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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행이야기
傭兵들의 피로 세계 최고의 국가를 일군 스위스 코로나를 뚫고 종횡무진 45일-네덜란드·스위스(2) 趙甲濟  |  2021-10-28

히딩크의 知性
 

히딩크 감독. 사진=조선DB

  2004년 3월 나는 상미회(尙美會) 여행단과 함께 전자회사 필립스의 고향인 네덜란드의 공업도시 에인트호번에 가서 이 도시 축구팀 감독이던 히딩크 부부를 만나 점심 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었다. 필립스는 미국의 에디슨이 발명한 전구(電球)를 유럽에서 맨 처음 대량 생산한 회사이다. 히딩크 감독은 우리 일행을 축구팀의 홈 스타디움 식당으로 초대했다.
 
  일행 중 20여 명이 갖고 온 축구공과 티셔츠 등에 히딩크의 사인을 받았다. 일행 중 한 분은 암스테르담의 안네 프랑크 기념관에서 산 책을 내밀면서 사인을 부탁했다. 나의 맞은편 자리에 있던 히딩크 감독은 책을 펴놓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만년필로 한 문장을 써서 돌려주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귀하가 이 책을 통해서 우리 역사의 아주 심각한 부분을 알게 된다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입니다”였다. 안네 프랑크 가족 등 많은 유대인이 네덜란드 사람들의 밀고(密告) 또는 협조에 의해 나치에 끌려가 희생되었다는 점에 대한 이 나라 사람으로서의 반성(反省)이 담긴 글이었다. 그냥 습관적으로 사인을 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깊이 한 다음 의미 있는 글을 써주는 히딩크 감독의 인격에 새삼 느끼는 바가 있었다.
 
  히딩크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다. 표현이 절제되고 정확하다. 문득 실용적(實用的)인 네덜란드 사람처럼 속이기 어려운 민족도 없을 것이고, 명분론(名分論)이 강한 한국 사람처럼 속이기 쉬운 민족도 드물 것이란 생각을 해보았다.
 
  히딩크는 “한국 선수단을 맡아보니 한국인들의 본성(本性)을 알 수 있었다. 감정의 기복(起伏)이 심하고 잘할 때와 못할 때의 격차가 매우 커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히딩크는 우리 여행단을 다음 날 경기에 초대까지 해주었다. “내일 게임엔 여러분을 위해서 박지성과 이영표를 출전시키겠다”고 약속했다. 프랑스 팀과 한 경기였는데 두 한국 선수가 맹활약한 덕분에 에인트호번이 3대0으로 이겼다.
 

 

루체른 ‘瀕死의 사자상’
 

스위스 루체른에 있는 카펠교. 700년 된 목조다리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가장 독한 국민은 네덜란드와 스위스 사람이란 생각이 절로 든다. 한 나라는 저(低)지대이고 다른 나라는 고(高)지대인데, 자연의 한계를 불굴의 의지력으로 극복, 해양제국과 정밀공업국가를 건설했다. 그리하여 바다와 산악을 부(富)의 원천으로 변모시키고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제도와 법치(法治)와 기술과 자유를 확립했다. 두 나라는 삶의 질(質) 랭킹 등에서 보통 10등 안에 든다. 자주(自主)와 자유(自由)를 지켜낸 베니스나 신라와 같은 세계사의 금자탑이다.
 
  처음 스위스 루체른에 간 것은 1985년이었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14세기의 목조다리(카펠교)는 길이가 200m인데 지금도 사용 중이다. 필라투스 바위산이 드리워진 호수도 좋지만 전사(戰史)를 좋아하는 나는 이번엔 갈 곳이 따로 있었다. 프랑스 루이 16세를 지키다가 장렬하게 죽어간 스위스 용병(傭兵)들을 기리는 ‘빈사(瀕死)의 사자상(獅子像)’. 해마다 100만 명 이상이 구경 오는 명소(名所)이다. 베르텔 토르발센이 디자인하고 루카스 아호른이 조각했다. 1824년에 완성. 140년 전, 나보다 먼저 여기를 다녀간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이 정밀한 관찰기를 남겼다. 1880년에 나온 《해외 유랑기(A Tramp Abroad)》에 이런 명문(名文)이 있다.
 
  〈사자는 낮은 절벽의 수직면에 파진 구덩이 안에 누워 있다. 몸집은 거대하고 고귀하게 보인다. 사자의 머리는 축 처져 있고 부러진 창이 어깨에 꽂혀 있으며, 발은 프랑스의 백합(百合)을 감싸듯 움켜쥐고 있다. 덩굴이 절벽을 흘러내려 바람에 흔들리고 물줄기가 위로부터 흘러내려 바닥의 연못에 떨어지는 가운데 사자상은 안온한 수련(睡蓮) 덮인 수면(水面)에 반사된다. 주변은 초록의 나무와 풀. 죽어가는 사자가, 근사한 쇠 난간이 둘러쳐진 공공장소의 화강암 받침대 위가 아니라, 편안한 숲으로 가려져 소음과 소란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는 이곳에 누워 있는 것이 참 잘 어울린다. 루체른의 사자상은 어디서든 강렬한 인상을 주겠지만 여기만큼 강렬한 곳은 달리 없을 것이다.〉
 
 
  후손들을 위해 피를 흘린 스위스 傭兵들
 
  1792년 8월 10일 파리의 폭도(暴徒)들이 튈르리 궁전에 있던 루이 16세를 습격할 때 근위대(近衛隊)에 배속된 약 786명의 스위스 용병은 최후까지 항전(抗戰)하다가 몰살했다. 루이 16세는 포위된 스위스 용병들에게 후퇴하여 병영(兵營)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서를 보냈으나 용병대장이 그것을 받았을 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한다. 총탄도 바닥이 나고 수적으로 압도되었다. 용병대장 칼 요셉 폰 바하만은 붙잡혔다가 재판을 받고 단두대(斷頭臺)에서 참수(斬首)되었다. 붉은 용병 복장을 한 채였다.
 
  ‘빈사의 사자상’을 만든 사람은 당시 루체른에 휴가 나와 목숨을 건진 한 용병장교였다. 모금을 시작했고 유럽의 왕가(王家)들이 후원했다. 외국 왕을 위하여 죽은 용병들을 왜 추모하느냐는 비판도 많았고 사자상의 다리를 자르려는 과격분자도 있었다. 사자상은 길이가 10m, 높이가 6m로서 대작(大作)이다. 죽은 장교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마사다를 찾듯이, 프랑스 군인들이 스당을 찾듯이, 스위스 군인들도 이곳을 찾아 군인정신을 다진다고 한다.
 
  1527년 신성로마 황제 카를 5세가 지휘하는 제국 군대가 로마를 점령, 수개월간 약탈을 했다. 교황(敎皇) 클레멘스 7세는 지하 비밀통로를 이용, 성베드로 사원 건너편에 있는 산탄젤로 요새로 도피한다. 189명의 스위스 용병 근위대는 교황이 피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하여 성베드로 사원을 사수(死守)하다가 40여 명만 살고 다 피살(被殺)된다. 바티칸은 지금도 이날 5월 6일을 기념한다. 루이 16세와 클레멘스 7세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용병으로서 계약의 의무를 다한 셈이다. ‘우리가 여기서 죽어야 가난한 스위스 사람들이 유럽의 부자나라 용병으로 계속 취직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傭兵의 피로 발전시킨 세계 최고 국가
 
  남자가 몸을 파는 일이 용병인데, 그렇게 지켜낸 스위스는 지금 모든 면에서 세계 최고 국가로 꼽힌다. 특히 자주국방 하는 나라이다.
 
  1인당 국민소득은 6만8000달러로 세계 8~9위권, 삶의 질 세계 2위, 1인당 무역흑자 세계 1위, 수출품 구성은 고부가 가치 중심으로서 화학제품이 34%, 기계·전자·정밀기계·제품 등 17%. 세율은 낮고 실업률도 낮아 2%. 네슬레, 노바티스, 롤렉스, 스위스에어 등 글로벌 기업이 많다. 관광으로 먹고사는 나라이기보다는 제조업과 금융으로 돈을 더 많이 번다.
 
  정부의 청렴도 순위에서도 세계 1위, 국가경쟁력 1위, 1인당 부(富)의 축적 1위, 고급 기술자 유치력 1위이다. 1972년에야 여성 참정권(參政權)을 인정했다. 한국보다 늦은 2002년에 유엔에 가입했고 EU엔 미가입.
 
  1525년 이후 나폴레옹 시절을 제외하면 500년간 전쟁에 말려들지 않고 무장(武裝) 평화를 유지, 알차게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예비군 포함 20만 병력 보유(12만이 현역), 남성은 의무복무, 약 1만 명이 직업적 기간(基幹)장병이다. 50세까지 예비군 훈련을 받고, 무기도 가정에서 보관해왔는데, 최근에 총탄은 제외했다. 민간인이 약 300만 자루의 총기를 갖고 있다. 핵폭탄을 맞을 가능성이 가장 낮은 나라인데도 전 국민의 120%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핵(核)방공호가 집집마다 마을마다 있다.
 
  노벨상 수상자는 2020년 현재 세계 7위. 아인슈타인 등 114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스위스와 관련 있는 사람들이고, 아홉 수상자는 스위스에 있는 국제기구다. 국적자별 노벨상 수상자 수는 1위 미국 385명, 2위 영국 133명, 독일 108명, 프랑스 70명, 스웨덴 32명, 러시아 31명, 스위스 및 일본 각 28명, 캐나다 27명, 오스트리아 22명. 국민 수당 노벨상 수상자 수는 스위스가 세계 1위.
 
  이 나라의 어려웠던 시절을 기억하게 하는 루체른 ‘빈사의 사자상’은 그래서 더 감동적이다. 피로 발전시킨 나라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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