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가 나폴레옹을 내려다본 곳에서
파리는 다 좋은데 소매치기가 많고 택시가 문제이다. 파리 북역에 내릴 때부터 긴장 상태로 들어간다. 승객들의 앞을 경찰이 막고 예방접종증명서 검사를 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발급한 증명서엔 바코드가 없어 서류의 영문을 보여주면서 설명했더니 통과시켜주었다. 네덜란드와 달리 프랑스에선 앵발리드(군사 박물관), 팡테옹 등에 들어갈 때 접종증명서를 보여야 했다. 15일 뒤 스당에 갔을 때는 식당에서도 검사를 했다.
올해는 나폴레옹이 센트헬레나 섬에서 죽은 지 200주년이 되는데 나는 브뤼셀 근교의 워털루를 다녀온 연장선상에서 그의 유해가 안치된 앵발리드를 찾았다. 200주년 전시가 진행중이었다. 나폴레옹의 유해는 죽은 지 19년이 지난 1840년에 파리로 돌아왔고 그 21년 뒤 앵발리드의 돔 교회에 안치되었다. 인물의 크기에 맞는 장엄한 석관과 회랑을 돌면서 히틀러를 생각했다.
미술가를 꿈꾸었던 그는 비엔나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면서 미술대학에 두 번 입학시험을 쳤으나 낙방했다. 그때 합격시켜주었더라면 역사가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 2차 세계대전이나 유대인 학살은 필연적인 사건이 아니라 히틀러의 개인적인 야망과 편견에서 비롯된 면이 훨씬 크다. 아르덴느 돌파전으로 세계최강으로 평가받던 프랑스군의 항복을 6주 만에 받아낸 직후, 1940년 6월28일 새벽, 그는 알버트 슈페르(건축가, 뒤에 군수장관) 등 건축 전문가들을 데리고 비행기로 파리 근교에 도착, 3시간 파리 관광을 하고 돌아갔다.
파리 오페라 하우스 내부를 구경하면서 히틀러는 늙은 안내인에게 “여기 있던 살롱은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놀란 안내인은 “몇 년 전 개조를 하면서 없앴다”고 했다. 떠날 때 히틀러는 부하를 시켜 50마르크를 팁으로 주려고 했는데 안내인은 두 차례 거절했다. 만약 이때 이 돈을 받았더라면 그의 이름은 역사에 남았을 것이다. 히틀러는 앵발리드에 와서는 나폴레옹의 석관을 내려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고 한다.
히틀러가 존경한 인물이 셋이라고 한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2세), 나폴레옹. 나폴레옹은 예나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무찌른 직후인 1806년 10월26일 포츠담의 프리드리히 대왕 무덤을 참배, 관 앞에서 생각에 잠겼었다고 한다. 히틀러는 나폴레옹 석관을 바라보더니 “아들 무덤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나폴레옹이 조세핀과 이혼하고 오스트리아 공주 마리아 루이즈와 재혼, 태어난 아기는 나폴레옹에 의하여 아기 때 로마왕으로 임명되었다. 1815년 6월18일, 워털루 전투에서 진 나폴레옹은 퇴위하면서 아들을 나폴레옹 2세로 임명했으나 연합군이 파리를 점령, 이를 무효화시켜버렸다. 오스트리아 궁전으로 돌아간 아들은 장교가 되었지만 20대에 요절, 비엔나에 묻혔다. 히틀러는 그의 유해를 앵발리드로 옮겨 아버지 곁에 묻어주라고 명령했다.
히틀러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잘하는 식으로 에펠탑, 팡테옹, 개선문, 몽마르트 언덕을 번개처럼 구경하고는 돌아갔다. 슈페르는 히틀러가 팡테옹의 장엄함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자신의 회고록 ‘제3제국의 내막’에 썼다. 난생 처음의 파리 구경에 히틀러는 감격, “오늘은 내 생애 최고의 날이다”고 털어놓더라고 했다. 독재자의 의외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슈페르는 연민의 정을 느꼈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한때 파리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베를린을 근사하게 지을 구상을 한 적도 있다는데 다음 날 슈페르를 불러 “베를린에 대건축물을 지어 파리를 베를린의 그림자로 만들어버리자”고 했다.
파리를 관광할 때가 히틀러 절정의 순간들이었다. 숙적 프랑스는 무너지고, 영국만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영국이 휴전 제의를 하지 않자 괴링의 공군 공습으로 굴복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히틀러는 영국이 휴전을 제의하지 않는 것은 미국과 러시아에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 소련 침공작전(바바로사)을 준비한다. 히틀러는 인생 최고의 순간, 그 앵발리드에서 자신도 나폴레옹처럼 결국은 영국, 러시아 때문에 망할 것임을 몰랐을 것이다.
우버 덕분에 편했다
파리 북역에서 내렸을 때 역전의 택시를 타려고 했더니 인상이 좋지 않은 운전자가 40유로를 불렀다. 거절한 나는 우버 앱을 켰다. 루브르 박물관 근처의 예약된 호텔을 눌렀더니 요금은 8유로, 5분 만에 도착하며, 차량은 아우디라는 표시가 나왔다. 파리 지하철이 편리하긴 하지만 시간을 아끼려고 거의 우버를 이용했다. 브뤼셀에서보다 요금이 쌌다. 우버 요금은 시간, 장소, 수요 공급에 맞춰 유동적으로 정해진다. 스위스의 알프스 산중도시를 빼고는 다 우버 이용이 가능했다. 부른 차량의 이동상황이 실시간으로 표시되고 요금은 자동으로 결제되니 마음이 편했다.
계획한 것은 아닌데, 나는 2박3일간 히틀러가 다녔던 코스를 가게 되었다. 특히 마지막에 본 팡테옹은 장대했다. 명사들의 공동묘지처럼 운영되는데 볼테르, 루소, 에밀 졸라와 빅토르 유고의 무덤은 같은 방에 있고, 장 조레스, 앙드레 말로, 퀴리 부부 등 친숙한 이름들이 카타콤 같은 지하를 채우고 있었다. 팡테옹에서는 지구 자전(自轉)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팡테옹 중앙 돔에서 늘어뜨려진 67m의 줄에 달린 28kg의 쇠공 ‘푸코의 진자(振子)’가 지구의 자전 반대 방향으로 흔들리면서 돈다.
파리의 센강변 한국전 참전 프랑스 대대 기념비도 참배했다. 290여 명의 전사자 이름(배속되어 전사한 한국군 병사 이름도 포함)이 새겨져 있는데 프랑스군 전사상률은 약 30%나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자, 공수부대, 외인부대 출신 등 베테랑이 많이 참전했고 지평리 전투 등 중공군의 대공세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던 때문이라고 한다. 그때 프랑스는 전쟁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월남에서 호지명 군대와 싸울 때인데 정예부대를 파병까지 해주었다니! 파리의 지하철역과 거리 이름엔 레지스탕스 희생자들을 포함, 애국자들과 프랑스를 도운 프랭클린 루즈벨트 등 외국인 이름이 많이 붙어 있다. 기차역으로 가는 우버 택시를 불렀더니 한국인 기사였다. 여행가이드를 하다가 할 일이 없어 우버를 몰게 되었다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파리의 지하철역 이름과 거리 이름만 알아도 프랑스 역사를 이해하게 됩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고마움을 표현하는 데도 예술적이에요.”
뉴욕을 빛내고 있는 자유의 여신상(철골은 에펠이 만들었다)은 프랑스가 미국 독립 100주년을 맞아 선물로 보낸 것이다. 팡테옹, 엥발리드 등 많은 건축물이 천재와 영웅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좌우로 갈라져 살벌하게 싸우고 1871년엔 그 화려한 파리 시내에서 시가전을 벌여 3만 명이 죽은(파리 코뮌 사건), 좌우 이념갈등의 정치를 이어가는 나라이지만 인물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감사의 표시를 멋있게 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사르코지 대통령의 한 업적으로 앵발리드 군사박물관에 드골 전용실을 만든 것을 꼽기도 한다. 드골이 살았을 때는 그렇게도 못살게 굴던 프랑스인들이다. 오죽하면 프랑스를 두 번 구한 드골도 ‘치즈 종류가 200개 넘는 나라를 다스리는 건 정말 어렵다’고 말했겠는가?
프랑스의 드골과 서독의 아데나워가 주도한 두 원수 나라의 화해는 오늘날 EU의 기초가 되었다. 샬레마뉴, 카를 5세, 나폴레옹, 히틀러가 무력으로 이루려 했지만 실패했던 유럽통일은 두 老정치인의 위대한 지도력에 힘입어 EU로 성사되었고 덕분에 나는 한국보다도 더 마음 편하게 확진자가 국민의 10%나 되는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등을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통치자 카를 5세와 브뤼셀
16세기 브뤼셀을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었던 카를 5세는 나라마다 호칭이 다르다. 독일어로는 카를(Karl) 5세, 네덜란드어론 카렐(Karel) 5세, 이탈리아에서는 카를로 5세, 스페인에서는 카를로스 1세, 영어권에선 찰스(Charles) 대제(大帝)로 표기된다.
그는 아라곤 왕국(바르셀로나 주변)과 카스티야 왕국(마드리드 주변)의 트라스타마라 왕가, 부르고뉴 공국의 발루아-부르고뉴 공가(公家),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속자로서 중유럽과 서유럽 그리고 남유럽을 넘어 아메리카 대륙과 필리핀 등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재위 기간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그의 후계자 앙리 2세를 상대로 이탈리아 전쟁에 집중, 많은 전비(戰費)를 소모했다. 카를 5세에게 밀라노와 프랑슈콩테를 빼앗긴 프랑수아 1세는 이슬람 세계의 종주국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었다. 오스만터키의 쉴레이만 대제는 1526년에 헝가리 왕국을 정복하고 1529년에 비엔나를 포위하였으나 점령에 실패했다.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1555년부터)을 다 물려받아 다스린 그는 최초의 스페인 국왕으로 여겨진다. 1556년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신성로마제국을, 아들 펠리페 2세에게는 스페인 왕국을 물려주고 퇴위하였다. 1618~1648년 독일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신구교 대결의 30년 전쟁 때도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는 신교도 편에 서서 구교 편인 합스부르크 세력과 싸웠다. 종교보다는 국익을 앞세운 점에서 근대적이라고 할 만하다.
플랑드르 지방의 중심도시 겐트에서 태어난 카를 5세는 1515년 브뤼셀의 쿠덴베르그 궁의 접견실에서 섭정으로부터 부르고뉴공(公)의 직위를 인수, 저지대(지금의 네덜란드-벨기에 일대)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40년 뒤인 1555년 같은 방에서 스페인 왕위를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넘겨주고 은퇴한다. 이때 남긴 퇴위사(退位辭)는 문무왕의 유언을 연상시킬 정도로 담백하고 겸손하다. 프랑스, 영국을 제외한 유럽의 거의 전역과 아메리카 식민지를 거느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란 찬사를 받았던, 역대 최강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그의 숨결은 18세기에 불탄 이 궁전의 지하시설(박물관)에서 느낄 수 있었다.
불탄 궁전터에 재건한 궁전은 1830년에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벨기에 왕국의 궁전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걸어서 한 30분 거리에 아담한(유럽의 대성당 기준으로) 성 미카엘-구둘라(聖女) 성당이 있다. 카를 5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된 1519년에 준공되었다. 성당 안에는 카를 5세 부부를 그린 약 500년 전 스테인드글라스가 남아 있다.
1537년 올리(Bernard Van Orley)의 그림을 안트워프의 유리공예가 얀 핵(Jan Haeck)이 작업한 것이다. 황제와 황비가 성물(聖物)을 찬양하는데, 두 사람의 수호성인인 샬레마뉴와 헝가리의 성녀 엘리자베스가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다.
1555년 10월25일에 있었던 카를 5세의 퇴위식은 ‘브뤼셀의 퇴위’로도 불리는데 기록이 정확하다. 그는 자신의 고문 어깨에 기대어 울먹이면서 이렇게 말했다(요지).
“내가 황제가 된 것은, 오로지 오스만터키로부터 가톨릭 세계를 수호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 목적을 거의 달성하였을 때 프랑스 왕과 독일의 몇 사람이 나를 공격하기에 할 수 없이 무기를 들어야 했다. 고백하건대 내가 알고도 정의롭지 못한 일을 한 적은 없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면 고의로 한 것이 아님을 알아주길 바라며 그런 일을 당한 이들이 여기 있다면 용서를 구한다.”
그는 퇴위사에서 변혁의 시기에 얼마나 많은 곳을 돌아다녔는지를 설명했다. 네덜란드에 열 번, 이탈리아에 일곱 번, 프랑스에 네 번, 잉글랜드에 두 번, 북아프리카에 두 번. 그는 “나의 생애는 긴 여행이었다”고 술회한다. 이 말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남긴 “인생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라는 명언과 통한다.
알찬 도시 겐트
다음 해 그는 스페인과 그 관할지(시칠리아, 나폴리 왕국, 밀라노 공국, 네덜란드 등) 및 식민지(남아메리카, 필리핀 등)를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넘기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는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인계한 뒤, 배를 타고 스페인으로 가서 수도원으로 은퇴하였다. 티치아노의 그림에 둘러싸여 통풍을 앓으면서 말년을 보내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1518년 9월21일 58세에 죽었다. 아내 이사벨라가 죽을 때 쥐고 있던 십자가를 쥔 채였다. 자신과 아내를 묻을 수도원의 창설을 유언으로 부탁했다. 펠리페 2세는 마드리드 근교에 엘 에스코리알이라 불리는 장대한 수도원을 짓고 예배당 지하에 가족묘당을 만들고 부모의 유해를 모셨다. 무거운 느낌의 이 석조 건물은 스페인의 다른 화려한 궁전이나 성당과는 건축양식이 다르다.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했던 근엄한 펠리페 2세가 이 수도원을 궁전으로도 사용해서 그런지 합스부르크 왕조의 뿌리인 독일적 분위기다.
카를 5세가 태어난 겐트는 브뤼셀에서 자동차로 북쪽으로 달려 한 시간 만에 도착했다. 벨기에 북쪽은 플랑드르 지방인데 상공업과 국제무역의 발달로 중세 때부터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였다. 브뤼헤, 겐트, 안트워프가 플랑드르의 중심도시로서 지금도 충실하고 성숙한 느낌을 준다. 카를 5세의 그림자가 아직도 짙게 드리워져 있는데 좋은 모습으로서이다.
흥미로운 점은 샬레마뉴, 카를 5세, 나폴레옹, 히틀러가 유럽 정복의 야망을 펼치기 위하여 벨기에 및 그 인근 지역을 중심에 두거나 결전장(워털루, 아르덴느 등)으로 삼았다는 점이다(샬레마뉴의 프랑크 왕국 수도는 브뤼셀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거리인 독일의 아헨, 그곳 9세기 성당에 무덤이 있다). 그런 브뤼셀에 세계에서 가장 큰 국가연합체 EU와 이를 무력(武力)으로 보호하는 세계 최대의 군사동맹체 NATO의 본부가 있다는 것이 우연일 수가 없다.
겐트는 13~16세기엔 인구 약 6만으로 안트워프와 함께 알프스 북쪽 유럽에선 파리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겐트 중심지에 있는 생바보(Bavo) 성당과 종탑, 성 등의 규모는 큰 나라의 수도에나 있음직할 정도이다. 운하 크루즈를 타 보면 베니스보다 깨끗하고 정돈되어 있다. 중세의 공장, 창고, 거래소, 은행 건물들이 즐비한데(유네스코 문화유산) 지금도 ‘부티’가 난다. 지난 7월 말엔 코로나를 비웃듯이 관광객으로 붐볐다. 겐트 대학교는 세계 100대 대학에 꼭 끼는 명문인데 인천 송도에 글로벌 캠퍼스를 열었다.
이 도시엔 카를 5세의 동상이 많다. 그의 탄생지임을 주장하여 도시 정체성의 일부로 삼으려 한다. 겐트의 상인들은 1539년 카를 5세에 저항, 반란을 일으켰다가 이듬해 스페인에서 프랑스를 거쳐 달려온 카를 5세 휘하 5000명 군대에 간단하게 진압되었다. 카를 5세는 주모자 수십 명을 처형한 뒤 다른 수백 명의 동조자에겐 좀 웃기는 벌을 주어 당시 수준으론 온건하게 처리하였다. 동조자들(주로 상공업자)이 내복차림으로 목에 교수용(絞首用) 밧줄을 걸고 나와 목숨을 구걸하도록 한 것이다.
역사의 현장에서 만나는 카를 5세는 교양인이고 너그러운 사람으로 느껴진다(물론 그가 지휘한 1527년의 로마 약탈은 주로 독일 용병들에 의하여 자행된 대규모 학살이었다). 1521년 3월 신성로마제국 의회를 직접 주재, 마르틴 루터를 불러 신문하고 풀어주는 장면은 그럴 수밖에 없는 정치역학과는 별도로 역사의 명장면이다. 스페인의 이슬람 시절 고도(古都) 코르도바에 가면 메조키트라 불리는 이슬람 대사원이 있다. 이곳을 수복한 기독교 세력은 이 희대의 건축물을 훼손, 한가운데 구멍을 내고 성당을 세웠다. 성당, 모스크, 시나고그가 공존하는 건물인데(그래서 더욱 빛난다), 스페인 왕이 된 다음 이곳을 둘러본 카를로스 1세(카를 5세)는 관리자를 불러 “당신들은 세계에서 가장 희귀한 건물을 망쳐버렸군”이라고 개탄했다고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