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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변호사가 무슨 벼슬인 줄 아냐?” 엄상익(변호사)  |  2020-10-22
검사 생활을 십여 년 하다가 미국유학을 갔다 온 고등학교 후배가 있었다. 미남인 그는 재력 있는 집안의 사위이기도 했다. 그는 미국에서 돌아온 후 국내 유명 로펌에 들어가 변호사가 되었다. 그는 정치적 야망도 있는 것 같았다. 텔레비전 방송에 정치평론가로 자주 등장하는 모습을 보았다. 어느 날 그의 사무실 근처의 청국장집에 앉아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때였다.
  
  “검사를 하다가 로펌에서 변호사를 하니까 어때?”
  내가 물었다.
  
  “로펌 대표가 검사장 출신인데 아직도 머리 속은 계속 검사장이고 로펌을 검찰청으로 착각하고 있어요. 신년 하례식 때 전 직원을 네 줄로 세워놓고 단 위에 올라가서 연설문을 읽는 겁니다. 우리 로펌은 내부를 까보면 변호사들이 각자 자기가 벌어 자기가 사는 구조에요. 대표가 월급을 주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 변호사들이 왜 대표 앞에서 차렷하고 권위적인 연설문을 듣겠어요? 그 다음부터는 대표변호사가 불러도 가는 사람이 없고 지시해도 따르지 않고 늦게 출근한다고 잔소리를 해도 다들 귓등으로 흘려버려요. 변호사 집단이라는 게 검찰청하고는 전혀 달라요. 자기에게 돈이 되지 않는 이상 움직이지 않아요. 나는 부하검사 출신이니까 최소한 예의는 차려줬지만 말이에요.”
  
  머리 속이 검사장으로 계속 세뇌되어 있으면 살기가 팍팍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사실에서 피의자를 상대하다가 변호사로 고객인 의뢰인을 만난 감상은 어때? 행패를 당한 적은 없어?”
  내가 물었다.
  
  “왜 없겠어요? 지난해 한 사건을 맡았는데 의뢰인 주장이 뭔가 하면 자기가 로또복권에 당첨이 됐는데 은행 측에서 돈을 주지 않는다는 거에요. 변호사 보수는 나중에 당첨금을 받으면 많이 준다고 해서 착수금도 받지 않고 재판을 여러 차례 진행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의뢰인의 거짓말이 많았어요. 그게 점점 명확히 밝혀지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 다음부터는 그 의뢰인이 사무실을 찾아와서 행패를 부리는 겁니다. 술을 가지고 와서 그걸 마시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맥주를 사람들에게 뿌리기도 했어요. 신고해서 경찰이 데리고 가면 다음날 또 찾아오는 겁니다. 또 신고하고 그렇게 반복을 했죠. 경찰은 다음부터는 신고해도 오지도 않아요. 내가 보통의 민원인보다도 못하게 전락이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법의 보호 밖에 있는 투명인간이 되어 버린 느낌이라고나 할까.”
  
  재벌집 사위에 미국 일류 대학에 유학을 하고 날리는 검사였던 그가 인생의 계단을 내려가는 체험을 하고 있었다.
  
  “법원의 판사한테서 수모감을 당한 건 없어?”
  
  “그것도 있죠. 제가 검사를 할 때 실무교육을 받으러 온 여성 사법연수생이 있어요. 형도 알지만 도제식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제자인 셈이기도 하잖아요? 귀엽길래 밥도 사주고 열심히 가르쳤죠. 그 후 그 여성 사법연수생이 판사가 됐고 내가 변호사가 되어 맡게 된 민사사건에서 그 여판사가 담당재판장이 된 거에요. 법정에서 만나 속으로 반가웠죠. 하루는 그 여판사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하는 말이 내가 쓴 법률서류가 잘못됐다는 거에요. 그러면서 시말서를 쓰라고 합디다.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조용히 판결문에 반영하면 될텐데 자기를 가르쳤던 나에게 반성문을 쓰라는 겁니다. 참 씁쓸합디다. 얼마 후에 그 여판사가 변호사가 되어 법정에서 마주쳤는데 서로 아는 체를 안 했어요.”
  
  검사로 대접을 받다가 조직의 보호막을 벗어나 쐬는 찬바람이 차가울 것 같았다.
  
  “그 다음으로 당해 본 건?”
  “검사실을 찾아가도 따지고 보면 후배들인데 시선을 주지도 않아요. 검사실 중간에서 엉거주춤하고 어쩔 줄 모른 경우도 있어요. 그보다 더 당한 경우도 있어요. 얼마 전에 당한 일인데 한 번 들어봐요. 법원 청사 안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는데 그 앞을 지키던 직원이 신분증을 보자고 하는 거에요. 뱃지나 복장을 보면 알 텐데도 까탈스럽게 굴더라구요. 그래서 예전을 생각하고 ‘해도 너무 하시네’ 하고 한마디 하면서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더니 그 순간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양손으로 잡고 나를 보려보면서 "변호사가 무슨 벼슬인 줄 아냐"고 소리치는 거에요.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민원인들이 오히려 같은동네 사람들이 왜 그러느냐고 한 마디 도와주더라구요. 뿌옇게 닦이고 얼마나 무안했는지 몰라요. 평검사 출신인 내가 그런 수모감을 느꼈는데 검사장이나 법원장은 어떻겠어요? 요즈음 법원이나 검찰청 직원은 법원장이나 검사장이 잔소리를 하면 ‘너 몇 년 후에 나가면 보자구’ 그런답니다.”
  
  “그래서 구름 위에서 살다가 시장 바닥에 떨어져 헤맨 소감의 결론은 어떤 거야?”
  내가 물었다.
  
  “우리 시절만 해도 고시라는 게 신분 상승의 도구였잖아요? 검사라는 데 대해 사회의 턱없는 대접에 내가 우쭐하고 취했었죠. 이제 뭔가 알 것 같아요. 그래도 형이나 나는 정말 감사해야 할 것 같아요. 고시낭인이 뭡니까? 대학 때 법률교과서를 평생 공부하는 거니까 나이가 사오십이 되도 계속 대학생인 셈이죠. 젊은 시절 형이나 나는 고시에 합격했지만 거의 대부분은 실패한 채 사회의 하수구에 휩쓸려 들어가 버렸잖아요? 고시 낭인들은 사회적응력도 없기 때문에 취직도 못했죠. 솔직히 그 사람들과 우리가 무슨 차이가 있어요? 백지 한 장 차이도 안되는 거에요. 법조문을 좀 안다는 게 무슨 큰 지식이고 지성이겠어요? 그래도 아직까지 우리는 지성인 취급을 받잖아요? 나는 머리 속에 꽉 들어찬 그동안의 정신적 찌꺼기들을 털어버리고 밑바닥으로 겸손하게 내려가려고 하는데 잘 안될 때가 많아요. 검사 대접을 받았던 게 뇌 속에 전족을 채운 거 같아.”
  
  그는 몸으로 확실하게 진리를 배운 것 같았다.
  
삼성전자 뉴스룸
  • 골든타임즈 2020-10-24 오전 6:12:00
    대통령은 국민의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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