」로 화려하게 컴백하며 슈퍼스타로
등극한 것은 바로 그의 이런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라고 응답자들은 입을 모은다.
- 연습 안하는 가수, 李美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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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容弼씨가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 가수라면 국민가수 李美子씨는 타고난 가수라고
말할 수 있다. 1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목소 리의 주인공답게 청아하고 담백한
목소리를 지닌 그녀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는 가수이다.
지난달 月刊朝鮮과의 인터뷰에서 李美子씨는 작곡가들이 이야기하 는 자신의 장점으
로 음폭이 넓다, 가사 전달이 정확하다, 어떤 곡도 소화해낼 수 있다 이 세 가지를
꼽았다. 이번 설문 결과는 그녀의 이야기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가사 전달이 뛰어
나다」(작사가 鄭斗守·63), 「우리나라에서 가사 전달이 가장 확실한 가수」(작곡
가 李容馥·47), 「低音(저음)에서 高音(고음)까지 음역이 넓다」(작곡 가 鄭松·58
), 「어떤 노래라도 잘 부를 수 있는 최고의 가창력을 지니고 있다」(裵哲秀) 등 응
답자들은 그녀의 장점을 정확하게 집어 냈다.
李美子씨의 음색에 대해 이야기하는 응답자도 많았는데 그 표현이 가지가지다. 「초
록색과 연두색의 중간쯤 되는 목소리」(작곡가 南國人)라는 문학적인 표현이 있는가
하면 「단물이 푹 빠져나오는 목소리」(작사가 李慶載)라는, 얼핏 들어서는 그 뜻
이 쉽게 와 닿지 않는 표현도 있다. 작사가 黃相現씨는 「李美子씨가 나이를 먹어가
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목소리다」라고까 지 극찬한다.
그런가 하면 金秀哲씨는 그녀의 생활과 노래가 일치하는 점을 존경 한다고 말한다.
『평생을 묵묵히 노래 외길을 가는 사람이 진정한 가수입니다. 생활 과 노래가 일치
해야 돼요. 이미자씨는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소리를 진솔하게 지켜온 분입
니다. 자신의 삶의 모습을 때로는 엄마 같이 또 때로는 누나같이 노래로 표현해온,
진정한 의미의 가수입니 다』
재미있는 것은 「연습을 안하는 가수」로 李美子씨를 지목하는 응 답자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두세 번만 들으면 노래를 완벽하게 소화 해내는 그녀의 천재성에 대한 이
야기겠지만 본인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억울해 할지도 모르겠다. 「하숙생」의 작
곡가 金虎吉(김호 길·80)씨는 「처음 받은 곡도 피아노 연주 딱 두 번 듣고 나서
감 정까지 실어 부르는 모습을 보고 가히 천재적이라고 생각했다」고 회상한다. 작
곡가 南國人씨에 의하면 「자신에게 노래 연습시키는 사람을 다시 연습시키는」 가
수가 바로 李美子씨란다.
- 서민을 울리고 웃기는 나훈아의 창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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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명의 추천으로 3위를 차지한 나훈아씨는 트로트를 맛깔스럽게 노 래하기로 손꼽
히는 가수이다. 趙容弼씨를 만들어진 가수로, 李美子 씨를 타고난 가수로 굳이 분류
한다면 나훈아씨는 어느 쪽에 속할까.
『오아시스 레코드사의 섭외부장으로 있을 때 나훈아씨를 처음 봤 어요. 노래를 한
번 듣고서 「내가 너를 히트 못 시키면 손에 장을 지진다」고 장담했지요. 나훈아씨
는 타고난 가수예요』(작사가 이상 문·61)
『작곡가 朴是春 선생님이 「이런 가수는 처음 봤다」고 이야기할 정도였습니다. 「
내가 조금만 젊었어도 나훈아에게 더 많은 곡을 줄 수 있었을 텐데」하고 많이 아쉬
워하셨죠』(작곡가 南國人)
『작곡가의 의도를 뛰어넘는 대단한 가수예요. 악보를 보고 아니다 싶은 부분이 있
으면 악보를 잘못 본 것처럼 슬쩍슬쩍 바꿔서 불러 요. 그런데 그게 악보보다 훨씬
좋은 겁니다. 자존심 상하지만 받아 들일 수밖에요』(작곡가 沈聲樂·64)
『타고났다기보다는 굉장히 노력하는 가수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는 노래만 불렀
지만 꾸준히 연습을 해서 나중에는 작곡도 직접 했 지요. 차 속에서도 항상 노래 연
습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나이 들면 게을러지기 쉬운데 후배들에게 정말 모범이 되
는 선배 가수입니 다』(가수 金秀哲)
『만들어진 가수예요. 물론 노래도 잘하지만 자기 관리면에서 정말 유일무이한 분이
죠』(가수 金鐘書)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엇갈리지만 트로트를 정말 맛깔스럽게
부른다는 점에서는 나훈아씨를 추천한 응답자 모 두가 동의한다. 특히 「꺾고, 흐
느끼고, 恨을 토해내는 창법이 국민 의 정서와 잘 맞는다」(姜仁遠)거나 「속에서
나오는, 뭐랄까 목을 뒤집는 창법으로 특히 서민들을 울리고 웃긴다」(南國人)와 같
이 그 의 독특한 창법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다.
선배 음악인이 반주를 해주면 개런티의 두 배를 손에 쥐어줄 만큼 정과 의리의 사나
이라는 평가(작곡가 沈聲樂)도 재미있다. 나훈아씨에 이어 가수 부문 4위를 차지한
가수는 29명의 추천을 받 은 대형가수 패티김이다. 「국악을 했지 않나 싶을 만큼
근본 있는 목소리의 대형가수」(작곡가 白映湖·77), 「대형가수답게 성량이 풍부하
고 프로 정신이 강하다」(작사가 黃相現) 등 대부분의 응답자 들이 「대형가수」라
는 표현을 사용했다.
또 작곡가 沈聲樂씨는 「가요에서 창, 팝송, 트로트까지 모든 장르 의 노래를 훌륭
하게 소화해낼 수 있는 大家(대가)」라는 점에서, 작 사가 申奉承(67)씨는 「팝송을
불렀을 때 필링(feeling)이 오는 몇 안되는 가수 중의 하나」라는 점에서 패티김을
추천했다. 작곡가 鄭松씨는 「국제 무대에 서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가수」라며
「음 악 선진국에서 태어났다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수가 됐을 것」이 라고 이야기
한다.
「애수의 소야곡」의 南仁樹(남인수)씨는 23명의 추천을 받았다. 대 부분의 응답자
가 추천 이유에 대해 「말이 필요없다」는 식의 반응 을 보였다는 것이 흥미롭다.
「설명이 필요없다」(작사가 金炳杰), 「전무후무하다」(작사가 鄭斗守), 「남자 가
수의 상징」(작사가 申奉承), 「기가 막힌 목소리」(작곡가 南國人), 「개인적으로
좋아하 진 않지만 한국 가수 부문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사람」(작곡가 金仁培·67
) 등의 추천이유에서 한국 가요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 중을 짐작할 수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22명), 배호(14명), 송창식(12명), 현인(11명), 김건 모(11명)가
그 뒤를 이었다.
- 트로트는 절제할 줄 알아야
20세기 한국 최고의 작곡가로는 43명의 추천을 받은 朴椿石(박춘석) 씨가 선정됐다
. 朴椿石씨에 대한 응답자들의 평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작품영역이 넓었다는
점과 히트곡이 많다는 점. 朴椿石씨를 이야기하자면 李美子씨를 빼놓을 수가 없다.
그가 작곡 한 노래의 3분의 1을 부른 가수가 바로 李美子씨. 「섬마을 선생 님」
「기러기 아빠」 「흑산도 아가씨」 「노래는 나의 인생」 「황혼의 부르스」등 히
트곡만 세도 열손가락이 훌쩍 넘는다.
『내가 코드를 세 개밖에 쓸 줄 몰라서 「섬마을 선생님」을 그렇 게 만든 줄 알아?
절제할 줄 아는 것, 그게 바로 트로트야』 복잡한 트로트 곡을 들고 온 후배 작곡
가에게 툭 던진 朴椿石씨의 이 말은 트로트에 대한 그의 생각을 한마디로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트로트만을 작곡한 것은 아니다. 「초우」와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를 들어보면 듣기 편한 팝의 분위기가 물씬 난 다. 이를 작사가 金熙甲
씨는 「주옥 같은 선율로 대중을 매료시킨 다」고 표현한다.
「섬마을 선생님」을 작사한 李慶載(이경재·72)씨의 말을 들어보 자.
『朴椿石씨는 정통재즈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몇 안되는 작곡 가 중의 한 사람
입니다. 「후라이보이 박사 소동」이라는 영화에 직 접 출연해 재즈 피아노 솜씨를
뽐내기도 했죠』
「수많은 히트곡을 가진 재주꾼」(작사가 曺東山·58), 「20세기 최 고의 히트 작곡
가」(작사가 金錫完·60) 등 그의 대중성을 추천 이 유로 꼽는 응답자도 많았는데
작사가 金淳坤(김순곤·40)씨는 이를 「한 세대의 한국음악을 도배했다」고까지 표
현한다.
39명의 추천을 받아 작사가 부문 2위를 차지한 朴是春씨는 체계적 인 음악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하고 독학으로 작곡과 편곡을 공부한 노력형이다. 「흘러간 노래의 대
부」(鄭松), 「한국 가요사의 시조」 (작사가 白敬國·43) 등의 표현은 한국가요사
에서 그가 차지하고 있 는 위치를 짐작케 해준다.
「이별의 부산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 「신라의 달밤」 「가 거라 삼팔선」
「전선야곡」 「전우야 잘자라」 등 가요무대의 단 골 레퍼토리가 바로 朴是春씨의
곡들이다.
『가요무대에서 나오는 모든 레퍼토리의 70%가 朴是春씨 곡입니다. 중년층이 제일
좋아하는 노래들이죠』(작사가 曺東山)『우리가 아는 트로트 노래의 반 정도가 朴是
春씨 작품이에요』(裵哲秀)
『과거의 좋은 멜로디는 이미 이분이 다 써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 당시에 히트되지 못한 곡들을 요즘에 들어보면 다들 어느 노래에선가 조금씩 인
용하고 있는 멜로디예요』(작곡가 南國人)
작사가 申奉承씨는 「그렇게 많은 곡을 썼는데도 불구하고 비슷한 노래가 하나도 없
다」는 점에서 朴是春씨를 추천했다. 작곡가 부문 3위는 24명의 추천을 받은 申重鉉
씨. 「한국 록 음악의 代父」 申重鉉씨에 대해서는 「천재적인 음악인」(작사가 李
健雨· 39), 「다른 말이 필요없는 천재」(가수 林胄利·42), 「천재적인 감 각」(
작곡가 崔鐘赫·59) 등 「천재」라는 수식어가 특히 많았다. 작사가 梁仁子씨의 표
현을 그대로 옮기면 그의 이런 천재성은 「신 들림이 주는 환희」. 작곡가 吳東植(
오동식·44)씨는 「한국 가요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작곡가」로 申重鉉씨를 뽑
으면서 「발표 된 작품수에 비해 히트곡이 많으며 곡마다 작품성이 살아 있다」는
점을 추천 이유로 밝혔다.
이 외에 「향수」의 김희갑(23명),「빛과 그림자」의 길옥윤(18 명), 「타향살이」
의 손목인(13명), 「나그네 설움」 「단장의 미아 리 고개」의 이재호(12명), 「아
침이슬」의 김민기(11명),「난 알아 요」의 서태지(8명), 「사랑하기 때문에」의 유
재하(7명), 「노란 샤 스의 사나이」의 손석우(7명), 「떠날 때는 말없이」의 이봉
조(7명) 씨가 한국 최고의 작곡가 베스트 10에 선정됐다.
-『곡을 너무 많이 써서 미안합니다』
작사가 부문에서는 37명의 추천을 받은 半夜月(반야월)씨가 20세기 한국 최고의 작
사가로 선정됐다. 半夜月씨는 우리 가요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노래말을 만들고 또
가장 많은 히트곡을 낸, 말 그대로 가요사의 산 증인이다. 무슨 조직의 보스처럼 10
개나 되는 필명을 가진 이유에 대해 「너무 많은 곡을 쓴 것이 다른 작곡가에게 미
안 해서」라고 밝힌 것처럼 응답자의 대부분도 그의 「끊임없는 창작 활동과 多作(
다작)」을 제일의 추천 이유로 꼽았다. 작사가 李慶載씨에 의하면 半夜月씨의 곡에
는 자신의 체험이 많이 담겨 있다고 한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에는 6·25 와중
에 잃은 둘째딸에 대한 피맺힌 恨이, 「산장의 여인」에는 결핵요양소에서 만난 아
름다운 여인의 상처가 담겨 있다. 「울고 넘는 박달재」 역 시 유랑극단 시절에 만
난 젊은 농부 내외가 슬프게 우는 모습을 보 고 단숨에 썼다고 하는데 그의 이런 순
발력이 아마도 5천 곡의 노 래를 만드는 밑거름이 됐을 것이다. 半夜月씨가 쓴 많은
노래들은 특히 6·25로 시련을 겪은 가요의 재부흥에 크게 기여했다. 36명의 추천
을 받은 朴健浩(박건호)씨는 半夜月씨보다 한 표가 적어 아깝게 1위 자리를 놓쳤다.
기성세대와 신세대를 이어주는 다리 역 할을 했다는 평을 듣는 작사가답게 「트로
트의 정형화된 틀을 깨고 노래말의 새로운 형식을 만든 개척자」(작사가 權赫植·47
), 「1970 년대와 90년대의 연결고리로서 한국 대중가요사에 기여한 바가 크 다」(
작사가 河智暎·44) 등을 추천 이유로 밝힌 응답자가 많았다. 1970년에 박인희씨가
불렀던 「모닥불」에서 「단발머리」 「잊혀 진 계절」 「괜찮아」 「아, 대한민국
」 「잃어버린 30년」에 이르 기까지 朴健浩씨는 항상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며 노래
말의 영역을 넓히는 데 주력했다.
朴健浩씨를 「시인」이라고 표현한 응답자가 많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실제로
시집을 출판하기도 한 그는 남자답지 않게 섬세하고 서정적인 노래말, 구체적이면서
도 압축된 표현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朴健浩씨의 서정적이고 순수한 노래말이 더욱 돋보이는 이유는 그가 음악을 잘 알
고 가수를 배려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수 입장 에서 「요」 같은 발음은 고음 처
리가 힘들죠. 「아」나 「이」 발 음은 상대적으로 쉽구요. 朴健浩씨는 노래말을 만
들 때 가수가 노래 를 잘 소화할 수 있도록 곡의 흐름에 맞춰서 노래말을 쓰는 세심
한 작사가입니다』(가수 姜殷哲)
23명의 추천으로 3위를 차지한 梁仁子씨는 뛰어난 문학성과 철학이 담겨 있는 내용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작은 소재로 가슴을 울린다」(작사가 安陽子), 「가
장 문학적인 작사가로 비유법이 기가 막히다」(가수 姜殷哲), 「대담한 문학적 시도
와 뛰어난 어휘 구사 로 우리의 정서를 이끌어낸다」(작사가 金漢萬·45) 등에서 나
타나 듯이 「노래말의 고급화」를 추천 이유로 뽑는 응답자가 많았다.
『기승전결의 정형화된 가사 패턴을 바꾼 작사가예요. 「킬리만자로 의 표범」을 보
면 철학적이면서도 섬세한 梁仁子씨의 장점을 한눈 에 읽을 수가 있죠. 「립스틱 짙
게 바르고」라는 일상용어를 대담하 게 노래 제목으로 올린 것도 다른 작사가는 쉽
게 하지 못했던 일입 니다』(가수 林胄利)
『趙容弼씨가 부른 「큐」를 보면 「사랑, 눈 감으면 잊으리」란 대 목이 나오죠.
쉬운 것 같지만 사실 그전까지는 이런 가사가 없었습 니다. 다들 「눈 감아도 떠오
른다」는 식이었죠. 눈 감는다고 사랑 이 잊혀지겠습니까?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렇
게 표현한 겁니다. 대단 한 표현력이죠』(작사가 金漢萬)
「너에게로 또다시」 「입영열차 안에서」「슬픈 언약식」 등 20대 의 정서를 세심
하게 그려내 많은 사랑을 받았던 젊은 작사가 박주 연(37)씨가 4위에 오른 것은 주
목할 만하다. 이 외에 「가슴 아프 게」 「흑산도 아가씨」의 정두수(16명), 김민기
(12명), 「꿈꾸는 백 마강」의 조명암(11명), 「신라의 달밤」의 유호(9명), 「짝사
랑」의 박영호(7명),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의 조은파(6명)씨가 최고 작 사가 부
문 베스트 10에 선정됐다.
손지연 자유기고가 / 이상희 조사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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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야 잘자라」작사자 兪湖의 노래 인생
글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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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가요 「전우야 잘자라」작사자 兪湖의 노래 인생 『울분과 술기운으로 단숨에 지은 노래』 ● 서울 수복 되던 날 明洞에서 朴是春씨 만나… 단숨에 「전우야 잘자라」 작사ㆍ작곡 ● 작곡가 朴是春씨의 의뢰로 히트곡 「신라의 달밤」, 「이별의 부산 정거장」 등 63곡 作詞 ● TV드라마「유호극장」5년간 250회 방송… 프로그램 제목에 처음으로 작가 이름 붙여 兪 湖 1921년 황해도 해주 출생. 1939년 제2공립고등보통학교(現 경복高) 졸업. 1942년 東京제국미술학교 도안과 2년 수료. 1943년 동양극장 미술부ㆍ문예부 입사. 1945년 서울중앙방송국 편성과 근무. 1949년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 1954년 경향신문 문화부 차장ㆍ부장. 1962년 방송작가로 복귀. 1980년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 1985년 한국방송작가 교육원장. 1968년 방송문화상, 1987년 한국방송 60주년 문화포상, 1993년 서울시문화상, 2002년 방송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 작사곡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전선야곡」, 「삼다도 소식」, 「이별의 부산정거장」, 「고향만리」, 「럭키 서울」, 「맨발의 청춘」, 「님은 먼 곳에」, 「전우야 잘자라」 「진짜 사나이」(군가) 등 63곡.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gomsi@chosun.com) 반세기 만에 돌아온 「전우야 잘자라」 지난 3월24일, 코리아나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兪湖(유호·본명 兪海濬·83) 선생은 반세기 전의 감격이 느껴지는 듯 조용히 가사를 읊조리고 있었다. 3월1일, 反核反金 자유통일 3·1절 국민대회(서울시청 광장)에 참석한 참전 용사들이 그의 노래 「전우야 잘자라」를 부르며 눈시울을 붉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자에게 『「전우야 잘자라」를 다시 부르며 우는 사람이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콧날이 시큰했다』고 했다. 1950년 10월은 국군장병과 민족 전체를 들뜨게 만들고 있었다. 모두가 통일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고 믿었다.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로 일하고 있다가 한강을 넘지 못하고 敵(적)치하에서 숨어서 살았던 그는 작곡가 朴是春의 筆洞(필동) 집에서 서울 수복의 감격과 환희를 담아 「전우야 잘자라」를 지었다. <1절-전우의 시체를 넘고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꽃잎처럼 떨어져 간 전우야 잘자라. 2절-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 /달빛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피던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3절-고개를 넘어서 물을 건너 앞으로 앞으로 /한강수야 잘 있느냐 우리는 돌아왔다 /들국화도 송이송이 피어나 반기어 주는 /노들강변 언덕 위에 잠들은 전우야. 4절-터지는 포탄을 무릅쓰고 앞으로 앞으로 /우리들이 가는 곳에 삼팔선 무너진다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떠오른다 네 얼굴이 꽃같이 별같이> 골프도 20여 년 전 그만두고 거의 운동을 하지 않고 있다는 兪湖 선생은 건강해 보였다. 『껍데기만 건강하다』면서 혈압이 조금 높아 조심하고 있다고 했다. 兪湖 선생은 현재 한국방송작가교육원장을 12년째 맡아 오면서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다. 그는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자문위원도 맡고 있다. 드라마 작가, 작사가, 신문기자 등 다양한 직업을 거친 그는 本業(본업)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모두 다 外道(외도)』라고 눙쳤다. 兪湖는 「맑은 호수」 兪湖 선생은 1921년 11월15일 황해도 해주의 廣石川(광석천) 근처에서 아버지 兪鎭明(유진명)과 어머니 白川 趙氏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장남은 黃州(황주)에서 태어나 黃濬(황준), 차남은 延安서 태어나 延濬(연준), 그는 海州서 태어나 海濬(해준)이라고 불렸다. 큰누이가 5남매 중 첫째이고, 둘째 누이는 兪湖씨 바로 위다. 고려大 총장을 지낸 초대 법제처장 兪鎭午(유진오) 박사와는 가까운 친척이다. 아버지는 친척이기도 한 구한말 개화파의 한 사람인 兪吉濬(유길준)의 영향으로 일본 明治大學(명치대학)에서 1년을 수학한 뒤 귀국했다. 황해도 黃州 군수를 시작으로 여러 곳의 군수를 지낸 끝에 당시 副知事(부지사)격인 參與官(참여관)에 올랐다. 어느 해인가 심한 가뭄이 들었는데도 상부에서는 쌀 供出(공출)을 前年 대로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를 거부한 그의 부친은 공직에서 사직을 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의 부친은 桂洞(계동)에다가 50칸이 넘는 집을 짓고 定着(정착)했다. 桂洞 꼭대기에 양조장을 개업하고 金鑛(금광)에도 손을 대서 생활은 윤택했다. 兪湖는 서울에서 제2공립고등보통학교(現 경복高)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제국미술학교 도안과 2년을 수료했다. 그 후 귀국한 兪湖 선생은 1943년부터 1년여 동안 東洋劇場의 美術部와 文藝部에서 일했다. 연극 상설 극장이라 1년 내내 공연을 했다. 그것들을 보면서 그는 극본 두 작품을 써서 靑春座(청춘좌)에서 상연했다. 그때 처음으로 「兪湖」라는 필명을 썼다. 兪(유)자는 맑을 兪라고도 해서 「맑은 호수」를 연상해서 지은 것이다. 방송소설을 쓰면서 그는 방송작가로 데뷔했다. 그리고 朗讀小說(낭독소설) 두 편을 京城放送局(후에 서울중앙방송국, KBS의 전신)에서 방송했다. 그것이 인연이 돼 1945년 광복이 되면서 10월에 編成課에 들어가서 라디오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광복 후 처음으로 방송된 연속 낭독 소설 「기다리는 마음」을 집필함으로써 본격적인 방송작가의 길을 걸었다. 이 땅에 처음으로 연속 방송극 시대를 연 것이다. 당시 김영수, 김희창, 최요안, 이익, 김성민, 이서구 선생 등과 본격적인 연속 방송극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는 1961년 TBC-TV가 開局하면서 「初雪(초설)」로 본격적인 TV드라마를 쓰기 시작했다. 1965년 TBC의 일요드라마 「일요극장」은 방송사의 연속극 경쟁이 치열할 때, 선생이 집필한 「맞벌이 부부」, 「짚세기 신고 왔네」 등의 작품이 잇달아 인기를 얻자 아예 작가의 이름을 딴 「兪湖극장」으로 타이틀을 바꿔 2년간 계속 방영을 했다. 일요극장부터 계산하면 5년간 250회의 방송횟수를 기록한 셈이다. 兪湖 선생의 작품세계는 도시 서민들의 哀歡(애환)을 코믹 터치로 그리는 것이다. 갑자기 벼락부자가 된 시골 영감, 신식 할머니, 서울에 돈 벌러 온 시골 처녀, 호스티스 등 모자란 듯한 밑바닥 인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그것은 그의 작품 밑바탕에 진한 휴머니즘과 페이소스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인기 극작가로서뿐만 아니라 대중가요 작사가로도 이름이 드높았다. 자신의 드라마 주제곡을 비롯, 많은 히트곡의 歌詞(가사)를 썼는데,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럭키 서울」, 「맨발의 청춘」, 「님은 먼 곳에」 등이 그것이다. 그는 1970년代 이후 두 民放(민방)의 주말연속극과 주간극을 한꺼번에 맡아 그야말로 안방극장에 1960년代에 이어 「유호시대」를 再現했다. 이같은 공로로 1968년 처음으로 마련된 방송문화상 「문예부분」 첫 수상자가 됐다. 그 후 그는 계속 집필 활동을 해 오다 1980년부터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직을 5년간 역임했다. 『遺作 방송드라마 남기고 싶다』 ―방송드라마는 언제 그만두신 겁니까. 『1991년 2부작 추석특집 드라마 「너두 늙어봐라」입니다. 사실, 그전에 1990년 KBS-1TV 신년특집 드라마 「구리반지」를 마지막으로 「편안하고 유유자적한 일상을 즐기고 싶다」며 絶筆(절필)을 선언했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드라마는 어떤 것이 있나요? 『일일연속극 「딸」인데, 1960年代에 300회가 넘게 放映(방영)됐어요. 당시로선 최장 드라마였지요. 이후 金秀賢(김수현)이란 여류작가가 「신부일기」로 400회를 훌쩍 넘겼어요. 요즘 대부분의 드라마들은 6개월쯤 방영하더군요. 너무 길면 긴장미가 떨어져요』 ―요즘 드라마를 예전과 비교하신다면? 『드라마에서 作家가 보이질 않아요. A라는 드라마와 B라는 드라마가 차별이 안돼요. 굳이 작가 정신까지는 언급 안 하더라도 작가의 색깔이 나와야 하는 건데… 不倫(불륜)을 다루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나는 생활주변에서 훈훈한 인간미가 드러나는 소재들을 발굴했었는데, 요즘 작가들은 튀어 보려는 생각인지 소재가 꼭 不倫이야. 텔레비전은 온 가족이 본다는 것을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좋은 작품 하나 남기고 싶은 욕심은 없으세요? 『내가 죽기 전에 마지막 작품을 써 보자고 모 연출가와 약속한 지도 벌써 7년이 넘어요. 제목도 「同行」(동행)으로 정해 놓고, 60분짜리 2회로 하기로 했지요. 그 연출가가 「어떻게 됐냐」고 재촉하면 「名作은 그렇게 빨리 안 나온다」고 하지만 마음대로 안 돼요. 추석 전에 칠순이 넘은 할아버지가 여섯 살짜리(너무 어리면 演技가 어려우니까) 손주를 데리고 단둘이 先塋(선영)을 찾아가는 얘기지요. 선영 가는 길에 짜증 내는 손주를 달래서 省墓(성묘)를 하고 온다는 이야기인데 잘 다듬어지질 않아요. 내 욕심이지』 ―광복 후 방송작가의 系譜(계보)는 어떻게 됩니까? 『1세대로는 兪湖, 韓雲史, 趙南史 등이 있습니다. 趙南史씨는 「청실홍실」이란 일일연속극 하나 남기고 죽었어요. 2세대는 윤혁민, 이희우, 박정란, 김수현, 김정수, 이금림씨 등이 있는데 여자들이 너무 기세를 올려선지 남자들이 맥을 못 췄어요. 지금도 여자들 勢(세)가 강해요. 김운경, 이황경 등 남자들이 버티고 있습니다만』 ―1949년 경향신문사로는 어떻게 옮기신 겁니까? 『1945년 광복되던 해에 서울중앙방송국 편성과에 들어갔는데, 경향신문 문화부장 겸 부국장인 金光洲(김광주) 선생을 우연히 알게 됐어요. 그분은 중국 上海 남양醫大를 중퇴하고 上海 임시정부 金九(김구) 선생을 밑에서 돕던 소설가였습니다. 그는 이미 1933년 新東亞에 「밤이 깊어갈 때」로 문단에 데뷔한 분이었어요. 그분이 같이 일하자며 날 끌기에 경향신문 문화부 평기자로 들어갔어요』 「전우야 잘자라」 작곡 秘話 兪湖는 1950년 6월25일, 전쟁이 터졌지만 피란을 가지 못하고 敵治下를 청파동 집에서 겪었다. 해방둥이 아들과 그 밑의 갓난아이 때문이었다. 6월27일 한강다리가 끊어지던 날, 그날 낮 서울역까지 들어온 人民軍들을 목격했다. 오후 서너 시쯤이었을까. 미군 전투기가 서울역 상공을 저공 비행하며 날았다. 기총소사가 불을 뿜었다. 서울역을 목표로 한 美軍機의 공격은 서울역을 비켜나 청파동 일대, 兪湖씨의 셋방에 떨어졌다. 『마당에 폭탄 두 발이 떨어지고 지붕이 홀랑 날라갔어요. 안채에 살던 사람의 부인은 卽死(즉사)했어요. 동사무소에 부역하러 갔다가 다행히 화를 면했어요. 놀라서 집에 오니 아내가 허벅지를 다쳤어요. 포탄에 맞은 게 아니라 폭풍에 날리는 나무에 찔려서 상처가 심했어요. 거리가 뿌연 연기로 자욱한데 막걸리집 주인은 거리에서 춤을 추었어요. 폭격에 놀라 실성을 했더군』 숙명여대로 가는 고갯길에는 그의 형 兪黃濬(유황준·작고)의 병원이 있었다. 무작정 고개를 올라가다 형제는 마주쳤다. 恐慌(공황) 상태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형과 의논해서 나는 해방둥이 아들과 갓난아이를 데리고 경기도 廣州(現 하남시)에 있는 기계 兪씨 集姓村(집성촌)으로 가기로 했어요. 아내는 다쳐서 걷지를 못해, 내가 갓난아이를 업고 하나는 걸리고 해서 서울을 벗어나기 위해 결사적으로 움직였지요』
2003년 노무현 정권의 정식 출범을 앞두고 김상철(金尙哲. 고인) 전 서울시장을 중심으로 3.1 국민대회를 추진하는 자리에서 행사 순서를 결정할 때 나는 두 곡을 강력 추천했다. 김동진 작곡의 '조국찬가'와 박시춘 작곡의 '전우여 잘자라'였다. 두 노래가 그 뒤 애국집회의 주제가로 불활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우여 잘자라'는 만들어지는 과정이 하나의 역사이다.
兪湖는 陣中歌謠(진중가요) 「전우야 잘자라」 외에 본격적인 軍歌를 작사했다. 「전우야 잘자라」를 작사한 공로로 육군본부에서 주관하는 군가선정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진짜 사나이」. 육군본부 정훈국에서 그에게 의뢰해 작사한 곡이다. 1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전투와 전투 속에 맺어진 전우야/산봉우리에 해-뜨고 해가 질 적에/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
『美軍들 군가를 들어보면 나라 사랑 이야기는 없습디다. 동네 계집애들 이름을 가사에 집어 넣어서 낄낄거리면서 훈련의 피곤함을 잊는데, 참 실용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軍歌도 앞으로는 그렇게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美軍들은 부대 이름도 사람 이름으로 짓고, 인간미가 있어요』 兪湖씨는 경향신문 문화부장 시절, 동료들과 술을 코가 비뚤어지게 마시고 나서 불광동 집엘 택시를 타고 간 적이 있었다. 가는 도중 녹번동 검문소에서 검문을 받은 그는 滿醉(만취) 상태에서 거동수상자로 몰렸다. 『헌병이 나를 검문소 안으로 데리고 가서 검문을 하는데, 「내가 전우야 잘자라 노래를 지은 작사자인데」라고 했더니, 헌병이 내게 「한번 불러보라」고 하기에 담배를 한 개피 달라고 했어요. 냅다 소리를 질러가며 노래를 하는데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까지만 기억이 나고 그 다음은 영 생각이 안 났어요. 두 번째 불러도 마찬가지고. 이 이야기를 金鍾泌(김종필) 총재 등 5·16혁명 주체들에게 했더니, 金총재가 날 만날 때마다 짓궂게 놀렸어요. 좌우간 술기운에 톡톡히 망신당한 거야』 노래인생의 시작, 朴是春씨와의 만남 ―朴是春씨와는 처음 어떻게 만났습니까? 『1945년 10월 서울중앙방송국에 들어갔을 때, 朴是春씨는 서울중앙방송국 초대 경음악단장이었습니다. 어떻게 인연이 닿았는지 1946년 조선방송사업협회에서 광복이 됐으니까 건전가요를 보급하자는 案(안)이 나왔어요. 그때 처음으로 내가 「목장의 노래」, 「하이킹의 노래」를 작사했어요. 작곡은 朴是春씨가 했고요. 1947년 朴是春 악단장이 내가 편성국에서 드라마를 쓰고 있는데, 작사를 하나 급하게 해달래요. 당시 댄스홀들이 盛業中(성업중)이라 樂士(악사)들이 수입이 좋은 댄스홀로 몰렸습니다. 朴是春 악단장은 악사들을 한꺼번에 모아 레코드를 吹入(취입)하기 힘이 드니까 악사들이 모인 김에 한꺼번에 연주해서 레코드를 취입하려고 한 것이었어요. 조금 있으면 악사들이 다 모인다며 지금 당장 作詞를 해달라는 것이었어요. 光復이 됐으니까 復古(복고)풍으로 하자고 합디다. 제목을 「신라의 달밤」이라고 정해서 갖고 왔어요. 어이가 없어서 멜로디를 물어 보니 朴씨가 테이블을 두두리며 「딴 딴 딴」 하며 조용히 불러요. 나는 字數(자수)를 맞춰야 하니까 3절 노래인데… 「이거 어때요?」 하면 무조건 「좋아, 좋아」 하더군요. 드라마를 쓰다 말고 한 시간쯤 걸렸을까. 내가 펜을 놓자마자 「휙」하고 바람 소리를 내며 들고 나가더군요』 「비 내리는 고모령」도 사연이 있다. 兪湖는 朴是春으로부터 作詞(작사) 부탁을 받고 서울중앙방송국 도서관으로 갔다. 벽에 붙어 있는 커다란 한국 全圖(전도)를 보니 東大邱(동대구)역 옆에 급행 열차도 서지 않는 顧母驛(고모역)이 눈에 띄었다. 顧母驛이라는 漢字가 무슨 사연을 간직한 것 같았다. 그는 가사를 적어 내려갔다. 이 노래는 1948년 가수 玄仁씨의 특유한 低音(저음)에 실려 인기를 모았다. 『1984년 「비 내리는 고모령」 노래비 제막식에서 大邱 달성구청 홍보관이 노랫말과 같은 어머니와 아들의 사연이 있다고 하기에 「틀리진 않았구나」 하고 안도했지요』 ―朴是春씨와 함께 몇 곡을 만들었습니까? 『나는 朴是春씨를 만나 5년 동안 작사를 했습니다. 작사자가 나밖에 없는지 같이 했어요. 「고향만리」, 「럭키서울」, 「이별의 부산 정거장」, 「전선야곡」, 「신라의 달밤」 등이 나온 겁니다. 난 방송작가로 시작했는데, 朴是春씨를 만나서 노랫말 인생이 시작된 겁니다. 드라마 주제가도 작사했는데, 「짚세기 신고 왔네」, 「님은 먼 곳에」 등이 있어요. 朴是春씨는 노래를 만드는 데 의미부여를 했어요. 「신라의 달밤」은 광복을 기념해 復古風으로 노래를 만들자는 것이었고, 1·4 후퇴 때는 군인들 사기앙양을 위해 대구에서 「전선야곡」을 지었습니다. 제주도에 갔을 때는 「兪湖씨, 우리 제주도 온 김에 이곳에 노래 하나 떨어뜨리고 가자」고 해서 나온 게 「삼다도 소식」입니다. 피란 수도 釜山에서 서울 수복이 가까워지자 그는 피란살이의 설움을 노래하자고 해서 「이별의 부산 정거장」을 지었습니다. 朴是春씨를 보면 마치 역사의 현장을 기록하는 記者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 시대상을 반영한 노래니까 당시에 크게 어필했다고 생각합니다』 『신라의 달밤이오』… 『수고하십니다』 ―노랫말을 지으실 때 어디에 가장 중점을 두시나요? 『어린 아이들도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쉬운 語彙(어휘)를 골라요. 그 다음이 멜로디를 보고 字數를 조정합니다. 作詞는 詩와는 엄연히 달라요. 개중에는 문학성이 짙은 노랫말도 있지만 대중성을 가진 어휘를 고르려면 문학성 있는 노랫말은 만들어지지 않아요. 다만 좋은 노랫말이 있으면 작곡가에게 曲想(곡상)이 떠올라 많이 불려지는 가곡이 만들어집니다』 ―작사료는 어떻게 받습니까? 그는 저작권료(작사료)의 구체적인 금액을 묻는 기자의 질문엔 은근히 답변을 피했다. 『음악저작권협회에 등록된 내 노래가 63곡이오. 드라마 주제곡까지 합치면 나도 많이 쓴 편이죠. 저작권료가 들어오면서 무슨 노래가 어느 노래방에서 몇 번 불려졌다는 일람표가 옵니다. 「신라의 달밤」, 「럭키서울」, 「고향만리」,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 열댓 곡은 지금도 많이 불리고 있어요』 ―가수 玄仁씨와는 언제 만나셨습니까? 『朴是春씨는 玄仁씨가 중국에서 돌아와 노래를 하는데, 누가 자기에게 소개를 했대요. 마침 「신라의 달밤」을 작곡하고는 누굴 줄까 하고 고심했답디다. 朴선생이 日政 때부터 좋아한 가수는 南仁樹씨였거든요. 그래서 朴是春씨 曲(곡)은 南仁樹씨가 도맡아 부르다시피 했는데 朴是春씨의 말이 「신라의 달밤은 南仁樹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며 玄仁씨에게 주었다는 겁니다. 1947년 노래 발표회가 明洞의 明治座(명치좌)에서 열렸습니다. 경향신문사와 가까워 건너가 봤어요. 朴是春씨 말을 그대로 옮기면 「玄仁은 코가 크고 서양 사람이 되다만 듯한 얼굴」이었는데, 唱法(창법)이 독특해 청중들이 홀딱 반했지요. 노래가 끝나도 박수 소리가 끝나야지. 내가 구경하던 날 玄仁씨은 여덟 번 앙코르를 받았어요. 무대 뒤에 가 봤더니 「歌手라는 게 저래서 좋구나」를 느끼겠더라구요. 통금시간이 지나 파출소에서 검문을 받는데 「누구냐?」 해서 「신라의 달밤이오」 하면 「수고하십니다」 하고 보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었으니까요. 하도 유명하니까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는 암구어로 쓰였다고 합디다』 럭키레코드社 문예부장 休戰(휴전)이 되자 兪湖씨는 경향신문사 문화부에 복귀한다. 그러나 매일 朴是春씨의 성화에 배길 수가 없었다. 朴씨는 자신이 차린 럭키레코드의 문예부장 자리를 兪湖씨에게 제의했다. 레코드社의 문예부장은 가수들을 상대해야 하고, 작사·작곡자를 선정해야 하는 등 핵심자리였다. 『신문사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경향신문 金光洲 문화부장의 배려로 레코드사 일에 관여할 수 있었습니다. 레코드 봉투의 디자인, 레코드 라벨 디자인, 포스터 등을 만들었습니다. 이제사 하는 얘기지만 朴是春씨는 그때 돈 한 푼도 주지 않았고, TBC 경음악단장 이봉조씨도 그랬어요. 이봉조씨는 영화 주제가 「떠날 때는 말 없이」, 「종점」 등 서너 곡을 부탁했는데, 일이 끝나면 「막걸리 먹으러 가자」는 게 전부였고, 나도 그것으로 만족했구요』 ―朴是春씨의 럭키레코드는 경영이 잘 됐나요? 『말도 말아요. 朴是春씨가 어찌나 무모하게 일처리를 하는지 고생만 했습니다. 그때까지는 日本에서 녹음·제작까지 해서 판매를 했어요. 朴是春씨는 녹음한 原版(원판)을 찍어 낼 방법에 대해 고심했어요. 돈도 없고, 기계를 日本에서 들여올 엄두를 못 냈어요. 어느 날, 朴是春씨가 투자를 한 日食 집 주인과 을지로 고물상에 나가자고 해요. 고물상에서 참기름 짜는 기계를 두 대 사다가 신당동에 있는 허름한 사무실에 설치했습니다. 고물상에다가 日本 노래 헌 레코드라도 좋으니까, 헌 레코드를 잔뜩 모아다 달라고 했어요. 그때는 日本 레코드가 흔했어요. 헌 판을 녹인 물에 밀랍 원판을 눌러서 판을 찍어 내는 방식이었습니다. 문제는 참기름 기계를 혼자 누를 수가 없으니까 서너 사람이 대롱대롱 매달려서 눌렀습니다. 이렇게 눌러서 말려 놓으면 판이 완성되는 데 하루에 10장도 못 만들었어요. 레코드 가게 주인이 기다렸다가 서너 장씩 가져갔는데, 얼마 있다가 다시 가져와서 「이걸 어떻게 파냐」고 항의해요. 처음에는 玄仁씨의 「신라의 달밤」이 나오다가 日本의 엔카(演歌)가 나오더라는 거예요. 人力으로 하니까 덜 눌려서 그런 불량품이 나온 거지요. 열 장을 팔면 返品(반품)이 여섯 장은 됐어요』 처음이자 마지막 시나리오, 「祖國 3時」 兪湖씨는 경향신문 문화부장으로 5·16 군사혁명을 맞았다. 몇 달 후 경향신문을 그만둔 그에게 혁명 주체세력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5·16 기념 영화」를 만들어 달라는 제안이었다. 『시나리오를 써 달라고 하기에 난 시나리오를 쓴 적도 없고, 그런 일은 전문가에게 맡기라면서 시나리오 작가인 김강윤씨를 소개했어요. 그쪽에서도 「혼자 하시기 뭐하면 다른 사람과 같이하셔도 좋다」는 것이었어요』 시나리오는 혁명주체 세력 간의 功 다툼과 異見(이견)으로 계속 수정 지시가 내려졌다. 『육사 5기생들이 자신들도 혁명 주체인데 시나리오에는 金鍾泌씨 등 8기생을 중심으로 혁명이 성사된 것으로 그려져 있다며 반발하는 거예요』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시나리오는 兪湖씨가 「祖國 3時」라는 제목을 붙여 촬영에 들어갔다. 『한강 다리를 넘은 시각이 새벽 3시 아닙니까. 시나리오 제목이 통과됐고, 朴正熙 대통령이 시나리오 원본 표지에 특이한 글씨체로 「祖國 3時」라고 썼어요』 그러나 영화는 공수부대가 한강변에 떨어지는 첫 장면을 찍고는 제작이 중단되고 말았다. 그는 혁명 주체세력 간 갈등이 중도하차의 원인인 것 같다고 추정했다. ―문화부 기자로서 기억에 남는 취재는 어떤 것이 있나요? 『극단의 巨頭(거두)로 극예술연구회 출신인 柳致眞(유치진·작고)씨와 徐恒錫(서항석·작고)씨가 한때는 사이가 안 좋았어요. 柳致眞 선생을 중심으로 한 극단의 움직임이 더 두드러져서 柳致眞 선생의 손을 들어 준(기사로 두둔해 준) 적이 있어요. 徐恒錫 선생이 대단히 섭섭해하던 모습이 기억 나요』 兪湖씨는 자유당 정권이 1959년 4월 군정법령 제88호를 적용, 경향신문을 폐간시킨 얘기를 꺼냈다. 『경향신문이 폐간되니까 사회 각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復刊(복간) 운동이 일어났어요. 문화부장인 나는 문화계 인사들의 서명을 받으러 다녔어요. 대한잉크 사장을 지낸 金振贊(김진찬·작고) 당시 문화부 차장과 함께 발품을 팔아 가며 도장을 받았어요. 그러나 경향신문에 기고를 하던 대학교수들도 「자유당 처사가 부당하긴 하지만 서명은 곤란하다」며 움츠리더군요. 작고한 趙芝薰(조지훈) 詩人, 소설가 馬海松(마해송)씨는 두말 않고 도장을 찍더라구요. 知性人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兪湖 선생은 부인 高壽子씨와의 사이에 1남1녀를 두었다. 장남은 KBS 보도국 기자를 거쳐 바둑TV 이사로 정년을 마친 兪建穆(유건목)씨, 며느리 禹惠全(우혜전)씨는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를 거쳐 경향신문에서 기자생활을 하다 현재 영국에 유학 중이다. 장녀 兪南眉(유남미)는 고려大 신방과를 졸업한 李信雨(이신우)씨와 결혼했다. 李씨는 現 문화일보 논설위원으로 있다. 兪湖 선생은 『우리 집에서는 나를 포함해 記者 출신이 네 명』이라면서 『남들은 나를 보고 신문사 社長이라고 한다』며 웃었다. 기자가 『좋은 노랫말 하나가 國難(국난) 때 국민을 단결시키는 큰 역할을 한다』고 하자, 兪湖 선생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한마디를 던졌다. 『통일이 되어 「전우야 잘자라」도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질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입력 : 2003.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