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9월23일 유엔총회 영상기조연설에서 또 종전(終戰)선언 타령을 했죠. 종전선언이 “한반도에서 비핵화와 함께 항구적 평화체제의 길을 여는 물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문 대통령이 이 시점에서 왜 뜬금없이 종전선언을 언급하는지 의아해하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현 상황에서 비핵화나 한반도 평화에 전혀 도움될 게 없다는 점에서 실없는 소리고 헛발질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좀 예의를 갖춘 표현을 사용하자면 초현실주의적인 언급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대통령이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실없는 말을 너무 자주 하는 것은 좋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문 대통령의 종전선언 집착을 비판하려면 종전선언이 도대체 뭔지, 무슨 목적으로 어떤 경우에 하는 것인지, 종전선언으로 달라지는 게 뭔지, 이런 걸 제대로 알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종전선언에 대해서 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종전의 방법: 평화협정 체결
먼저 종전하는 방법부터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전쟁상태를 법적으로 종식시키는 방법은 평화조약 또는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겁니다. ‘평화조약’, peace treaty라는 이 명칭은 국가 간에 체결된 종전 합의서에만 붙일 수 있고 국가로 인정되지 않은 당사자가 포함된 종전 합의서는 보통 ‘평화협정’, peace agreement, peace accord 이렇게 부릅니다.
1973년 미국과 월맹, 월남 삼자(三者) 간 파리에서 체결된 월남전 종전 합의서는 종전협정입니다. 1995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크로아티아, 유고 삼자 간에 체결한 합의도 평화협정입니다.
평화조약이나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전쟁상태를 법적으로 종식시키는 종전입니다. 종전 외에 전후 처리문제도 다루는데 그중에서 영토의 범위와 경계를 확정하는 게 가장 중요하고 배상, 청구권, 포로, 전범(戰犯) 문제 같은 것도 포함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종전선언은 평화협정의 전문(前文), preamble이라고 하죠. 또는 제1조에 들어갑니다. 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전후처리를 다룬 1919년 베르사이유 평화조약은 그 전문에서 “이 조약의 발효와 함께 전쟁상태가 종식된다” 이렇게 선언을 합니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의 종전합의인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제1조에서 “일본과 연합국 간의 전쟁상태는 이 조약이 발효되는 날 종식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979년 3월26일 체결된 이스라엘과 이집트간의 평화조약 제1조의 종전선언 문구도 이와 유사합니다.
이처럼 모든 평화조약이나 평화협정에서 종전선언 문구의 공통점은 “평화협정이 발효하는 날 전쟁상태가 종료된다”는 것입니다.
평화조약 체결 이전 종전선언 사례
그러면 평화조약이 체결되기 전에 종전선언부터 하는 그런 사례는 전혀 없느냐? 없는 건 아니지만은 극히 드문 예외입니다. 대표적 사례가 1956년 10월19일 모스크바에서 체결된 일·소(日·蘇) 공동선언입니다. 태평양 전쟁을 종식한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소련은 서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과 소련 간에는 그때까지 평화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아직도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는 4개 북방영토 때문이죠. 그래서 법적 종전을 하고 외교관계를 재개해야 할 현실적 필요성 때문에 평화조약에 들어갈 내용 중에 영토문제만 제외한 ‘평화조약-1’을 체결한 겁니다. 일·소 공동선언 1조도 평화조약과 똑같이 종전선언으로 시작됩니다. 명칭은 공동선언이지만은 정식조약 체결절차를 거쳐서 비준서가 교환되는 날 발효되도록 규정한 그런 법적 구속력 있는 사실상의 평화조약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예외적 사례는 1994년 7월25일 후세인 요르단 국왕과 라빈 이스라엘 총리, 그리고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공동 발표한 워싱턴 선언(The Washington Declaration)입니다. 이 선언 C항에 “요르단과 이스라엘 간 교전 상태가 종식되었다(The long conflict between the two States is now coming to an end. In this spirit, the state of belligerency between Jordan and Israel has been terminated.)”라는 그런 문구가 들어가 있습니다. 전쟁상태, state of war라고 하지 않고 교전상태, state of belligerency라는 그런 표현을 사용한 게 보통 평화조약에서 사용하는 종전선언 문구와는 조금 다릅니다.
그런데 워싱턴 선언 3개월 후인 1994년 10월26일에 요르단과 이스라엘 간 정식 평화조약이 체결되었기 때문에 이 워싱턴 선언은 평화조약 체결 의사를 천명한 정치적 선언인 셈인데 미국 대통령이 여기에 보증을 선 거죠. 워싱턴 선언으로 교전상태를 먼저 종료를 하고 평화조약으로 평화를 회복하는 2단계 접근법을 사용한 아주 특이한 경우입니다.
외교관계 수립도 종전과 평화회복을 포함
외교관계 수립이라는 것도 사실상 평화조약의 성격을 포함합니다. 1979년 미·중(美·中)수교나 1992년 한중(韓·中) 수교는 법적 종전의 의미도 포함합니다. 휴전은 법적으로 전쟁상태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휴전상태에 있는 국가와는 외교관계를 수립할 수가 없습니다. 중국이 한국, 미국과는 이미 별도의 평화조약을 체결한 거나 다름없다는 점에서 중국은 한반도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의 당사자가 될 수 없다는 북한의 주장에 틀린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한반도 종전선언이 무의미한 이유
여기까지 들어보시면 ‘문 대통령이 종전선언하자는 주장에 시비할 것도 없겠네’ 하는 그런 생각이 드시죠? 그런데 한반도 종전선언은 의미도 없고 부가가치도 별로 없습니다.
1953년 7월27일 한국전 휴전협정이 67년간 유지되어 왔으면 이게 사실상의 종전이죠. 남은 과제는 사실상의 종전을 법적 종전으로 전환할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종전선언을 해 봐야 실제로 달라지는 것은 없고 앞으로 평화협정 체결하자는 정치적 의지를 선언하는 그런 의미밖에 없습니다. 그런 걸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면 모를까 이미 평화협정 체결 의지는 여러 번 선언했지만 아직 체결이 안된 것은 서로 조건이 안 맞아서 그런 겁니다.
이미 선언한 평화협정 체결 의지를 많이 되풀이한다고 법적 종전에 가까워지는 것도 아니고 평화가 더 공고해질 그런 일도 없습니다. 당장 평화협정이 체결될 가능성이 없는 그런 상황에서는 체결하겠다는 의지를 많이 선언할수록 그 선언의 값만 떨어질 뿐입니다.
한반도 평화협정이 체결되지 못한 이유
1953년 휴전협정에서 3개월 내에 평화협정 협상을 개시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1954년 제네바 평화회담이 열렸지만은 서로 말싸움만 하다가 끝난 것 아닙니까? 1997년, 1998년에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을 위한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 참가하는 4자회담도 제네바와 뉴욕에서 여러 차례 열렸지만 아무 성과 없이 끝났습니다. 2005년 6자회담 9·19공동성명에서도 북한 비핵화의 대가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를 수립하기로 되어 있었고, 2018년 6월12일 미·북(美·北) 싱가포르 공동성명 2항도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 수립을 공약한 겁니다. 이게 평화협정을 체결하자는 정치적 의지를 확인한 것이라는 점에서 종전선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종전선언보다 북한에게 수백 배, 수천 배 가치가 있을 평화체제를 수립하기로 되어 있는데 안 되는 이유가 뭡니까? 작년 2월 미·북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김정은이 ‘비핵화는 할 생각이 전혀 없고 핵을 계속 더 만들 수 있는 합의를 하자’는 그런 황당한 제안을 갖고 나와서 북한이 평화협정 체결할 기회를 스스로 더 멀리 차버린 것 아닙니까? 그 이후 북한의 입장이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데 종전선언이 왜 지금 또 나옵니까?
북한이 제재에다가 설상가상으로 코로나와 태풍 피해까지 겪는 삼중고 속에서도 핵을 계속 만들고 있는데 종전선언을 선불로 해준다고 해준다고 핵을 내려놓고 평화가 올 것이라는 것은 잠꼬대 같은 소리입니다. 평화협정 체결해서 법적 종전을 해주고 미·북 수교도 하고 안전보장도 제공하겠다는데도 핵을 내려놓기는커녕 핵무기 증강을 중단할 생각도 없는 사람들이 법적 효력도 없는 정치적 종전선언 해준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표류해간 우리 공무원을 살해한 게 종전선언 안 해준 것 때문입니까?
문재인 정부가 종전선언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러면 문재인 정부가 왜 아무 소용도 없는 종전선언에 이토록 집착을 할까요? 종전선언이 무슨 마력을 가진 요술 방망이라는 그런 미신과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가장 큰 원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종전선언의 신통력에 대한 맹신은 어제 오늘 생긴 게 아니라 13년 전부터 드러났습니다.
2007년 10월4일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서명한 남북 정상 선언문 제4항이 종전선언에 관한 문항입니다. “남과 북은 현 정전 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 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한 달 전에 시드니 APEC 정상회의 계기에 노무현 대통령이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만나서 종전선언 구상을 논의를 했지만 부시 대통령은 ‘북한이 비핵화하기 전에는 종전선언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기 때문에 평양 선언은 처음부터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13년 전에 시도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데 대한 한(恨)과 미련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은데 미국의 입장은 바이든이 당선되더라도 바뀔 수가 없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종전선언이 그렇게 하고 싶으면 북한에다가 종전선언할 여건을 빨리 만들어달라고 독촉할 일이죠. 종전선언하는 게 내 꿈이니까 핵물질 추가 생산만이라도 좀 중단해달라고 해야죠.
북한이 종전선언에 부여하는 가치
북한도 종전선언에 문재인 정부가 생각하는 만큼 그런 엄청난 가치를 부여하는 게 아닙니다. 평화협정을 통해서 법적 종전이 이루어지면 남북간 해상 경계선을 유엔해양법협약에 따라서 결정하자고 요구할 그런 근거가 생기고 유엔사령부도 해체할 수가 있죠. 그러나 종전선언만으로는 이런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고 한국 내의 반미(反美)세력, 친북(親北) 평화지상주의 세력의 활동 공간을 넓히는 데는 도움이 좀 될 겁니다. 그것도 좋긴 하지만 북한이 목숨 걸고 매달릴 만한 그런 물건은 못됩니다.
종전선언을 대북 레버리지로 활용해야
보수진영에서는 종전선언을 해주면 큰일나는 줄 알고 결사반대하는 분들이 많은데 종전선언해준다고 대한민국이 망하거나 세상의 종말이 오는 건 아닙니다. 주한미군이 철수한다면 종전선언 때문이 아니고 그보다 더 중요한 다른 이유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데 종전선언은 북한이 여기에 부여하는 가치만큼 북한에 대해서 레버리지(leverage·타인의 자본을 지렛대처럼 이용하여 자기 자본의 이익률을 높이는 행위를 뜻하는 경제용어)가 됩니다. 앞으로 미·북간 협상이 재개될 때 협상카드로 사용하는 데 무조건 반대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종전선언을 제값 받고 파느냐가 중요합니다. 종전선언을 팔아서 북한의 핵물질 생산 중단이라도 받아낼 수 있으면 그건 대박이죠. 종전선언 내어주는 대신에 우리에게 그보다 가치있는 협상자산인 제재를 지킬 수만 있어도 손해볼 게 저는 없다고 봅니다.
천영우TV의 천영우였습니다.
정리: 李知映(조갑제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