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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네덜란드의 해양정신과 만난 李承晩 코로나와 같이 살기로 작심한 유럽 종횡무진, 45일간 여행기! (下) 趙甲濟  |  2021-09-18

 안트워프는 한때 세계 최대의 무역항

 

 제2차 세계대전 역사를 읽어보면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이 안트워프 항구를 확보하는 데 사활을 거는 장면이 나온다. 브뤼셀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안트워프의 부침(浮沈)에도 카를 5세가 있다. 16세기 전성기엔 런던을 능가하는 유럽 최대의 무역항이었다. 대항해 시대를 맞아 번영, 알프스 북쪽에선 파리 다음으로 큰 도시가 되었다. 그때 인구가 약 10만. 세계 무역의 약 40%가 이곳에서 이뤄졌다고 한다.

 

 지금도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 이어 유럽 제2위의 물동량을 자랑한다. 프랑스에서 발원한 스켈트강이 이 도시를 거쳐 북해로 들어간다. 인구는 약 50만 명으로 브뤼셀 다음이지만 네덜란드어권의 중심으로 권위가 있다. 안트워프는 1894년에 세계 박람회를, 1920년엔 하계올림픽을 주최했다. 상공업과 무역으로 중세 유럽에서 가장 잘 살았던 플랑드르 지역의 중심이었다는 권위가 배어 있는 도시이다. 광장엔 화려한 시청, 길드 하우스, 성당이 있고, 세계 최대의 다이어몬드 가공센터가 있다.

 

 이웃한 브뤼헤 항구가 토사로 막히는 바람에 그곳의 상인과 상사(商社)들이 안트워프로 옮긴 게 번영의 원인이었다. 포르투갈, 스페인이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인도로 진출해 향료, 은(銀), 원당(原糖), 원광(原鑛)을 수입하여 안트워프로 가져와 상품으로 만들어 독일, 영국, 프랑스 등으로 팔기 시작하면서 발전했다. 안트워프-브뤼헤-겐트를 중심으로 한 플랑드르 지방은 오랫동안 모직 섬유산업 등이 발달, 식민지 개척에 따른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제도와 인력을 갖추고 있었다. 은행과 상품거래소(세계 최초), 법치와 자유가 있었다. 영국, 베니스, 제노바가 투자했고, 16세기엔 개신교도와 유대인들이 많이 몰려와 상공업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네덜란드는, 16~17세기, 합스부르크 왕조의 스페인 지배를 받다가 펠리페 2세가 신교도들을 탄압하자 봉기하여 80년 전쟁으로 불리는 독립운동의 대격변으로 휩쓸린다. 1576년 스페인 군대가 안트워프의 개신교 세력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7000명을 학살하고 800채의 집을 불태웠다. 1578년부터 7년간은 개신교도들이 이 도시를 장악, 노트르담 대성당의 예배를 금지하고 예술품들을 약탈하기도 했다. 1585년 스페인 세력은 안트워프를 탈환, 개신교도들을 추방했다.

 

 이들은 신생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이주, 안트워프는 쇠락하고 암스테르담이 세계 무역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나중에 프랑스의 개신교도인 위그노도 구교세력의 탄압을 피하여 네덜란드로 피난, ‘더치 황금기’를 여는 데 기여한다. 개신교도와 유대인들은 상공업에 특출한 능력이 있어 이들이 많이 사는 나라와 도시는 발전하였다.

 

 유대인들이 많이 사는 안트워프는 세계 다이아몬드 가공 부문에서 단연 1등이다. 16세기 아프리카, 인도 등에서 포르투갈 상인들이 가져온 원광을 가공해 비싸게 팔기 시작한 것이 계기였다. 수만 명이 지금도 이 분야에 종사하고, 연간 거래액은 수백억 달러 규모에 달한다.

 

 네덜란드 독립전쟁 80년을 정리하는 1648년 뮌스터 조약으로 안트워프는 북해로 난 스켈트강 사용이 금지되어 국제항구로선 쇠락한다. 지금 벨기에 지역은, 네덜란드 지역과 함께 스페인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하다가 중도퇴장했다. 끝까지 싸워 공화국으로 독립한 네덜란드와 달리 스페인과 타협, 그 지배를 수용한 것이다. 그런 변절에 대한 보복을 받은 셈이다.

 

 스페인에 이어 오스트리아 지배를 받던 벨기에 지역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프랑스로 넘어간다. 1792년 프랑스 국민군이 쳐들어와 병합한 것이다. 나폴레옹은 안트워프의 노트르담 성당에 있던 루벤스의 그림을 파리로 가져가는 한편 안트워프를 재건하여 런던과 대항하려고 도크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마무리하지 못했다. 지금의 벨기에 지역은 1815년 이후 네덜란드에 병합되었다가 1830년의 혁명으로 분리, 독립하여 벨기에 왕국이 되었다.

 

 이때 네덜란드가 진압군을 보내려 했으나 프랑스가 벨기에 독립을 지지, 좌절시켰다. 네덜란드는 독립선언 이후 다시 군대를 보냈으나 프랑스군이 막았다. 네덜란드는 안트워프 요새에는 계속 군대를 배치, 도심을 감제하고 있었으나 1832년 프랑스군은 이 요새를 포위, 항복을 받았다.

 

 벨기에는 독립 이후 중립을 선언했으나 제1·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를 점령하려는 독일군의 진격통로가 되어 공격과 지배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립을 포기, NATO와 EU 설립에 적극적으로 참여, 두 기관의 본부를 브뤼셀에 유치했다.

 

 네덜란드 이야기

 

 벨기에와 네덜란드는 일란성(一卵性) 쌍둥이 같은 나라이다. 플랑드르 상공업 지대를 공유하였고 부르고뉴 공국 및 스페인의 지배를 같이 받았다. 16세기 개신교도들과 상공업자가 중심이 되어 스페인을 상대로 독립투쟁을 벌인 점도 같다. 그러나 16세기 말 가톨릭 신도들이 많이 사는 벨기에 지역 사람들이 독립투쟁을 포기하고 스페인과 타협, 그 치하에 남기로 결정하여 운명이 달라진다. 네덜란드는 독립투쟁을 끝까지 밀어붙여 네덜란드 공화국을 세우고 17세기를 ‘네덜란드의 세기’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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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셀 개선문

 

 벨기에에서 네덜란드로 넘어가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브뤼셀에서 평야를 자동차로 달리면 2시간 만에 암스테르담이다. 브뤼셀의 화려하고 장대한 건축물과 암스테르담의 실용적이고 질박하고 절제된 건축물이 대조적이다. 벨기에는 독립한 이후 국가상징물을 크게 지었다. 언덕에 있어 브뤼셀의 스카이라인을 독차지하는 ‘정의의 궁전’은 법원종합청사인데 건축 당시 세계 최대 사무용 건물이었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만든 개선문, 지금은 아프리카 박물관으로 쓰이는 레오폴드 2세의 궁전 등은 이 나라가 독립한 뒤 네덜란드를 의식하여 국력을 과시하려 했구나 하는 강박관념 같은 것을 느낀다. 뒤늦게 식민지 경쟁에 뛰어든 레오폴드 2세는 벨기에의 80배나 되는 아프리카 콩고를 식민지(사실은 사유지)로 만들어 상아 고무를 수탈하는 과정에서 수백만 명의 토착민들을 학살했다.

 

 네덜란드는 17세기에 이미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이자 다국적 기업인 동인도회사를 만들어 아프리카, 인도, 인도네시아, 대만, 일본, 북아메리카로 진출해 해양제국을 건설, 세 차례나 영국과 큰 해전을 치르면서 암스테르담을 세계 무역의 중심지로 키웠다. 종교의 자유를 쟁취한 이후엔 통상의 자유를 확보, 지구를 좁게 만든 해양문화권의 선두주자, 그 분위기를 집약한 곳이 바닷가에 지은 해양박물관이다.

 

 해양문화권의 본질을 포착한 이승만의 박사논문

 

 17세기의 네덜란드를 지도하였던 장군 정치가들의 초상화는 박력에 넘친다. 갑옷을 입은 검은 복장의 인물들이 금방 화폭에서 튀어나올 것 같다. 오직 바람과 지도에 의지하여 바다로,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전쟁의 나날들을 보내던 시절의 패기, 바로 이 시대의 분위기를 ‘야경(夜警)’이란 집단 초상화에 담은 화가가 렘브란트였다. 17세기 네덜란드 사람들이 세계를 누비게 만든 원동력은 무역에 의한 돈벌이였다. 이들은 위대한 장사꾼이었을 뿐 아니라 싸움꾼이었다. 베니스와 같은, 그러나 더 큰 상무(商武) 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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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해양박물관 17세기 지도책에 나오는 조선

 

 네덜란드 사람들이 세계를 누비면서 수집한 것들과 남긴 기록들 가운데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수많은 지도였다. 이 지도에 조선이 등장한다. 조선 지배층이 위선적 명분론으로 불러들인 전쟁(병자호란)의 후유증으로 허우적거리면서 200년간의 자폐증으로 들어가려던 바로 그 시기에(조선이 해양세력 앞에 노출되었다는 것도 모르고) 용맹한 네덜란드인들은 조선과 일본을 손바닥에 놓고 저울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양박물관을 나와서 구글 검색을 하여 이승만(李承晩)이 1910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논문으로 쓴 ‘미국에 의하여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uenced by the United States)을 원문으로 읽어보았다. 번역서로 읽었던 느낌과 많이 달랐다. 전쟁이 많은 유럽의 역사를 관통하는 원리를 포착하고, 특히 통상의 자유와 전시(戰時) 중립의 문제를 논문 주제로 삼은 것은 그가 해양문화의 본질에 접했다는 뜻이다. 격조 높고 유려한 영문은 유럽 역사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한 자신감의 자연스러운 표현일 것이다.

 

 이 논문 서두에 17세기 네덜란드의 대표적 인물이자 국제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휴고 그로티우스가 등장한다. 미래의 건국 대통령이, ‘전쟁과 평화의 법’을 써 국가간의 질서에도 인간세계에 적용되는 것과 같은 자연법의 이상을 심으려 했던 그로티우스를 이해하였다는 것은 네덜란드가 선도한 해양문화의 본질을 파악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박사논문을 쓰면서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진로를 서구 중심의 해양문화권에 묶어야 한다는 확신을 다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1952년 평화선을 선포할 때 이를 뒷받침한 해양법적 이론도 이때 싹이 텄을 것이다. 17세기 조선은 난파한 동인도회사 선원 하멜 일행을 잡아놓고도 네덜란드에 대한 그 어떤 정보 수집에도 관심이 없었지만 이들이 탈출, 나가사키에 도착하자 일본의 막부 관리들은 상세한 신문기록을 남겼으며 하멜은 귀국, 조선을 소개하는 표류기를 썼다. 이승만은 그로티우스를 통하여 네덜란드의 17세기가 인류사에 던진 화두(話頭)를 잡아채어 대한민국 발전 방향을 정립하는 데 이용하였으리란 것이 나의 시각(視覺)이다. 그 중심 개념은 ‘자유’였을 것이다. 국민들에게 자유를 주면 나라가 활기차게 되고 부국강병은 저절로 따라온다는 확신, 조국을 떠나면 조국이 제대로 보이기도 한다.● (끝)

 

 

유럽 역사 메모

 

: 유럽 여행을 많이 하면서 생각해두었던 관점을 정리해본다.

 

 1. 5세기 西로마의 멸망 이후 유럽의 군사 정치적 주도권은 게르만족의 세상인 알프스 북쪽으로 옮겨간다.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영국, 스웨덴, 러시아 같은 나라들의 각축전이 펼쳐진다. 2021년 유에스엔드월드리포트 연례 세계최고국가 종합랭킹 20大 국가 중 13개국은 게르만족이 압도적인 북유럽 및 그 계통이다. 4개국은 동아시아의 유교한자문화권, 3개국은 라틴계열이다. 13개국 중 12개 나라는 개신교가 주류이다.

 

 2. 5세기 이후 유럽의 거의 모든 왕가(王家)는 게르만족 계통이다. 이는 유럽의 지배민족이 게르만족으로 교체되었다는 뜻이다. 그들이 5세기 이후 지금까지 1500년간 세계사의 주역을 연기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뛰어난 체력, 정신력, 무엇보다도 법치 정신이 요인이다.

 

 3. 30년 종교전쟁을 끝낸 1648년 웨스트팔리아 조약이 오늘의 유럽 국경선을 거의 결정하기 전까지, 즉 근대 국민국가가 등장하기 전까지 유럽의 국가, 공국, 영지 등은 왕이나 귀족의 사유물이었다. 사고팔고 선물도 했다. 한국인들이 유럽 역사를 이해하는 데 가장 장애가 되는 대목이다.

 

 4. 유럽에선 독자적 언어를 가진 나라들이 거의 예외 없이 국민국가를 만들었다. 언어가 동족(同族) 의식을 낳고 이것이 국가건설로 이어지는 구조이다. 언어의 질과 양이 그 나라의 수준이 되기도 한다.

 

 5. 영국의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은 유럽이 세계사를 선도하게 된 이유로 여섯 가지 요인을 꼽았다. 경쟁, 과학, 사유(私有)재산권, 의료, 소비자 사회, 근로윤리. 맨 앞에 나오는 경쟁은 전쟁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전쟁은 국가 공국 백작령 등 정권의 수와 비례하는데 15세기엔 유럽에 산재한 여러 형태의 정권이 200개에 육박했다고 한다. 우랄산맥에서 피레네산맥까지는 평야이다. 전쟁을 막을 산과 사막, 큰 강이 없었다. 수많은 전쟁이 과학과 기술, 행정제도, 상공업 발전, 그리고 외교술과 국제법의 동인(動因)이 되기도 했다.

 

 6. 르네상스-종교개혁-산업혁명-해외식민지 개척-민주화로 이어져 온 유럽 역사의 흐름에서 도전자는 훈, 마자르, 몽골, 맘루크, 오스만터키 등 아시아의 유목기마민족과 이슬람 세력이었다. 1683년, 오스만터키의 비엔나 2차 포위를 마지막으로 이들의 공세는 꺾여버린다. 이는 말과 활을 주(主)무기로 한 기마군단 세력이 대포와 배를 앞세운 해양세력에 굴복한 것을 의미한다.

 

 7. 지난 1500년간 유럽통합의 꿈을 밀어붙였던 인물은 네 명인데 실패했다. 서기 800년 전후의 프랑크 왕국 샬레마뉴, 16세기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 19세기 초 프랑스의 나폴레옹, 20세기의 히틀러. 히틀러와 나폴레옹은 영국과 러시아를 공격했다가 망한 점에서 같다. 다섯 번째 통합 시도는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와 서독의 화해를 기반으로 한 EU 설립으로 성공했다.

 

 

 

삼성전자 뉴스룸
  • 맑은마음1 2021-09-28 오후 12:31:00
    좀 뜬금없지만 수년전 꼭 이맘때 황금연휴 연이어 있을 때 최대한 활용하고자 막둥이 중3아들(현재는 대1)과 둘이 부자 여행으로 캐나다 미국 서부 대자연 명소들을 17일간 마음껏 돌아다닌 때가 기억난다. 어린 아들에게 좀더 넓은 세계를 보여 줄 생각으로... (벤쿠버, 록키산맥, 라스베가스, 그랜드캐니언 등 3대캐니언, 데쓰밸리, 요세미티, 샌프란시스크, 스탠포드대, 실리콘밸리 등 코스로. 특히 텐트 야영도 활용)
    마지막 날 귀국 비행기에서 감회가 깊어 습작시를 하나 지었는데 아래와 같다. 누군가에게 참고되길 바라며...

    록키산맥에 올라

    어린 아들 손을 잡고 록키산맥 올라 보니
    장엄한 태산 준령 눈앞에 펼쳐지네
    인간의 때묻은 마음 모두 씻겨지는 듯

    산을 향해 눈을 들어 천하 절경 둘러본다
    이 천지 대자연을 지으신 이 누구신가
    나의 주 하늘 아버지 여호와의 걸작품

    록키산맥 험산준봉 깊은 계곡 맑은 호수
    휘트먼이 여기 있고 소로우가 저기 있어
    꿈엔들 어찌 잊으리 청록 호수 머레인

    여산의 진면목 누가 알 수 없다 했나
    록키산맥 참 모습 나 또한 알 수 없네
    천년 전 소동파 싯구 깊은 뜻이 놀라와

    한 백년 인간의 몸 천지 간에 한 점일뿐
    거듭난 맘과 영은 태산보다 크고 깊어
    잠잠히 하늘 우러러 거룩한 뜻 품으리

  • 맑은마음1 2021-09-28 오후 12:21:00
    조갑제닷컴을 근래 자주 보게 되는데 배울 점이 무척 많다. 이번 여행기도 그렇다. 혹자는 이 엄중한 시기에 여행이나 다니나 힐난하기도 하지만 꼭 그렇게 볼 일은 아니다. 여행은 살아있는 독서이고 더군다나 좁은 땅에 웅크리고 좁은 눈으로 모든 사안을 보는 것보다 넓은 세계를 두루 보고 생생히 경험한 사람이 아무래도 안목이 있고 더 지혜롭고 분별력이 뛰어난 법이다. 자신이든 자식이든 일부러 돈을 들여서라도 여행을 하는 것은 돈 이상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조갑제대표께서는 그야말로 인터넷 디지털 시대를 마음껏 잘 활용하는 것 같다. 국내 있을 때나 해외 있을 때나 조갑제닷컴은 훌륭하게 잘 돌아가고 있으므로.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개선문이 젊은 때에 두어 번 본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과 거의 같아 놀랍고 건축 시기가 비슷할 거로 생각된다. 베를린의 개선문은 아주 장대하고 독일 최고의 역사적 명소이기도 한데, 파리의 개선문은 상층부에 청동기마 상이 없다.
    *이승만이 조지워싱턴대, 하버드대, 프린스턴대에서 공부한 당대 최고의 인물인데,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 네델란드의 인물과 관련 있다니 놀랍다. 추후에 한번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다.
  • bestkorea 2021-09-25 오전 10:18:00
    Thanks again Mr. ChoGapje for sharing your precious experiences.

    I'm learning and enjoying a lot through your travel.
    Because I'm getting historical facts and cultures that
    I didn't know when I traveled to the places you went.

    So I feel more fun and happy when I read your travel stories.
    Because I've been to most of the places you talk about.

    The 17th-century map of the Amsterdam Maritime Museum
    you introduced reminds me of an ancient marine map
    I saw at the National Museum there 30 years ago
    when I traveled to Tunisia.

    At that time, there was a German family there,
    and the father explained to his children while looking
    at an ancient marine map.

    While thinking about the scene from time to time,
    I knew that the history and education of Western white people,
    especially Germanic descendants, were very different from Korea.

    Thanks. Have a nice tr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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